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다락골길 78-2 (농암리 651-1)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가 탄생한 교우촌이며 무명 순교자들 무덤이 있는 곳
청양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무덤을 이
루고 있다.청양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박해라 일컬어지는 신해박해(1791년) 직후였으며,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의 집안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다락골이었다.
여기에 천주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1791년이다.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 최인주(崔仁柱)가 그의
어머니, 곧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누이를 모시고
피난해 들어오면서 교우촌이 시작되었다.
모자는 다락골로 들어와서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로서, 점점 이웃이 모여
들어옴에 따라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던 것이다.
다락골은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 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때 순교한 치명자의 묘소로 추정되는 30여 기의 묘가
이곳 다락골에 줄 무덤을 이루고 있다.
이 무덤이 있는 산은 경주 최씨(최양업 신부 집안)의 문중 산으로
이 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이 있다.
다만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옮겨서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줄무덤의 총수는 37기다.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가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1, 2, 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다.
제1 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다. 오기선 신부의 증언에는 17기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 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다.
제1 줄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쯤 떨어진 지점에 10기의 제2 줄무덤이 있다. 제3 줄무덤은 제1 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된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 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 다락골의 교회사적 특성
내포교회사연구소에서 발간한 다락골 자료집(2009.12)에서는 다락골의 교회사적 특성을 몇가지 제시하고 있다.
첫째, 다락골은 멀리는 신해박해(1791), 가까이는 신유박해(1801) 이후 형성된 교우촌으로 적어도 병인박해(1866) 초반기까지
지속된 공동체였다.
지금까지 다락골은 최양업 신부와 최경환 성인의 고향으로, 병인년 순교자들의 줄무덤이 있는 곳으로만 알려져 왔다.
이러한 면만 부각되다 보니 다락골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다락골은 박해 중에도 비교적 안전했던 교우촌으로 교회재건운동과 기해박해 기간 중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05년에 순교한 최신덕(바오로)은 신태보(베드로) 등과 더불어 신유박해로 흩어진 교우들을 결집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기해박해(1839) 중에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다락골에서 마지막 편지와 사목서한을 남기고
최후의 미사를 거행한 장소가 되었다.
셋째, 다락골은 위치상 중간 지점에 있기에 박해기간 동안 한국 교회의 가교역할을 하였다.
다락골 교우촌은 규모가 크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큰 신앙공동체 사이의 왕래에 있어 거점이 되었다.
다락골은 서울, 경기, 내포(충청도 북서부), 전라도 북부 지역에 형성된 큰 신앙공동체의 중간에 위치하며 가교의 몫을 담당하였다.
금정 일대에 비교적 많은 신자들이 생겨나고, 최신덕이 교회재건운동에 참여하며, 모방과 샤스탕 신부의 피난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락골이 여러 공동체의 중간지역에 위치해 있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 아무리 더듬어도 (다락골 줄무덤에서) <김영수> ▒
바람이 머물면 우주가 밝고
바람이 달리면 영원의 틈 보이는 곳
화성면 농암리 산등성엔
가슴에 하늘 품은 죄인들이
밀알되어 빽빽 줄 지었습니다
내 감히 줄 끝에 누어보면
바람은 갑자기 어둠으로 깊어지고
나는 아무리 더듬어도
삶을 짚지 못합니다
죽음를 짚지 못합니다
나의 목마름은 언제 투명해질까요
나는 다시 일어나
줄무덤 도는 햇살에다
오래도록 손 담그어 봅니다
목숨 흐르는 숨결 들으며
슬픔 다 비워내고 새 슬픔 다시 채워
이슬 젖은 아침에 눈 뜰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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