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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의 어린나이로 즉위한 무사술탄은 어느덧 24살의 정정한 청년이 되었다.
인간의 가장 혈기왕성한 시기였던 그는 제국내의 기독교세력을 용납할수가 없었다.
그는 신앙심이 깉은걸로 유명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오스만의 종교관용정책은 어느정도 자리를 잡아가 세금유무만 다를뿐이지
종교로인해 차별받진 않았다.
무사술탄의 후기통치시기에 등장한 역사학자 살라딘은 오스만의 피를 이은 술탄들을 이리 평했다
"더러운 인격안에 인자한 사람가죽을 걸친 괴물들이었다"
만약 그가 메흐메트1세 시절에 살았더라면 능지처참된뒤 그 목이 거리에 뒹구르고 있겠지만
무사술탄의 통치말기이자 오스만 혈통을 가진 마지막 술탄이었기에 그는 후세에 추앙받는 역사가가 될수 있었다.
그래도 오스만왕가의 술탄들은 다행스럽게도 자국민들에겐 선정을 베풀었다.
다만 그 더러운 인격들이 죄다 적국들에게 사용해서 오스만제국의 평판을 떨어뜨렸지만...
다른길로 셋지만 다시 돌아가서
혈기왕성은 그는 전쟁을 무진장하고 싶었다.즉 피에굶주린 전쟁광이었다.
(이는 오스만혈통 뿐만아니라 후에 등장하는 emir(수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려 0~24살.전부 방어전이었을뿐 전쟁을 일으켜본적이 없다.
방어전을 빼면 8~24살 16년간 전쟁없이 살았으니 이젠 방어전이라도 하고싶을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때 최우방국인 모로코의 외교관 알리는 전쟁광 무사에게 동맹으로써 전쟁에 참개해주라는 서신을 전해줬다.
무사는 이 서신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바로 전쟁할 준비 하자며 신하들과 회의도 하지않은체 카스티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선전포고라는 국가적 중요사항을 맘대로 결정해버린 무사에게 불만을 가진 신하들이었지만 지난 메흐메트1세의 피의 잔치를 다시
벌리고 싶지않아 잠자코 있었다.
무사는 알아야했다. 자신이 어린나이에 즉위할떄부터 신하들의 충성도는 메흐메트1세의 공포정치에서 우러나오고있었고
이제 약빨이 떨어지고 있다는것을
서유럽의 강자 카스티야와 오스만이 전쟁을 한다는 소식에 헝가리는 바로 선전포고를 해왔다.
오스만은 헝가리의 외교사절을 일체 궁정출입을 금했기에 헝가리의 동맹국인 보헤미아가 대신 전달해줬다.
선전포고를 대신 전해준 보헤미아의 대사와 무사는 비밀리에 전쟁중에 어떠한 충돌도 하지말자라는 비밀협약을 맺었다.
헝가리와의 전쟁도 매우 싱겁게 끝났지만 무사의 정신은 오직 카스티야를 무찌른것이었고
너무나도 높은 불명예로 인해 헝가리를 봐줬다.
다르게 보는 시점도 있는데 역사가 살라딘은
전쟁광이었던 무사가 일부러 한번더 싸울려고 휴전했다고 악평을 했다.
카스티아와 그의 동맹 포루투갈군은 현재 헤라클레스의 양기둥의 건너편 아프리카로 상륙했고
해군은 오스만의 해협으로 진군했다.
이 두국가는 연합합대를 이루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스만의 해군을 얕잡아봤기때문이다.
수십년간의 전쟁을통해 카스티야는 오스만의 육군은 피하되 해군은 반드시 격파한다.
라는 신조로 오스만과 여러전쟁을 했지만
이러한 전략은 이번 전쟁을 끝으로 끝을고했다.
지난 10년간 오스만은 해군에 무지막지하게 투자해서 카스티아와 맞먹는 해군을 건조했고
이는 전후더 증가했다. 포루투갈 해군이 전멸당하자 카스티야는 비로소 오스만의 해군에 대항하기위해
남은 포루투갈 해군과 연합했지만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하고 만다. 이후
오스만은 이제 지중해 해군의 최강자로 군림하게되었고
무사는 승전보고를 듣고 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지중해에 종이배도 띄울수 없다."
이걸 또 살라딘은 오만방자한 발언이다.라고 깠다.
뭐 까도될만한게 지중해의 최강자이지만 아직 세계 최강해군은
영국이었다. 이 영국해군때문에 오스만은 엄청난 재정,인적적으로 피눈물을 흘리게된다.
