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麗蒙聯合軍의 日本遠征, 1274년)
대한민국에서는 원나라 (몽골)의 일본 원정 혹은 고려군의 중요성을 높게 사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원군침일전쟁(元軍侵日戰爭), 즉 원나라의 일본 침략 전쟁이라고 부른다. 혹은 원일 전쟁, 몽일 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1274년의 원정을 분에이의 역(文永の役, 문영의 역), 1281년의 원정은 코안의 역(弘安の役, 홍안의 역)이라 부르며 이때 쳐들어온 여몽 연합군을 원구(元寇), 몽구(蒙寇) 몽고? 라고 부른다.
그외 외국에서는 "몽골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른다. 이 당시 고려는 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최일선 교두보였으며, 원나라를 위해 준비해야 했던 막대한 함선 등에서 전쟁의 한 축을 또한 담당했다. 또 1차 원정군과 2차 동로군은 합포(마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여몽 연합군(혹은 여원 연합군)이란 표현을 쓸 수 있다. 고려를 독립국으로 볼 것이냐에 관하여는 여몽 관계 참조. 이와는 별개로 고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달가운 전쟁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몽골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 농경지나 도시의 복구에 쓰여야 했을 인적, 물적 자원이 전쟁용으로 돌려지면서 고려 말기를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들게 된다.
다만, 숫자와 전력상으로 보았을 때 주체는 몽골이 맞다. 1차 원정에서 몽골군은 2만 5천, 고려군은 1만 5천이었고, 2차 원정에서 강남군는 10만 명, 나머지 4만의 동로군은 몽골군 1만, 고려군 1만, 고려의 수부 1만 7천가 동원되었다. 한편 1차 원정에서 900척의 전선을 만드는데 4개월 동안 고려인 3만 5천 명이 동원되었다.
그림 왼쪽의 병사들이 고려군이라는 설이 있다. 그림에서는 잘렸지만 앞에서 싸우는 병사들 뒤쪽에 화살을 맞고 도망가는 병사들이 있는데 그 병사들의 복식이 몽골군 복식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오른쪽의 기마 무사가 몽고습래회사를 그리게 했다고 알려진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 원래 이 그림은 여몽 연합군의 화살과 포탄을 뚫고 돌격하는 스에나가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서는 말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어서 전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이 전쟁에서 죽지는 않았고, 꽤 장수했는지 1324년까지 생존한 게 확인되지만 정확한 몰년은 전해지지 않는다.
전체 그림을 보면 화살 맞고 도망가는 병사가 보인다. 이 병사들의 복식이 몽골 병사에 가깝다는 이유로 선두에 서서 싸우는 병사들을 고려군으로 보는 설이 있는 것. 도망가는 병사들이 쓰고 있는 투구를 보면 투구 옆의 드림이 목의 앞부분까지 모두 감싸는 형태로 여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한 몽골의 형식이다. 굳이 다른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 활을 쏘고 있는 이들이 몽골군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이 그림이 1274년 1차 원정 때의 사실을 그린 그림임을 감안해 보면 저 몽골군과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군대가 남중국 병사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군은 항복한 나라의 군대를 선봉에 세우는 전술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그림에서도 저 병사들이 선봉에 서 있다. 더구나 몽골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 저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당시 원정 기록을 살펴보면 몽골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고려군이 막부군의 습격을 격퇴한 사실이 여러 번 보이므로 근거가 될 만하다.
3. 제1차 원정
3.1. 발단
1265년 몽골 제국의 5대 칸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남송 정복의 계획을 주위에 묻던 중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가 남송과 교역하는 밀접한 나라로 일본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남송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초유(불러서 타이름)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다고 진언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복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66년 쿠빌라이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려 재상 이장용(李藏用)은 이것이 고려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임을 예견했고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 점을 이용, 일부러 바다가 험난하고 풍랑이 심하다는 등 겁을 잔뜩 주었다.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 사신들은 겁에 질려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거제도까지만 간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쿠빌라이가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268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반부(潘阜)라는 관리를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했다.
