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찬송가 455장 (구 507장) / 갈라디아서 3 : 23 - 29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찬송가 455장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 하나님 말씀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 – 29절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멘!
어느 여자중학교의 여자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자신의 엄마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을 조사했더니, 자신의 엄마처럼 되겠다고 한 여자아이는 전 학년에 두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조사보고를 들은 엄마들이 다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 이처럼 딸아이들이 엄마처럼 되는 것을 싫어했을까요? 엄마들이 그렇게나 사랑하고, 잘 되기를 위하여 모든 희생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딸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인기가 없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엄마들의 잔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잔소리를 들으며 자라게 됩니다. 정도가 너무 심한 잔소리는 문제가 있지만, 잔소리를 너무 듣지 않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의 된 단계에서 많은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지혜로운 왕인 솔로몬의 잔소리를 잠언이란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에게는 회초리가 있어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 밑에서 양육 받아야 할 단계에선 회초리도 필요하고, 잔소리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같은 훈육 밑에서 아이들은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갖춰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 없이 자란 사람' 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의 뜻은 '그는 참으로 독립성이 강한 사람'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버릇없고 예의가 없는 사람'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어린 시절 훈육 없이 자라게 되면, 버릇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는 데 있어선 두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하나는 부모님의 슬하에서 배우고 훈련받는 단계이고, 다음단계는 이제 성장하여, 부모님의 슬하에서 떠나 독립하는 단계입니다. 사람이 자라는 데 이 두 단계, 즉 훈육이 있는 시절을 거쳐, 독립적인 시절로 가는 것처럼, 우리들의 영적여행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두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하나는 율법의 단계고, 또 하나는 약속과 복음의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들이 율법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약속의 체험에 도달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둘 중 하나만을 원함으로써 그 둘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모세를 거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갈려고 합니다. 그들은 율법에 의한 정죄의 고통의 선행 없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의롭다 하심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구약을 뛰어 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안에서 복음의 은총과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감히 상상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취급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모세와 율법 안에 나아가 정죄를 받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 불행한 굴레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구약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이란 고통스러운 멍에입니다. 짊어지기가 너무도 힘듭니다. 부모님의 훈육 밑에서 자라고, 그 다음에 책임적 존재로서 또 성숙한 어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 역시 이 두 단계, 즉 율법아래서 정죄 받는 단계와 복음 안에서 자유와 용서의 은총을 누리는 단계가 다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 두 단계, 즉 믿음이 오기 전의 모습과 믿음이 온 후의 모습을 비유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 23절 - 24절 말씀은 믿음이 오기 전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먼저 23절 말씀에서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오기 전의 우리의 모습은 율법이라는 감옥 속에 단단히 갇혀 있었던 죄수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오기 전까지는 오직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멀리 바라보며 살았을 뿐이라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24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오기전의 우리 인간의 모습은 몽학선생 아래에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고대 헬라, 로마시대에 유력한 가문에서는 아이를 돌보고 인도하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집 아이가 7살부터 17살 될 때까지 아이의 외적 행동을 지도하며, 또 길을 다닐 때 보호하는 일 따위를 하였습니다. 이 몽학선생님은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 임무는 소년들의 행동전반을 감독하고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그림들을 보면 이들은 언제나 회초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주 엄격하게 아이들을 지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율법이라는 몽학선생님 밑에 있었다는 것을 무엇을 뜻합니까? '믿음이 오기 전까지' 즉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율법은 우리를 죄인처럼 감시하고, 우리의 죄와 습관과 어리석음을 꾸짖고 처벌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영구히 그런 상태로 우리를 하나님께서 놓아두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이 오기 전까지'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즉, 율법의 억압하는 역사는 일시적인 것이며, 그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를 저주하고 상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풀어 놓아 자유하게 하기 전까지만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또 우리를 참 스승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녀로 삼으실 때까지, 개인교사로서 율법아래 두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본 본문 25절 - 29절 말씀에서는 믿음이 온 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죄수처럼 갇혀 있었던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엄청난 신분의 상승입니다. 죄수가 만왕의 왕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수에 비하여, 왕의 아들이 되므로 인하여 누리게 되는 그 특권이란 것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는 자유입니다. 죄수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늘 따라 다니는 감시자가 있고, 정해진 곳 외에는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릅니다. 자유가 있습니다.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하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가능한 모든 힘을 다하여 도와줍니다. 갇혀 있고, 몽학선생님 밑에 있을 때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복음 안에서의 아들로서의 특권입니다.
믿음이 온 후, 세 번째로 나타나게 되는 특징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고 27절에서 말씀합니다. 로마사람들은 16세가 된 소년에게 성인이 되었다는 표시로 입혀 주었던 예복이 있었습니다. 성인으로서 한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로서의 신분을 상징하는 옷을 이제 성인이 된 아들에게 입혔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온 후에,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옷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혀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죄인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입고 있는 그 옷을 통해서 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한, 우리는 우주적으로 존귀한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으면, 안됩니다. 옷을 벗으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그대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온 후,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다 하나가 되었습니다.(28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민족적 차별이 없습니다. 신분상의 차별, 계급적인 차별이 없습니다. 성별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남녀평등의 세계가 된 것입니다. 요즘이야,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기에 그것이 그렇게 큰 선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사회에서 노예와 로마시민은 엄청난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로마시민과 노예가 한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함께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선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정말 별천지요, 천국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그 어떤 사람도 그가 가진 배경으로 인하여, 차별을 받아선 안 될 줄 압니다. 그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온 후,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29절)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음이 온 후, 누리게 되는 이 놀라운 축복은 미래로 계속하여 이어지게 됨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온 후, 우리들에게 온 하나님의 축복은 이 세상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오지 않은 약속의 유업,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 얼마나 다른 세상이 되었는지를 오늘 우리들은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 차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 보다 더 큰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율법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자유의 세계, 믿음의 세계, 은혜의 세계에 들어 왔으면,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은총을 입게 되었으며, 모든 신분상과 계급상의 민족으로 인한 차별도 철폐 되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것으로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으로 유산이 주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놀라운 믿음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 하나님의 은총에 언제나 감사할 수 있는 우리의 믿음세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으로 간구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