카스티아와의 전쟁이 끝날무렵 모로코에서 모든 카스티야군을 무찌른 무사는 시선을 유럽에서 중동으로 돌리게된다.
잃어버린 10년간 무진장 커져버린 페르시아였다. 패르시아는 티무르제국 붕괴시 등장한 국가중 가장 강력했고
이제 오스만하고 동맹까지는 아니었지만 친하게지냈던 Jalayirds를 완전 점령한것이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 바예지드1세가 중동문제를 완벽하게 완결했지만 그건 반세기전이었고 티무르라는 강이 사라져
양강체제가 무너졌던때라 지금까진 조용했지만 이제 새로운 강 페르시아가 떠오르는것이었다.
무사는 이를 통해 자신의 위엄과 전쟁욕구를 충족시키기위해 Jalayirds를 공격한다.
그전에 카스티야하고 전쟁보상금을 조금주고 끝낸다.
페르시아가 Jalayirds의 북부지방을 내놓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결하자
Jalayirds에게 선전포고. Jalayirds와 동맹이었던 트리폴리도 참전했다.
트리포리를 속국화시킴으로써
이제 지중해를 맞대고 있는 소국들을 전부 시켰다.
모로코가 있지만 그들은 혈맹국이라 건드릴 필요가 없었고 카스티아 견제및 완충지대로 놔뒀다.
모로코인들도 역시 오스만이 있어야 모로코가 있다는 생각으로 오스만과의 친선을 더욱더 돈독히 맺었다
증조할아버지처럼 아니 보다 빠르게 중동문제를 해결할뻔한 무사였지만
바예지드1세와는 다른 상황이 온다.
그건 유럽의 개입이었다.
바예지드1세시기 유럽국경은 워낙조용했다 그 이유는 헝가리가 내전으로 자기몸겨눌 힘도 없었기에 그랬지만
지금 무사가 다스리던 유럽지역은
오스만과 원수인 나라밖에 없었다.
특히 오스트리아는 그 분노가 심했다. 아이들 사이엔
"메흐메트1세를 죽입씨다. 메흐메트1세는 나의 원쑤!"라는 후크송이 인기였다.
당연히 이곡은 오스만내에서 금지곡이다.
오스트리아는 좀더 오스만을 압박하기위해 지중해의 경제중심지이자 해군력이 막강한 베네치아를 동맹에 끌여들인다.
게다가 비밀협역으로 맺어진 바바리아와도 이 전쟁에 개입
뿐안아니라 자신들의 영토였던 Stria 와 Triol에게도 전쟁개입을 요청해왔고 오스만의 막강한 해군을 견제하기위해
베네치아 뿐만아니라 영국에게도 요청했다. 이렇게 사방으로 외교적으로 오스만을 포위해왔지만
오스만의 강력한 육군에게는 끝업이 무력했다. 빈에선 오스트리아의 전군이 몰살.
포로 한명도 없이 죄다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무사는 이 풍경을 보고 흐뭇했다고 한다.
이 풍경을 그린 르네상스 대표작 "술탄들"라는 작품에선 무사술탄 어깨위에
바예지드1세,메흐메트1세가 유령이되어 오스트리아군들의 살육을 같이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있고
오스트리아 성벽안에선 아낙네들의 슬픔과 공포를 대조적으로 그려냈다.
당연히 이 그림도 발견당하면 즉시 태워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다행히 술탄들의 시대가 끝난뒤 발견되어 콘스탄티누풀 박물관에 전시되게된다.
제3 차 빈포위가 성공적으로 끝났을때
오스트리아에겐 비극적인 소식이 당도했다. 영국이 전쟁참여를 거절한것이었다.
다만 영국은 교황청에 주교가 있어서 오스만을 상대로 성전을 외쳤지만 이미 오스트리아의 빈은 점령, 약탈,방화가
끝난뒤였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빈을 오스만에게 내주었고
동쪽의 나라(오스트리아)라는 이름에 맞지않게 서독일의 끝자락으로 도망친다.
오스만은 Jalayirds를 속국화 시킴으로써 다시한번 중동을 정리했다.
바예지드1세와 또다른점은 바예지드1세는 중동전쟁으로 티무를 제외한 모든 중동국가와 동맹,부마국 및 속국화였으며
이유도 유럽진출을 용이하기위해 뒷정리를 한것이었다.
