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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친구 따라 강남갈래? 친구랑 기도할래?/단 2:17-24
17. 이에 다니엘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그 동무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에게 그 일을 고하고
1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사 자기 다니엘과 동무들이 바벨론의 다른 박사와 함께 죽임을 당치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구하게 하니라
19. 이에 이 은밀한 것이 밤에 이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매 다니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20. 다니엘이 말하여 가로되 영원 무궁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권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21. 그는 때와 기한을 변하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지식자에게 총명을 주시는도다
22.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23. 나의 열조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바 일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
24. 이에 다니엘이 왕이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라 명한 아리옥에게로 가서 이르매 그에게 이같이 이르되 바벨론 박사들을 멸하지 말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 해석을 왕께 보여 드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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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이정선목사(타우랑카 한인교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강남 가는 친구를 만나면 강남에 갈 수 있고, 뉴질랜드 가는 친구를 만나면 뉴질랜드에 갈 수도 있겠네요. 여기 있는 여러분 중에서도 친구 따라 여기 뉴질랜드까지 온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친구는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고 착실한 친구들이 많으면 자연히 모범학생이 될 것이고, 친구들이 모두 껄렁껄렁하고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 꾸부정한 애들이라면 그 삶이 평탄하지는 않겠군요.
친구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진짜 친구인가 하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남아있는 친구입니다. 내가 힘이 있고 잘나갈 때 내 주변에 모여드는 많은 친구들은 아직 진짜 친구라고 할 수 없지요. 죽지도 않은 아버지의 재산을 억지로 뺏다시피 상속을 받아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흥청망청 살던 탕자에게 친구들이 엄청 몰려들었습니다. 친구는 좋은 것이죠. 같이 있으면 즐거우니까요. 함께 술도 마시고, 함께 골프도 치러가고, 함께 여행도 하고 말이죠. 이 탕자의 삶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해준 사람들이 바로 그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치는 일을 하면서 돼지밥이나 훔쳐먹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어떤 친구가 있었던가요? 안됐지만 그에게는 친구가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없으니 누구랑 마음속 얘기를 나눌 수 있겠어요? 누가 그의 곁에서 그의 고통을 나누어 가졌습니까? 누가 그의 슬픔을 위로해 주었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친구가 하나도 없다면 삶이 얼마나 황량하겠어요? 친구가 하나도 없는 아이들, 왕따죠, 너무 힘들어서 전학을 가기도 하고 유학을 가기도 합니다. 그만큼 친구는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문제는 친구라고 모두가 친구는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좋은 친구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가치관이 형성되어가는 시기, 그리고 많은 정보와 지식을 받아들여야 할 시기에 좋은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앞으로의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좋은 친구는 함께 기도하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함께 술마시는 친구나 만나서 수다나 떠는 친구가 아니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친구, 즉 기도의 동역자입니다. 기도의 동역자가 좋은 친구라고 해서 이 친구는 만날 때마다 기도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기도할 일이 없으면 안 만나는 그런 사이도 물론 아니지요. 평소에는 만나서 함께 떡볶이를 먹고 함께 영화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나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친구들 중에서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여기 다니엘을 보세요. 바벨론의 지식인 그룹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몰살을 당할 뻔한 절박한 상황에서 일단 발등의 불은 껐지만, 며칠 내로 잊어버린 왕의 꿈을 알아내고 그것을 해석해야 할,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임무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만약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어쩌면 가장 먼저 처형을 당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다니엘이 맨 먼저 한 일은 친구들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 친구들은 다니엘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 질 수 있는 친구들입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 그나마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친구들이 다니엘에게 참으로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그런 친구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들은 바벨론이라는 타국에서 서로 위로하고 기댈 수 있는 고향친구들이었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출신의 친구처럼 정서가 통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지요. 우리가 여기 뉴질랜드에 살면서 아무리 좋은 키위 친구가 있다 한들 그래도 마음이 맞고 얘기가 통하는 것은 그래도 한국사람입니다. 좋은 키위교회들이 많이 있음에도 한인교회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다니엘에게 있어서 이 친구들은 고향친구 이상의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는 사람들이지요. 함께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친구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답답하고 어려운 시련에 처했을 때 함께 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사귀고 있는 친구들은 기쁠 때의 친구들입니까? 아니면 슬플 때나 고통스러울 때도 여전히 여러분의 곁을 지켜줄 수 있는 친구들입니까? 정말 외롭고 슬플 때 여러분이 찾을 수 있는 친구는 얼마나 됩니까? 더 나아가 그런 순간에 함께 슬퍼하고 고민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해주기를 부탁하고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이 필요한 이유는 기도의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계시는 동안 어떤 사람이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 보았지만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시자 제자들이 자기들은 왜 할 수 없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는가 하면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하셨어요. 