사신은 당시 일본의 대외 창구였던 다자이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고 당시 대륙의 정세를 전해줬으나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사 이래 한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데다 교토의 덴노를 힘으로 누르고 있는 가마쿠라 막부에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사신을 5개월 동안이나 다자이후에 머물게 하며 박대했다.
사신은 고려로 귀환했고 고려에선 다시 이를 몽골에 보고했는데 쿠빌라이는 보고 내용을 불신하며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쓰시마 섬까지만 갔다가 그 곳에서 섬 사람 두 명만 잡아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면 질책을 받을까봐 두려워한 듯. 쿠빌라이는 섬 사람 두 명을 잡아온 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사신들을 치하한 뒤 섬 사람 두 명은 다시 돌려보냈다.
섬 사람 두 명을 돌려보낸 고려는 다시 다자이후에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자 1268년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할 거라고 선언하며 고려에 병선의 건조와 군량 비축을 명했다.
3.2. 몽골의 원정 준비
이듬해인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 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이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 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안습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조양필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 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덴노와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에 불과한 호조 도키무네였는데 도키무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 일본의 슈고와 지토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말로는 도저히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그와 더불어 1272년에는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했다.
1273년에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전함 900척이 건조됐다.
지휘관은 원나라 측은 몽골인 흔도, 귀화한 고려인 홍다구, 송나라 유복 형이었고 고려 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이 2만 5천,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 7백이었다.
1274년 음력 10월 4일, 마침내 여몽 연합군은 일본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키 섬 전투
음력 10월 14일, 연합군은 쓰시마 섬과 큐슈 사이에 있는 이키 섬에 도달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 대리인 타이라노 카게타카(平景隆)에게 전해졌다.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가신 100명을 이끌고 출전해서 연합군과 조우해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참패했다 (아래 무력차 항목 참조). 결국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이키 섬의 본거지인 히츠메 성으로 달아나 농성을 했고,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짧은 시간에 성이 함락당했고, 그는 다자이후에 전령을 보내 본토에 위급함을 알린 뒤 목을 매고 자결했다.
3.5. 하카타 만 상륙 작전
음력 10월 17일에 연합군은 규슈에 있는 다카시마에 상륙했고, 일본 막부군은 급히 내려가서 산성을 구축하고 싸웠으나, 막부군은 계속 밀리기만 했다. 일본 무사들의 개인 전법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집단 전법, 몽골군이 쓰는 철포(鐵砲)의 위력에 막부군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리고 여몽 연합군은 겐카이나다(玄海灘, 현해탄)를 지나 하카타 만으로 향했다.
음력 10월 19일, 여몽 연합군의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다음날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다자이후의 총 사령관 쇼니 쓰네스케는 이미 쓰시마 섬, 이키 섬이 점령당했다는 급보를 듣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사를 전했고 규슈 내의 슈고, 지토 및 고케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또한 하카타 지구에는 총 사령관의 동생 쇼니 가케스케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병력은 대략 1만 7천 명 이상이었다.
3.6. 삼랑포 전투 & 하코자키 전투
음력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삼랑포(現 사와라)를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싹슬었고. 몽골군 지휘관 흔도조차 감탄할 정도였던 몽골군 주력 부대가 합세함으로써 막부군이 만든 하카타 만의 해안 방위선 30km가 전부 붕괴되었다.
그래도 하코자키 지구에선 제법 막부군이 선전을 했다. 전선 사령관 쇼니 가케스케는 시마즈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화살을 쏴 몽골군 장수를 낙마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때 화살에 맞은 이는 몽골군 좌우군 부원수 유복형이었다. 결국 패배한 막부군은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 미즈 성(水成)에 집결했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합군은 추격을 해오지 않았다. 한편 연합군은 함대로 귀환해 차후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
3.7. 신의 바람(神風)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하카타 만에 대폭풍이 몰아쳤고 이는 연합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900척의 전함 중 몽골 군함 200척이 하룻밤 사이 침몰했다. 전투의 지속 여부는 의미 없었고 남은 선택지는 오직 철수 뿐이었다.
