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대목을비롯한 많은 장인들의 체취가 베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들에게 가슴이 확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앞으로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사찰을 보려면 먼저 건물들이 놓인 터와 그 주변의 산세를 살펴보는 게 순서이다.
놓일 자리에 따라 건물의 조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국(局)이 넓은 땅에서는 건물을 비교적 넓게 배치하되 높은 건물을 정점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국이 좁고 가파른 땅에서는 높은 석축과 건물을 잘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공간 배치를 하였다.
부석사의 경우는 물론 후자에 속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곳은 봉황산 중턱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가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루었다.
부석사가 위치한 봉황산은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국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석양이 뉘엿거릴 무렵 안양루 쪽에서 멀리 도솔봉 쪽을 바라보면 펼쳐 있는 산맥의 연봉들이 장관을 이룬다.
초점이 되는 도솔봉 오른쪽으로는 아스라이 죽령이 보인다. 가히 대단한 경승지라 할 수 있다.
도착하니 벌써 해가 뉘엇뉘엇 저물어가고 주차장은 한적하기만 하다.
일주문을 향하는 이 길은 가을 정취가 뛰어나다고 하지만 고느넉한 향취는 지금이 더 좋은것 같은데...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8m 이다.
이 석축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이다.
물론 석축의 목적은 사찰을 짓기 위한 땅다짐에 있지만 석축 돌계단 그 자체에도 상징 하는바가 있다.
즉, 극락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한 것이다.
천왕문에서 요사체로 오르는 세 계단이 하품단이며,
여기서 다시 세 계단 오른 범종루까지가 중품단,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지나
무량수전 앞 마당에 다다르는데, 마지막 계단으로 상품단이다.
이렇게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반듯하게 다듬은 규격화된 돌들로 석축을 쌓지 않고,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맞추어 쌓았다 는 것이다.
둥글든 모났든 크든 작든 돌들의 본래 모양새와 개성을 버리지 않고도 조화롭고 짜임새 있으며
견고한 석축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부석사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130호)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건실하고도 장쾌한 느낌이 든다.
일주문을 거쳐 천왕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 몰아쉬는 숨을 들이키면 범종루가 눈앞에 들어온다.
이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반기고 서 있다.
이 탑은 원래 부석사 동쪽 일명사터에 있던 것을 1966년 경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석사의 경관을 흐트리지않고 잘 조화되어 있다.
탑은 지석대 위에 상·하층 기단을 쌓고 우주와 탱주를 각각 새겨 격식을 갖추고 있다.
또,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 5층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분안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안양루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2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석등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景文王代(861~874)로서,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무대가 됨에 따라,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石龍, 長臺石,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안양루 추녀끝에서 점차 멀어지는 해가 그저 아쉽기만하다.
부석이라는 절 이름은 가람이 들어설 터에 잡귀들이 패악을 부리며 방해하자,
대사를 흠모하다가 용으로 변한 선묘가 다시 커다란 돌로 화하여 이들을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묘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의상 대사를 한 인간으로 연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이 영원히 깃든 이름이다.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8매석으로 짜였고
중석 각 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5단이고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었다.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 있다.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 . "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 눈이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없이 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창작과 비평사))
" . . .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 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공장(工匠)의 체취가 배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되는 요소들이다. . .
산지나 구릉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종심형(縱心型)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심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가의 위계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있다.
소위 기승전결의 구성인데 부석사도 예외가 아니다.
사찰 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起)라면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인 승(承)에 해당되고
여기서 축이 꺾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轉)의 공간이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이므로 결(結)이라 할 수 있다. . .
"(배병선 外, <부석사>(대원사:빛깔있는 책들 시리즈)
" . . . 부석사는 창건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여건 속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을 뿐 아니라,
해동 화엄종의 최고 사찰이라는 종교적 중요성도 갖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희귀한 고려시대의 목조건축을 두 채씩이나 가지고 있다는
희소성과 함께, 터를 고르고 정리하는 안목부터 거대한 자연에 대응하여 종교적인 감동의 장소를
구현한 건축적인 구성의 뛰어남일 것이다. . .
구성의 기법 가운데 큰 특징들로는 '대지 전체가 여러 단의 석단으로 나뉘어 구축되었다.
범종각까지의 구성축과 무량수전의 축이 분리 굴절되어 있다.
무량수전을 비롯한 여러 구성요소에서 치밀한 시각적 조정이 이루어져 있다'는 점들이다.
이 특징적 기법들은 각각 교리적인 이유와 지형적 해석, 그리고 부석사 자체의 건축적 개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김봉렬, '건축의 계획과정: 부석사'(월간 <이상건축> 9511:"한국 고전 속의 건축 이론" 시리즈 1)
" . . . 무량수전은 13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정사 극락전의 건립 연대가 13세기초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한국 최초의 목조건축'으로 암기해야 했던 건물이다. . .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목수들이 창조하였던 목구조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표작이다.
그 기법들은 조선시대에도 전승되어 한국 목구조기술의 정수를 이루어왔다.
그 가운데서 눈여겨볼 것은 기둥의 안쏠림, 배흘림과 귀솟음, 평면의 안허리곡, 그리고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 등이다.
이들은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금새 발견하기 어렵고, 매우 섬세한 기술이 요구되는 기법들이다.
이 기법들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무량수전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창조되는 것이다. . . "
(김봉렬, '건축의 계획과정: 부석사'(월간 <이상건축> 9511:"한국 고전 속의 건축 이론" 시리즈 1)
무량수전은. . .
" . .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 .
"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서서><최순우전집>)
무량수전 앞 석등과 안양문
조사당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어느덧 산사의 저녘 공양 시간이 되고 법고, 목어, 범종을 차례로 ....
이 모든것을 보고 느끼는 지금 이 시간
그저 아쉬운 행복만 담아갑니다.
|
첫댓글 행복하게 잘 보았습니다..음악도 좋고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부석사의 기를 받으시고, 올 한해도 행복하십시요.
저도 가보았는데 옛모습이 그대로 ....
마음으로 전해오는 느낌입니다.^^
새롭게 느껴지네요 ㄳㄳㄳ 저는 소수서원 근처에서 생활하지만 여기서 부석사 감상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