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평택의 한 가구의 한 가구 전시장에서 불이 났다.
불길이 너무 거세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소나무 이재만과 한상윤은 동료를 먼저 내보내고 진화 작업을 계속했다.
마지막으로 나오던 그들 머리 위로 천장이 무너져매렸고 둘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서른한 살 한상윤은 네 살배기 쌍둥이 아들과 임신 중인 아내를 남겼다.
화재가 난 그날 소방서엔 캠핑용 테이블이 배달됐다.
그가 휴일에 아들과 캠핑 가려고 주문한 것이었다.
'1층에 우리 아들이 있어요!'
2001년 서울 홍제동 주택 화재 현장에서 할머니가 소방관들에게 외쳤다.
불길이 잡히지 않아 위험한 걸 뻔히 알면서도 소방관들은 외면하지 못했다.
공기 호흡기와 손도끼만 든 채 로프로 서로 묶고 자욱한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가 2층이 무너져내렸고 소방관 여섯이 숨졌다.
그중 한 명의 책상엔 미국 어느 소방관이 썼다는 '소방관의 기도'가 놓여 있었다.
'신이여 제가 부름을 받을 때는/ 아무리 강력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미국 테러 당시 테러 현장에서 정신없이 도망쳐 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무너지는 빌딩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방관들이었다.
'왜 가느냐'는 물음에 어느 소방관은 '내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방관 347명이 순직했다.
동일본 대지진 참사 때 방사선 피폭 위험을 무릎쓰고 '사용 후 핵연료' 냉각 작업을 벌인 것도 소방관들이었다.
남들이 살려고 빠져나올 때 소방관들은 사명감 하나로 죽음의 지옥으로 뛰어든다.
한상윤 소방관 봉급은 기본급 180만원에 수당 13만원이 전부였다.
그렇게 제 목숨 바친 사람이 해방 이후 356명이다.
다친 사람은 지난 10년 동안만 3391명이라고 한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다.
존중이라도 받아야 할 텐데 요즘엔 벌집 떼어주고, 미친개 잡아주는 허드렛일까지 파김치 되기 일쑤다.
그런 소방관들이 지난 5일 환호했다고 한다.
국민안전처에서 소방청을 독립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1975년 소방국(내무부 소속)에서 출발한 이래 늘 곁방 신세였다.
소방본부 관계자는 '지난 42년 동안 제복을 입은 공무원 중 독립 조직이 없던 것은 우리뿐이었다.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사이렌 울리며 달려가는 소방차를 보고 '국가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소방관 여러분,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최원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