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1-2절)
유대인이 요나서를 좋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요? 자신들의 모습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둘기, 하나님의 전서구로서 전령이요 전도자가 하나님의 긍휼에 반기를 들고 다시스로 도망가며 배 밑창에 들어가 요즘 말로 하면 배째라 하고 잠을 자다가 풍랑을 만나 남들에게 손해를 몽땅 입히고,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체포되어 바다에 던짐을 받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요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니느웨는 용서하지 못한다고 마음에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요나에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했다가 삼키도록 하십니다. 거기서 삼일 삼야를 지냅니다. 드디어 요나의 아집이 허물어졌습니다. 극심한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이실직고 한다’는 것은 여간한 축복이 아닙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몰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지심을 얻지 못해 부르짖지 못하고, 또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고도 아직 잔꾀가 남아있고 가진 재주의 열쇠꾸러미가 남아 있어 무릎을 꿇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음부와 같이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고난의 터널 속으로 들어갑니다. 요나처럼… 마침내 거기서 부르짖습니다. 더 이상 남은 것은 죽음 밖에 없기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 두렵습니다.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외롭습니다. 연약합니다. 슬픕니다. 억울합니다.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저런 원수가 있습니다’ 낱낱이 하나씩 아룁니다. 그리고 부르짖습니다. 불퇴전의 기도입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입니다. 아랫배가 당길 정도의 간절함과 목에 피가 나올 만큼 애절한 간구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아직입니까?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요? 우리는 다 요나입니다. 김 요나, 이 요나 최 요나 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철저한 이기주의자들이며 입에만 사랑이란 상표가 붙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요나를 바꾸시기 위해 큰 배, 큰 풍랑, 큰 물고기, 박 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고난을 통해 부르짖게 하시곤 물고기의 입에서 토해내게 하십니다. 그 자리는 그가 그렇게 가기 싫어하든 니느웨 땅이었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고는 도저히 하나님의 자비를 전할 수 없는 원수의 땅입니다. 끝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분을 내던 요나의 입을 막고 그 자비를 알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