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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모세 tv/서울성령기도센터/충주성령기도원 원문보기 글쓴이: 초록들판
고린도 전서 12:8~10에는 성령의 9가지 은사가 있는데 이중에서 가장 많이 받는 은사는
방언의 은사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받은 것은 천국가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방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한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분명
성령을 받은 것(성령의 내주) 즉 거듭남과 은사는 전혀 다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이끌어
궁극적으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며,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주위의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전도하여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방언은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이기에 나자신을 위함도 있지만 남을 위한 중보기도에도 값지게 쓰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면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능력을 부어주실 수 있습니다. 이 때 내주하시는 거듭남의 성령도 같이 부어질 수 있겠지만
그러나 얼마든지 성령의 은사만 부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절대 안됩니다.
즉 성령의 능력은 받아도 얼마든지 거듭남의 체험은 하지 못한 채. 열심히 사역만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남은 구원시켜 놓고도 나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말하며, 성령의 열매가 나타남이 없이 사역만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성령의 능력과 거듭남인 성령의 내주를 동시에 받았으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결과로
능력은 행하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떠나가시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반대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나와 함께 하시지만 능력은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정말 잘 분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2015년도에 유명 기독카페와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동시에 올려놓은 글이 있기에 여기에 다시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 능력을 행하는 것과 성령의 내주는 별개다 --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님은 이 땅에 오셔서 믿는 자들을 위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하시지만 그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은사와 능력을 부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과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 영혼을 변화시킴으로 주님의 거룩한 신부로 구원받는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6:1~2에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인 회개 신앙(믿음) 세례들 안수 부활 심판등 여섯 가지가 나오는데 이 중에서 세례들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말합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옛 자아가 세례로써 씻겨지고 죽음으로 죄를 씻음 받고 다시금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성령세례란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심을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성령의 부어주심과 임하심 즉 하나님의 권능이 부어져서 우리에게 그 능력이 덧입혀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에게 임하는 것(권능)과 내주하시는 것으로 그 역할을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성령의 내주는 우리 개인의 구원과 직결되므로 임하셔서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보다 우리 개인에게는 훨씬 더 소중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고넬료와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는데(행 10:44~46) 이것은 권능 못지않게 우리에게 소중한 성령의 내주로 인한 거듭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성령이 계심을 모르는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임하여 방언과 예언을 했다(행 19:6)는 것은 성령세례로써 능력이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며 또 그 이면에는 내주하는 성령을 동시에 받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시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4:10~14에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 생수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은 곧 영생을 뜻하는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합니다.
성령세례로 권능이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로 수많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사명감을 부여받았다는 의미이며 그 달란트를 충분히 감당했을 때는 천국에서 상급과 그에 합당한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람인 우리의 옛 자아를 깨뜨려 영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계속하여 성화되어감으로써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마 3:13~17에서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님 위에 임하심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며 삼위일체이시며 신성을 가지신 분이나 우리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인성을 가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겸손해야 했기에 기꺼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기에 세례를 통한 우리와 같은 성령의 내주는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으며 우리와 똑같이 낮아지셔서 성령의 권능만을 받으시는 겸손함을 보이셨습니다.
행2:1~4에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문도가 모여 열심히 기도를 함으로써 성령이 임하여 방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후로 많은 사람과 더불어 제자들은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며 권능을 행하게 되며 마지막에는 모두가 순교합니다. 순교할 만한 믿음은 성령의 거듭남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이 임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성령 받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권능과 더불어 성령의 내주도 같이 일어났으리라고 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선지자나 왕이나 대제사장과 그 누구도 그들 속에 성령은 없었습니다.
각종 기적과 권능을 행한 모세 엘리야 엘리사 등등도 성령의 내주로써 내적인 세미한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명령을 따라 그때마다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순종함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는 성령의 내주는 없었지만 구원받은 백성들은 모두가 그 믿음에 따른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아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는 열두 제자들이 모두 귀신 쫓고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성령의 내주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듭남이 없었고 성화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기에 각종 능력은 행했지만,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도 또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모두가 대부분 도망가는 비겁함을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거듭남으로 변화된 이들은 모두가 담대하게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정신을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기준으로 본다면 신구약시대 모두 성령의 내주없이 권능을 행하는 장면이 많이 증거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고 하나님 뜻대로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죄를 자복하고 진심으로 간절히 회개하는 마음이 없이 마냥 하나님의 능력만을 간절히 구한다면 주님은 성령의 내주가 아닌 권능만을 우리에게 부어주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진실로 돌이키고자 하는 간절한 눈물의 회개가 없다면 거룩하신 주님은 결코 내 속에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권능만은 간절히 원하는 우리에게 당연히 임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만약 그 속에 주님이 성령으로 안 계신다면 이러한 능력 사역자는 많은 권능은 행하겠지만, 성령의 올바른 인도함을 그때마다 못 받기에 자기 의와 욕심과 사탄의 올무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항상 있으며 결국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주님의 준엄한 경고를 들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나 지금시대는 성령의 거듭남을 먼저 체험한 후에 막16:17~18과 같이 능력을 부여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일반적으로 사역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는 진실한 사역자로서 그 사명을 모두가 잘 감당할 수가 있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이처럼 거듭났다면 그 후 시기의 차이는 있겠으나 믿는 자로서 능력은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기본이 갖추어진 사람을 택하여 주로 주님의 군사로 쓰기를 원하시므로 그 사람의 수준에 합당한 권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저의 견해로는 권능을 받는 데 치중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은 그 간절한 기도와 소망에 따라 성령의 내주 없이 능력만이 부어질 수도 있다고 보며, 거듭남 체험을 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그 뜻에 따라 성령을 받는 체험을 하겠지만 또 언젠가는 주님의 은혜로 반드시 권능도 따라온다고 봅니다.
