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단상(斷想)
사람(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야 설 수 있다고 글자는 설명한다. 과학기술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시절에는 사람이 서로 협력하고 협동해야만 문제 해결력이 쉽고 편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생활의 불편한 점을 해소하기 위해 부단히 아이디어를 내고 실생활에 적용하여 현재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일구어냈다. 정보 통신과 융합의 학문 패러다임이 새로 형성되면서 사람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품격이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뀌어졌다. 공동체주의를 옹호하는 관점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진정 행복이라고 주장하고, 개인주의 입장에서는 사람과 부대끼는 이해충돌로 오는 괴로움 보다는 혼자의 삶이 더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각자가 맡은 역할의 수행이 자연스럽게 가정이나 공동체에 화합으로 이루어지지 않기에 큰 공동체는 정치가 필요하고 가정에서는 가장의 역할이 필요하게 된다.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선택권자의 선택에 따라 이해득실이 서로 엇갈리게 배정되어 결정적인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줄을 선다.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입장을 고정해야 평화가 온다.
고대 사상가나 제도는 힘의 불균형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분업(分業)을 강조한다. 서양 사상가 플라톤의 사주덕(四主德)에 기초한 직업관이나 브라만교의 카스트제도나 맹자의 주장이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다.’(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힘의 불균형을 정착하는 이론의 정당화 모습이다. 이런 제도는 신분의 이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태어나서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것이 하늘의 명(命)이라고 세뇌하는 모습이다. 하늘의 명에 따라 숙명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모두 자기 생각이 있다. 억압하는 사회적 구조 때문에 자기표현이 쉽지 않지만, 본인의 의지대로 살기를 원하고 표현도 한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민심(民心)을 중요시하는 이유다. 민심에 따르지 않으면 폭동으로 대처하거나 혁명하는 모습에서 인간 자유의지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맹자의 또 다른 주장으로 평민은 풍년이 들면 부모를 풍족하게 섬기게 하고 흉년이 들어도 굶지 않게 해야 늘 같은 마음(恒心)을 유지한다고 한다. 하늘의 명이라고 세뇌한 보상적 모습이다.
우리나라 선인(先人)들의 삶을 보자. 고려 시대까지는 남녀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살았다고 한다. 연애도 자유연애이고, 재혼도 자유로웠으며 유산도 남녀 차별 없이 균등하게 나누어졌다고 한다. 재산의 유출을 막기 위해 사촌간의 근친혼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정치이념으로 정착되면서 남녀유별을 강조한다.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재혼 금지 조항이 생기고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윤리로 남자와 여자의 일을 구분하여 외지의 공직 생활이 많은 남자의 두 집 살림을 정당화하여 여자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낮게 만들었다. 일반 가정에서도 남자는 밖에 일에 몰두하고 가정의 일은 여자가 한다는 관습으로 여자들이 독립적인 생활을 꿈도 꿀 수 없는 문화를 만들었다. 근대에는 어머니의 희생이 많았던 시절이다. 시대 정신의 반영으로 여자들의 독립된 생활을 희망하였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국 각지나 세계 여행을 다니고 싶어도 남편과 시부모 식사 문제로 움직이기 어려웠던 삶이 1980년대까지의 우리 어머니 삶이었다. 현재도 나이가 60대 중반 이상의 가정과 60대 중반 이하의 가정적 삶이 분명하게 나뉜다. 60대 중반 이상은 여자의 가정생활에 역할이 매우 크고 60대 중반 이하의 가정은 각자도생의 개인주의적 삶이 일상화되어 있다. 같은 시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도 매우 크게 분명하게 차이가 난다.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윤리적 행위 지침이 오륜(五倫)이다. 아직도 근본적인 행위 지침 바탕에 적용되고 있지만, 현실 적용에 어려운 점을 지적해 보자. 군신유의(君臣有義)다. 현대 사회는 선출직 권력이다.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권력자의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 국가 운영에 참여한다. 국가 운영에 국민이 만족하지 못하면 선출을 하지 않는다. 신하가 옳은 일로 군주를 보필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에 따라 정권이 바뀐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다. 이 덕목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도 지켜야 할 덕목이다. 부부유별(夫婦有別)이다. 현대 사회에 가장 빨리 없어진 덕목이다. 신체적 특징을 빼고는 남녀의 구별이 필요 없는 시대이다.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덕목은 잘 지키면 좋은 일이 많이 있지만 현세대는 그리 필요한 덕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경제적이든 정신적이든 서로 보탬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각자 해결해야 하는 사회이기에 오랜 친구나 마음을 나누던 친구보다 동호회 모임으로 대처하는 모습이다. 장유유서(長幼有序) 덕목이다. 오랜 경험을 토대로 그 사회의 문제 해결을 했던 시대에는 장유유서가 큰 역할을 했지만, 시대의 변화가 엄청 빠른 현대 사회는 경험보다 새로운 지식을 빨리 많이 받는 쪽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인정받는 사회이다.
