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9월 5일
복녀 마더 데레사
Mother Teresa of Calcutta
Beata Teresa di Calcutta (Agnes Gonxha Bojaxiu)
TERESA of Calcutta
Born : 26 August 1910 in Skopje, Macedonia(Agnes Gonx-ha Bojaxhiu)
Died : 5 September 1997 in Calcutta, India of natural causes
Beatified : 19 October 2003 by Pope John Paul II
마더 데레사는 1910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프예에서
아니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Agnes Gonx-ha Bojaxhiu라는 이름으로 알바니아 집안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비교적 안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건물 청부인이요 수입업자였고, 어머니는 깊은 신앙을 가진 여인으로 엄격하면서
도 다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생활은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계?꾸려가기 위해 옷과 수예품을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아니스는 소녀 시절 신우회라는 본당의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예수회 사제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열 여덟 살 때 인도에서의 선교활동으로 잘 알려진 로레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는 이른바 첫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인도에서 일하기를 원했던 데레사는
먼저 아일랜드로 사서 영어를 배운 다음 인도로 가서 캘커타에 있는
로레토 수녀원의 성 마리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6일 캘커타에 도착한 아니스는 1931년 5월 24일 로레토 수녀로서 허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 꽃>으로 알려진 리지 외의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선택했다.
자기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겠다고 결정한 것과
데레사를 허원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마더 데레사의 힘과 특징 그리고 목적을 이해하는 데
근본적인 실마리가 된다. 단순한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열정,
<밖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이 열정을 보면 마더 데레사의 첫 번째 부르심에 대해 알 수 있는데
그 선교생활은 복음을 전하겠다는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마더 데레사는 처음부터 개척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선교활동은 연민에 찬 활동만은 아니다.
마더 데레사가 리지 외의 성녀 데레사를 수도 명으로 택한 것을 보면
그분의 선교 활동이 관상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랑스 리지 외에서 보석상의 막내딸로 태어난 데레사는
1888년 열 다섯 살이라는 아주 어린 나이에 갈멜 수도회에 들어갔는데,
자신의 소명은 <사랑>이며 가장 큰 의무는 사제와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은 몸이 약해 선교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단순성, 희생정신, 관용으로 가득한 영성,
즉 복음의 근본 진리로 향하는 건강한 영성의 길을 따랐다.
데레사는 <나의 작은 길은 영적인 어린이 됨의 길, 절대적인 신뢰와 자기 포기의 길이다>라고 했다
리지 외의 데레사는 자신을 <아기 예수의 손에 있는 공>으로 비유한 반면
마더 데레사는 신뢰와 자기 포기라는 단순한 길을 좀더 실제적으로 표현하여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있는 연필> 이라고 불렀다.
마더 데레사는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배웠다. 그리고 1944년에는 교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 때는 식량은 아주 적고 할 일은 너무 많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잖아도 별로 튼튼하지 못했던 데레사는 결핵에 걸려 가르치는
일을 계속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 기슭의 작은 언덕에 있는 다릴징으로 보내졌다.
마더 데레사가 <부르심 안에서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것은
1946년 9월 10일 기차 안에서였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이것이 그분의 뜻이라는 것과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데레사가 교사에서 종으로 안전하고 편안한 공동체에서 예외적인 신앙과 뛰어난 비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옮겨가는 허락을 얻는 데는 2년이 걸렸다.
성 마리아 학교에서 19년 동안 마더 데레사와 함께 일한 수녀님들 중에는
그 시절 마더 데레사는 몸이 허약하고 아주 평범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마더 데레사는 어디에 뭐가 필요한 지를 알아 적절히 대응하고
모든 의혹에도 불구하고 조직을 하고, 회헌을 작성하고,
전세계에 지부를 파견하는 등 전형적이고도 정력적인 실업가로 보인다.
그리고 마더 데레사에게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하늘과 땅> 사이에 적절한 균형과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얻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가 이렇게 강한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맡길수 있는 것은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데레사는 자신의 성덕의 진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과 나, 하느님의 은총과 나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진보를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그것을 원하는 것이다."
마더 데레사에게 거룩함이나 성스러움에 대해 질문을 하면
"거룩함은 필수품입니다. 그것은 수도자 등 소수에게 맡겨진 사치품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의무입니다.
