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적도보라는 책이 있습니다
검색을 하다가 일제시대에 만든
조선의 문화유물을 모은 사진집
'조선고적도보'라는 책을 영인한 책이 있다 하여
일곱권 한질을 신청하였습니다.
가격은 35만원으로 초판은 총 열다섯권인데
일곱권으로 만들어 십여년 전에 영인을 하였답니다.
겸하여 '일제시대 불교정책과 현황'
이라는 책도 있다 하여 같이 구입하였습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전15권. 1915~35년 사이에 축차로 발행되었다.
총사진수 6,633장으로
발행 당시까지 조사된 고적이 대부분 실려 있다.
편찬경위는 권1의 서문에 의하면,
1909년 9월부터 한국정부의 요청으로 세키노[關野貞]가
조선의 옛 건축물 조사를 시행한 것이 그 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로
실제로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며,
다음해 한일합병과 함께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전환되었다.
조사범위는 역사 관련자료 및 미술품까지 이루어졌다.
각 권의 내용에서 사진 등을 시대순으로 배열했다.
권1은 낙랑군·대방군 시대, 고구려시대로
주로 대동강 주변의 유적 등과
만주 지안 현[輯安縣] 유적 등을 실었다.
권2는 평양 지방의 고구려 유적이며,
사신총(四神塚) 등의 고분 중심이다.
권3은 마한·백제·임나(任那)·옥저(沃沮)·예(濊)·
고신라(古新羅) 시대로 구성했다.
권4는 불국사 등과 경주 지역 외 신라유적이며,
권5는 무열왕릉 등을 수록했다.
권6은 고려시대(1)로 개성과 사찰유적을 실었다.
권7은 고려시대(2)로 역시 사찰과
개성 부근의 고려시대유적도이다.
권8은 고려시대(3)으로 총독부·도쿄제국대학·
이왕가(李王家)박물관, 도쿄 제실(帝室)박물관 및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 중에서 우수한 것을 뽑아 실었다.
권9는 고려시대(4)로 거울 등의
금속품과 벼루 등의 돌공예품을 수록했다.
권10은 경복궁 등 4왕궁이고,
권11은 성곽·단(壇)·묘사(廟祀)·학교·문묘·객사(客舍)·
사고(史庫)·서원·유가주택(儒家住宅)과 왕릉 등을 실었다.
권12는 평안남북도·황해도·경기도·함경남도·강원도·
충청남북도·경상북도의 조선시대 불사건축 등을 실었다.
권13은 경상남도·전라북도의 불사건축과
한반도 전체의 탑파·묘탑(墓塔)·석비(石碑)·교량 등을 수록했다.
권14는 조선시대 회화, 권15는 도기(陶器)를 실었다.
최초의 한국 고적의 사진자료집으로서
유적의 당시 상태를 알 수 있다."
-이상 인용문-
위 기록으로 보면 일제는 이미 강제합병 이후
조선과 조선 왕실이 지닌 문화유물들의 조사를 통해
무엇을 어디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일본으로 빼기는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깡그리 말살시킬 것인가를
낱낱이 분석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사에도 초판은 아니지만 8권과 14권이 있어서
나머지 책을 구해 권수를 맞춰보려 하다가 마침
영인본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서적상과 연락이 되어
오늘 책을 송부하였다 문자가 왔으니
내일이면 받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초판 이후 두세차례 영인이 되었지만
아주 소수의 한정판으로 제작되다 보니
문화재 관련 일을 하는 학자들조차 이 책을
소장하지 못하고 있는 분이 많기로
누군가 뜻있는 분들이 힘을 모아서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었던 문화유산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해외 반출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입니다.
