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년(庚午年)이던 1990년 말(午)해에 힘차게 달리는 돌마(突馬)가 자기 이름을 찾아 나섰다. 돌마는 한강을 건너 남으로 달렸다. 숯내(탄천=炭川)를 따라 계속 먼지를 일으키며 힘차게 뛰었다. 경기도 성남시를 왼쪽으로 비켜 달리다 보니 매지봉(梅址峰) 기슭. 매화꽃의 터에서 발을 멈추니 옛날 광주군의 돌마면(突馬面)이다. 돌마는 이 돌마 땅에 머물러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터를 닦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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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은 원래 장터였던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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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이곳을 분당(盆唐)이라고 일컫지만 분당은 원래 돌마면의 한 동네였을 뿐이다. 돌마면은 일제 때인 1914년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15개나 되는 동리(洞里)를 관할했던 큰 면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편에 보면 ‘광주목(廣州牧)’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돌마(突馬)’라는 지역명이 나오는 것을 보면 ‘돌마면’ 지명은 상당히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또 그밖의 조선시대 문헌에서도 ‘돌마촌(突馬村)’이니 ‘돌마리(突馬里)’니 하는 이름이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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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에 두 개의 동(洞)이 있다 남동(南洞)과 북동(北洞)이다. 경안(慶安)은 고을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10리이고 그 끝이 40리이다. 오포(五浦)도 고을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세촌(細村)도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가 50리, 끝이 20리이다. 악생(樂生)도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마지막이 40리이며, 돌마(突馬)도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광주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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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는 조선시대엔 경기도 광주군(지금의 광주시)의 지역으로 돌마면이라 하여 갈현, 도촌, 여수, 상탑, 하탑, 오야소, 율리, 이매, 통로, 양현, 둔서, 분점, 당우, 수내, 정자의 15개 동리를 관할하였었다. 그러던 것이 1914년 3월 1일 군면 폐합에 따라 세촌면의 하대원리와 대왕면의 송현동 일부를 병합하여 갈현, 도촌, 여수, 야탑, 율리, 이매, 서현, 분당, 수내, 정자, 하대원의 11개리로 개편 관할하다가, 1973년 7월 1일 성남시에 편입되고, 그 2년 후인 1975년 3월 17일 이곳에 돌마출장소를 두고 분당, 이매, 여수 등의 동을 관할해 왔다. 지금 이 지역 일대는 분당동을 비롯한 여러 동이 어울려 ‘분당’이라는 큼직한 새 도시를 이루었다. 지금의 분당동엔 옛날에 ‘분점(盆店)’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 마을은 이미 그 이름에서 큰 도시가 될 기운을 품고 있었다. 분점 마을은 인근 여러 마을 중 가장 중심에 있었고, 규모도 단연 컸다. 이곳은 시장이 섰던 곳으로, ‘장터’ 또는 ‘시장’이라 불렸다. 따라서 가게가 많이 모였다는 뜻으로 ‘모을분(盆)’자, ‘가게점(店)’자를 써서 ‘분점(盆店)’이라 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토박이 어른들은 이 곳을 ‘장터말’로 불렀는데,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부터 또 다른 모습의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게 됐다. 근처에 ‘당모루’란 마을이 있었는데, 이를 한자로는 ‘당우(唐隅)’라 했다. 일제 때에 이 ‘당우’와 ‘분점’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 ‘분당’이다. ‘모을 분’자 지명이 들어가 있는 이 지역에는 지금 묘하게도 물이 모여 들어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바로 율동공원의 연못.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80만평의 호수 주변에는 수변 휴게소들이 위치해 있고, 물가에는 발 지압장도 있으며, 번지 점프대도 마련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수내동 일대에 마련된 중앙공원에도 경주의 안압지 축조양식을 이용하여 만든 분당호가 들어서 그 이름 ‘분당’처럼 열심히 물을 담아 열심히 관광객의 발길들을 모으고 있다. 중앙공원 야외음악당 잔디밭 뒤의 등산로변에는 동요 ‘겨울나무(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의 작곡자로 잘 알려진 정세문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학과 제자 및 친지들이 건립한 노래비가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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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평생을 동요 및 가곡의 작곡과 음악교육에 헌신한 분이며, 겨울나무는 어린이를 비롯한 우리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선생의 대표적인 노래입니다. 