거룩함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라고 일상적으로 설명했다
.
마더 데레사를 "살아있는 성녀"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현대에서 점점 더 높이 평가받고 있는 개념, 즉 균형과 관계있는 것 같다.
인도의 스승 크리슈나무르티는 거룩함이 <온전성>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갈라진 지체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고르게 결합된다는 의미이다.
마더 데레사의 영적인 길은 관상생활이 사랑의 활동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단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단순성 뒤에는 탁월한 신앙과,
의지와 지혜에서 나오는 여러 해 동안의 체험과 봉헌이 숨어 있다.
마더 데레사는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조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존경스러우면서도
친밀감 있고, 실용적이면서도 통찰력 있고,
상처 입기 쉬우면서도 강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관상적일 수도 있다.
(사랑의 선교회홈에서)
데레사 수녀 연보
1910년: 8월 27일 현 마케도니아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께 건축업자의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세속명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
1928년: 캘커타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 아일랜드, 더블린을 거쳐 인도 지질링 도착.
1929-1948년: 캘커타 성 마리아 학교에서 지리학 교편을 잡다 교장에 임명, 로레토 수녀회와 관련 있는 인도 수녀회인 성안나 수녀원의 수련장 맡음.
1946년: 결핵 때문에 요양차 기차를 타고 산간 도시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시를 받음. 곧바로 빈민촌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원장 수녀에게 밝히고 허락을 요청.
1948년: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하얀 사리와 이마에는 푸른 줄무니가 있는 새 수도복을 입음. 3개월간 미국 의료수녀원이 잇는 파트나에서 간호학을 수학. 그해 성탄절에 캘커타로 돌아와서 빈민촌에 학교를 세움.
1950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창립.
1952년: 죽어가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안식처 '니르말 흐리다이(순수한 마음)'를 설립, 다음해 고아원을 세움.
1962년: 파드마 슈리상 수상, 상금으로 여러 곳에 새 안식처를 건립.
1963-1978년: 사랑의 선교 수녀회 교황청 인가 취득, 첫 해외시설을 베네수엘라 코코로트에 건립. 사랑의 선교회 남자 수도회가 앤드루 수사에 의해 창설, 국제 데레사 수녀 협조자회와 자매결연.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교황 요한 23세 평화상을 받음. 상금으로 나환자들의 재활센터를 지어 '평화의 도시'라고 명명. 69년 중국 방문.
197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상금 19만 2천 달러는 나환우 구호소 건립 기금에 씀.
1981-1985년: 81년, 82년, 85년 3차례 한국 방문.
1982년: 포위된 베이루트의 한 병원에서 37명의 지진아를 구조하는 동안 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들에게 총격을 멈추도록 설득.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는 동안 심장 발작을 일으킴.
1985년: 미국 '자유의 메달' 수상. 뉴욕에 에이즈 말기 환자를 위한 병원 건립.
1989년: 두 번째 심장 발작. 삼장 박동 조절장치를 주입시킴.
1990년: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표명. 후계자 선출을 위한 비밀 투표에서 데레사 수녀 자신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재선됨.
1991년: 멕시코 티후아나에서 폐렴 발생. 심부전 발생.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병원에 입원.
1993년: 5월 로마에서 넘어져 늑골 3개가 부러짐. 8월 뉴델리에서 말라리아로 입원. 9월 막힌 혈관을 뚫는 수술을 받음.
1996년: 미국 명예시민권 받음. 또다시 넘어져 쇄골이 부러짐. 8월 말라리아 발병, 좌심실 부전, 폐감염, 심장병 재발, 11월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다시 입원.
1997년: 3월 13일 '사랑의 선교회' 대표직 사임. 9월 5일 밤 9시30분 캘커타에서 심장마비로 별세.
빈자들의 어머니 데레사 수녀...출생에서 선종까지
'아녜스 곤히아 브약스히야(Agnes Gonxha Bojaxhiu)'.