며칠 전 어느 불교 관련 싸이트에는
혜문스님의 발견과 귀환 노력에 의해
조선왕조실록이 일본으로부터 기증의 절차를 거쳐
서울대학교에 돌아오기는 하였으니
아것은 엄밀히 말하면 약탈당한 물건인지라
그에 대한 정당한 반환 절차를 거쳐서
본디 실록이 있었던 오대산 사고로의 귀환이 바람직하며
평창 올림픽을 전후하여 대한민국을 알릴 수 있는
박물관의 건립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본바가 있는데
이 책에 수록된 북한쪽의 문화재와 유물등에 대해서는
남북간의 공조를 통한 확인과 검증절차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절에 젊은 불자가 구입하여 보내와서
소장하고 있는 '북한의 전통사찰' 이란
열권의 책을 살펴보건대 이미 북한 사찰이란
알맹이는 없고 형태만 남아서 형해화된 고물에 불과하지만
그나마 조금씩 남아있는 전통사찰의 면면을 통해서
북쪽의 건축 기법이나 단청 조각 주조 회화등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보존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을 생각합니다.
왕조실록과 의궤를 활용하고자 하는
어느 여성의 주장과 편지를 적어 봅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즈음하여 일본에서 되찾아온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 전시를 위한 박물관 짓기 모금을 호소합니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해외교포(고국동포) 여러분께 지면을 통하여
먼저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독일에서 43년째 살고 있는 독일 교포입니다.
어느 단체나 기관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 또한 저명인사도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께 모금을 호소하게 된 동기는, 2011년 모국 방문 시 아주 우연히
강원도 평창에 속한 오대산으로 등산을 갔다가 사고(史庫)라고 쓰인 팻말을 보고
그 길을 따라 올라간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때 저는 텅 비어 있는 사고를 보았습니다.
바로 이 해 2011년은 경술국치 100년, 망국의 피맺힌 치욕의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지요.
오대산 사고. 사진=문화재청
빼앗긴 500년 정신문화의 기록
왜인들은 대한제국의 심장인 명성황후를 장해한 것을 시작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찬탈하고, 고종황제를 위협해 강제 퇴위시켰으며,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기유각서로 사법권과, 경찰치안권을 빼앗고,
마침내 1910년 8월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자리에 그들의 총독이 들어섰습니다.
이 총독이 우리 정신문화의 500여 년 기록을 여지없이 찬탈해 갔습니다.
오대산 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는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과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와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사책 150짐을 8일에 걸쳐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때까지 피해 없이 유일하게 보존된 완성본이었습니다.
과거에 사고를 수비했던 스님들이 머무셨던 사고 옆에 영감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의 주지스님으로부터 점심식사 대접을 받고, 외롭고 슬픈 표정의 사고,
한을 머금은, 세계 어디에도 그 유례가 없는 한 왕조의 오백년 기록을 보관했던
사고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집채를 뒤로 하고 산을 내려 왔습니다.
사고가 있는 곳에서 조금 내려오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가 있습니다.
마침 월정사 마당에서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이하 실록, 의궤로 표기함)를
역사의 현장인 사고로 다시 돌려받기 위한, 제자리 찾기 운동의 전시회를 보았습니다.
월정사 주지스님으로부터 제자리 찾기 내용에 관하여 자세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로 돌아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아니 유럽에서는 로마인들이
머물던 집터에서 벽돌 한 장만 발굴해도 이름 없는 촌동네가 2000년의 문화도시로
둔갑한 것을 목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제 머리를 스쳐가는 우리 조상들에 대한 연민과,
우리의 문화재를 생각하면서 다시 귀국하여 강원도에 위치한 고사찰 답사 행보를
시작하였습니다. 수많은 고귀한 불교문화재는 거의 1000년이 넘는 문화재였지만
너무도 무관심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실망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평창 동계올림픽 때 우리나라로 모여드는 세계만방의 사람들에게 ‘
우리 문화재와 문화를 알려 줄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여러 가지 좋은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과
이 귀중하고 아름다운 문화재를 하나의 고리로 연결하여
국제문화축제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93년 만에 귀향한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
그러면 조선왕실의궤가 무엇인지 알아볼까요? 조선왕실의 행사를 세세히 기록하고,
의례절차가 되풀이 되는 궁중행사를 효과적으로 진행하려는 의도에서 모든 절차를
글과 그림으로 제작하여 후대에 본보기가 되기 위해 의궤로 남긴 것입니다.
