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동혈
등산로 입구 언저리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노부부가 있다. 나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연배일성 싶은데 언제나 손을 마주잡고 느릿느릿 임도(林道)를 오간다. 처음엔 둘 중에 하나가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손을 꼭 쥐고 걷는 것으로 착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같은 출입구 길이라도 5백 미터(m)쯤 지나면서부터 그들은 임도, 나는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갈라지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었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들은 몇 년째 걷고 있는데 한 번도 손을 놓고 따로 걷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는 전언이다. 그처럼 금슬이 좋은 경우라면 백년해로를 거쳐 해로동혈(偕老同穴)을 꿈꾸지 않을까?
해로동혈을 직역하면 ‘함께 늙어(偕老) 같은 곳에 묻히다(同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부부가 평생을 함께하며 늙은 후에 죽어서도 같이 무덤에 묻힌다.’는 의미가 된다. 이의 유래는 중국의 ⟪시경(詩經)⟫이고 유의어로 백년해로(百年偕老), 금슬상화(琴瑟相和)가 있다. 그런데 해로(偕老)라는 말은 ⟪시경⟫의 ⟨격고(擊鼓)⟩라는 시에서, 동혈(同穴)은 ⟨대거(大車)*⟩라는 시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이들 둘을 합성해서 해로동혈(偕老同穴)이 생겨났다.
이 시들은 전장에 내몰린 젊은이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을 시로 읊은 내용이다. 시작은 있어도 끝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장수가 지시하는 대로 이 나라 저 나라 구석구석을 떠돌며 죽지 않으면 죽여야 하는 병사의 삭막한 심경을 곧이곧대로 읊은 노래이다. 절박해진 젊은이의 참담한 심정과 두고 온 아내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들 중에 먼저 ⟨격고⟩에서 나타난 해로이다.
/ 당신의 손을 꼭 쥐고(執子之手 : 지자지수) / 당신과 같이 늙어가고 싶소(與子偕老 : 여자해로) /
한편 살벌한 전쟁터에서 두려움과 절망 속에 이런저런 생각을 비롯해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본의 아니게 떨어져 지내는 처지이다. 그런 절절한 심정이었을까. 훗날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같이 무덤에 묻히고 싶다는 진솔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구절(句節)이 역시 ⟪시경⟫ 속에 담겨있는 시인 ⟨대거⟩에 이렇게 등장한다.
/ 이승에서 사는 곳이 다를지라도(穀則異室 : 곡직이실) / 사후엔 같은 무덤에 묻히고 싶어라(死則同穴 : 사즉동혈) /
위의 두 시(詩)에서 나타난 해로와 동혈에서 해로동혈이 생겨났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참혹함과 비정한 흔적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나 보다. 때문에 전쟁이 멈추고 꽤나 세월이 흘러도 비감(悲感)을 벗어날 수 없게 했나보다. 우리의 6.25전쟁이 멈추고 한참 세월이 자난 뒤에 38선 부근에 배치 받았던 젊은 소대장(韓明熙)이 묘사했던 처연한 풍경의 묘사 내용으로 널리 알려진 ⟨비목(碑木)⟩이라는 노래 가사 일부이다.
/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 깊은 계곡 양지 녘에 /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 이름 모를 비목이여 / 먼 고향 초동(樵童)친구 두고 온 하늘가 /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
가끔 텔레비전에서 노인들이 출연하는 경우에 듣는 말 중에 하나이다. 사회자가 장난삼아 묻는 내용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할아버지(혹은 할머니)와 결혼하겠느냐.”고. 부부가 모두 “예(Yes)”라고 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런 생각이 진실이라면 훗날 죽음을 맞이했을 때 부부가 같은 묘에 묻히는 해로동혈을 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어느 가수(하수영)가 부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정도를 진정으로 부르는 마음이 되어야 해로동혈을 꿈꾸지 않을까. 왜냐하면 노래의 후렴구에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라는 내용은 끔찍이도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을 더덜이 없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 본 순간 /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 온 나날들 /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결국 해로동혈은 ‘부부의 검은머리가 파 뿌리처럼 하얗게 될 때까지 살다가 죽음을 맞이해 같은 무덤에 묻힌다.’는 의미를 초월해 부부의 진정한 믿음과 끝없는 애정을 에둘러 나타내는 말로 정의함이 옳다. 앞에서 얘기했던 두 시에서 전쟁에 징발된 젊은 병사가 내일을 담보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에서 고향에 돌아갈 희망이 없는 서럽고 안타까운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아울러 고향에 두고 온 아내에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훗날까지 해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면 같은 무덤에 묻히고 싶다는 절절한 애정을 피력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부부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내의 의중부터 슬며시 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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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거(大車) : 큰 수레
한국수필, 2024년 10월호(통권 356호), 2024년 10월 1일
(2024년 2월 5일 월요)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