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
철면피(鐵面皮)를 곧이곧대로 풀이하면 ‘쇠로 된 얼굴 가죽’, ‘쇠처럼 두꺼운 낯가죽’, ‘쇠로 된 얼굴 가죽’ 등으로 엇비슷한 가름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염치가 없으며 은혜도 모르는 뻔뻔한 사람’, ‘부끄러움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 ‘어느 모로 봐도 염치없는 일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꼴 같지 않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통용되고 있다. 이 성어의 출현 배경과 관련된 고사(故事)를 통해 그 실체에 접근한다.
철면피의 유래는 고대 중국 송(宋)나라 시절 진사(進士)이었던 왕광원(王光遠)이라는 사람이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염치없고 부끄러운 수모를 당해도 감수하던 괴이한 성격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출전(出典)은 ⟪북몽쇄언(北夢瑣言)*⟫으로 알려졌다. 유의어로는 과렴선치(寡廉鮮恥), 파렴치(破廉恥), 후안무치(厚顔無恥), 면피후(面皮厚), 강안여자(强顔女子), 박면피(剝面皮), 면장우피(面長牛皮) 등이 있다. 출전(出典)에 수록되어 있는 고사를 바탕으로 줄거리를 대강 요약정리하며 그 실체를 파악한다.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묘한 성격이었던가 보다. 그 옛날 중국의 송나라 시절에 특이한 성격을 지닌 진사 왕광원이라는 사람 얘기다. 그는 원래 학문도 상당한 수준이고 재주가 있어 과거(科擧)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갔었다. 하지만 출세를 위해서라면 간이나 쓸개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여 지조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성품이었다. 왜냐하면 자기에게 이(利)가 된다 싶으면 권문세도가나 토호세력의 대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면서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고 엽기적인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의처럼 통용되었던 연유일까 아니면 세월 따라 인심이 고약하게 변했던 때문일까. 그는 염치가 없는 철면피의 전형으로 예로부터 ‘대변이라도 맛볼 듯이 부끄러움을 돌아보지 않고 몹시 아첨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인 상분도(嘗糞徒)나 ‘상전의 변을 맛보고 고름을 빨아준다.’는 의미인 상분연옹(嘗糞吮癰), ‘말똥 위에서 무릎으로 긴다.’는 표현인 슬행마시(膝行馬矢) 따위의 행동도 출세를 위해서라면 망설이지 않던 것 같다.
한 번은 그런 그가 가당찮고 역겹다고 여겼던지 어떤 고관대작이 술을 마시다가 “내가 자네에게 매질을 하고 싶은데 괜찮겠나?”라고 말했다. 그에 왕광현은 “대감님께서 하사하는 매라면 기꺼이 맞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고관은 “있는 힘을 다해 사정없이 매질을 했지만 그는 고통을 참아내며 그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그 괴이한 광경을 지인들이 지켜보던 자리였다.
다음날 친구들이 그에게 진지하게 나무랐다. “여보게나!” 여러 사람 앞에서 그 망신과 모욕(侮辱)을 자초하다니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라고 조곤조곤 따졌다. 그 말에 천연덕스럽게 “그 이에게 잘 보여 나쁠 게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답해 주위의 모두를 유구무언의 상태로 만들었다. 훗날 그 대답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했다.
/ ....... / 광원의 낯짝은 10겹의 철갑처럼 두껍다(光源顔厚如十中鐵甲 : 광원안후여십중철갑) / ....... /
여기서 광원의 낯가죽은 비굴하고 야비한 철면피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한편 ⟪송사(宋史)⟫ ⟨열전칠십오(列傳七十五)⟩에 철면피와 닮은 철면(鐵面)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하지만 철면피와는 맥락과 성격이 다른 개념이다.
송나라 시절 조변(趙抃)이라는 사람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벼슬길에 들어서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고 적발하는 관직으로 오늘날 우리의 감사원 유사한 직종’인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소임을 맡았다. 동료를 비롯해 높은 재상까지 감시했던 관계로 바람이 심한 자리였다. 그럼에도 그는 공평무사하고 서릿발같이 법을 적용하며 빈틈없이 직무를 수행해 말 많고 탈 많은 황실이나 외척(外戚)을 비롯해 환관(宦官)의 문제까지 깔끔하게 처리했다. 심지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재상(宰相)까지도 탄핵했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대쪽 같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 ...... / 도읍의 뭇사람들이 (그를) 보고서 철면어사(鐵面御史)라고 불렀다(京師目爲鐵面御史 : 경사목위철면어사) / ....... /
여기서 철면이 비롯되었으며 ‘철가면을 쓴 것처럼 냉정하고 공정’한 결국은 ‘공명정대하며 냉철하고 강직하다.’는 의미이다. 당시 조비는 판관(判官) 포청천(包靑天) 포승(包拯)과 함께 대표적인 철면어사로 알려졌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이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철면피와는 맥과 결을 달리하고 있다.
승무(僧舞)라는 시로 유명한 조지훈(趙芝薰) 님은 철면피 같은 아첨을 세 가지로 나뉘어 천명했다. “가련한 아첨으로 굴신지족(屈身舐足 : 몸을 굽혀 발을 핥음)”, “가증스러운 아첨인 반신가공(反身假攻 : 몸을 뒤집어 거짓으로 공격함)”, “가소(可笑)로운 아첨인 번신일침(飜身一針 : 몸을 날려 일침을 놓음)” 등이 그 유형이다.
세상에 질애(耋艾)*를 막론하고 기회주의자나 무책임한 후안무치(厚顔無恥)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 무리들은 권력자나 강자의 주위를 맴돌다가 기회를 포착하면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좋은 말을 줄줄이 쏟아내는데 내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 그들이 수시로 쏟아내는 말의 성찬(盛饌)에 현혹되어 섣불리 맞장구를 치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사사로운 이(利)를 챙기거나 보신(保身)이나 영달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림을 일삼는 철면피들은 전형적인 아첨쟁이들이기도하다. 그들은 도처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다. 이 같은 철면피들이 완벽하게 사라질 세상을 기대함은 황소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 보다 어려운 화두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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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몽쇄언(北夢瑣言) : 고대 중국 송(宋)나라 사람인 손광헌(孫光憲)은 시사(詩詞)에 능하고 경사(經史)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당말(唐末) 오대(五代)의 사회 풍속과 문인들의 일화를 모아 편찬한 책이다. 여기서 언급하는 오대는 둘로 가름할 수 있다. 먼저 전오대(前五代)는 동진(東晉)이 망한 뒤부터 당나라 건국 이전까지의 과도기에 흥망(興亡)했던 다섯 왕조(王朝)로서 남조(南朝)의 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 • 남북을 통일한 수(隋) 등이다. 한편 후오대(後五代)는 당나라가 망한 뒤부터 송나라 건국 이전까지의 과도기에 중원(中原)에 흥망했던 다섯 왕조인 후량(後梁) • 후당(後唐) • 후진(後晉) • 후한(後漢) • 후주(後周)이다.
* 질애(耋艾) : 늙은이와 젊은이
수필과 비평, 2024년 9월호(통권 275호), 2024년 9월 1일
(2022년 6월 29일 수요일)
첫댓글 많이 배워갑니다. 철면피 같은 인간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