정보 통신 융합 사회라도 공동체적 삶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공동체적 삶 즉 사람이 서로 부대끼고 협력하고 협동하려면 개별적인 주체적 의지로 살아가는 일은 어렵다.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규칙을 준수해야 공동체적 삶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공동체의 원활한 작용은 누군가의 희생이 따르게 되어있다. 부부에게 가장 잘 적용하는 규칙이다. 한정된 경제적 여건과 함께 공유해야 할 시간이 필요한데 늘 부족하다. 누군가 양보하면 누군가는 소외된다. 이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논어(論語)에 서술된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비교를 각색해 보자.
‘군자는 남에게 베풀 것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자기 이익을 생각하고 군자는 제 잘못을 생각하지만, 소인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탓한다.’(이인 편) 군자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런 자세로 가정이나 공동체에서 실천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군자는 남의 장점을 완성되게 하고, 남의 단점을 고쳐 주지만 소인은 그 반대로 한다‘(인연 편) 남들에게 적용하기 어렵지만 가족이나 부부에게 적용하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군자는 이치에 따르므로 시간이 갈수록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지만, 소인은 욕심만 채우고자 하므로 후퇴한다. ‘(허문 편) 직장 생활 36년 동안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많은 허점을 보이기도 하고 실수도 많이 했다. 제자들의 평가가 좋음을 느낀다.
’군자는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고 소인은 남의 평가를 기준으로 행동한다. ‘(위령공 편)’ 논어에서도 주체성 문제가 등장한다. ‘타인의 시선은 지옥이다’라고 설파한 사르트르가 이 문장을 읽고 창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의 평가보다는 자기의 인격 완성과 소신을 강조한 대목이고 실천해야 할 행위 지침이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와 소인의 비교를 통해 장래 인격 교육을 정착하고 인간관계의 바탕 교육이 되면 현대 사회의 이기주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가능하리라 생각을 해 본다.
우리 부부는 같은 공간 같은 주제로 살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다. 가치관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단순하게 살고 주변의 많은 일들을 포기하고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반면 아내는 아직도 흥미로운 일과 관심 분야가 많고 넓다. 관심 분야가 하나라도 파생적인 일에 관심이 많으면 다양한 분야로 넓혀진다. 나는 음식 만들기와 상대 배려가 많다. 반면 아내는 음식 만들기에 별 관심도 없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진심으로 열정을 쏟는다. 나는 술을 좋아하고 아내는 술을 아주 싫어하고 술 마시는 남편은 더 싫어한다. 퇴근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부엌에서 막걸리 한잔 마시면 기분이 좋다. 이것을 보고 빙긋이 웃는 아내다. 서로 상쇄(相殺)가 된다. 누군가 희생을 강요하지 말고 자기가 잘하는 일을 솔선수범하여 실행하자. 상대는 그런 일에 거부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나 생각해 본다.
2024. 10. 8 憲
첫댓글 ’군자는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고 소인은 남의 평가를 기준으로 행동한다. ‘(위령공 편)’라는 지적에 마음을 묶어 두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