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흑룡강(黑龍江)/ 볼가강 지도
현재의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며,세계적인 강대국 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과연 러시아는 어떠한 나라였으며 조선과 아시아와 어떠한 관련을 가졌던 나라였는지 제대로 그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봅니다.
러시아에 관련된 역사(歷史)를 알면 조선의 상고사(上古史)와 아시아의 역사를 알게되는 단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러시아의 민족적 정체성은 어떠한지에 대해 여러 고문헌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9권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아라사국(俄羅斯國)
"아라사국(俄羅斯國 러시아)은 북쪽 맨 끝에 위치해 있는데,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다. 명(明)나라 300년 동안은 중국과 통하지 못하다가 청(淸)나라 강희(康煕) 때에 이르러 중국에 들어와 조공을 바쳤다. 8도(道)를 두어 ‘사과(斯科)’라고 칭하고, 사과마다 또 각각 소사과(小斯科)로 나누었다."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권지12 잡저(雜著) 자집고이의(子集考異議)
" 唐太宗用兵。至骨利幹。置堅昆都督府。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
(당 태종이 군사를 부려 골리간에 이르러 견곤에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지56 초사담헌삼(草榭談獻三)
" 時淸人徵我兵攻車漢。車漢者羅禪也。在極北鄂羅斯地。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黠戛斯。其人皆長大赤髮晢面。綠眼而黑瞳者曰李陵之後也。窃據黑龍江上。"
(당시에 청나라는 우리의 병력을 징집하여 차한을 공격하게 했다.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 북극 악라사의 땅이다. 한(漢)나라때 견곤,정령이다. 당나라때 힐알사 이다. 그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하며 붉은 머리에 흰 얼굴을 하고 있다.
푸른 눈에 검은 눈동자가 있으며 한(漢)나라때의 이릉의 후예라고도 한다. 흑룡강의 위에 근거해 살고 있다.)
여유당전서 제6집 지리지제6권 대동수경(大東水經) 대동수경 기2(大東水經 其二) 만수2(滿水二)
" 大國徵兵助攻車漢。車漢者。羅禪也。" (청나라에서 병력을 징집해 차한 공격을 돕게 했다. 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
위의 기록에서 알수 있는 것처럼 러시아는 근대에 와서는 아라사국(俄羅斯國)으로 불리어 졌는데 근대 이전의 상황을 보면,한(漢)나라때 견곤,정령이었으며,당(唐)나라 때 힐알사(黠戛斯) 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 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청(淸)나라때는 악라사(鄂羅斯),라선(羅禪),차한(車漢),아라사(俄羅斯)로 불렸습니다. 러시아 민족에게 있어 상고시대의 조상은 견곤(堅昆) 부족과
정령(丁令) 부족 인데, 이중에서 정령(丁令) 부족은 철륵(鐵勒)의 조상 입니다. 철륵민족은 혈연적으로 고대에 고창국(高昌國)을 세운 회흘(回紇),외오아(畏吾兒)라 불린 민족과 더불어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의 기록처럼 다같은 흉노(匈奴)의
후예 입니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흉노족의 후예이며 정령의 후예인 철륵(鐵勒)의 군대를 고려가 징발해서 후백제를 쳤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두산백과"를 보면 철륵(鐵勒)민족의 고대의 할거지가 오늘날의 카스피해,아랄해 일대
였다고 하는데 이들의 할거지가 위의 기록처럼 북극지역으로 이동한 이유는 다음의 기록으로 알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권 세기(世紀) 4 부여(夫餘)
"《후한서》에 또, “6년에 선비(鮮卑) 단석괴(檀石槐)가 용맹이 있고 지략이 있어서 남쪽으로 변경을 침략하면서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는 부여(夫餘)를 퇴각시키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격파하여 흉노(凶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하였다. 그런 다음 스스로 그 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우북평(右北平)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러 부여와 예ㆍ맥과 경계를 접해 25개 고을을 묶어 동부(東部)라 하고는 각각 대인(大人)을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해동역사가 인용한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선비족(鮮卑族) 단석괴(檀石槐)가 "북쪽으로는 정령(丁零)을 막고"라는 기록은 정령(丁零)을 북쪽으로 축출했다는 기록입니다. 선비족인 단석괴에 의해 북방으로 축출당한 정령(丁零)부족의
할거지는 북극지역이었던 겁니다. 그럼 이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이 현재의 어디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던 지역을 알면 고대사의 비밀을 풀수 있는 커다란 단서가 보일 겁니다.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던 지역을 알수 있는 단서가 위의 기록에 있는데 아주 핵심적인 단서 입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기록인 "흑룡강의 위에 근거해 살고 있다.(窃據黑龍江上)"의 기록과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인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 입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저자는 성해응(成海應)으로 조선의 정조때의 인물이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저자는 이형상(李衡祥)으로 조선의 숙종때의 인물 입니다. 그 당대의 상황과 과거의 역사사료를 근거로 기록을 남긴 것인데,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흑룡강의 상류지역에서
살고 있다고 기록했고,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사는 곳은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처럼 "백야(白夜)"현상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즉,역사상의 흑룡강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 입니다. 네이버 지식을 보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웨덴 지역등등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당 태종이 골리간(骨利幹)에 이르러 견곤도독부(堅昆都督府)를 설치했던 지역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이며 흑룡강의 상류지역인 러시아 민족이 사는 지역이었던 겁니다. 다시말해서 러시아 민족이 과거에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은 흑룡강 상류지역이며,그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입니다.