이것을 조선왕실의궤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문화의 기록으로
세계문화의 꽃으로서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오대산 사고에는 모든 교정을 거쳐 완성된 실록과 의궤가
1618년 8월부터 보관되어 왔습니다. 이 사고를 관리하는 책임이
사고 참봉에게 있었고, 영감사의 본사인 월정사 주지가
사고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융희 3년(1910년) 10월 25일 포쇄할 때의 기록을 남겼는데,
이 사고에 보관된 실록은 후에 추가된 단종실록 부록과 함께 총 260책이었습니다.
포쇄라는 것은 실록과 의궤를 3년에 한 번씩 바람을 통하게 하여 책의 습기를
제거하고 책이 썩지 않고 종이가 찢어져 못쓰게 되지 않게 검열하는 것입니다.
실록과 의궤는 93년 동안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실록과 의궤가 되돌아오게 된 경위를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한 스님의 천신만고의 노력으로, 일본을 상대로
외롭게 투쟁한 노력의 결과로 마침내 동경제국대학과
국내청(일본 왕실 관련 사무 행정기관)으로부터
우리가 되돌려 받을 수 있었습니다.(이 스님의 얘기는 뒤에서 하겠습니다.)
되찾아온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는 성종강정대왕실록, 중종실록,
선조실록을 모두 합하여 실록만 47책입니다. 이 47책이 동경제국대학에서
93년 만에 고향인 대한민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실록 외에도
오대산 사고에는 임금의 시문과 어제, 임금의 어필과 의궤, 사서, 문집 등
일반 서책도 보관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왜인들의 손에서 되찾아온 의궤 중에는 국가에서 지극한 존경의
의식을 갖추어 진행한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란 이름의 의궤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에 중요한 관점을 두고
주목해야만 하겠습니다.
왜인들은 일국의 황후를 무참히 장해해 국부 검사까지 하는 능욕을 감행했습니다.
그 장소에는 ‘다이’라는 조선시위대 교관이었던 미국인이 있었고,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라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황후가 숨어 있던
궁궐 숙소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칼로 황후께 상처를 입히고 옷을 벗겨
장해할 때까지 수수방관하고 있다가 그녀의 주검을 확인하고 그 장소를 떠났습니다.
그들이 궁궐을 활보했을 때 조선의 대관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중심이 없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국민 모두의 뼈아픈 치욕의 과거입니다.
그 이후 계속 이어온 36년의 그 치욕 말입니다.
우리들의 심장인 명성황후를 살해할 때 썼던 ‘히젠도’라는 칼집이 후쿠오카 시내
‘구시다’ 신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찌르다”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비웃는 듯합니다.
그녀가 어떤 황후였는지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석한 모든 국가의 손님들에게
그녀를 알현시키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를 넘보던 큰 열강들은 그녀를 꺾지 못하면
조선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없을 만큼 그녀는 학덕을 겸비한 총명하고
굳건한 의지를 지닌 국모였습니다.
그녀를 무참히 살해하고 능욕한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국모인
명성황후의 장례식에 대한 기록과 우리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말살하기 위하여
1922년 우리 황실의 모든 것을 일본 왕실의 것으로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그 산증인이 바로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오대산 사고, 이 역사의 현장에 우리 국모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름답고 품위 있는 박물관을 지어서 조선을 지키려다 무참한 죽임을 당한
대한제국의 고귀한 마지막 황후께 한 치도 손색없는 예절 바른 차림새로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박물관을 지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우리는 왜 반드시 역사의 현장인 오대산 사고에 박물관을 짓고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를 보존하고 전시해야만 될까요?
그 첫째 이유는, 약육강식에 의해, 강대국의 만행으로 두 동강이 난
우리 민족을 다시 한 번 추슬러 남북의 모든 국민들이 우리가
하나였음을 깨우치는 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두 동강이 나야 했던 것은 우리가 아니라 일본이었습니다.
