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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도시 설명 (실제가 아닌 인게임)
페스트(Pest): 제국 최도의 도시, 개발도 37의 대도시로써 헝가리의 심장이다. 그래서 많은 침략을 당했기에 1587년부터 성을 세워 1650년에는 완전한 철옹성이 되었다. 그리고 쇼프론 대학이 가장 먼저 세워졌고 이후 4번째로 대학을 세운 도시
벡트(Becs = Bien): 제국의 제 2의 도시, 비록 1557년에 정복되었지만, 그 위상은 매우 높다. 그래서 전통성이 낮은 명군 이스타반 7세 즉위 당시 시그문트 2세를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라슬로 6세가 들어선 뒤 적통성이 바로잡아지고 오스트리아를 대부분 차지한 뒤 오스트리아인들을 높여주며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 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프라거(Prága = Praha): 제국의 제 3의 도시, 헝가리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체코인들이였지만, 동군연합 전쟁 이후 재건을 전폭적으로 해주었고 체코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시켜주며 주요도시로 등극하게 되었다. 3번째로 대학을 세운 도시
크라코(Krakkó = Kraków): 4번째로 큰 도시이나 입지나 역사적 측면으로는 많이 성장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헝오제국의 최중요 요충지로 많은 전투의 무대이자 헝가리 최초로 스타포트가 지어지는 등 많은 것이 이루어졌다. 헝오제국의 방패이다.
자그라브(Zágráb = Zagreb): 명목상 제국의 제 4의 도시이다. 코토르와 함께 헝가리를 구원해준 충성스런 용병들의 산지이다. 크로아티아인의 수도라고 볼 수 있으나 다른 민족에 비해 충성적이지만, 본국과의 차이도 크기에 인정받는데 오래 걸렸지만, 헝오제국의 총이자 칼이다.
왕조 겸 왕사 (이것도 인게임을 토대로 함)
후냐디 야노스를 시조로 하며 후냐디 가문이 아르파드 가문 다음으로 헝가리 본토 가문이 헝가리를 다스리게 되었다.
시조 후냐디 야노스는 오스만을 막기 위해 대발칸 동맹을 맺었으며 이후 오스만의 비잔티움 침략을 함께 막으며 오스만의 성장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전사하였다.
섭정 겸 태후 대(大) 플라비아 드라큘라, 그녀는 비록 후냐디 마티야스의 계모이긴 하였지만 야노스 사후 불안해진 나라를 안정시켰고 마티야스가 즉위할 때까지 도움을 주었다.
태조 정복왕 마티야스 1세, 후냐디 조 헝가리 확장의 첫 주자가 되었다. 그는 오스만의 발칸 확장을 저지하는 동시에 보스니아를 속국화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그와 동시에 오스만과의 경쟁으로 약해진 틈을 노리는 폴란드를 선공하여 크라코 권역을 얻고 갈리치아를 해방시켜 주었다.
섭정 겸 태후 소(小) 플라비아 드라큘라,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섭정을 맡았으며 왈라키아 출신의 마지막 왕후이다. 이슈트반이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발칸 대동맹을 위해 정략결혼을 했다.
배신왕, 외교왕 이슈트반 6세, 이후의 헝가리의 진출 방향과 아젠다를 완전히 정립한 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비판 받을 소지가 많다.
그는 즉위 초에는 발칸 대동맹에 많은 기대를 가졌으며 동맹국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에피로스에게 패배한(오스만의 비잔티움 침략의 원인, 그리스 남부를 전부 빼앗김) 비잔티움 통합을 지원했고 왈라키아와 알바니아의 확장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발칸 대동맹 사이의 간극과 분열, 비잔티움에 대한 실망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서유럽에 대한 동경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서유럽의 선진국인 프랑스에 바로 동맹과 혼약을 추진했고 서방 외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발칸 대동맹에 대한 무책임적으로 해산했으며 오스만의 비잔티움 2차 침공을 묵인해주어 오스만의 팽창을 그저 방관하여 많은 가톨릭 국가들을 실망시켰다. 결국 갈리치아 공국을 조금 확장하는 것 이외에는 동진을 포기하게 되었고 발칸에 혼란을 줄 남진 또한 좌절되었다.
