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이 외롭지 않은 만종역 / 이종영
단풍의 기적 너머로
가을을 업고 찾아온 만종
네온사인 번지는 도심 화장기 지우고
산야의 속살 적시는 저 오묘한 빛
오직 자연만이 빚어낼 수 있는 채색이다
만종, 그 이름마저 정겨워
천천히 다시 불러본다
비로봉 우러르던 망종(望宗)의 마음
세월의 모서리 닳고 닮아
이제는 순한 만종(萬鍾)으로 머문다
역사(驛舍) 곁 코스모스 물결 따라
시(詩)가 피어나고 노래가 열린다
벽화 속 기차는 어느새 은하수를 달리고
비어있어 비로소 가득 찬 간이역
오늘, 나의 가을은 결코 외롭지 않다.
소멸의 시간에서 피어난 영원한 서정
— 이종영의 시 ‘이 가을이 외롭지 않은 만종역’
1. 산문의 기록에서 운문의 기억으로
이 시는 과거 만종역에 대한 사실적 기록(산문)을 시적 변용을 통해 기억의 예술로 승화시킨 秀作이다. 한때 화물 수송의 중심지이자 북적였던 간이역이 이제는 열차가 멈추지 않는 '무정차 역'이 되었다는 상실의 서사를, 시인은 '외롭지 않음'이라는 역설적 긍정으로 치환해냈다. 산문에서 언급된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은 시의 행간 속으로 녹아들어, 독자로 하여금 풍경 너머의 본질을 바라보게 했다.
2. 색채와 빛의 미학: 인위(人爲)를 지우는 자연(自然)
첫 연에서 시인은 도심의 '네온사인'과 '화장기'를 지워냈다. 이는 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 본연의 자아를 찾으려는 시적 의지의 표명으로 보인다.
“오직 자연만이 빚어낼 수 있는 채색이다”
라는 구절은 산야의 속살을 적시는 오묘한 빛을 통해, 만종역이 단순히 버려진 공간이 아니라 대자연의 생명력이 회복된 성소(聖所)임을 강조한다. 단풍의 기적 소리를 듣는 시각의 청각화는 이 시의 감각적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3. 어원적 성찰: 망종(望宗)에서 만종(萬鍾)으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역 이름에 담긴 중의적 의미를 성찰하는 2연이다. 비로봉을 우러르던 ‘망종(望宗)’의 마음이 세월의 모서리를 깎아내며 ‘순한 만종(萬鍾)’으로 머문다는 표현은 놀라운 철학적 통찰을 보여준다.
*望宗:무언가를 갈구하고 바라보던 젊은 날의 집착과 열정
*萬鐘: 세월에 마모되어 둘글어진, 모든 것을 품어 안는 넉넉함
이는 역의 역사를 인간의 삶에 투영하여, 쇠락을 몰락이 아닌 '완숙'의 과정으로 재해석한 지점이다.
4.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간이역의 역설
마지막 연에서 만종역은 시와 노래가 피어나는 문화적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벽화 속 기차가 은하수를 달린다는 표현은 물리적 단절을 넘어선 초월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비어있어 비로소 가득 찬 간이역”
이 구절은 이 시의 핵심적인 시안(詩眼)이다. 열차가 서지 않아 비어있는 역이지만, 그 빈자리를 코스모스 물결과 시적 영감이 가득 채우고 있기에 시인의 가을은 결코 외롭지 않다.
결국, 이종영의 ‘이 가을이 외롭지 않은 만종역’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이자,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 서정시의 정수로 평가한다. 10년 전의 기록이 시인의 눈을 통해 오늘의 영원이 되었듯, 이 시는 독자들에게 ‘멈춰선 것들’이 가진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격조 있는 시어와 깊은 성찰이 어우러져 간이역의 정취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린 명편이다.禹
첫댓글 감사합니다 교수님
ㅎ
다음 작업이 기대 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