해방 후 어리석은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상적 분열 속에 서로를 죽이며 권력투쟁에 혈안이 되어 오늘의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동족상잔의 6∙25는 그 많은 어린이들을 부모를 모르는
어린 고아로 만들어냈고, 헤어진 부부들과 부모 형제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륜을 어긴 한 세기에 가까운 커다란 만행입니다. 누가 감히
이것을 운명이라고 말하며 지나쳐 버릴 수 있을까요?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총탄에 두 분 부모님을 잃으시고 한 맺힌 오늘을 살고 계시니,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무친 절절한 사연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실 줄 믿습니다.
이 세상 위에 땅을 디딘 조그마한 한 몸은 무한한 신비의 원소를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이 작은 존재는 생각할 수가 있지요. 우리가 사람답게 생각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사람이 되지요. 멀쩡히 살아 있는 부부들과 부모형제들을
강제로 떼어놓고 단절이라는 금을 그어서는 안 되겠지요.
조선의 26대 왕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 광무 9년 10월 8일, 국모
명성황후가 장해되고 침탈당했던 그 망국의 수치를
두 번 다시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미래를 향해야만 되겠습니다.
지금도 열강은 북쪽과 남쪽의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습니다.
현 남북의 정치가들과 미래에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가들이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를
전시하고 보관한 역사의 현장을 두고두고 방문하여, 밝고 희망찬 앞날을
바라보며 사람됨에 품위와 조화를 잃지 않고 다시는 이런 수모의 국치를
겪지 않는 국가를 이끌어주길 바라는 온 국민의 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도 그 목적이 있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전 세계 사람들의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위한 것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은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왔고 오늘도 살고 있지요.
이 박물관을 탐방하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의 슬픈 과거 역사를 알리는 것은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나 일본인들을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오늘도
약육강식의 고통을 당하는 전 세계 모든 희생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며, 탐욕에 묻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교훈이 되게 하고자 함입니다.
자고로 선량한 사람들은 살 권리를 위해 싸워 왔고, 오늘날도 싸우고 있습니다.
명성황후를 장해한 그 장소에서 소위 조선을 도우러 온 미국인과 러시아인도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조선 땅에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계올림픽 때 평창으로 오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무기로 위협을 하여 상대방을 지배하거나 굴복시키는 만행이 인간의 품위에
합당한 것인지, 우리의 치욕의 역사인 오대산 현장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런 좋은 기회에 우리의 정신문화로 정신문화동맹을 이루어 온
세상이 하나의 화합을 이루도록 모색해야 될 것이며, 나아가 온 세계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공존의 혁명에 앞장서야 되겠습니다.
오대산 역사의 현장에 박물관을 지어 실록과 ‘명성황후 국장 도감의궤’를
전시해야만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 옛날 동방의 시원문화를
수메르를 통해 전 세계에 전해 준 동쪽 군자의 나라, 동이족의 배달민족이며,
우리 민족이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무려 960여 번의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나 우리의 정신문화가 면면히 살아 있음을
현 21세기에 세계만방에 알려야만 되겠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박물관 짓기 모금을 해외동포 여러분께 호소합니다.
역사의 현장인 오대산은 매년 평균 150만 명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 월정사는 템플스테이, 기도처로서 불교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힐링을
원하는 명소인데,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평화와 육체의 휴식을 즐기러 옵니다.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는 모두 제 각기의 세분적인, 무엇이라 증명할 수 없는
다양한 작동을 그 내면에서 일으키고 있다고 양자역학 물리학자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또 하나의 무형의 다른 세계로 존재해 나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 오대산 역사의 현장에서, 조선왕조실록과 무참히 살해당한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 전시에서 겨냥하고 가늠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박물관 전시를
보는 찰나의 순간에서 무한대의 다른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신비로운 내면성의
아름다움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그 핵심 희망이지요.
그래서 저는 해외동포 여러분들께 박물관 짓기 모금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제 코리아는 비판적이고 양심적인 세계 속의 대중들이 지구촌 모든 비리,
그 속을 꿰뚫어 알아보도록 공개해야만 하겠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평창
동계올림픽은 명실공히 문화올림픽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평화를 결합시켜 유기적인 평화통일체를 만드는 코리아가 되는
지름길이지요.