1910년 8월 27일. 옛 유고연방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데레사가 태어나자 알바니아인 부모는 막내딸에게 '꽃망울(곤히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데레사는 건축업자이자 시의원인 아버지, 그리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 밑에서 언니 아게, 오빠 라자르와 어울리며 비교적 안락한 低?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곤히아가 7살이던 1917년,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와중에서 동업자가 재산을 빼돌리는 바람에 길거리에 나앉은 가정은 순식간에 몰락했다. 어머니는 옷과 수예품을 파는 일로 3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
데레사는 소녀 시절 신심회라는 본당 청소년 단체에 들어갔는데 당시 예수회 신부가 지도하는 이 단체에서 선교사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2살 때였어요. 수녀가 되겠다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어요," 데레사 수녀는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처음에 "수녀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며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6년 뒤 데레사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뜻을 재차 밝히자 그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는 "너의 손을 예수의 손에 얹고 예수만 따라 가라"고 당부했는데 데레사 수녀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창 세상을 동경할 나이인 18세(1928). 데레사 수녀는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까지 배웅 나온 가족들과 이별을 하고 아일랜드의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했다. 그곳에 들어간 이유는 인도 벵골에 수녀원을 두고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 수녀회에서 평소 생각했던 봉사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데레사는 아일랜드에서 영어를 배운 다음 1929년 1월 6일 인도 캘커타로 건너갔다. 캘커타 로레토 수녀원에서의 첫 소임은 수녀회가 운영하는 성마리아 고등학교의 교사, 데레사 수녀는 1931년 5월 24일 그곳에서 첫서원을 했는데 그때 '예수의 작은꽃'으로 알려진 프랑스 리지외의 데레사를 수도명으로 정했다. 데레사 수녀는 성마리아 학교에서 지리와 교리를 가르치는 한편 힌두어와 벵골어를 공부했다. 1944년에는 교장직을 맡았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가뜩이나 몸이 허약했던 데레사 수녀는 결핵에 걸려 히말라야산 기슭의 지질링에 가서 요양을 했다.
데레사 수녀가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두 번째 부르심을 들은 것은 바로 이때다. 데레사 수녀는 지질링을 다녀와서 "수녀원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지질링으로 가던 중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데레사 수녀는 훗날 당시의 결심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 메시지가 아주 분명했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라 빈민가로 갔습니다. 가장 미소한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교장에서 빈민들의 '종'으로,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에서 가난과 질병이 들끓는 빈민굴로 자리를 옮기는 데는 수녀회 허락이 늦어져 2년이란 기간이 소요됐다. 데레사 수녀가 빈민가로 들어갈 때 몸에 지닌 총재산은 단돈 5루피(약 1백20원). 로레토회 수녀복을 벗고 인도 고유의 부인복 '사리'에 푸른테를 두른 옷으로 갈아입은 데레사 수녀. 수녀원 바로 평의 빈민굴 모트지힐에서 쓰러져 가는 가건물을 빌려 학교를 열고 칠판도 없이 붉은 땅바닥에 나무막대기로 알파벳을 써가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빈민구호소를 차려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환자들을 데려다 돌봤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빈민구호소는 연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거지와 병자, 사경을 헤매는 노인들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소문은 또 성마리아 학교 재직시절에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을 한 두명씩 자원 봉사자로 불러모은 신비로운 힘을 발휘했다.
연약한 수녀의 몸으로 아무 계획도 없이 시작한 빈민구호사업. 데레사 수녀는 자신의 빈민구호사업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라는 것을 잘 알아요. 그러나 이 물 한 방울이 태평양에 있지 않다면 태평양의 물은 어떻든 한방울이라고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어린이 집'과 '영생의 집'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가 데려온 이 어린 창조물들은 길가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데레사 수녀는 1950년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창설했다. 데레사 수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산파들이 데려오는 유아, 쓰레기통에서 건져오는 죽음 직전의 핏덩이, 그리고 거리에서 쥐와 개미에 몸을 파먹힌 채 죽어 가는 나환자 등 보호가 필요한 곳이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의 손길을 뻗쳤다. 고된 희생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현재 1백 19개국에서 운영하는 사랑의 집은 5백57개. 데레사 수녀는 기적같은 사랑의 열매를 맺었지만 정작 자신의 몸은 몇 년 전부터 급격히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96년 여름 말라리아와 고열, 고질적인 심장병과 폐질환 등으로 사경을 헤매던 당시 치료를 담당했던 센 박사는 "구부린 자세로 병약자를 돌봐온 오랜 봉사활동이 어려 질환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데레사 수녀를 위해 인도의 힌두교와 회교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인들이 쾌유를 빌어 세간에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우리를 더욱 더 감동시켰던 것은 그때 병원에서 인공 호흡기를 떼자마자 "병원비가 꽤 많이 나왔을 텐데..."라며 병원비 걱정부터 한 것이다. 더욱이 그해 11월에 또 다시 심장마비로 입원 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냥 죽어가게 해달라"고 간청해 의료진들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노벨 평화상, 케네디 인권상, 인도 최고의 바라트라트나 훈장... 세상은 '가난한 이의 어머니' 데레사수녀에게 화려한 영예를 안겨 주었다. 그렇지만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 때 "수상 축하연을 열지 않는 대신 그 비용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쓴다"는 조건을 내걸고 수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정도로 세속의 영광조차도 가난한 이들의 '양식'으로 돌렸다. 데레사 수녀는 그 작은 체구로 50년 넘게 빈민가를 지키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고 4일 밤 하느님 곁으로 돌아갔다.
