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형의 눈치를 살폈다. 형의 얼굴에 슬픔이 옅게 베어나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는 입가에 미세하게 미소가 번졌다. 또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싶어서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힘겹게 참았다. 형은 살짝 고개를 떨구고는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어깨를 툭툭 두어번 치고서 일어섰다. 형의 몸짓을 따라 내 고개가 자연스럽게 위로 들렸고, 시무룩한 나에게 형은 눈부시도록 청아한 미소로 대답했다. 나는 감히 엄두도 못 낼 맑은 미소.
"그럴 이유 없어, 그만 가자."
나의 눈은 조금씩 멀어져 가는 형의 뒷모습을 쫒아갔다. 마침내, 형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되었을 때 나지막히 말했다.
"뻥쟁이, 이미 표정으로 다 말해 놓고선 없다고 거짓말 하네."
순간이었지만, 그 때의 7살 꼬맹이가 서글픈 어깨를 하고서 걸어가는 것 처럼 보였다. 형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정말로 난 이 공간에 혼자 남겨졌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뚝뚝 잔디 위로 떨어졌다. 초록빛 잔디 위에 눈물이 맺혔고, 그 모습이 너무 예뻐보였다. 이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어둑어둑한 밤 하늘 위로 엄마와 아빠의 형체가 드리워졌다. 나의 모든 슬픔들이 허공에 흩뿌려진다. 그리고 나는 바지를 털며 일어선다. 현관문을 열며 이따금 다시 웃는다. 나의 슬픔과 쓸쓸함을 아무도 눈치 못 채도록 최대한 밝게 웃는다. 이게 수안 도련님으로 살고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도련님, 어서 부엌으로 들어가 보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강비서님은 현관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맞이했다. 나는 아차 싶어서 후다닥 부엌으로 향했고, 아니나 다를까 모두들 숨죽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숨이 막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적막함에 압도 돼 표정관리도 제대로 못하고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슬쩍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나 못마땅한 눈치로 나를 처다보고 계셨고, 제니퍼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수혁이 형만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마른기침과 함께 수저를 드셨다.
"수안이도 왔으니 먹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수저를 들고서 식사를 시작했다. 제니퍼는 아직 젓가락이 서툴어 포크를 사용했다. 그런 제니퍼의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제니퍼에게서 조금 먼 곳에 있는 반찬을 집어 제니퍼의 밥 위에 얹어주었다. 내가 준 반찬을 맛있게 입에 넣고서 제니퍼는 고맙다는 눈짓을 보냈고,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니퍼는 알아서 먹게 두고, 너나 잘 챙겨 먹어."
옆에서 묵묵히 밥을 먹고 있던 형이 나에게 조용히 말했고,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서 수저 한가득 밥을 퍼 입 안에 넣었다. 복스럽게 먹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제대로 씹고 있는지는 생각도 못하고 그저 맛있게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콜록, 콜록!"
너무 급하게 욕심을 부려서 먹었는지, 사레가 들렸다. 요란스런 기침과 함께 고개를 돌려 괴로움에 가슴을 치는데 옆에 있던 형이 등을 두드려주며 물을 건넸다. 나는 컵을 받아들고서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컵을 식탁에 내려 놓고서 주위를 살피니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민망한 맘에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그만 먹겠다며 일어섰고, 아버지는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부엌에서 황급히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온전한 나만의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안도감에 온 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하아."
눈을 감으면 모든 시선에서 자유로워 진다.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고서 양 손을 곱게 포개어 배 위에 올렸다. 나도 모르게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주위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렸을 때엔 막연히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지금은 나아졌지만 어릴 때 지독한 몽유병을 앓았다. 아니, 앓았다고 한다. 지금도 난 그 때 내가 그런 병을 앓았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잠만 자면 악몽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이유없이 불안해져 잠 자는 것을 두려워하고 꺼려했었다. 의사 선생님과 지금의 부모님이 그게 원인이라고 하셨지만, 내 생각에 친부모님을 찾아가고 싶고,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녔을까 싶다. 내가 몽유병을 앓을 때의 일은 금기 사항이라 직접적으로 말해주시진 않았지만, 집안에서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걸 듣고서 알게 되었다. 내가 이집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했는지. 이성적으로 아무리 자신을 타이르고 통제하려해도 무의식적으로는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어느날은 강비서님을 붙잡고 자세하게 듣고 싶어서 떼를 썼던 적이 있었다.
'비서 아저씨, 저 다 들었어요. 그러니깐 사실대로 말해주세요.'
'도련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한테 몽유병 있었다면서요? 의사 선생님하고 아버지는 도통 말을 안 해줘요.'
'누군가 이유를 말 안해줄 땐, 들어봤자 득 될게 없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죠.'
'아저씨, 저 몽유병 앓을 때 어땠는지 말해주세요. 제 병이니깐 꼭 알아야겠어요.'
강비서님의 난감한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를 애처롭게 내려다 보며 짓던 동정어린 시선. 나에게 말을 해줘도 될까 싶은 마음 속 갈등이 어린 내 눈에도 확연히 느껴졌을 정도니깐. 강비서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차마 목 놓아 울진 못하고 그저 소리없이 몸 안에 있는 물이란 물은 다 내보낼 기세로 울었다.
'그만 눈물을 거두세요, 도련님.'
'말해줄때까지 계속 이렇게 울거에요.'
'도련님은 아무리 슬퍼도 절대 목 놓아 우시진 않으시네요.'
아무런 변명도 못했고, 화도 못 냈다. 강비서님 말이 당연하게 맞는 말이라서 그저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렸다. 그런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강비서님은 나를 일으켜세우고서 바지에 묻은 작은 잔디와 흙을 털어주었다.
'제가 말했다고 하시면 안됩니다.'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강비서님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그저 내 옷에 묻은 잔디를 털어주며 말했다.
'도련님이 몽유병을 앓으셨을 때, 항상 저 큰 대문으로 가서 두드리며 울부짖으셨죠.'
'...........'
'제발 나가게 해달라고.'
바지에 묻은 잔디와 흙이 다 떨어져 나가고 강비서님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입은 담담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너무나도 슬픈 눈을 하고서 나지막히 말했다.
'그런데 너무나 슬픈 사실은요, 도련님의 키가 충분히 잠금 장치에 닿는데도 그저 열어달라고만 했다는 겁니다.'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주루륵 내 뺨을 타고서 흘렀다. 강비서님은 그 어떠한 위로의 말도 않고서 그저 나를 살포시 안았다. 그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를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그 어떤 위로보다도 따스했다. 무의식 상태에서도 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였구나. 문뜩, 무엇이 날 이렇게 붙잡고 있는 건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그리고 나는 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 아이의 꿈을 10년 넘게 꿔야만 하는지. 꿈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지만 꿈 속의 그 남자아이는 여전히 어린 꼬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