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
가을하면 연상되어 떠오르는 말이 천고마비(天高馬肥)이다. 직역하면 ‘하늘이 높고(天高) 말이 살찐다(馬肥).’는 뜻으로 현재 우리는 ‘가을의 풍요로움과 청명하고 드높은 하늘’을 비유하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로 표기하며 최초에 썼던 두심언(杜審言)은 ‘아주 좋은 가을 날씨’를 표현하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연유이었던지 매년 가을 마다 북쪽 변방을 침공하던 흉노(匈奴)에 대한 문제와 두려움과 공포를 지칭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변용(變容)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쓰였던 천고마비의 원형인 추고새마비의 유래와 의미를 위시해서 어떤 연유로 우리나라에서 오늘날처럼 천고마비로 변형되어 쓰이고 있는지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그 옛날 지금의 만리장성 너머의 북방의 변방 드넓은 초원에 유목민인 흉노들이 이른 봄부터 광활한 초원에 말을 풀어놓아 가을에 이르면 말은 살찌고 기운이 펄펄 났을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흉노들은 날쌘 말을 타고 중국 북쪽 변방에 질풍노도처럼 침공해 전광석화같이 가축과 곡식을 탈취해 가는 만행이 되풀이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추고새마비라는 말이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흉노가 쳐들어온다는 두려움이나 공포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전언이다. 다시 말하면 해마다 중국 북방 주민들은 가을이 무르익고 말이 살찌면 연례행사처럼 침공해 오는 흉노에 제대로 대항할 방법이 없어 번번이 당했다. 그런 때문에 그 무렵이 오면 흉노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엄중한 경고(警告)와 아울러 경계(警戒)하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추고새마비라는 말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는 견해이다. 따라서 우리처럼 순수하게 ‘가을이라는 계절의 풍로움’만을 뜻하는 의미로 쓰였던 게 아니었다. 한편 천고마비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한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나 추심새마비(秋深塞馬肥)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중국 역사상 북방의 이민족이 가을에 남침했던 경우는 빈번했던 것 같다. 매년 가을 연례행사처럼 침공했던 흉노족을 위시해 당말(唐末)에는 돌궐족(突厥族), 송(宋)나라 시절엔 여진족(女眞族) • 거란족(契丹族) • 몽골족이 노렸으며, 명(明)나라 때는 여진족(女眞族)이 그러했다. 이처럼 유독 가을이 되면 북방의 이민족이 준동(蠢動)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그들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하여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었다고 한다. 이를 이름 하여 방추(防秋)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출전(出典)으로는 첫째로 ⟪전당서(全唐書)⟫의 ‘증소미도(贈蘇味道)’, 둘째로 ⟪사기(史記)⟫의 ‘흉노열전(匈奴列傳)’, ⟪한서(漢書)⟫의 ‘흉노전(匈奴傳)’ 등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에서 ⟪전당서⟫의 ‘증소미도’에 나타나는 추고새마비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살피기로 한다. 작자는 당(唐)나라 시인으로 두보(杜甫)의 조부인 두심언(杜審言)이다. 그는 소미도(蘇味道), 이교(李嶠), 최융(崔融) 등과 함께 문장사우(文章四友)로 불리던 인물로서 자신의 시의 한 구절(句節)에서 이렇게 읊었다. 한편 동의어로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 추심새마비(秋深塞馬肥), 추고마비(秋高馬肥) 등이 있고, 유의어로 등화가친(燈火可親), 신량등화(新涼燈火) 따위를 들 수 있겠다.
/ ......../ 구름은 깨끗한데 요사스런 별은 떨어지고 / 가을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찌누나(秋高塞馬肥 : 추고새마비) / 말안장에 기대어 영웅의 검을 휘두르며 / ......... /
이 내용은 원래 ‘당군(唐軍)의 승리를 가을날’에 비유한 표현으로 ‘매우 좋은 가을 날씨를 묘사한 말’이다. 이처럼 최초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다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부정적인 뜻을 함께 함축하는 말로 변용 되었다.
웬만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천고마비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 싶다. 하지만 본디 이 말의 원형(原形)이 추고새마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 그렇다면 추고새마비라는 말이 천고마비로 바뀐 사연이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양한 자료를 들춰봤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전해들은 내용이다. 이에 대한 내 자신의 연구가 없었기에 단언하기 어렵지만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가 이렇게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추고새마비라는 말을 일본이 수용하는 과정에서 섬나라인 때문에 흉노족의 침공을 받고 공포에 떨며 트라우마(trauma)를 겪지 않았던 까닭이었으리라. 그들은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에서 ‘새(塞)’를 빼고, ‘추(秋)’를 ‘천(天)’으로 바꿔 신조어인 천고마비(天高馬肥)를 만든 것 이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천고마비가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풍요로운 가을’로 이해하도록 만든 것은 일본의 에도시절(江戶時代 : めえどじだい : 1603~1867)이었다고 한다. 그처럼 만들어진 천고마비가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우리사회로 시나브로 스며들어 오늘날 친숙하게 쓰이고 있다는 얘기다. 좀 더 명확한 자료를 접했으면 했지만 희망사항 일 뿐으로 내 능력 밖이라는 생각에 여기서 멈출밖에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사용되고 있는 말 중에 일본에서 비롯된 말이 과연 얼마나 될까.
원래 중국에서 추고새마비라고 했던 성어가 일본에 전파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춰 만들었던 신조어가 천고마비였다는 연구 결과이었다. 원래의 표현을 일본인들 기호에 맞춰 변형시켰던 조어(造語)가 우리에게 그대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씁쓸하고 찜찜함은 왜일까. 지난 학창시절 우리의 교육을 담당했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일제 강점기에 교육을 받았거나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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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도(1925~2015), ‘한말글연구회장’을 역임했다. ‘한말글연구’ 제7호, 2002년. 참고로 192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1944년 광주사범학교를 나왔다. 문교부 · 문화부 · 문화체육부 국어심의위원회 한글분과위원과 소년 조선일보 주간, 한국 글짓기 지도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말글연구회장을 맡아 우리말을 올바르게 다듬고 쓰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우리말글 이야기⟫, ⟪국어의 갈 길⟫, ⟪지명 유래집⟫, ⟪한국 신문 · 방송 말글 변천사⟫, ⟪주시경 국어사전 바로잡기⟫ 등을 펴냈다.
수필과 비평, 2024년 10월호(통권 274호), 2024년 10월 1일
(2024년 4월 28일 일요일)
첫댓글 중국의 만리장성을 왜 쌓았는지 근거를 이해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