데레사 수녀는 우리 곁을 떠나면서 이 메시지를 남겼다.
"가난한 이들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의식주가 아니라 따뜻한 온정입니다. 그들이 늘 괴로운 것은 사실 가난 때문에 생겨난 '버림의 상태'입니다.
데레사 수녀의 어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자신들의 존엄성이 존중 받는다고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봅니다. 내가 나환자의 상처를 씻어줄 때 나는 하느님 바로 그 분을 돌보아드리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입니까."
(1974년 인터뷰에서)
"쌓아 두면 쌓아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이 적어집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되지요."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것 이상을 돌려 줍니다. 그들은 강한 사람이여 음식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저주하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울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1977년 인터뷰)
"며칠 전 제가 천국의 문 앞에 서 있는 꿈을 꿨습니다. 그러나 성베드로께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에는 빈민굴이 없느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96년 연설)
"낙태는 '자궁 내 살인'입니다. 아이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원하지 않으면저에게 보내주십시오."
(유엔 연설에서)
"저는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입니다. 그분이 언제 어디서든 당신을 쓸 수 있도록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도구가 되십시오."
(일일묵상집 '사랑은 철따라...'에서)
"만일 달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면 물론 그곳에도 갈 것입니다."
"나는 빈민들의 가난을 선택한 사람입니다. 배고프고 헐벗고 집 없는 사람과 불구자, 맹인, 나환자,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돌봄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에 짐이 됐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기피했던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으며)
"하느님은 보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복종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고 선교회는 그대로 지속될 것입니다."
(1989년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 원장 사임 의사를 밝히며)
"평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이 전쟁에서 단기간에 우리가 모두 두려워하는 승자나 패자가 나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통과 참상, 당신들이 무기가 저지른 생명의 손실을 정당화하지 못할 것입니다."
(1991년 조지 부시와 사담 후세인에게 보낸 서한)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그리고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선물이며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사랑의 등불 마더 데레사'에서)
"나는 전쟁터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근과 주검은 봤습니다. 나는 전쟁을 하면서 사람들이 무엇을 느낄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지만 이해가 안됩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1982년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싸우는 베이루트 전장에서)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내 줄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그리고 배우자끼리도 서로에게 시간을 내기가 힘든 모양입니다. 세계 평화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교만은 모든 것을 파괴시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진정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암울한 80년대 한국에 사랑 전한 데레사 수녀의 방한행적
가난했던 삶. 그럼으로써 오히려 풍요로웠던 삶. 생전 '빈자들의 어머니'로 불렸던 데레사 수녀의 삶은 이렇게 요약된다. 데레사 수녀가 한국을 찾은 것은 81년과 82년, 85년 등 모두 3차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에서 비롯된 사랑, 복음적 사랑의 참뜻을 전해주었던 데레사 수녀의 방한 행적을 다시 떠올려본다.