참고로 Discovery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는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너무 빨리 배를 건조하는 데 발생한 내구도 부실 공사 문제와, 배가 부족한 나머지 항해에 부적합한 강가용 배를 징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태풍 덕이었지만 어찌됐든 일본은 승리했다. 일본은 이 태풍을 神風(신푸, 신의 바람)이라 부르면서 기렸다.
그리고 약 660년 후, 이 태풍의 이름은 일본군의 자살폭탄 공격을 작전이라 포장할 때 쓰여졌다.
4. 제2차 원정
4.1.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
1차 원정군 사령관 흔도는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한 사정은 숨기고 일본을 패퇴시킨 전적만 부풀려 보고한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일본이 충분히 쫄았을 것으로 착각하고 원나라에 굴복하고 입조할 것을 권하는 사신단을 보냈다.
1차 원정이 끝난 이듬해인 1275년, 예부 시랑(외무 차관 급) 두세충과 병부 시랑(국방 차관 급) 하문저 등 원나라 사신단 30여 명이 쿠빌라이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하자, 호조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이들을 접견한 후 고려인 수행원 4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참수해버렸다(…). 5년 후 원나라 사신들이 다시 방문하자 이번엔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바로 다자이후에서 죽여버렸다. 칭기즈칸 시절 호라즘 왕국이 몽골 사신단을 몰살했다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
이러한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에 크게 빡친 쿠빌라이 칸은 2차 원정을 결심했고 고려에 다시 원정 준비를 명했다. 충렬왕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 전함의 건조 및 병량 비축은 무리'라고 호소했으나 쿠빌라이는 일본을 족치기로 결정한 터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2차 원정은 1차 원정으로부터 7년 후였는데 당시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에 골몰한 데다 아리크부카와의 후계 다툼 및 카이두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76년이 되어서야 바얀이 지휘한 몽골군이 남송의 수도 임안 (항저우)을 공격해 점령했다.
같은 해 가마쿠라 막부 측은 연합군의 원정에 대한 응징으로 고려에 반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 전함 건조와 병력 징발을 명했으며 비용의 부과 및 징수는 쇼니 쓰네스케에게 일임했는데 이를 이국출격(異國出擊) 계획이라 했다. 원정군의 본영은 하카타에 설치되었으며 총 사령관은 쇼니 쓰네스케가 임명되었다. 출격에 필요한 선박과 무사들은 규슈 내에서 조달했지만 부족하면 시코쿠와 주고쿠에서도 보충하기로 했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끝내 실행되지는 못했다.
4.2. 몽골과 고려의 원정 준비
한편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2차 일본 원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갑자기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자살 폭탄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몽고의 침략과 동시에 50년 전부터 출몰해 약탈을 해대기 시작한 왜구가 지긋지긋한 데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여 지분 떡고물 을 얻고 원나라의 앞잡이 홍다구가 고려에서 패악질을 벌일 틈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1279년 원나라가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하자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환영의 뜻을 밝혀 호의를 사는 동시에 원나라는 홍다구를 곧 본국으로 소환했다.
1280년, 2차 원정군이 편성되었는데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서 편성했다. 동로군은 몽골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몽골군 지휘관은 흔도와 홍다구였고 고려군 지휘관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 1만 명, 고려군 전투병 2만 명, 뱃사공·수부 1만 7천 명, 함선 9백 척, 군량 12만 3000석이었다. 강남군은 주로 옛 남송군이었는데 병사 수는 10만에 지휘관은 범문호였다.