음악과 그 교육에 대한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선생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후학과 제자, 친지들이 이 노래를 돌에 새겨 여기에 세웁니다. 2000. 3.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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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문은 1999년 1월 8일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분당동 약사암 바로 뒤의 왼쪽 골짜기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한사무(1452∼1482)의 묘가 있다. 조선 초 세조 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까지 역임했던 한사무는 사후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청주 한씨 가문이 자랑하는 한 인물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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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술의 집터 다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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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의 이매동 일대에서는 예부터 ‘이무술 집터 다지기’ 풍습이 전해져 왔다. ‘이무술’은 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의 옛 이름으로 ‘이매술’이라고도 했던 자연부락이었다. 약 3백년 전 낚시를 즐기던 한 농부가 냇가에서 커다란 고기를 안고 나왔는데, 바로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 고기는 천년만에 승천할 이무기였는데, 바로 승천을 앞두고 있었단다. 마을 주민들은 이 죽은 이무기의 원한을 풀어주려고 위령 승천제를 지내 주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난데없는 매화나무 두 그루가 솟아 그후부터 이곳이 ‘이무술(이매실)’이라고 불렸다는 것, 이 이무술 일대에서 잘 알려진 것이 ‘집터 다지기’인데, 마을 사람들이 집터를 다지면서 외쳐대는 소리가 특이하다. 소리는 경기 지방의 음률이 반영되고 있는데, 집터를 닦고 다지고 집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 중에서, 특히 집터를 다지는 소리가 특색있게 잘 발달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 옛 사람들은 자손을 분가시키거나 이사를 가서 새로 집을 짓거나 증축을 할 때에는 우선 집터를 닦고 지반을 튼튼하게 다졌다. 이 때에는 집을 짓는 동안의 안녕을 빌고, 집을 지은 후의 복록과 평안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며, 덕담을 하고 나서 모인 이들이 함께 소리를 내면서 작업을 하게 된다. 이무술의 집터 다지기는 집주인이 먼저 술상을 준비하여 동티나게 하지 말게 해 달라고 지신(地神)께 정성껏 비는 것으로 시작된다. ‘동티’라는 것은 건드려서는 안될 땅을 파거나 돌을 다치거나 나무를 베었을 때 이것을 맡은 지신이 성을 내어 받게 된다는 재앙을 말한다. 집주인은 빌고 나서 술을 사방에 뿌린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술을 한 순배 마시고 나서 횃불을 켜들고 장단에 맞춰 터를 다진다. 이때 선소리꾼이 선창을 하면 지경꾼들이 후렴을 한다. 집터 다지기는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마을 사람들이 낮에는 농사일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터주신이나 귀신은 밤에 움직인다고 믿어 밤에 행하여야 액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집터 다지는 소리도 지역마다 다양하게 불려졌는데, 사대문 안과 밖의 음률은 역력한 차이가 있다. 즉 서울의 경우에는 서두에 ‘에이려라’로 시작되는데 비해, 경기 지역의 경우에는 서두에 ‘에이려라 지경이요’라고 시작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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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마니’에 모두 많이 모여 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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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집터를 정성되이 잘 다져서 그런가? 여느 농촌과 다름없던 이무실 일대는 차츰 ‘시골’의 때를 벗고 큰 마을(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그래서 지금은 엄청난 인구가 이곳에 집중되었다. 이 분당 일대가 큰 도시가 될 것임은 이 근처의 ‘모두마니산’과 ‘새고을’이란 이름이 암시하고 있었다. ‘모두마니’는 ‘모두 많이 모인다’는 뜻을 담았음인지 정말로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한자로는 대개 ‘무두만이산(無頭蠻伊山)’이라고 기록되어 왔다. 이 모두마니산은 성남시의 대장동과 석운동 및 하산운동에 걸쳐 있다. 