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심부름이나 하던 최순실, 국정 농단하고 부정한 富도 챙겨 그녀의 딸은 대학에 부정 입학 올해 박정희 대통령 탄생 99주년… 부친 무덤 구린내로 안 덮으려면 깊이 뉘우치고 애국의 길 고심을
1979년 10월 27일의 일이다. 한 방송사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추모 대담을 마련했다. 이선근(李瑄根)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만 수락했을 뿐 다른 인사들이 한사코 출연을 꺼렸다. 시인부터 교육자까지 대통령 '덕'을 봤던 이들의 태도가 대통령이 서거한 지 채 12시간도 안 돼 변했다. 인심이란 이렇게 부박(浮薄)하다.
겨우 구한 대담자가 송지영(宋志英) 선생이었다. 그는 죽은 대통령에게서 후의(厚意)는커녕 핍박만 받았다. 민족일보 사건에 연루된 그는 5·16 후 설치된 혁명재판소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8년을 보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이는 "지식인의 얄팍함, 하루도 안 돼 변하는 비겁함에 너무 실망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지만 자녀에게 천금 같은 교훈을 줬다. 지식인·관료·정치인들의 변절과 보신과 표변(豹變)을 보게 했고, 소수 측근에게만 의존하면 어떤 결과를 맞는지도 이보다 더 정확히 보여줄 수 없었다. 세 자녀는 그런 걸 못 깨닫고 측근과 우군(友軍)의 '배신'에만 치를 떨 뿐이었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人間事)이다.' '자기를 은혜로이 돌보았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하여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 또 그러한 사람들이 영웅시되는 사회는 도덕이 바로 설 수가 없다.'
이 두 문장은 박근혜 대통령이 1981년 2월과 3월 자신의 일기(日記)에 써놓은 것이다. 문장만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을 철저히 경계하고 '언제 돌변해 총을 겨눌지, 욕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도시'를 만들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한 듯하다. 그런데 그가 만든 세상은 정반대였다.
7인회의 좌장 김용환(金龍煥)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이 당선인이던 시절 강남의 한 호텔에 2페이지짜리 건의서를 들고 갔다. "이제 최태민의 그림자를 지우셔야…"라고 말하는 순간 대통령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런 말씀 하시려고 저를 지지하셨나요?" 노신(老臣)은 충언을 다 말해보지도 못하고 최후의 독대를 끝냈다.
이선근 박사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2012년 12월 21일 세상을 떴다. 105세의 병든 몸으로 죽기 이틀 전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 표를 보탠 김 여사는 그의 당선 소식에 "정말 잘됐네요"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김 여사를 문병(問病)한 일도, 위로의 전화 한 통 한 적도 없었다. 박 대통령은 이렇게 자신의 지지자들을 떠나보냈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가난한 나라를 일으켜 세운 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부모에 대한 국민의 '보답 심리'와 '결혼도 않고 아이도 없는' 대통령이 최소한 비리는 안 저지를 것이라는 믿음 외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런 국민의 신뢰를 대통령은 최태민·순실 부녀에게 의존해 국정을 농단하는 것으로 깨버렸다.
대통령 곁에서 심부름 하던 부녀가 권세를 등에 업고 부정한 부(富)를 챙긴 것도 모자라 국정을 농단하고, 국민의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밥그릇'을 말발굽으로 걷어찼다. 못된 손녀도 대학 입시에서 이 조롱을 거들었다. 이게 바로 최태민·최순실·정유라 스캔들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악질 3대가 '나빴다'는 말을 아직 꺼내지 않고 있다.
'월간조선'은 내년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 8일 '시민 강좌' 첫 회를 열었다. 450여
명이 참석했는데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반대자들에게 말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자기 사후(死後)에도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그리하라는 얘기였다." 강좌 며칠 뒤인 14일은 박정희 탄생 99주년이었다. 이런 잔칫상을 딸이 말똥 구린내로 뒤덮었으니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다. 깊이 뉘우치고 나라를 위하는 길을 고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