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민중개’ 그 산모롱길
2019.12.26.
석야 신웅순
나는 서천군 기산면 산정리 181번지에서 태어났다. 51년 신묘생 토끼띠이다. 며칠 남지 않은 내년이면 고희로 접어든다. 예까지 내가 어떻게 왔는지 정말 잘 모르겠다.
나는 시인이 되리라고 학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공부하고 싶어 그 길을 지금까지 걸어왔을 뿐이다. 걸어오면서 시인의 꿈도 꾸었고 서예가의 꿈도 꾸었다. 그래서 시인이 되었고 서예가가 되었다.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화가였다. 어렸을 때부터 꾸어왔던 꿈이었으나 결국은 이루지 못했다.
시서화. 굳이 라이센스가 필요없을 것 같다. 시를 쓰면 시인이요, 글씨를 쓰면 서예가요, 그림을 그리면 화가가 아닌가. 이를 일찍 깨달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 자체를 즐겼을 것이다.
어차피 이리 되었으니 즐기면서 가리다. 그림이야 오래 전에 잠깐 손을 댄 적이 있어 이를 밑천 삼아 이제부터 시서에 과객으로 참여시키기로 했다.
외로움은 한평생 불빛을 따라 다닌다
밤길
잘못 들어
잠깐
놓쳤나보다
산마루 어디쯤였을까
새벽까지 울었을 첫정
- 신웅순의 「아내 22」
- 신웅순의 「아내 22」종장
산마루는 내 고향 마을 민중개 산모롱이가 있는 조그마한 산, 바위 고개이다. 어떻게 해서 민중개라는 이름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이 동구 밖 산모롱이를 민중개라 불렀다. 거기에는 그 옛날 가난한 작은 오두막집에 유식했던 차씨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분은 언제나 술에 취해있었고 아깝게도 술로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거기를 거쳐갈 때면 그 가난했던 차씨가 생각나는, 그 집터를 꼭 거쳐가야만 하는 조금은 울적한 곳이기도 하다. 작은 둑길 건너 논길로 조금 더 걸어가면 높은 논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조금 넓은 강가의 밭둑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로 어머니는 깻잎을 자주 따러갔었다. 나와 집으로 돌아올 때면 먼 희리산 서쪽에 초승달이 뜨곤 했다. 지금은 경지 정리로 사라졌으나 나는 옛날 촉촉한 그 논길을 잊을 수가 없다. 들을 바라보고 있는 그 바위 고개, 산마루는 의연한 채 옛날 그대로였다. 어렸을 적 울적할 때마다 나는 그 바위고개를 오르내리곤 했다.
아버지가 장에서 돌아오실 때면 등불을 들고 마중을 나갔던 곳이, 내가 고향을 떠날 때 어머니, 아버지가 잘 가라 손짓해주었던 곳이 바로 그 민중개 산모롱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영원히 이별했던 곳도 거기였고 내 누이동생이 고향 집을 떠날 때도 거기에서 작별했다. 언제나 만나고 이별했던 그 작은 산모롱길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의 혈육의 정이 영원히 묻어있는 그리운 곳, 회자정리 거자필반이었던 우리 인생의 산모롱길이었다.
그 곳을 생각하며「아내 22」를 썼다. 내 아이들은 내 곁을 떠나 새 둥지를 틀었다. 아이들이야 그 민중개를 어찌 알랴마는 아비의 혈육이 묻어있는 그 곳을 이 네모진 원고지에다 어찌 내 인생의 낙묵을 찍지 않을 수 없을 것인가.
나는 이홍렬이 작사, 작곡한 ‘바위고개’라는 가곡을 유난히도 좋아한다. 그 가곡을 들을 때면 고향 생각이 나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우리 집에서 머슴을 살았던 이웃동네 그 어리뜩한 젊은 머슴도 생각나고, 나하고 유난히 친했던 이름은 잊었지만 항상 웃어주는 키가 작은 머슴도 생각난다. 그 분들은 지금 어디 가서 무엇하며 살고 있을까. 내 외사촌 형도 집을 나가 전라도 오지 그 어디선가에서 머슴을 살아 새경도 제대로 못받고 외가인 우리집으로 몇 년만에 돌아왔던, 외삼촌인 내 아버지가 그 조카를 무던히도 기다리며 매일 매일 눈이 갔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럴까 나는 ‘번지없는 주막’과 ‘나그네 설움’이라는 트롯트 유행가를 좋아한다. 나는 어떤 노래보다도 이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부른다. 이 역시 그 때 그 생각이 나서일까 아무 뜻도 모르고 초등학교를 오가며 불렀던 노래들이라서 그런 것인가.
하늘이 낮다. 12월도 다 가는데 아직도 첫눈을 보지 못했다. 세월도 밤길 잘 못 들어 잠깐 길을 놓쳤나보다. 내 고향 민중개 그 산모롱길에서 새벽까지 울다 뒤늦게 되돌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눈 대신 비가 올 것 같다.
석야 신웅순의 서재 , 매월헌
첫댓글 너무 맑으시고 깨끗하셔서
전혀 고희를 맞는 모습이 아니신 교수님 글. . 또 잘 읽었습니다.
새해에도 더욱 건안히 좋은글과 작품 감상할 기회 주세요.^^*
잡글을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다만 살아가는 이야기를 쓸 뿐입니다.저는 사실 아는 것이 없어 무엇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암튼 읽어주시니 감사하기만 합니다.작은 것이라도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