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을 좋아하나? "
스멀히 사라지는 연기를 내뿜으며 뱉는 하얀 목소리는 대꾸를 하지 않아도 될만큼
객관적이었다.
" 아..아뇨....가끔 즐기는 정도죠...뭐, 잘 알지도 못하고.. "
그는 갑자기 무방비 상태에서 받은 질문에 마시던 와인잔을 내려놓고 존칭을 써가며
확신없는 대답을 하는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을지도 모를 옆자리에 앉은 '그'에 대해
순간, 종류를 알수없는 친근함을 느꼈다.
" 선생님은 와인을 좋아하시나 보죠? "
고개를 돌려본 '그'는 중년을 넘어보이는, 정수리에는 지식의 인식같은 하얀 소초머리와
미간사이의 생의 집념같은 주름, 와인을 머금어 웅얼거리듯 다문 입매와 허공을 찌르는
눈매는 잠시 그가 가졌던 이유없는 굴복감을 안심시켜주었다.
" 좋아하지...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더 좋지.."
그리곤 다시 경건의 의식처럼 크리스탈 잔속에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어 잠시 물결을 응시하는
것 같더니 이내 눈을 감고 잔 깊숙히 코를 넣어 자신의 폐부 가득 충만하게 와인의 향을 꾹꾹히
담아두는 그의 모습은 야곱의 시대에 하늘에 번제를 드리던 대제사장같은 신성함으로 충만해
보였다.
그는 갑자기 '그'를 닮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마담..... 이곡도 기억하고 있었군."
" 변하진 않으셨군요. "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다는것을 알게해준 가라말 같은 여자.
이 클럽의 주인이기도 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내부로부터 무한히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아직 변변한 이름하나 붙여줄수 없는 그로서는 동시에 '그'가 무척 흥미로워졌다.
그녀가 더할수 없이 상냥하고 매력적인 웃음을 띄며 '그'에게 다가왔다.
" 여름엔 특히 이곡을 좋아하셨잖아요.. "
" 그랬지.....악마의 반도네온을..."
그는 잠시 '그'에게 갔던 관심이 그녀에게 옮겨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시선도 함께.
" 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는데 제가 오늘 선약이 있어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할것 같아요...
죄송해요."
" 이사람, 일이 있으면 일을 봐야지...죄송해하긴...."
" 즐겨 들으시던 곡들로 준비는 해 놓았어요....편안히 즐기다 가세요.."
" 그래...또 만나지..."
'그'에게 인사를 하는 그녀는 잠시 그에게도 의례적인 웃음의 목례를 하며 단정한 걸음으로
홀의 내부를 가로질러 문을 열고 그녀의 코트와 같은 색의 푸른 우산을 펴들고 빗속을 총총히
걸어나갔다.
짧은 최면을 깨우는 샴페인 터지는 소리가 없었다면 그는 제법 오랫동안 그 문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것 같았다.
그의 관심이 방황하는 사이 어둠의 농도는 더욱 짙어지고 클럽안에는 반도네온의 날서린 선율
이 가득 차 있었다.
" 피아졸라가 연주한 곡인가요? "
" 피아졸라를 아는가? "
" 그냥 조금 들어본 정도죠...새로운 탱고음악의 개척자이고,
클래식과 재즈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위대한 연주인이라는 정도쯤이죠."
" 많이 알고 있군...그래...이곡은 피아졸라가 직접 연주를 하는 곡이지."
" 저는 리베르 탱고를 제일 좋아합니다....춤추기에도 참 좋고."
" 호~~ 탱고를 추는가? "
일순 밝아지는 '그'의 눈빛을 보며 그는 갑자기 자신이 '그'의 관심을 끌어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그리곤 다시 힘차게 말을 이었다.
" 네...좀 오래췄습니다...한 7년정도...여자들은 저보고 테크닉과 느낌이 좋은 땅게로라고 하죠."
그의 목소리에는 당당함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 그렇군...한국에서 탱고를 추기 시작한지가 이제 겨우 15년 남짓이니 꽤 오래췄구만."
" 선생님께서도 탱고를 추셨나보죠? ...성함이...? "
혼잣말을 하듯 질문을 삼키는 그는 이제 다시 새로운 경건의 의식을 진행하는 '그'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리니....여기서 또 보는군!! "
'그'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그를 부르며 누군가가 어깨를 쳤을때 하마터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펄쩍 뛰어오를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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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분이 오셨어.'
