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청주까지 50리(20km)를 걸어가는데
나는 큰 형의 등에 업혔다가 걷다가를 반복합니다.
드디어 청주에 이르자 또 깜짝 놀란 것은 청주가 폐허가 된 것입니다.
바로 전국에서 유명한 `제사공장`이 있는데 누에를 길러 실을 뽑아 비단을 짜는 공장인데
규모가 엄청 큽니다,
우리는 국민학교다닐때 견학을 하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망가지고 불타고 부서지고 초토화가 된 것입니다.
이 악마같은 북한 놈들아 ! 하늘의 저주를 받아라 !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옵니다.
거기뿐만이 아니고 모든 공장들이 다 때려부셨고 건물들도 다 망가졌습니다.
우리는 서문동 으로 왔는데
큰 형이
"우리 본정으로 갈까 무심천으로갈까?"
라고하자 작은 형이
"무심천"
이라고 하여 우리는 바로 옆의 무심천으로 들어갑니다.
무심천은 옛날에는 강이었는데,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자
사람들이 일본인들이 잘 키워 놓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장마가 지면 토사가 밀려내려 강을 메웠기에 이제는 강이 아니라 개천입니다.
무십천 은 넓어 가운데에는 물이 흐르고 옆에는 잔디밭을 조성한 일본인들인데
해방이 되자 마구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습니다.
양쪽에는 아주 잘 만든 제방이 있는데
제방에는 벗나무가 가득히 심어져 봄만되면 깜짝 놀랄만큼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무심천 끝의 영동을 지나 북문로 3가의 끝자락의 길을 건너 논길로 해서 우암동으로 갑니다.
형들의 발길이 빨라지는데
나는 혹시 어머니가 살아서 돌아와 우리를 기다릴지 모른다는 허망된 생각을 하였는데
형들도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점점 성급해 집니다.
우리가 집에 이르자 대문이 열려있고 방문도 다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살림살이 세간도 누가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는 방마다 돌아다니고 부엌에도 가보고 뒷곁에도 가 보지만
어머니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 텅 빈 방을 보고 엉엉 소리내어 웁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와서 우리가 우는 것을 보고
"엄마는?"
이라고 어머니를 찾습니다.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라고 형이 말 하자, 그들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참 좋은 분이었는데 흑흑흑"
어느 부인이 밥을 가지고 왔기에 우리는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그동안 굶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모릅니다.
어느 부인은 쌀도 조금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다음날 부터
쌀이 떨어지자 형들은 바가지를 들고다니며 밥을 얻어옵니다.
그렇게 11월이 지나갑니다.
우리국군과 UN군들이 압록강 까지 쳐들어갔는데 중공군들이 물밀듯이
인해전술로 내려와 유엔군들이 모두 후퇴를 합니다.
그해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유엔군들이 많이 얼어죽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피난가시오"
라고 1951 년 1월 4일의 1.4후퇴명령을 내리고
모두 피난 가라고 라디오방송을 하지만
국민들은 지난 여름피난때 모두 고생을 해 봐서
"이제는 다시는 피난 안 간다"
라고 하자 이승만은 다시
"피난 안 가면 적에게 동조한 것으로 간주한다"
라고 하는 바람에 겁이나서 산골에 사는 사람들도
병이 든 사람들고
늙은 사람들도 다 피난을 갑니다.
늘고 병든 어른들을 리어카에 태우거나
업고 가거나
지게에 지고 갑니다.
그 엄동설한에 피난민들은 어디에서 자고
어디에서 밥을 해 먹는가?
거의 다 얼어죽습니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전쟁이 나면 무조건 피난을 가야만 하는가? 입니다.
이승만이 단 하루만이라고 겨울 피난을 가 본다면 다시는 피난가라는말은 못할 것입니다.
헌법에 피난을 가라는 조항도 없는데 대통령 말이라면 하느님 말씀으로 알아듣다니 !
(계속)
첫댓글 에효. 그저 그시절이 고통스럽기만 했지요.
어서오세요 방긋님 감사힙니다.
저는 싱글벙글 하하하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정말 고난속에버티어주셨서지금는평화롭살잔아요너무가슴아프네요
어서오세요 해배라3님 늘 감사합니다.
그런 멍청이 같은 이승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중엔 결국 천벌을 받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