그와 동시에 서방문물 직접 수용(강력한 왕권 추구)이라는 이치를 걸고 서진 정책을 택하게 되었고 크로아티아 공국 복구부터 시작했다. 동시에 후냐디 가와 헝가리 귀족 세력들은 신성로마제국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와 모스크바과 동맹을 공고히 하며 나폴리에 접근하는 등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하였다.
건설왕 울라슬로 2세, 후냐디 왕조에선 38년으로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으며 사실상 헝가리 황금기의 토대를 세운 임금이다. 동진과 남진을 포기한 헝가리로서 서진 정책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노린 세력은 베네치아와 보헤미아로 베네치아는 동아드리아 해안을 두고 라구사 전쟁을 벌여 승리했고 보헤미아와는 모라비아 전쟁을 벌이며 우위를 확실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진출에 성공하여 오스트리아를 지배하는 후냐디 빈 계열, 팔츠를 지배하는 후냐디 팔츠 계열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울라슬로 2세는 매우 자신감에 찼으며 선제후와 황제가 모두 자신의 가문이 되었기에 외교적 고립과 타보르파(후스파 내 강경파)의 궐기 등 내부 불안을 겪고 있는 포데브라트 가의 보헤미아에 입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프라하 전투를 기점으로 결국 포데브라트 가를 몰아내고 보헤미아 왕직에 오르게 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155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꿈꾸며 헝가리의 신성로마제국 가입과 선제후직을 요구했다. 그 결과 제국의회는 50개국 중 45개국 찬성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이며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의회에서 황제 루돌프 4세(후냐디 빈 계열의 수장)가 헝가리를 제국의 침략자라고 단정하였고 보헤미아를 되찾아야 되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못 믿을 종자라고 욕하며 백지화하였다. 제국 구성원들은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혈맹이 아니냐며 의아했지만 황제는 의회 결정을 확인하러 온 헝가리 사절단을 내쫓고 동맹을 끊으며 강경하게 나서자 결국 수응했다.
울라슬로 2세는 매우 놀랐으나 이후 오스트리아의 뻔뻔하게 재동맹 요구를 하자 놀라움은 분노를 넘어선 격노로 변하였다. 후냐디 방계의 오만에 2달 동안 전쟁을 준비하였고 선전포고하게 되었다. 헝가리, 프랑스, 나폴리 삼국동맹과 오스트리아, 아라곤, 팔츠, 교황령, 밀라노, 피렌체, 바덴, 브르타뉴의 연합군이 5년 전쟁(1차 헝가리-오스트리아 전쟁)을 벌였고 빈을 베크로서 합병했다. 이런 수많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대부분에 교회, 군사 훈련소를 설치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후 말년에는 수도 및 요충지에 요새를 건설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추존황제 성왕 라슬로 5세, 헝가리의 종교인 가톨릭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내정 정비, 산업 발전, 영토 확장 등 못한 것이 없으며 헝가리 왕국의 황금기를 연 왕이다. 특히 외교를 잘하였는데 후냐디 빈 세력으로 인해 몰락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꼬드겨 스트리아 공국을 세워 오스트리아를 더욱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칭호를 얻게 한 종교 활동을 관련해서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정교회, 루테니아 러시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보스니아 보고밀파, 마지막으로 신흥 신교 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의 매우 열렬한 신봉자였기에 그들 모두 개종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중심점이 없던 트란실바니아 정교회 측은 빠르게 가톨릭화 되었지만, 러시아 정교회 세력 측은 러시아와 헝가리의 비호 아래 면세, 교회 확장 등의 혜택을 받고 왕의 사후 가톨릭 이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보스니아 보고밀파의 경우 가톨릭 세력에게 지속적으로 탄압을 받았으며 심지어 헝가리에 의해 십자군을 당할 뻔 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강경하게 나섰다. 그리고 세르비아 정교회 또한 세르비아 멸망 이후 대주교가 망명해 왔기에 저항이 거셌고 신교 측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2차부터 4차 헝가리-오스트리아 전쟁을 벌이며 상황은 바뀌게 되었다. 헝오 전쟁으로 라슬로 5세는 교황령과 맞붙게 되었는데 가톨릭 신봉자인 그가 교황과 맞붙는 것 자체가 모순이였지만 로마 공성전을 통해 라슬로 5세는 지금까지의 교황이 내린 칙령이 가톨릭이 아닌 세속적인 교황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공언하며 신교와 보고밀파의 호응을 얻어냈다. 결과로써 교황령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 파기와 교황령 내의 성직자가 교황이 되었다. 그리고그럼에도 세르비아 정교회의 불만은 없앨 수 없었지만 신교의 확장 저지와 타종교의 개종을 이룰 수 있었다.
