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보는 이들 마다 “거기 사람 썰어 숨겼지?”라며 몹쓸 살인자에게 보내는 시선을 쏘아붙이는
웬만한 송아지크기의 캐리어를 한 손으로 끌고
나의 가녀린 몸뚱이를 아스팔트에 박아버릴 심산인 미친 배낭을 업고
크로스백까지 가세해
생각보다 내 여행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았다.
그 몸으로 KTX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 비행기 이륙 시간을 한참 남겨두고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일단 도착하긴 했는데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할지 참 난감했다.
제주도 한번 가보지 못한 촌여자가 공항 시스템을 알 리가 없지 않는가.
얼굴에 나름 설렘이 비친다. -_-;
일단은 나를 짓누르는 이 짐들부터 해결을 봐야했다.
짐 무게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짐을 끌고 다닐 ‘끌개’가 필요했다.
저 멀리 한 뭉치의 끌개 무리를 발견하고는 다가가 하나를 빼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이 녀석도 촌사람 알아보는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끌개따위에게 무시당하다니.
참을 수 없는 굴욕감에 여러 번 다시 시도를 해보았지만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것은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만 사용할 수 있는 공항 물품이 아닐까?
그래서 티켓에 각각 비밀번호가 부여되어 있고 그것을 입력해야만 하는.... 휴...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
그렇게 허무맹랑한 나만의 상상을 사실 마냥 믿어 버리고는
22년 동안 배운 갖가지 욕들을 섞어가며 자본주의에 대한 통탄과 한탄을 늘어놓으며 뒤돌아섰다.
그렇게 내가 짐을 끄는 건지 짐들이 나를 끄는 건지 모른 채 공항을 헤매고 있는데
적어도 30년쯤은 업으로 떠돌이 생활을 한 것 같은, 절대로 비즈니스클래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레게 백인이
끌개에게 다가서서는 손잡이를 지그시 누르고 쑥하고 빼내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오호. 통재라.
무식도 정도껏 해야지.
대형마트 끌개만 봐왔던 지라 공항 시스템은 손잡이를 눌러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렇게 괜히 두 눈 뜨고 욕먹은 자본주의에게 뒤늦은 사과를 하고
새삼스레 맞닥들인 나의 무식함에 혼자 떠나는 여행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어렵사리 획득한 끌개
자 이제 서두르자.
쇼핑시간과 헤맬 것까지 감안하면 시간이 그리 넉넉지는 않았다.
나는 꼭 공항 면세점에서 사야만 하는 물품이 있었다.
바로 담배.
오해는 하지 말자.
미친 물가를 자랑하는 영국에서는 담뱃값이 한국과 몇 배나 차이난다고 한다.
더군다나 면세까지 되는 면세점 담뱃값과 비교한다면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런던 몇몇 한인 민박에서는 담배로 대체하여 숙소 값을 할인해 주는 경우가 있다.
돈 없는 배레몽이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나는 인터넷 배낭여행 카페 이벤트에 당첨되어 무료 1박을 확정까지 받아 놓았다.
1박 무료+담배로 숙소값 할인을 받아서 런던에서 그 누구보다 싸게 살아 볼 의지가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런데 난관에 봉착했다.
말보로 레드를 사야 하는데 붉은 포장의 말보로 종류가 어마어마한 것 이었다.
종업원에게 말보로 레드를 부탁해 보았지만 레드 중에서 어떤 종류를 원하는 것이냐며 답 없는 소리만 해댔다.
담배를 피워봤어야 알지. ㅠㅠ
대책없는 나.
고심 끝에 가장 감 좋은(?) 녀석으로 골라 집었다.
출국을 기다리는 공항에서 이 여행을 계속 진행해야 하는지 의구심만 증폭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찍은 말보로 레드 15보루를 계산대에 턱하고 올려놓았더니 캐셔가 화들짝 놀란다.
“어우~ 규정상 이렇게 많이 사실 수 없습니다. 손님.”
“예?”
“영국으로 입국하시네요. 영국에는 입국법상 1보루만이 반입 가능합니다.”
소심한 나는 쉴틈 없이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난관의 블랙홀 덕에
우선 1보루만 결제하고 그 가게를 빠져나왔다.
첫 여행지 영국에서 최대한 아껴볼 심산이었는데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싶어 난감했다.
십여 분을 주저앉아 고민한 끝에 겨우
배낭여행객에 불과한 나에게 입국 법을 좀 어겼다고 빨간줄 그을 정도로 박할까싶어 밀반입(?) 시켜보자는 묘략을 짜냈다.
* 담배 밀반입 묘략
1. 욕심을 버리고 8개만 시도한다.
2.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3. 혹시나 걸리면 영어를 못 알아 듣는 척 한다.
4. 그 마저도 애써 외면하기 힘든 상황이 되면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고 골초여서 그러니 한번만 봐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5. 그마저도 안통하면.... 상황에 따라 행동한다.
담배 밀반입 묘략을 완성하고 면세점 전체를 돌며 담배를 하나씩 사서 8보루를 손에 검어줬다.
그런데 이 담배들 새털처럼 가볍지는 못해도 내 짐들과 함께 한 무게를 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담배 8보루는 연약한 내 몸에게는(미안^^) 배려를 잊은 채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에 자신들을 의지했다.
그 당시 짐들은 정말 끔찍했다.
