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C포르투에 입성한 석현준. 그의 의지에 박수를 보내며 더 훌륭한 선수가 되어주길 응원한다. 출처:FC포르투 홈페이지)
‘헬조선(지옥을 뜻하는 Hell + 조선)’이란 말이 대한민국을 몰아치고 있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마냥 틀린 말도 아니다. ‘없는 자(라고 쓰지만 평범한 사람들)’들의 삶은 팍팍하고 또 절망적이다.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에게 ‘너희도 우리처럼 될 수 있어’라며 기존의 경쟁 구도를 ‘열정’, ‘스펙’ 혹은 ‘경험’이란 긍정적인 말로 치장하며 경쟁에 뛰어들기를 부추기고 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승자는 없고 불평등은 계속 재생산되고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렇게 불합리한 경쟁을 욕하고 헬조선이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아 경쟁에 뛰어들고 헬조선의 경쟁 논리를 은연중에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때문인지 최근 한국인 중 40%가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정말 이런 곳이라면 헬조선이란 말이 현실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한국 시간 1월 15일 오전 석현준의 FC포르투 이적이 확정되었다. FC포르투가 빅클럽 진출의 교두보로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설레고 있다. 석현준의 바이아웃 금액은 3000만 유로, 한국돈으로 400억에 이른다.석현준이 스타플레이어는 아님에도 팬들에게 꾸준한 지지를 받는 이유는 그가 걸어온 행보 때문이다. 석현준은 네덜란드 아약스에 테스트를 통해 입단하면서 유럽 생활을 시작했고 그의 유럽 생활은 도전으로 점철되어 있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사우디에서 생활하면서 도전의 시기를 꿋꿋하게 견디고 이제 FC포르투에 입성한 그는 박수 받을만하다.(물론 그의 도전은 끝이 아니지만.)
유럽 도전의 '명(明)' 석현준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외 도전의 '암(暗)'이 등장한 것 같다. 포털사이트나 축구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중국, 중동 등 아시아 내 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에게 도전 정신이 없다고 지적하는 팬들의 반응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통해 병역을 해결한 선수들이라면 더욱 유럽으로 가야한다는 말도 접할 수 있다. 최근 많은 선수들이 중동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해외 이적의 무대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상대적으로 도전정신이 떨어진다고 본 것이다.
축구 선수들은 확실히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는 존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 역시 대중의 소유는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고 그것 때문에 비난 받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안정적인 선수 생활과 높은 연봉, 그리고 화목한 가정생활 등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택할 자유가 있다. 팬들의 입장에선 수많은 선수들 중의 하나로 여겨지겠지만, 그들은 한 가족의 아들이며 누군가의 남편이거나 혹은 남편이 될 이들이다.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이들에게 무작정 험한 길을 가라고 등을 떠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럽 도전의 현실을 살펴보자. 축구 선수들이 유럽에서 경쟁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사실 유럽 축구팀들은 확실한 선수가 아니면 굳이 아시아 선수 영입에 공을 들일 필요가 없다. 유럽은 전 세계 축구 재능들을 빨아들이고 있고 아시아 선수에 대한 인식도 아직까진 높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무대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선수들이나 K리그에서 독보적인 선수들이 유럽 이적에 성공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가족도 없이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작은 돈을 받으면서 경쟁에 나서는 것은 당연히 괴로운 일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들이 잘될 것이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아시아 무대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은 많은 팀들이 선호하는 옵션이다. 소중한 '용병 쿼터'를 차지하는 대한민국 선수들은 주전으로 기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AFC챔피언스리그의 재편과 함께 점차 발전하고 있는 아시아 무대는 유럽의 여러 팀들에게도 좋은 선수 영입처로 자리 매김 했다. 유럽 진출이란 꿈을 위해 굳이 큰 위험을 감수해야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주전 경쟁이 때론 치열하게 자신의 기량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경기 감각과 자신감을 떨어뜨려 기량이 저하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더 많은 급여를 받으면서 꿈의 무대인 유럽을 노릴 수 있는데 이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 2015 KFA 올해의 선수 김영권. 중국 슈퍼리그와 아시아 무대에서 최고의 수비수로 꼽히는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유럽에 도전해야 할까? 출처:AFC챔피언스리그 홈페이지)
‘요즘 젊은이들은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것만 선택하고, 우리가 젊었을 때처럼 도전 의식이나 패기가 보이지 않는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들을 때마다 억울해하는 말이다. 안정적인 선택에 대해선 도전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고, 도전하라고 등을 떠밀지만 끝까지 한다고 해서 잘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수 년을 보내고 나면 '실패자'로 낙인 찍는 게 헬조선의 현실이다. 축구 선수들에게 무작정 유럽으로 나가라고 떠미는 것은, 젊은 세대가 매일 받고 있는 압박과 다를 바가 없다. 축구선수라는 직업이 조금 특별할 뿐 그들 역시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일 뿐이다.