실제로 고려군이나 몽골군이나 1차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고, 고려군이 특히 소극적이었는데도 원은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은 걸로 보건대 쿠빌라이의 본의는 일본 정벌보다는 그냥 두들겨패서 후방에서 엉뚱한 짓을 못 하게 막는 것 + 왜구 소탕이 목적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존재한다. 물론 이게 맞아도 결국은 실패한 게 맞는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는 것이 일본 자체의 역량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던 데다가 왜구는 오히려 더 활개를 쳤기 때문이다.
4.3. 이키 섬 전투
음력 5월 26일, 이키 섬에 상륙한 동로군은 저항하는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이때 막부군의 지휘관은 7년 전 열두 살의 나이로 전쟁을 경험한 쇼니 쓰케도키로 쇼니 쓰네스케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과부적임을 알면서 싸우다 전사했다.
4.4. 시카노 섬 전투
10일 간 휴식을 취한 동로군은 음력 6월 6일 하카타 만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때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혔으니 1276년에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 연안 20㎞에 축조된 높이 2m 전후의 방루가 그것이었다. 하카타 만 해안에 즉각 상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동로군은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는 시카노 섬에 상륙했고 같은 날, 오토모 가문의 당주이자 고케닌인 오토모 요리야쓰가 이끄는 막부군이 시카노 섬에 상륙한 동로군에 먼저 선공을 가했다.
시카노 섬 쟁탈전은 6월 8일까지 지속되었는데 고려군과 몽골군의 동로군은 생각 외로 고전을 반복했다. 결국 시카노 섬 상륙을 포기한 동로군은 다시 이키 섬으로 철수해 야영 생활에 들어가고 20여일 간 교전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후 7월 2일, 동로군은 대륙에서 오는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히라도 섬으로 이동했고 이때를 틈타 마츠우라 가문, 류조지 가문, 다카시 가문이 이끄는 1만의 일본군 병력이 이키 섬을 탈환했다.
음력 7월 27일, 히라도에서 합류한 동로군과 강남군은 다카시마에 상륙하여 진영을 축조하는 한편, 다시 하카타 만 공략을 준비했다. 막부군은 이 소식을 듣고 반격을 준비했으나 4천여 척의 대함대의 위용에 눌려 전면전을 벌일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소선으로 기습전을 벌였다.
당시 기습전에 참가한 막부군 무사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는 3척의 배들에 별동대를 분승시켜 몽골군 군함에 접근해 분전을 벌여 몽골군의 석궁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되지만, 배를 접현시키는데 성공하여 몽골군 배에 횃불을 던지고 적병을 베며 몽골군 지휘관 한명을 납치하고 귀환하는 등 활약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몇 차례 감행된 소선 기습 당시 일본 수군은 여몽군의 배에 설치된 투석기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4.5. 또다시 신의 바람이 불다
그러나 음력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튼튼한 배 400여척을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침몰하거나 떠내려가 버렸다. 이에 흔도, 범문호 등 지휘관들은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병사들을 내버린 채 일본에서 퇴각한다.
이미 육지에 있었거나 박살난 배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인원은 약 10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장총관이라는 자를 우두머리로 뽑은 후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돌아오려 했으나 곧 막부군에 포위되었고, 결국 굶주림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고려사와 원사, 남송 측 생존자의 기록에 따르면 막부군은 8월 7일 경에 기술자와 농사를 지을 줄 아는 자 2만 ~ 3만 명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원 몰살시켜 버렸고, 이틀 후에는 그 중에서도 몽골인, 고려인 , 한인을 골라 살해하고 오직 신부군(한족 이외의 남송인으로 편성된 군대)만 당인(당나라 사람)이라 하여 살려주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도 제2차 원정에 참여한 고려인 26,989명 중 19,397명이 생환했으나 몽골과 남송에서 참전한 원의 군사는 극소수만이 돌아왔다.