또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기도하라고 하면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했습니다(약 5:16).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는 의인들을 확보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의 어린 딸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밤새 펄펄 끓어오르는 아이의 몸을 끌어안고 기도를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에 보니까 악한 영들이 자기들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딸을 해치려는 것인데 주변에서 어슬렁거릴 뿐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곱 개의 횃불이 이 두 사람을 빙 둘러서서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밤새 씨름을 하다가 아침을 맞았는데 보니까 딸의 열이 내리고 깨끗이 나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본국에서 편지가 왔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몇월 몇일, 우리는 기도하는 중에 선교사님이 매우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곱 사람이 합심해서 밤새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요? 그리고 지금은 어떠한지요?’
여러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친구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오늘 여러분이 위해서 기도해야 할 친구는 또 누구입니까?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 주는 친구를 갖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괴로울 때 주로 뭘 하던가요? 술을 마시지요? 술로 괴로움을 잠시 잊거나 달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몇 시간이나 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럴 때 기도할 수 있잖아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슬픔에 잠겨 세상을 저주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 인간의 삶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무슨 수로 잊어버린 왕의 꿈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바벨론의 술사들이 말했던 것처럼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을 인정한 바벨론의 술사들이 그 꿈을 알아내기 위해서 자기들의 신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이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니엘은 즉시 그 꿈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정적으로 바벨론 술사들의 신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고, 오직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라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왕의 잊어버린 꿈을 알아내지 못하면 몰살을 당하게 된 이 천재지변과도 같은 사건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해답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왕에게 그런 약속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물과 채소만 먹고도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은 청년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공부도 잘 할 수 있도록 해 주셨던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과거에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또 다른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다시 담대하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줄 압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기도했을까요? 기도의 자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들어주시려면 들어주시고 싫으면 관두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렇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기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기도가 아니라 배짱이군요. 물론 들어주시거나 아니거나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사 자신과 친구들이 죽임을 당치 않게 해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도 상당한 손해가 아닙니까? 그러니 살려주세요.’ 뭐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이번만 살려주시면 이 한 몸 바쳐 충성하겠습니다.’ 이건 또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까? 기도할 때는 다급하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살려주신 후에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 별로 많지 않더군요. 화장실에 갈 때와 갖다온 다음의 마음이 같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루는 밤에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마치 스크린에 영상이 찍히듯 사라져버린 왕의 꿈이 재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비밀의 창을 조금 여시고 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다니엘서는 기본적으로 계시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비밀을 알려주셨고 그것을 다니엘이 받아 적은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채소와 물만 먹으면서 공부했어도 하나님이 그들에게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는데, 그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았다는 구절(1:17)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냥 지나쳤습니다만, 다니엘이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아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다니엘서 전체를 꿰뚫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밀을 열어 보여주시는데 그것을 깨닫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음으로써 계시의 전달자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왕의 꿈이 스크린에 나타났을 때 다니엘이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했을까요? 그래서 여기 보면 다니엘이 하나님을 찬양한 내용이 길게 나옵니다. 기도의 내용은 한 절로 압축해서 표현된 반면에 기도응답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길게 나와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때는 간절히 길게 하면서도 그것이 응답되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는 데는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니엘이 누리고 있을 감격과 기쁨, 그리고 감사, 이것은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특권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의 응답 역시 우리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기도의 동역자, 기도하는 친구와 함께 나눌 때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기도하는 삶으로, 그리고 기도하는 동역자와 더불어 더욱 성숙하고 감격스러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