1차 방한(1981. 5. 3)
81년 5월 3일 오후 5시40분 김포공항. 데레사 수녀가 대한항공 618기편 트랩을 내렸다. 전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첫 방한이었다. 마디진 손에는 성서와 묵주, 잿빛의 작은 헝겊가방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도 고유 의상 사리에 감춰진 작은 몸매와 깊은 주름이 팬 얼굴에서는 어머니만이 줄 수 있는 자애로움과 따뜻한 미소, 평화가 흘렀다. 이미 구면이었던 김수환 추기경과 손을 맞잡고 따스한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교황대사였던 루치아노 안젤로니 대주교, 프란 즈페 주한 인도대사, 수도장상연합회장 황우경 수녀 등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5백 여명의 환영 속에 도착한 데레사 수녀, 그녀의 첫 마디는 "가난하고 병들어 외롭게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며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도착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데레사 수녀는 "79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라며 "사랑의 선교회가 벌이고 있는 봉사활동은 빈민 구제의 성격을 띤 사회사업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봉사활동이 복음에 근거한 사랑의 실천임을 분명히 했다. 잇따르는 기자회견과 서강대 및 효성여대 강연, 사회복지시설 희망원 방문, 병인박해 순교성인 28위의 순교신심이 살아 숨쉬는 절두산 순교성지 방문 등 빽빽한 일정 속에서도 데레사 수녀는 시종 따스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강대 교수회관에서 마련된 기자회견의 한토막.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 라는 한 기자의 질문에 데레사 수녀는 "여러분과 내가 가난을 나눌 때 벌써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데레사 수녀는 "가난을 나눈다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하고 "한국의 이 도시에서 만이라도 아무도 고독하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의 가난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해 평생 '가난'과 함께 해온 수도자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2차방한(1982. 4. 28)
두 번째 방한은 무척 짧았다. 불과 18시간동안 이뤄졌다. 82년 4월 28일 오후 4시10분 김포공항을 통해 '혼자서' 한국에 들어온 데레사 수녀는 이튿날 오전 10시30분 마카오로 떠나기까지 만 하루도 못 되는 시간동안 당시 서울 용산에 임시로 마련돼 있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머물렀다. 방한 목적은 단순했다. 81년 7월 한국에 설립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분원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2차 방한 기자회견에서의 에피소드 한토막. 한 가지가 "수행원도 없이 혼자 들어오셨느냐?"고 묻자 데레사 수녀는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고 대답했다. 스승 그리스도를 따라 사랑의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랑의 사도다운 대답이었던 것. 특히 데레사 수녀는 당시 사랑의 선교수녀회 지원자들과의 대화에서 "가난은 우리가 기쁘게 선택해야 하며 그것은 바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려 했던 소화 데레사 성녀를 따라 생활의 어떤 부분에서도 충실하라"면서 수녀회 지원자들에게 어머니다운 당부도 잊지 않았다.
3차 방한(1985. 1. 26)
세 번째 방한은 84년 103위 시성식이 열린 지 8개월 만인 85년 1월 26일부터 31일까지 5박6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체류기간이 가장 긴 방한이었다. 특히 중국 방문에 이어 이루어진 3차 방한에서 데레사 수녀는 판문점을 방문, 북녘 땅에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등 북한 교회를 포함해 침묵이 땅에 버려진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판문점 방문 길에서 데레사 수녀는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기적의 패' 5개를 북녘 땅 가까운 곳에 던져 북한을 방문케 해달하고 기원하기도 했다.
26일 오후 8시30분 타이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데레사 수녀는 경기도 안양에 있던 사랑의 선교 수녀회 분원에 머물면서 27일 오후 안양 라자로 마을을 찾아 1백 여명이 나환우들을 위로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데레사 수녀는 또 27일 오후 사랑의 선교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는 '휴양의 집'을 방문한데 이어 29일 절두산 순교성지, 30일 사랑의 선교수녀회를 각각 방문해 버림받은 이들이 사랑 안에서 살아갈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잊지 않고 꼭 버려진 이들을 만나 위로하고 기도했던 데레사 수녀, 맨발로 사랑의 긴 그림자를 남기며 다가오던 데레사 수녀의 발길은 이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존엄성을 일깨웠던 정신만은 세월의 무게를 딛고 천년을 이어가리라. 아, 데레사 수녀여!
▨ 마더 데레사 시복식, 30여만명 운집
가난한 이들의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이 열린 성 베드로 광장에는 무려 30여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어 데레사 수녀에 대한 인종과 계층, 종교를 넘어선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500여명의 사랑의 선교회 회원들이 흰색에 푸른 줄이 있는 고유의 사리식 수도복을 입고 참석했으며 맨 앞줄에는 3500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초청돼 자리를 잡았다. 시복식에는 또 동방교회 대표단과 알바니아의 2개 이슬람 공동체가 초청돼 참석했다.