상식적으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북극권 입니다. 위의 기록 만을 가지고 러시아 민족이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을 말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을 보면 위에서 말한 러시아 민족이 과거에 살았던 지역의
전제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기록이 될 것입니다. 이를 보면,
《신당서(新唐書)》 회골전(回鶻傳)에 의하면, 골리간(骨利幹)이란 지역은 한해(瀚海)의 북쪽에 위치하여 경사(京師)와 가장 먼 곳으로서, 해가 막 넘어갈 때에 양갑을 삶기 시작하여 양갑이 다 익을 때쯤이면 벌써 동방(東方)이 밝아온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세월이 몹시 빠름을 의미한다. (唐書回紇傳曰。瀚海之北。骨利幹之地。)=(한국 고전 번역원의 주석 인용)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백야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신당서(新唐書)"입니다.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당나라때 당 태종이 골리간 지역에 이르러 견곤도독부를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고문헌에서 이 지역의 백야현상에 대해 비유하여
시문(詩文)등에서 주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표현하는 기록이 참으로 많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해가 넘어가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하여 다 익을 때쯤이면 해가 다시 뜬다."는 기록을 생각해 보면, 고기를 삶아 익힐때 까지 불과
몇 시간 정도에 불과 한데 벌써 해가 뜬다는 기록으로 그 만큼 밤이 짧다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골리간 지역은 그 밤도 어둡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도 골리간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가 되면 순전히 낮만 계속되는 시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는 북쪽의 골리간(骨利幹)지역이 완연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6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3 ○ 강목(綱目) 7 [당 태종(唐太宗)]
"양고기가 겨우 익자마자 하늘이 벌써 밝아졌다고 한 것은, 북극(北極)이 지평으로부터의 고도(高度)가 60도(度) 이상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3개월이 낮이고 3개월이 밤이 되는 나라가 나오며, 다시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반년이 낮이 되고 반년이 밤이 되는 나라가 나온다. 아침에 밭을 갈아 저녁에 수확한다는 말이 《주비산경(周髀算經)》에 나오고, 낮과 밤이 반대된다는 말이 《역서(曆書)》에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이치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데, 선유(先儒)들이 여전히 그것을 믿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 이것은 이른바 피차간에 처지가 달라 상대방을 서로 비웃은 것이리라."
정조대왕의 저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백야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홍재전서에서도 백야현상 관련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일부 인용했고,당나라에 온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라는 기록은 골리간 지역에 백야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웃었던 겁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헌적으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통해 흑룡강 골리간(骨利幹)지역의 백야현상을 알게 되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알수 있었던 계기는 조선과 청(淸)에 의한 "나선정벌"입니다. "성호사설"에서 나선정벌에 대한 기록인 "차한일기"를 기록했는데,그 기록의 일부를 보면,"효종(孝宗) 9년에 중국(中國 청(淸) 나라)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그리고 조선 군대의 이동경로를
보면,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이 기록의 달과 날짜를 기점으로 러시아에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6∼7월 이므로 고문헌의 기록들이 음력에 의한 기록일지라도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 지역의 백야현상을 생생히 목격했고,"신당서(新唐書)"라는 고문헌등과 목격한 기록등을
통해서 백야현상에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것입니다. 위의 기록처럼 백야현상 말고도 이들이 살았던 지역인 흑룡강 일대에 관련된 다른 기록들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권58 필기류,난실담총(筆記類,蘭室譚叢)
淸國徵我兵。助攻車漢賊。車漢者羅禪也。按羅禪卽鄂羅斯地。在極北。秦漢之間。服屬㐫奴。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點戛斯.......骨利幹等國。元時阿羅思及吉利吉思.......淸順治初。其衆曰羅刹。竊據黑龍江雅克薩之地。築城居之。......."