오대산 실록과 의궤는 어떻게 돌아왔는가
우리 조상들의 정신문화이며,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고 정확한 기록문서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는 어떻게 그 막강한 도쿠가와 역대 쇼군, 메이지의
후예인 현재 일본 천왕이 거주하는 에도성을 뚫고 우리에게 돌아왔을까요!
한 일본 유학생 스님, 그분은 혜문스님입니다. 그가 2004년 8월 어느 날
교토의 한 고서점에 갔다가 도쿄대학 스에마츠 교수의 <청구사초(靑丘史草)>라는
책에서 월정사가 수비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이 일본 도쿄대학 귀중도서실에
소장되어 있음을 확인합니다. 또 오대산 조선왕조실록 약탈 경위 조사에서
‘명성황후 국장 도감의궤’가 다른 의궤 72종에 포함되어 일본 국내청에
소장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님은 명성황후와 관련된 근대사 공부를 끝내면서,
왜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참혹하게 살해되었고, 그녀의 장례식을 기록한
문서마저 약탈당해 왜인들의 왕궁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코리안으로서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고증을 통해 역사를 규명하고자 조선의 심장을
찌른 그 칼의 종적을 찾는 일부터 고달프고 어려운 길을 내딛었습니다.
그는 귀국하여 분주히 월정사, 봉선사, 조계종 중앙신도회, 민족문화연구소 등과
의논하여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를 결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65년 한일
양국 정상회담 때 “일본이 보유한 6만여 점의 우리 문화재는 다시 거론치 않겠다”고
한 우리 정부의 공식문서를 내놓았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있는 6만여 점의
문화재 속에서 특정해서 조선왕실의궤만을 반환 요청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캄캄절벽에 부딪혔습니다. 환수위원회와 스님은 혼신을 다해 일본 양심에 호소하며,
부처님께 의지하여 외로운 희망을 걸었습니다. 정의를 사랑하는 참다운 용기와
출중한 중용의 덕으로 일본 재야를 넘나들며 일본의 양심을 이끌어 냈습니다.
마침내 의궤는 일본 왕실을 박차고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환수위원회와
스님의 부단한 노력으로, 빗발치는 양심의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일본과 도쿄대학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을 서울대 규장각에
기증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실록과 의궤 환수는 한일 간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대 사건입니다.
코리아의 혜문스님이, 일본권력의 심장부인 일본 왕궁과의 싸움에서 문제 제기부터
마무리까지 선봉장이 되어 진행시킨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총리의 조선왕실의궤 반환 담화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 국민들은 무관심했고,
정부 관료나 국회의원들조차도 의궤를 무슨 궤짝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일본 궁내청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드물었습니다.”
코리아의 용감한 국민, 혜문스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실록과 의궤, 규장각에 다시 갇히다
그런데 실록과 ‘명성황후 국장의례 도감의궤’는
왜 또 다시 인연 없는 규장각에 갇혀야만 했을까요?
환수가 아닌 기증! 입니다. 약탈의 경위가 분명하였으나 일본은 약탈자의
부끄러운 수치심을 모면하려고 기증이란 명목으로 서울대학교에 넘겨주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반환운동을 벌여오고 결실을 맺은 환수위원회와는
상의 없이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문화재인 조선왕조실록을 불법 약탈해간 일본으로부터 기증을 받는,
대한민국은 차마 웃을 수도 없는 바보놀음을 하였습니다. 그 결실을 맺을 때까지
온갖 노력을 한 환수위 사람들과는 단 한번 스쳐보는 연대의식도 없이
왜 그렇게 받아들였을까요?
사실을 말하자면, 조선왕조실록이 동경대학 귀중도서관에 소장된 것을
학계와 정부에서는 그들의 책임과 의식 속에서 잊고 있었고, 이것을 약탈해간
왜인들의 손에 안일하게 일임했던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국사학자들에게
커다란 경고가 될 것입니다. 경술국치 이후 백년이나 지났지만 을미사변의 진상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며,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기초적인 자료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코리아의 재외동포 여러분!