▨ 시복 선언에 환호
교황은 시복식 미사가 시작되면서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더 데레사를 새로운 거룩함의 모범으로 제시해주셨다』며 마더 데레사의 시복을 선언했다. 캘커타 대교구장 루카스 시르카 대주교가 교황에게 캘커타의 데레사를 복자위에 올려 주기를 청한데 이어 마더 데레사의 간략한 이력이 소개됐다. 이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더 데레사를 복자로 선포하자 침묵 가운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수많은 순례자들은 뜨거운 환호를 올렸다.
▨ 인도 춤과 노래로 경축
열화와 같은 환호 속에서 시복식은 인도의 전통 춤과 노래들이 펼쳐지면서 축제 분위기가 됐다. 이어 젊은 여성들이 마더 데레사의 유해를 제단 앞까지 옮기는 행렬이 이어졌다. 교황은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마더 데레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모든 인간적인 논리를 거스르는 사랑과 봉사의 여정을 걸었다』고 치하했다.
이날 시복식 미사에서는 성찬의 전례에 이어 인도의 전통적인 경배 형식에 따른 예식이 거행됐는데 갖가지 색의 사리를 입은 인도 여성들이 꽃과 불을 봉헌했다. 교황은 9월 5일을 마더 데레사 축일로 선언했다.
이날 미사는 50개국에 생중계로 방송됐고 시복식 미사에 초청된 가난한 사람들은 미사 후 사랑의 선교회 총장인 니르말라 수녀와 바오로 6세 홀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
마더 데레사의 뒤를 이어 사랑의 선교회를 이끌고 있는 니르말라 조쉬 수녀는 시복식에 즈음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데레사 수녀의 시복식은 『우리도 모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라고 말했다. 데레사 수녀가 타계하기 6개월 전인 1997년 3월 후임으로 임명된 니르말라 수녀는 『데레사 수녀의 시복은 그의 삶과 행적이 하느님께 옳게 보였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며 『마더 데레사와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표지』라고 말했다.
(가톨릭신문에서)
가,난,한,사,람,안,에,계,신,예,수,님,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는데,
불행하게도 가난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유행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뿐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 모두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될 때 비로소 그들의 삶에 하느님을 모셔다 드릴 수 있고,
그들 또한 하느님에게 나아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 자매들의 굶주림을 채워 주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야 합니다.
그들의 처지와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너무나 바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미소 지을 시간조차 없는가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이는 모두 예수님입니다.
그는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선 예수님인 痼都求?
<사랑의 선교회>의 수도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때마다
그것이 진정 예수님을 돕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음식과 옷은 가난한 이들은 먹고 입는 것과 똑같아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문명화되고 부유한 서구의 교회 활동이,
캘커타나 사우스 예멘처럼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추위를 막을 옷 한 벌,
허기를 달랠 밥 한 그릇이면 족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더데레사 말씀집에서)
거,룩,함,
거룩함은 선택된 소수만의 사치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해야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룩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룩함이란 하느님께 자신을 내맡기는 영혼의 영웅적인 결단이요, 행위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고, 하느님께 다가간다.
우리는 그분을 소유한다."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원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또 하느님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해지겠다는 결정은 아주 소중합니다.
거룩함을 선택한 영혼의 주변에는 포기, 유혹, 투쟁, 박해,
그리고 갖가지 희생들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할 때 거룩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야 합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이든, 아주 가까이에 사는 이든,
그가 누구든 만나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작 슬픈 일은 우리가 성인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덕을 행하기 위해서는 영웅적인 힘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혐오감을 극복함으로써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몇몇 성인들의 생애에서 발견하는 비밀은 본능적인 것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입니다.
다음은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에게 일어났던 일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모습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나환자와 마주쳤을 때
처음에는 메스꺼움을 이기지 못해 본능적으로 물러섰지만
즉시 이를 극복하고 그 일그러진 얼굴에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프란체스코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했다는 것을 알고 어마어마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한편, 그 나환자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마더데레사 말씀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