다음 여행에는 절대로 그렇게 무식하게 짐을 싸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며 다짐을 거듭했다.
어느새 내가 통과할 게이트 위에 ‘탑승 대기’ 신호가 들어오고 싱가폴 경유를 위한 나의 첫 비행이 시작되었다.
남들 태울 대기중인 대한항공과 나를 실어 나를 비행기표
5시간 후, 나는 싱가폴 창이 공항에 발을 들여놓았다.
약 10시간의 환승 시간을 견디기 위해 침대처럼 푹신한 한 쇼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오늘의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는데
누군가 털썩하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까 전 그 럭셔리한 비행기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우러나오던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통성명을 하고 한 두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다 어느새 친해졌다.
오빠는 대학 시절 2개월동안 미국 배낭여행을 하며 자신의 역마살 존재를 깨달은 후
틈만 나면 해외로 발을 들이고
그 날도 연차 끌어 모아 추석 연휴까지 포함해 3주정도 시간을 내어 인도 여행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고 했다.
멋진 오빠.
그런 오빠 역시 싼 항공권을 고른 바람에 8시간의 환승대기 시간을 버텨야 한다고 했다.
“10시간 어떻게 버틸 거야?”
“저는 아까 비행기에서 잘 자서 여기서 밤 샐거에요.”
“잘됬다. 나는 꼭 자야해서~ 짐 좀 맡아줄래?”
“그래요! 제가 짐 볼테니깐 푹 자세요.”
나도 믿지 못하는 나를 믿어보라고 천신만고 끝에 오빠를 설득시키고는 오빠의 눈이 감기는 걸 지켜본 후
열심히 일기 쓰기에 집중했다.
그러나 아직 여행은 시작도 못했는데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겠는가.
짧은 일기를 대충 갈기고 나니 온몸이 슬슬 비틀어진다.
그 호언장담을 하던 기색은 어디서 엿바꿔 먹었는지 녹아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겁고 일기장에도 여러 지렁이들이 꿈틀대기
시작해...
엤...
다...
아...
................
툭툭!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는 눈을 비비며 깨어보니 오빠가 배낭을 둘러 매고 해맑게 웃고 있다.
벌써 아침이다.
오빠는 자다가 미안한 마음에 살짝 깨어보니 내가 목 아픈 것도 모르고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퍼질러 자고 있더란다.
헛기침도 해보고 쿡쿡 찔러도 봤는데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은 착한 오빠가 밤을 새워 짐을 지키고 내가 깊은 숙면을 취하게 된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다.
그나저나 잠결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양ㅇㅇ오빠!
그 때 정말 고마웠어요!
창이공항에서
--------------------------------------------------------------------------------------------------
왜 이렇게 할말이 많은 건지..
140일을 어떻게 다 글로 옮길지 앞이 캄캄합니다.
좌충우돌 무대책 어리버리 여행이었던지라 판타지 소설같은 엄청난 삽질과 에피소드들을
공유해보겠다는 심산에 이렇게 펜을 쥐었습니다.
아직 정말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점입가경일테니 많이들 읽어주시길 바랄게요.
사진따위에 문외한이고 심미안도 없는지라 영 사진들이 구리네요.
여행이 거듭될 수록 상태가 양호해지니깐
따스한 시선으로 봐주시길 바랄게요.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
첫댓글 호오!!.. 반지의 제왕을 능가하는 한편의 판타지를 보게 될 것만 같은 예감에 기대 만빵입니다.~~ ^^
벌써 기대되네요^^**
저랑 같은부산사람이네요~ 저는 무작정 4개월전에 뱅기표사놓고 10월에 출발할껀데 아직 부모님께 얘기도 못꺼냈어요 나이 서른에~~이런 소심한지고~ 20일 가는건데도 부모님 눈치를 봐야하공~~어떻게 얘기 꺼낼지 ...
이거 완전 흥미진진해요!!!!!!!!!!!와!!!! 저도 비행기 뒤로 미루고 오래 다녀오고싶어요!!!고작 47일.ㅠㅠ
저도 기대되요..ㅋ
ㅎㅎ사람썰어숨겨놨지....................완전대박인데요?ㅋㅋㅋ
오 멋지네요 ㅋㅋㅋ 나도 저렇게 돌면서 담배사고 가야하나 ㅋㅋㅋㅋㅋㅋ
ㅎㅎ 완전 귀여워요.. 담배 15보루라니... ㅎㅎㅎ 진짜 너무 귀엽다.. "골초라고 그러니 한번만 봐달라고 한다" 완전 대박.. 아마.. 여행기중에 몇개는 다음메인에 실릴꺼 같은데요.. ㅎㅎ 완전 재밌어요..
영어 못알아듣는 척--ㅋㅋ 넘 귀여우삼.. 앞으로 더 많은 여행기 부탁해요.
으하하하하하하하하 후반부 웃겨요..엽기발랑코믹썰렁삽질 여행기가 나올거 같은데요? 기대할거에요!! ㅋㅋㅋㅋ
우와!~~ 진짜 기대되요~~^^ 부럽다.ㅋ
아..정말..젊고 파릇파릇한 기운이 한껏 느껴지는 글이에요~~~~다음편도 기대됩니당~~~^^;;
와우~! 8보루 밀반입 ㅋㅋ 여행기 기대되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