높이가 3백25m인 이 산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데, 분당시가 들어설 터를 서쪽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이 산의 한 골짜기의 작은 마을도 이름이 ‘모두마니’로, 폐촌이 되다시피하고 있었다가 지금은 이 일대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새고을(새골)’은 지금의 성남시 금곡동(金谷洞)으로, 새로운 고을이 될 곳임을 말해 주었다. ‘새고을’은 ‘샛골’ ‘쇳골’ 등으로 발음이 조금씩 변하면서 한자식 이름 ‘금곡(金谷)’을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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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천 이름이 개발을 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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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의 남서쪽에 있는 분당은 경부고속국도 판교 길목에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 동쪽과 남쪽으로 광주와 용인이 연결되어 서울을 떠받치고 있고, 서울 중심지에서 직선 거리로 20㎞, 강남에서 10㎞ 정도 떨어져 있다. 개발 직전 1천1백7가구, 4천2백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던 이 지역에는 1976년 5월 남단(南端) 녹지로 묶인 이후에 그린벨트에 준하는 건축 규제를 받아 개발이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현재 성남시 분당구가 된 이 지역에는 분당동을 비롯해 구미, 궁내, 금곡, 대장, 동원, 백현, 삼평, 서현, 석운, 수내, 야탑, 운중, 율, 이매, 정자, 판교, 하산운동 등 무려 18개의 법정동이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의 땅이름들을 살펴보면 현재의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것이 무척 많다. ‘대왕천(大旺川)’이란 내가 있다. 이 내는 수정구 상적동 뒤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흘러 대왕저수지를 이루고, 동쪽으로 계속 나가 시흥동에 이르러 숯내로 들어간다. 내의 이름이 ‘대왕(大旺)’이듯 이 내가 흘러가는 방향이 크게(大) 흥왕(旺)해 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이 내가 숯내와 합쳐지는 곳의 동이름 시흥동(始興洞)도 ‘흥하기 시작함’ 의 뜻을 담았으니 분당 지역이 흥하게 되어가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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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다리(판교)에는 인터체인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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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板橋)는 ‘넓은 들’의 뜻인 ‘널다리’ 또는 ‘너더리’로 불리던 곳이다. ‘널다리(너더리)’에서 ‘다리’나 ‘더리’는 원래 ‘들’을 뜻한 것이었지 ‘다리(橋)’를 뜻한 것이 아니었다. ‘널다리’에서의 ‘널’도 ‘널판지(板)’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넓음’의 뜻을 가진 것이었다. 옛날 이 마을의 운중천 위에 판자로 다리를 놓고 건너다녔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판교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판교리였다. 1914년 너분바위(광암)를 병합해 판교리(板橋里)라 하였다. 1971년 경기도 성남출장소 관할이었다가 1973년 성남시 관내의 판교동, 백현동, 삼평동이 되었다. 1975년 낙생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89년 중원구에 편입되었다. 1991년 분당구에 속했으며 1973년부터 관할 행정동이 판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한자로 ‘판교’가 되면서 ‘넓은 다리’의 뜻을 담아 오랫동안 전해져 오더니 이 곳에 큰 다리라고 할 수 있는 인터체인지가 들어섰다. 분당구의 북쪽 중심부에 위치하는 이 지역은 경부고속도로가 동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판교-구리간 서울외곽순환도로가 동의 북단을 동·서로 지나고 있다. 또한 동쪽에는 남·북을 가로질러 내곡-분당간 도시고속화도로가 지난다. 판교신도시 건설 부지로 도농복합지역이다. 판교 근처의 매지봉 밑의 이매실(이매동)에는 ‘갓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분당 시가지가 들어설 곳의 가장자리가 되니 ‘가(邊)’의 고을’이란 뜻의 ‘갓골’이 잘 맞아떨어졌다. 수내동(藪內洞)’은 원래 ‘숲안’이라고 불려 왔던 곳으로, 지금은 나무의 숲이 아닌 아파트의 숲으로 둘러 싸였다. 땅이름을 보고 앞날을 점치는 이들은 분당 시가지는 앞으로 서쪽으로 살쪄 나갈 것이라고 했다. 모두 많이 모인다는 뜻의 ‘모두마니(대장동)’, ‘궁(宮)의 안뜰처럼 아늑한 곳이 될 것이라는 뜻의 ‘궁안(궁내)’, 늘어나는 고을’이란 뜻의 ‘는골(능곡-정자동)’, 즐겁게 산다는 뜻의 ‘낙생(樂生)(운중동)’같은 좋은 땅이름들이 이쪽에 많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 추측은 지형적 여건이나 지금의 도시 형태를 보아서도 그러한데, 아니나 다를까 요즘의 개발 모습을 보면 그러한 예측이 현실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명당이 될 곳은 이처럼 땅이름이 짚어주고 있었다.
글:배우리(한국 땅이름학회 회장) |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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