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에 앉아 느긋하게 녹차 직접 우릴 수 있어
드넓은 차밭 풍광…초여름에 여행하기 좋아
주변에 소설 ‘토지’ 배경인 ‘화사별서’ 가볼만
패러글라이딩 명소 ‘구재봉 활공장’ 노을 장관
경남 하동군 악양면 매암제다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차밭. 차밭을 거닐 수도 있고, 쉼터에서 차를 즐기며 경치를 구경할 수도 있다.
‘일상다반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다’는 많음(多)이 아니라 ‘차(茶)’를 뜻한다. 반(飯)은 밥을 의미하는 한자다. 그만큼 우리네 선조가 차를 밥 먹듯 자주 마셨다는 얘기다.
신록의 땅에서 봄이 여름에게 작별을 고하는 5월말이다. 녹차의 본고장 경남 하동을 가기 딱 좋은 시기다. 마을 곳곳 산과 들에 드넓게 자리 잡은 차밭에 햇살이 반사되면서 생명의 기운 가득한 녹색이 온 세상을 물들일 태세다. 바닷물과 민물이 교류하는 하동의 섬진강은 귀하디 귀한 재첩을 식탁에 내놓을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KTX를 타고 전남 구례구역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하동 악양면에 있는 ‘매암제다원’으로 향했다. 역에서도 멀지 않거니와 녹차밭을 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 첫 기착지로 삼았다. 옥토 2만1120㎡(6390평)에 녹색 향연이 펼쳐지니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포근함이 이내 낯선 이방인을 맞이한다.
매암제다원 옆에 위치한 매암차문화박물관에서 바라본 차밭. 전통적인 느낌이 물씬 나 인생 사진을 찍기 좋다.
차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한갓진 곳에 짐을 풀고 안채에서 녹차를 주문했다. 마음씨 따뜻해 보이는 주인장이 다기와 찻잎, 그리고 뜨거운 물을 담을 보온병을 내어준다. ‘빨리빨리’를 하루 철학으로 신봉하는 도시인에게 ‘느림’은 퇴화한 흔적기관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찻잎이 들어간 다관에 물을 붓는다. 그다음 물을 식힐 숙우에 잘 우려낸 녹차를 담는다.
1∼2분 정도 기다리고서 찻잔에 담아 스르릅 하고 한모금 들이켰다. 어린아이 살갗 향 같은 감미로움에 절로 눈이 감긴다. 바람이 부는 속도, 구름이 지나가는 속도만큼 호흡도 느긋해진다. 버성겼던 자연과 사람 사이가 오로지 찻잔 하나만 놓일 정도로 가까워지는 곳이다.
“하동은 우리나라 차 시배지예요. 역사는 금관가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수로와 혼인한 허 황후가 자신의 고향 인도에서 차 종자를 가져오면서 자연스레 귀족 사이에 차문화가 퍼졌을 겁니다. 김수로의 일곱 아들이 성불했다는 칠불사가 하동에 있으니 차문화가 발달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겠죠.”
하동야생차박물관에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김명애 다례 강사의 말이다. 하동 차를 예찬했던 초의 선사, 그리고 추사 김정희의 차로 맺어진 우정에도 관심이 간다. 정쟁에 휘말려 제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제주도로 유배 간 김정희에게 초의 선사는 차를 배편으로 보내기도 하고 직접 제주도를 찾아 건네기도 했다. 인간사 부침이 있을지언정 벗이 보내는 차향과 맛은 한결같았으리라. 몸은 외딴섬에 묶여 있었지만 작은 찻잔 속 웅대한 세상과 교류하는 것에서 위로를 얻었을 추사의 마음이 하동 차밭에서 새삼 와닿는다.
정서리에 있는 화사별서.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으로 실제 사람이 살고 있다.
하동은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혹자는 ‘최 참판 댁’이 소설 배경이라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여기는 군이 소설과 연계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고 2001년 준공했는데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촬영하기도 했다.
소설의 진짜 배경이 궁금하다면 정서리 ‘화사별서’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조선 개국공신 영의정 조준의 후손 조재희(1861∼1941년)가 조성했다. 200㎡(60평)에 이르는 수려한 방지(네모반듯한 연못)를 보면 한때 이곳 가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화사별서를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조덕상씨(60)의 증언에 신뢰가 간다. “실제 소설 속 주인공 가운데 우리 집안 사람 이야기를 차용한 사례가 꽤 됩니다. ‘길상(<토지> 등장인물)’이란 친척도 있었고요. 우리 당숙 고모는 박경리 작가와 진주여자고등학교 동창으로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하동의 일몰을 만끽하기 좋은 구재봉 활공장. 악양면 일대 논과 밭, 섬진강, 그리고 이를 둘러싼 지리산이 장관을 이룬다.
아기자기한 하동을 충분히 즐겼다면 다음엔 좀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해 질 시간을 미리 확인한 후 축지리 ‘구재봉 활공장’으로 떠나보자. 이곳 봉우리는 맞바람이 불면 패러글라이딩 이륙장으로 쓰인다. 해발 650m인 봉우리에서 바라보는 해넘이 광경이 보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태곳적 순수함을 간직한 지리산, 물 댄 논에 오롯이 담긴 일몰의 붉은 눈동자, 풍류를 노래하며 느릿느릿 바다로 향하는 섬진강이 형용할 수 없는 자태를 완성한다.
해거름이 끝날 때쯤 박경리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땅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생각한다. 과거 누군가는 지주의 집에서 태어나 마름을 부렸고, 그 마름의 자식은 또 아비가 소작농이었던 소작농을 부렸을 터. 태어날 때부터 빈부격차라는 굴레를 짊어져야 하는 일은 지금도 반복되건만 불변하는 진리 앞에 그 부조리함은 결국 소멸한다. 부요하든 가난하든 만인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소유냐 존재냐의 갈림길에서 늘 방황하는 게 아니겠는가.
하동=이문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