그녀가 다시 몸을 돌려 또 다른 골목길로 들어섰을때,
클럽 어디에서라도 더 이상 그녀의 발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그녀는 골목 어귀에서 파란 유황불처럼 잠시 서 있었다.
이끼긴 화강암의 옹벽을 타고 내린 빗물은 그녀의 발아래로 모이더니 헤어나지 못하고 회붉은
초빛으로 변해 굼실거리고 있었고, 무릎까지 내려온 레인 코트는 의사의 가운처럼 금방이라도
죽음이 드러나 보일것 같은 모습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수선화같은 머리결을 쓰다듬던 그녀는 우산을 접고 붉은 입술 사이로
한 모금의 미소를 하늘로 보냈다.
' 나가야해...'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그녀는 적당히 식힌 가슴으로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닦고 있던 와인잔을 놓치지 않기위해 그녀는 재빨리 수건과 잔을 내려놓고,
오른손을 가볍게 테이블위에 놓은 채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애초부터 불편함이란 없었던 것처럼.
" 어서오세요....선생님."
" 오랜만이군...잘 지냈나? "
" 네...오랜만에 오셨군요."
" 그래.....여전히 곱군.."
그 순간 그녀는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7 년전 그날처럼.
그녀가 머뭇거리는 사이, 그는 클럽 주위를 익숙하게 둘러본후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정확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눈에 클럽 내부를 둘러보기에도, 음악을 듣기에도 편한 자리처럼
보였지만 묘하게도 다른 공간과는 별도로 독립되어 있는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사진속에 박제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하지만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다가간 그녀가 물었다.
" 모에 에 샹동 (Moe''t et Chandon ) 동 빼리뇽 ( Dom Pe'rinon) 으로 늘 시작하셨죠? "
그녀는 숙제를 검사받는 어린아이처럼 공손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뺨을 향하던 눈동자가 움직이며 '그'의 머리카락이 희게 변한것을 발견하자 그녀는 순간
무릎을 꿇어 그의 손을 잡고 싶어졌다.
" 아니...샤또 마고 ( Chateau. Margaux ) 1997년 産이 있으면 그걸로 하지."
" 네...준비되 있어요. 그럼, 식사도 함께 하시겠어요? "
" 그래...샤또 브리앙 (Ch. brian)으로..."
" 붉은 색은 와인하나로 충분하다고 하셨죠? "
" 아직 기억하고 있군...그래..."
'그'가 처음 이 클럽에 왔을때 소의 최고급 부위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안심으로 만들어지는
샤또 브리앙(Chateau brian)을 주문하며 충분히 익혀 달라고 했던 말에 당황하던 기색을
보이던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 붉은 색은 와인 하나로 충분하지..'
" 알겠습니다...더 필요한건 없으세요? "
그러자 '그'는 아무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 탱고는 여전한가...? "
" 아뇨...지금은 더이상 추지 않아요.."
" 왜....? "
" 추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요."
어떤 땅게라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땅게로가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라고,
그녀는 종종 말하곤 했었다.
" 아니, 한국의 밀롱가가 모두 사라졌나? "
" 아뇨...'그' 만 사라졌었죠....그런데 7 년만에 다시 나타났어요."
" 흠...."
그가 눈길을 돌리며 말을 멈춘 사이,
그녀는 오랜만에 찾아온 이 무겁고도 어색한 침묵이 좋았다.
그걸 즐기는 쪽은 언제나 그녀였다.
" 그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8 년동안 익숙하게 단련된 클럽주인의 풍으로 말하며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밖은 초여름 비가 세상의 모든 기운을 한번에 후리질이라도 할것처럼,
거침없이 내리고 있었고, 클럽안에는 Chet Baker 의 ' I Fall in Love Too Easily' 가
탄식처럼 흘러 나오고 있었다.
2014년 서울에서의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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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웅..........레오님 마음이 편안해져서 쏠땅에도가끔 좋은글을 올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어디서나 탱고추는 사람들의 관심의대상이 되다보니 이런 일들도 일어난게 아닐까라고 많이들 생각해요
하루빨리 편안해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멋진춤과 좋은 글 그리고 아직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반도네온까지 잘 해나가시길 바라구요
잘 모르는 분이긴하지만 레이디아나님도 힘내시구요.아자 아자 모두들 화이팅!!!!!!!!!
로긴님 분위기 헤치는글 아니져?? -_-;;
첫댓글 에구 무슨 말씀을요^^ 저도 두분 모두 힘내셨으면 합니다. 아싸가오리~ -_-;;; 내가 분위기파악 못하는건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