유럽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해서 '노오력'이 부족하다고 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무대에서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노력을 다하고 있다. 호비뉴와 파울리뉴가 활약하는 중국 무대에서 각 팀에서 핵심 멤버로 활약하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방관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성실한 삶을 왈가왈부할 권리는 팬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도전 정신은 소중한 것이고 석현준이 국내에서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하기를 택했다면 오늘의 석현준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전 정신을 강요할 수 있을까. 축구 선수들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 대중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해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석현준의 도전은 패기는 칭찬하고 응원해줄만하다. 멋지다. 하지만 석현준의 도전과 성공 때문에 다른 이들의 삶이 폄하당하거나 부정당해서는 안 된다. 석현준의 도전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에 의미가 있다.
대학생 시절 주변 친구들이 흔히 선택했던 길이 각종 고시다. 다른 분야에서 재능이 넘쳐 보이는데 고시를 하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술을 한 잔하면서 고시생으로 사는 선-후배, 동기가 너무 많다며 개탄하다가 친한 친구와 다툰 적도 있었더랬다. 그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주변 사람을 개탄할 권리가 나에게는 없다. 그들은 나와 다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길 뿐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왈칵 붉어진다. 나의 오만과 아집으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닐까. 나 스스로 헬조선을 욕하면서도 도전하지 않는다고 친구들을 비난하면서, 내가 그들의 주변을 헬조선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헬조선의 불합리한 경쟁을 끝내려면,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불합리한 판을 엎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선 길고 긴 정치적 투쟁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도전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는 여전히 굳건하고, 우리는 여전히 헬조선을 살아갈 것이다. 그 와중에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절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다. 팍팍한 속에서 충분히 ‘지옥’의 맛을 보고 있는 청춘에게, 서로를 몰아붙이고 상처 주며 더한 지옥 맛을 보여주진 말아야 한다. 아픈 사람들끼리 서로 보듬고 힘을 모아도 어려운데 서로에게 도전 의식이 없다며 깎아내리진 말자. 우리도 모르게 축구 선수들에게 도전을 강요하며 ‘헬조선의 참맛’을 보여주고 있진 않은가.
http://blog.naver.com/hyon_tai
첫댓글 공감합니다.
근데 헬조선이란 단어 그만좀 보면 안되나요. 대체 일베나 디씨갤 꼴통들이 만든 단어를 왜 자꾸 쓰는건지. 특정 지역 비하는 불합리한거고 특정 시대나 나라 전체에 대한 비하는 합리적인가요? 애초에 그 단어자체가 뚜렷한 근거없이 국뽕처럼 자기 반대세력들 입막음 위한 무작정 비하에 불과한건데. 일베에서 홍어나 민주화같은 단어랑 다를게 뭐 있다고.
그렇긴 한데 요즘 쓰는 의미로 보면 각박하고 살아남기 힘들고 치열하고 답은 안보이고 이런 사회를 한탄하는 의미로 주로 쓰이는 듯 해요. 물론 좋은 말은 절대 아니고 좋은 의미역시 아니지만요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비하하는 의미보단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의미가 강해서요
@Mr하자 글쎄요, 저도 조심스럽지만, 고위기사님 의견이랑 같은데요, 요즘 보면, 그냥 뭐 만하면 헬조선이니, 헬조선 클라스라는둥 몇몇글은 뭐 한쪽으로만 저격한 글도 많이 보이고하는데, 토론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비판 그런게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물타기 식이 많아서... 거의 입에 달고사는분들 보면 안쓰럽습니다..
그럼 노오오력 은 어떻게 느껴지세요? 사실 글 업로드한 후에야 '헬조선'이란 말에 거부감이 심하구나라는 걸 처음 느꼈어요. 노오력이나 헬조선이나 사실 단어의 느낌의 차이 뿐이라, 노오력이란 단어로 글을 썼으면 반감이 덜 했을까요?
@hyon_tai 반감은 덜했을수 있으나, 글 쓰실때 의도한 그 느낌을 잘 전달하기 위해선 헬조선이란 단어 사용이 더 적절한듯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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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으로 이루어낸 석현준의 포르투 입단은 칭찬받을만하나 도전하지 않는 선수들이 폄하당해선 안 된다. 이게 주제였던것 맞지요?
신선하고 좋은 의견이라 생각되는데, 주제에 닿기까지 설명이 너무 길게 늘어져있는 느낌이 들어요. 의도적으로 집중해서 읽어보자는 생각을 해야 몰입해서 따라갈수 있었네요. 댓글 다신분들께서 헬조선이란 단어사용에 여부에 대해서만 이야기 나누시게된것도 이때문인것 같은데요, 제 비판이 도움이되길 바랍니다.
좋은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