5. 두 세력의 무력 차이
원정은 실패했으나, 여몽 연합군의 전반적인 전력은 일본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당시 일본은 모든 면에서 여몽 연합군에게 열세였다. 다만 전투 방식은 물론이거니와 무기 또한 사거리 2백 미터에 달하는 단궁을 주 무기로 삼은 몽골군에 비해 막부군은 백병전을 중시했기 때문에 무거운 갑옷과 일본도로 중무장했고 따라서 원거리에서 연합군이 봉쇄하면 막부군은 손 쓸 틈도 없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헤이안 시대부터 여몽 침공 전까지 일본의 주된 전투 무장은 활이었고 원거리 전투만으로도 끝나는 전투가 대다수였으며, 기병도 기병 부대가 전무하며 있는 기병인 지휘관들조차 기마 궁술 위주의 전투를 하였으므로 백병전에 집착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뿐만 아니라 갑옷조차도 백병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아직 전국 시대 이전이라 전투력도 딸렸고 화약무기도 없어서 전력이 열세에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전투 방식은 부하에게 우는 살(명적)을 쏘아 개전 신호로 삼은 뒤 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자신의 가계, 이름, 전적들을 자랑스레 읊은 뒤 싸우는 거였다. 쉬운 말로 기사도, 아니 무사도를 준수하는 일기토 시전. 물론 여몽 연합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몽골군 역시 명적을 사용했는데 이는 진격을 알리거나 대량으로 사용해 적의 사기를 꺾거나 전투 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휘관끼리 연락을 취하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결국 일본군이 명적을 쐈다는 것은 장수가 앞서서 가계를 읊는 것이었지만, 몽골군은 이걸 진격 시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만구다이가 돌격해 측면을 돌파 중이었을 것이다. 망했어요. 사실 그전에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서 예법에 맞춰서 말을 하는 건 여몽 연합군 입장에서는 나 죽여 주시오 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원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파훼법까지 쓸 정도로 철저히 전술을 준비했는데, 기병 중심인 일본군에게 극상성인 병력 구성인 도검병(말 다리를 쳐서 기병을 무력화) + 화포 (직접적인 피해 이외에 폭발음으로 말을 놀라게 해서 기동력을 상실)로 밀어붙였다. 게다가 전장이 넓은 평야 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도검병이 기병에게 접근하기도 적절하거니와 화포의 활용도가 높았고, 덕분에 여몽연합군은 막부군을 압도적으로 유린했다. 해군이야 뭐 고려가 거들어주면 되는 것이고 일본은 거꾸로 바다 건너 이렇게 대규모 원정을 할 능력이 없었다. 태풍만 아니었다면 정말 역사가 뒤바뀌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봉화 및 역마 체제도 낙후되어 1차 원정 당시 일본군의 패전 소식이 막부에 전해진 것은 전투 8일 뒤인 10월 28일이었고 막부가 다시 명을 내린 시기는 11월 1일이었다. 교토에는 더욱 늦어 11월 2일에야 소식이 전해졌다. 태풍으로 상황 종료된지 일주일도 넘어서 소식이 전해졌다는 이야기다.(...)
또한 원정 당시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대한 공포심은 극에 달해 일본인들은 무쿠리(몽고)와 고쿠리(고려)라는 두 마리 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한 마리의 도깨비로 부르며 어린아이가 울 때 "'무쿠리와 고쿠리가 잡으러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라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였다. 당시 일본에서 여몽 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2차 원정 때는 일본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1275년 이국경고번역을 실시하면서 각지의 병사와 물자를 징발할 준비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었던 것과 고려 쪽에 첩자를 계속 보내 침공군의 규모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원정 당시 큐슈의 방어군은 1차 원정 때보다 2배 정도를 동원했으며 이요의 수군과 중앙에서 아다치 모리무네의 1만 가량의 증원군까지 파병되어 4만 이상의 숫자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여몽 연합군은 쉽사리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태풍이 불어올 때까지 일본이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6. 원정의 여파
6.1. 원나라
두 번에 걸친 원정이 모두 실패하자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을 중단했다. 사실 고려도 그렇지만 일본도 애시당초 완전 정복을 한 뒤 철저하게 복속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한 측면도 있다. 즉 어설프게 복속시키는 게 목적이면서 전쟁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수지가 맞지 않아 포기한 것이다.