(청나라에서 조선병력을 징발해서 차한공격을 돕게 했다. 차한이라는 것은 라선이다.살펴보건데,라선은 즉 악라사이다.진나라 한나라 연간에 (차한은)흉노에 복속되었고,한나라때 견곤,정령이다. 당나라때 힐알사 이다.
골리간등의 나라가 있다. 원나라때 아라사,길리길사였다. 청나라 순치초에 그 무리들을 나찰이라 일컬었다. 흑룡강 아극살의 땅에서 성곽을 지어 노략질하며 살았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집(續集) 제15권 지리고(地理考) 15 산수(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대청일통지" 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흑룡강원(黑龍江源)
"백두산(白頭山)에 서북으로 흐르는 물이 혼동강(混同江)이고, 그것이 흑룡강(黑龍江)으로 들어간다. 흑룡강은 멀리 국경 밖에서 흘러 내려오기 때문에 그 근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그 물은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왕기(王圻)의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사막의 지역은 중국 서북에서 시작되어 동북쪽으로 비스듬히 뻗쳐나갔다. 이는 분명히 옛적에 황하(黃河)가 흐르던 길이다. 사막 밖에 있는 여러 물이 합류되어 서쪽에서 동으로 쏟아지는데, 그 가장 멀리 흐르는 것은 아로찰리(阿魯札里) 지역에서 장청(長淸)과 새남(塞南)을 경유하여 북두(北斗) 밖으로 나타나는데, 이것도 동쪽으로 쏟아지니, 그 물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흑룡강의 근원일 것이다. 또 《외이고(外夷考)》에는, “유주(幽州) 북쪽 7백 리에 유관(渝關)이 있고 그 아래에 유수(渝水)가 있는데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하였다. 백두산 북쪽의 여러 물은 다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옹주(雍洲)에 유엽하(楡葉河)가 있는데 그 물을 건너면 다리가 검게 물든다. 유수도 물수변[氵]에 썼으나 이것은 유엽(楡葉)의 물이 밴다는 뜻에서 생긴 명칭일 것이니, 역시 흑룡강의 상류일 것이다. 이 물이 바다와 가까워지는 지역은 옛날 실위족(室韋族)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왈개(曰介)ㆍ거한(車漢) 등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거한을 곧 신류(申瀏)가 가서 토벌했던 곳이니, 그의 부장(副將)이었던 배시황(裵是榥)의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대체로 곤륜산(崑崙山) 동쪽의 물들은 모두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니 따라서 그 산세도 알 수 있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의 기록을 보면 러시아 민족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인 흑룡강 아극살(雅克薩)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의 기록을 보면 이 지역의 현황에 대해 기록하고하고 있는데,과거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던 아극살성(雅克薩城)지역이 흑룡강이 있던 지역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 상고대의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실위(室韋)가 있었으며 역사상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인 혼동강(混同江)이 이지역과 관련이 있었으며, 이 지역 일대에서
몽고의 징기스칸이 황제로 등극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성호사설에서는 감숙지역의 곤륜산과 옹주(雍洲)에 유엽하(楡葉河)와 흑룡강과의 관계에 대해 기록했으며 조선의 장군인 신류(申瀏)가 가서 토벌한 지역은 차한(車漢)지역이고
이 지역은 백야현상이 있는 지역 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백야현상이 완연하게 나타나는 지역은 북극지역으로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 [ Sankt Peterburg ]와 스웨덴 등등의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을 기점으로 보면,
위의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인 (唐書回紇傳曰。瀚海之北。骨利幹之地。=당서 회골전에서 말하길,한해의 북쪽에 골리간의 땅이 있다.)를 보면,역사상에 전하는 한해(瀚海)가 사막이라는 주장과 기록등이 있지만 흑룡강의 상류지역에서
백야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과 신당서의 기록인 한해 북쪽에 흑룡강 상류에 살고 있는 골리간이 있으므로 이를 근거로 보면 역사상의 한해(瀚海)는 진짜 바다를 의미하는 기록이며 역사상의 진실된 한해(瀚海)는 내륙의 바다인 오늘날의
흑해 또는 카스피해로 봅니다. 그리고 흑룡강과 연관된 지역이 총령(蔥嶺)인데,역사상의 총령(蔥嶺)은 유럽지역의 카프카스 산맥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지역이 감숙지역이었던 겁니다. 이 지역에서 고대의 숙신민족이
있었으며 실위(室韋)가 존재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당나라때의 흑수 말갈,여진이 있었으며 고려때 철륵의 군사를 징발한 지역 또한 이 지역이었던 겁니다. 역사상에 관련된 모든 흑수,흑룡강,감숙성,총령,곤륜산,여진,말갈,숙신,실위등과
관련된 지역이 바로 이 지역이므로 이 지역을 기점으로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