로마(Rome)는 왜 전 세계인들에게 영원한 도시가 되었을까요?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는 유럽인들이 자부하는 명작의 건축 예술품들이
나열된 것이 그 원인일까요? 아니면 모든 역사의 진실을 낱낱이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일까요? 아마 이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자극을 주기 때문이겠지요.
실록과 의궤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정치, 학문, 경제, 외교, 문화 등을
글과 그림으로 정교하게 기록한 찬란한 우리의 정신 문화재입니다.
세계 어디에 내어놓아도 결코 뒤지지 않는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이것은 아시아의 시원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동이족, 배달민족인 우리가
21세기에 전 세계에 내어놓을 수 있는 자부심입니다.
결코 로마 문명에 뒤지지 않습니다.
사고가 있는 오대산은 절묘한 산세의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오대산에는 4개의 국보가 있으며,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 외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우리 문화재가 오대산 산줄기에
굽이굽이 서려 있습니다.
오대산에 보관된 아름답고 값진 문화재들은 속절없이 점령당하고 착취당하고
파괴되었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배달민족의 천성이 담긴 우리 문화의 보고입니다.
침략과 착취로 이루어진 로마문명에 뒤질 것은 결코 없습니다.
이러한 자연과 우리의 정신문화가 어우러진 오대산 역사의 현장에
박물관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 국채보상운동
저는 보천교의 600만 신도들이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거출했던 사실을
알게 되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90%에 달하는 독립운동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조달했습니다. 현재 재외동포 수는 600만 명을 훨씬
능가하지 않습니까? 1922년 동학 정신을 이어받은 보천교가 등장하였는데,
당시 교세는 600만 명에 달하는 기록을 가졌고, 독립투쟁에 몸담아 무려
3만의 신자들이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도 30만 원이라는 거액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 운동을 벌였습니다.[동아일보, 1926. 11. 1.]
전 국민이 국가를 위해 모금운동을 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07년 1월 29일 일본에 진 빚을 국채를 갚기 위하여 온 조선에 모금을
호소한 분이 계셨습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두 차례 330만 원의 차관을 주어,
우리나라는 일본에 330만 원의 빚을 졌습니다. 그 차관은 높은 이자율로
1,300만 원이 되었습니다. 이 액수는 우리 국민의 1년 소득액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은 국력과 실력이 부족하여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기고
일본에 예속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이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성심에서 열성적인 모금운동을 시작하신 분이
바로 서상돈 선생님이십니다. 열성적인 천주교 신자인 이 분은 천주교 전통 안에
예수의 부활축일을 준비하는 통회와 보속의 사순절 시기에 독립운동의 희생정신을
분발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게 됩니다. 이 애국운동은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고종황제로부터 서민층과 기생들, 걸인에 이르기까지 한마음으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발휘하였고, 우리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일본 유학생 800여 명이 금연과 금주로 절약한
의연금을 보냈으며,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동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습니다.
운동의 발단은 조선의 한 백성이었지만 그의 모금운동 의향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기관은 언론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존망은 물질에만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우리의 민족정신이 없었다면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중국은 ‘동북공정’이란 역사 조작으로 현대판 대동아공영권을 꿈꾸고 있고,
중화사상을 펼치면서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한 수를 두고 있습니다.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로, 군국주의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동북아 문화와 역사의 주도권 쟁탈전’입니다.
이제 우리는 배달민족의 유구한 정신문화로 무기 없는 무장을 해야 되겠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이홍범 박사가 주창하는 평화공존의 아시아 이상주의로
대한민국은 진정한 동북아의 주인이 되어야만 되겠습니다.
친애하는 해외동포 여러분!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오대산 사고 역사의 현장에 박물관을 건립한다면,
분명 우리에게는 가장 좋은 새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이국 땅 멀리에서
우리 조국 코리아로 확고한 신념과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심신의 평안을 누리시길 삼가 비옵니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박희용 올림
-불교포커스에 실린 글-
저의 이 호소문에 회답을 주실 분이나 물으실 말씀이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
현재 저는 국내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소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산 63 월정사 명상관
*전화 010-2103-3967
-공주 상왕산 원효사 심우실에서-
(글:해월스님 사진:李海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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