또 성령의 두 가지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능력의 은사를 받음과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같이 임하여 거듭남과 권능을 동시에 겸비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성령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갖춘 사람이 세상에 미혹되어 타락하여 세상을 추구하며, 이런 경우는 별로 없다고 봐야 하겠지만 만약 성령을 대적하는 일들이 계속하여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성령님은 그 속성상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며 떠나지 않는 분이시지만 이 경우는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을 심히 근심하게 할 것이며 마지막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으로부터 성령님은 떠나가시게 됩니다.
그렇지만 권능은 있기에 열심히 사역을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구원하겠으나 결국 나중에는 성령의 내주 없이 능력만을 행하므로 성령의 열매는 맺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또 임하시는 능력의 성령님을 매우 근심케 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결국 은사자로서의 능력을 상실케 되는데 이런 경우는 세상 죄에 빠진 경우는 아니고 거룩한 삶은 영위하겠지만, 그 받은 달란트에 맞추어 충실히 영혼을 살리는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기에 하늘나라의 상급은 별로 없으리라 보며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 않을까 합니다.
성령의 두 가지 역할을 모두 갖춘 자가 천국만 가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으로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가 힘이 드니 그 받은 능력이 싫다고 고의로 그 능력을 외면하고 하나님이 도로 가져가실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저는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 사람들에게는 능력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사람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동시에 떠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속에 계신 성령님도 인격을 가지신 분인데 매우 섭섭해 하시고 이렇게 사명을 거부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좋아하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능력을 행하면서 하나님께 거저 받은 권능을 자기 욕심과 명예를 위해 사용하는 사역자들이 지금 시대도 있다고 봅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며 많은 사람을 실족케 하고 교회를 떠나게 하는 비극이 발생합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행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 자신 속에 성령님이 거하기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내주해 계신다면 바로 징계가 내려오지 않겠습니까.
70년대 거룩한 성령의 사람 캐더린 쿨만 여사는 주위의 많은 사역자를 만나본 결과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 안에 성령이 없다는 것을 영으로 알게 되었다고 그의 저서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지금 시대 사역자 중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별로 나타나지 않으면서 사역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드물지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역은 하지만 자기 개인의 이득에 그 목적도 두고 또 자기 의와 명예도 겸하여 추구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으며 이들에게 성령님이 내주하실까 하는 의문을 저는 가져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복락을 추구하고 거룩하게 살지 못하며 받은 권능도 행하는데 게을러서 성령의 권능을 잃어버리는 잘못은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혹의 영에 휘둘려서 성령을 대적하는 죄를 본의 아니게 짓게 된다면 당연히 천국에는 못 가게 되며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맛본 자로서 주님을 진노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불신자보다 더 무서운 구렁텅이로 빠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남 없이 능력을 받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하며 거듭났다면 그 후에 당연히 능력은 따라오기에 이 모두를 소멸치 않도록 늘 두려워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저는 예전에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착하고 경건하며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도덕을 잘 지키면 나 스스로가 거듭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거룩함도 저는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부끄럽고 내 자아가 살아서 내 의를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내에서는 무난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성령님이 함께 하지 않는 세상의 거룩함이었으며 진실함과는 거리가 먼 유사기독교인이었음을 이 시간도 고백할 뿐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다녀도 세상의 경건을 추구하는 사람의 성품은, 진실로 성령의 거듭남으로 인한 사람의 성품과 서로 비슷해 보이는 것 같지만, 전자는 절대 하나님의 권능이 나중에라도 부어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거듭난 것 같은데 끝내 믿는 자로서 표적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람은 세상적 거룩함만 있고 성령의 내주가 없는 빈 껍데기에 불과한 유사신앙인에 불과하다고 저의 경험을 견주어 말하고 싶습니다.
또 거듭남으로 그 속에 성령이 내주하신 자는 무서워서 절대 성령을 대적하는 일은 없겠지만, 만약 주님이 아주 싫어하시는 죄를 범하고 있으면 바로 징계가 내려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시대에도 초대교회 때와 마찬가지로 온갖 능력과 기적과 이적과 치유들이 진실한 교회와 목자들을 통해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분별이 안되거나 혹시라도 세상 영에 미혹되어 이들 전부를 신비주의나 신사도 등등 악한 마귀가 하는 일로 매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이 미혹되거나 영적으로 무지하여서 이러한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본의 아니게 짓게 되기도 합니다. 정말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나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는 영분별이 꼭 필요한 시대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시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열심히 기도하고 주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권능을 나중에라도 부어 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 이 시대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 이 시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데 온전히 쓰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을 근심케 하여 떠나가시게 하는 일이 없도록 사도 바울과 같이 늘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일이 각자 개인에게는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리라 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