■자유공원
인천의 자유공원은 1888년으로 탑골공원보다 9년 일찍 응봉산 일대에 조성되었다. 응봉산은 인천이 개항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발 69m의 야트막한 야산으로 공원이 만들어진것은 개항후 이 일대에 외국인들이 조계를 설정한 이후 부터이다.1883년 청국과 일본이 선린동일대에 조계를 설정하자 영국과 미국,독일도 서둘러 해안지대와 응봉산 자락 14만평을 쪼개 각국조계로 만들었다. 이 조계를 A,B,C,D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D지구로 분할된 곳이 현재의 자유공원으로 부르는 각국공원이다. 각국공원은 일제시대때에는 서공원으로 불렸는데 광복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바뀌었다가 1957년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나라의 힘이 이땅에 미치는가에따라 공원이름도 계속 바뀐것이다.
각국공원이 공원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88년 당시 독일인이 경영하던 세창양행이 이곳의 땅을 구입해서 서양식 직원사택을 짓고 사교틀럽인 제물포 구락부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공원을 설계한 사람은 러시아의 측량기사 사바친인데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항구가보이는 언덕공원'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은 공원조성을 일본식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오랫동안 인천 시민의 휴식처가 된 자유공원은 별명이 있는데 오정포산 또는 오포산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시계가 귀한 때라 시간을 알수없어 생활에 불편을 겪자 인천 기상대에서 1908년 자유공원꼭대기에 설치한 대포를 쏘아 낮12시를 알렸는데 정오를 알린다고 해서 오포(午砲)라고 불렀던 것이다.그러나1924년에는 시간이 15분늦는 사고가 생기고 오포를 쏘다가 손에 부상을 입는 일이 자주 생기자 오포제도가 폐지되고 홍예문 언덕에 세운 철탑 소방망루에서 사이렌으로 시간을 알렸다고 한다.
▶ 간추린 정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인천항 개항 5년만에 만들어졌다. 지대가 높은데다 터가 넓고 숲이 울창해 산책하기 알맞다. 봄이면 공원전체가 벚꽃으로 휩싸인다.이를 즐기는 벚꽃축제도 펼쳐진다. 정상엔 한미수교 백주년기념탑이 있다. 1882년 4월 우리 나라와 미국 사이에 조인된 한미수호 통상조약체결을 기념하기 위해 100주년이 되는 1982년에 세운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맥아더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맥아더장군 동상도 그 옆에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7주년이 되는 1957년 9월 15일에 완공됐다. 자유공원 정상에서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도 훤히 내려다보인다. 자유공원 안에는 소규모 동물원과 팔각정, 연오정, 의자 등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맥아더 동상이 있어 자녀와 함께 온다면 교육적으로도 좋다.
매년 4월이면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벚꽃으로 만발한다. 이를 기념해 벚꽃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공원 정상에서 인천항과 월미도를 바라보는 맛도 그만이다. 늦은 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인천항의 밤 경치는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도 유명하다. 인근에 중국인촌, 신포동시장, 인천백화점, 올림포스관광호텔 등이 있다.
약간 멀리는 연안부두, 월미도가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내려오는 길에 홍예문을 보고 오는 것도 좋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조계와 축현역(현 동인천 역)을 연결시키려고 응암산 줄기를 뚫어 1905년 착공했다. 1908년 준공했는데 고개문의 형태가 무지개와 같아 홍예문이라고 불렀다.개항후 인천은 서양 강대국들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각국의 조계가 들어서면서 서양식 공원이 만들어지게되었는데, 이름하여 '만국공원'으로 칭하여졌으며 국내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 탄생하게된다.
한국전쟁 후, 인천상륙작전의 7주년 기념을 위해 맥아더 동상 제막과 함께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게되었다.자유공원은 인천 대표하는 몇곳 중 하나로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이며, 맥아더 장군 동상과 함께 장미공원 및 인천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광장이 있으며,몇 종류되지 않지만 커다란 새 우리에는 새들이 몇 마리 있으며 인근에 나무 그늘을 찾아 쉴 수 있는 쉼터와 함께 약수터가 있어 사람들이 쉴새없이 오가고 있으며 그 옆에 한국전쟁때 학도의용대가 일어나 난 것을 기리는 호국기념탑이 자리잡고 있다.
공원광장에서 월미 방향으로는 한미수교100주년을 맞이하여 제작된 기념탑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틀고 있어 묘한 공간감을 주고 있는데 멀리서 그저 지켜보고 지나지 말고 가까이 다가가 그 내부로 올라가 볼 것을 권장한다.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아래쪽으로 연오정이나 석정루등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도록 하는데, 석정루에 올라보면 인천항을 좀 더 가까이서 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자유공원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개천절을 기해 맥아더 동상을 세웠다.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 동상
이곳은 고종 25년 (1888년) 11월 9일 인천항구 각국 조계 장정 제1관에 의해 공원으로 확정되었으며 도면에 미,영,로,청,일 등 각국 외교관이 공동 서명하고, 로서아인 토목기사 사바탄이 측량하여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부르던 것을 1914년 각국 지계제도의 철폐와 함께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호칭했으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개천절을 기해 맥아더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이라 개칭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
맥아더 장군의 인솔하에 감행된 인천 상륙 작전은 워싱턴등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성공적으로 지휘, 전쟁의 양상을 뒤바꿔 놓았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으로 상륙한다는 것을 최측근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비밀로 하고 '군산상륙작전'이라는 허위 사실을 작전상 고의로 유포했다.
특히 인천의 앞바다는 전세계적으로 조석간만의 차, 즉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큰 해변으로 유명했는데 맥아더의 군산상륙작전의 발언이 이래서 더욱 신빙성이 높아졌다.이 사실이 북한군에게도 알려져서 북한군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했는데 맥아더는 오히려 이 점을 노렸던 것이다.
군산으로 쳐들어가는 척 하면서 맥아더가 실제로 노렸던 곳은 인천이였다. 이 작전은 성공하였고 맥아더의 작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북한군은 이 작전에 의해 인천을 빼앗긴 이후 1.4후퇴가 도래할 때까지 연전연패했다
맥아더와 한국전쟁 1-2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