즉 일본 입장에서는 이후 몽골의 침공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원정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그런 점을 감안해도 대단했는데, 이후 신토와 불교에 대한 믿음이 더욱 공고해진 일본은 자국이 '신의 나라'라고 자처하게 되었으며 연합군을 물리친 태풍을 신풍(神風)이라 불렀다. 이는 훗날 태평양 전쟁 때의 그 카미카제의 어원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카미카제 문서 참고. 이게 약 7백년 뒤 그런 참혹한 것을 야기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6.2. 가마쿠라 막부
태풍 덕에 두번이나 원정군을 물리치긴 했으나 일본 측의 피해도 적지 않은 편이어서 막부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로 무사들에게 논공행상으로 내려줄 토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기긴 이겼으되 영토를 얻은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영토를 얻으려면 원나라를 공격하던가 해야 하는데, 홈그라운드에서 방어한 일본 무사들이 바다를 건너 원나라를 공격해 이길 리 만무했다. 결국 자비를 들여 여몽 연합군과 싸웠던 무사, 즉 고케닌들은 보상으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해 갈수록 궁핍해졌고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에 자동적으로 고케닌들에게서 쫓겨난 비(非) 고케닌 무사들 및 총령(가문의 상속자)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서자들이 악당을 조직해 슈고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것은 곧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막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을 무렵, 교토 조정에선 덴노의 후계 문제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고 내전은 고다이고 덴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를 외딴 곳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하지만 호조 정권의 장기 독재에 반감을 품은 무사들, 특히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가 호죠 타도를 노리고 있었다.
1333년 마침내 전국에서 호조 정권 타도의 깃발이 올랐다. 같은 해 5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함락시켰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략했으며 호조 씨 일족은 마지막 싯켄 사다도키를 비롯해 전원 자결함으로서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 연합군을 막아낸지 반세기도 채 못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예상하고 경고한 승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일련종을 만든 니치렌이다.
6.3. 고려
동국통감과 고려사에서 드러난 기록들을 보면 고려의 왕과 조정 대신들 부터가 원정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문하 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를 원나라에 보내어 표문(表文)으로써 아뢰기를,
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倭邦]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는데, 시절이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큰물이 져서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蘇生)될는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다시 일본을 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능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한마디로 원정에 참여한 김방경조차 직접 이 표문을 낼 정도로 정벌의 필요성 보단 오히려 회의를 느낀 전쟁이었다. 애초에 고려 땅 늘리자고 하는 전쟁도 아니고 원나라 땅 늘려주자고 하는 전쟁인데 좋다고 했을 리가 있나... 이쯤되면 정벌을 위해 혹독한 전쟁 준비를 해야 했던 병사들과 백성들만 불쌍하다.
대략 700년이 넘어서 그때 당시의 원정 때 사용된 배로 추정되는 목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7. 현대 일본에서 바라보는 시각
1950년대 일본에서 이 원정을 흥미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가 지은 《풍도(風濤)》.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왔는데 원제를 그대로 쓴 것과 적당히 의역해 검푸른 해협이라고 제목을 붙인 두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일본"이 주인공이 아닌 충렬왕과 김방경이 주인공으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한국인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에 국내의 소설이나 김방경 위인전이 대부분 이 소설을 따오는데, 사실 몽골의 지배 하의 고려를 미 군정 하의 일본에 빗대어 냉전 시기 군사 기지화 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이 소설이 의외의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은근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는 것. 당연하지만 고려가 일본 원정을 달갑게 주도한 것도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임진왜란이나 일본 식민 지배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졌다는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