무사도 유럽진출을 용이하기위해 뒷정리를 한것까지는 같지만 전쟁의 목표중 하나는
페르시아가 Jalayirds전부 먹지전에 제국내로 편입시키고 페르시아를 견제하는것이었다.
또 다른 점은
이 전쟁으로 수니파(오스만,북아프리카,남 서아라비아)와 시아파(페르시아와 동 아라비아)의 갈들이 심해진점이다.
약속대로 Triol과 Stria 및 타국가참여했지만
가장 큰 주축국중하나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따로놀게되었고 결과는
Stria는 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빼았겼고
나머지는 사이좋게 합병당했다.
적은 영토를 확장시켰지만 결국 동유럽의 불안감은 폭팔해버렸고
몇십년간 불안한 치안상태가 유지된다.
그후로도 여러 소국들이 전쟁을 걸어왔지만 무사는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젠 신체를 능욕하는것보단
희롱,삥 뜯는걸로 바뀌게된다.
이 20년간의 계속된 전쟁으로 유럽은 오스만에대한 공포가 더욱더 커져갔다.
무려 이 20년동안 북아프리카에서 싸우고
유럽과 중동에서 동시에 싸우며 전선을 유지확장해온것이다.
상상도 할수 없었던 오스만의 힘에 놀란 그들은 전쟁을 그만두고 오스만에게 금을 받쳐서 평화를 샀다.
동유럽,독일남부가 처절히 능욕될떄
서유럽의 상황을 보면
카스티야는 아라곤을 먹었고 프랑스는 통일을했으며 1496년 영국은 아일랜드,스코틀랜드,잉글랜드,웨일즈를 통합하여
정식적으로 영국이 성립되었다.
자 이제 눈을 돌려 무사가 신경쓰던 페르시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무사가 20년간 전쟁하고 있을때 페르시아도 조용히 있진않았다 그들은 서쪽으로 진출이 막히자 중앙아시아로 말머리를 바꿔 침략해갔던것이었다.
현재 카사흐스탄과 전쟁중이었고 이들도 결국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한다.
남인도쪽도 재미있는데 힌두스탄이 인도통일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무사는 이들과 친해져서 페르시아를 압박할려고했지만 그들은 친해질뿐 동맹까진 원하지 않았다.
무사는 이제 44살이었지만 하렘에 있는 부인은 56명이었고 자식들은
아들만 54명 딸은 40명이나되었다.
그는 할아버지인 메흐메트1세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는데 그건
술탄의 후계자는 오직 한명이다.라는 정책이었다. 즉
한명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전부 죽이는것이었다.
그가 44살이 되던 해 첫째 아람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게다가 하렘에 있던 자신들의 부인,딸들도 모두
사막으로 유폐시켜버렸다. 할아버지 못지않게 많이 죽였지만 그는 학살왕이라는 칭호별멍은 얻지 않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공성전빼곤 학살을 그다지 않했기 때문이다.(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에 비해 적은거지
나름 많이 했다.) 또 할아버이와 다르게 자식들을 모두 죽인후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했다고한다.
다만 이걸 또 살라딘은 악어의 눈물이라고 깠다.
이렇게 까는 역사가 살라딘은 출생이 비밀로 남아있는데 오스만황족에게 적대감이 있는걸보면
비잔티움 자손이라던지 심지어 무사의 아들또는 손자설 나돌았지만 끝내 밝혀지진않았다.
이렇게 어느정도 할아버지 정책을 닮은 그였지만
종말도 그와 같았다.
자신의 후계자였던 아람이 갑작스럽게 죽어버렸던것이다.
사인은 치질이 번져서였다.
(이 걸로 인해 치질은 황제병이라고 불리게된다.)
할아버지처럼 후계자의 지위를 굳히기위해 나머지 후계자를 모두 죽였지만
할아버지는 그래도 손자라도 있었지 무사는 손자가 없었다.
즉 그에겐
후계자가 없었다.
다음화
Devlet-i âliye-i Osmâniye-7 술탄 시대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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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오..
말머리가 업다
댓글수를 늘릴려고 그런겁니다.ㅋ(퍼퍼퍼퍿)
멍태님께 고단수 배워갑니다.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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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질 투르크의 정복기..ㅋㅋ 크고 알흠다운 제국 ㅋㅋㅋ
16살의 어린나이로 즉위한 무사술탄은 어느덧 24살의 정정한 청년게이가 되었다. 그는 하렘을 폐쇄 역하렘을 건설해 여자대신 역하렘의 중심에 선것이다. ㅌㅌㅌㅇㅌ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