전쟁 면에선 긴 전쟁을 통해 피패해지기도 했지만 아라곤의 4차 전쟁에서의 동맹 파기, 팔츠의 후냐디 가문 단절 등 오스트리아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래서 헝가리의 서진은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소심왕 이슈트반 7세, 후사가 없던 선왕인 라슬로 5세가 후계자로 임명한 후냐디 가문의 일원이다. 애초에 입양아였기에 약한 적통성에 매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매우 노력하며 총명하고 병법적으로 뛰어남을 증명했다. 충분히 입지를 다졌다며 생각하고 24세에 즉위했지만, 후냐디 빈 계열의 귀족 연립 정권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귀족 세력과 가톨릭 이외의 탄압된 종교 세력이 연합해 시그문트 2세를 옹립하며 각자 31000명, 14000명이 동시에 베크에서 궐기했다. 하지만 라슬로 5세 치세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명장과 노장이 모두 있는 헝가리 정규군과 크로아티아인 권리 신장을 위한 크라바트 용병대, 영토 재수복을 위해 신 발칸 대동맹을 꿈꾸며 달려온 알바니아 용병대가 모두 협공하여 베크 대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반군 45000명과 진압군 58000명이 엄청난 대규모 격돌을 하게 되었고 그 전투 과정에서 시그문트 2세는 즉살되었고 반군 23000 여 명, 진압군 14000 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진압군의 학살로 끝내게 되었으나 이슈트반 7세는 이 일에 매우 충격을 받게 되었고 뛰어난 군사 재능이 있었으나 전투엔 나가진 않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지가 넓지 않음을 인식하고 헝가리 왕국이 군림하는 것이 아닌 모든 왕국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공언하며 헝가리 보헤미아 연합 왕국으로 국명을 전환하였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지속하는 와중에 신성로마제국 부속국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바이에른인들이 헝가리에 귀속하기 시작했다.
검소왕, 금욕왕 야노시 1세, 울라슬로 2세 다음으로 오래 통치했으며 외치보다는 내정에 중점을 둔 왕이다. 특히 그의 치세 당시 국가의 예산은 매년 2000 두캇이 상회하며 이 돈으로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공장제 개혁과 군제 개혁은 헝가리를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들게 하는데 일조하였다. 공장제 개혁은 헝가리의 부를 더욱 증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군제 개혁을 통해서는 헝가리의 상비군을 확장하는데 큰 공헌을 주었으며 이와 함께 포병의 수 또한 늘어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트리아 공작직 회수로 오스트리아와의 통합도가 더욱 높아졌다.
통합왕 라슬로 6세, 보헤미아 직접 통치와 오스트리아 정복을 이룬 왕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비엔란드를 중심으로 두고 있는 상 오스트리아, 그라츠를 중심으로 두고 있는 하 오스트리아, 리에츠를 중심으로 두고 있는 중오스트리아로 나뉘어 스트리아 공작직을 뒷통수 맞은 합스부르크 세력으로 연합했다. 그러나 상 오스트리아는 야노시 1세 치세에 나폴리-피렌체 전쟁으로 몰락했고 중 오스트리아와 남 오스트리아만 남게 되었다. 결국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오스트리아는 고립되게 되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2번의 전쟁을 치르고 결국 아우크스부르크 임시정부만을 두고 멸망해 버렸다. 그리고 보헤미아 통합을 완수하며 보헤미아 군대를 헝가리 정규군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용병 의존도를 낮추는 계기 또한 되었다. 그 결과 라슬로 6세 치세에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 왕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섭정 겸 태후 브로스크 가의 이오나, 라슬로 6세가 세운 루사티아-실리지아 공국에 임명된 지도자 프리드릭 1세의 누이이다. 외교와 군사 면으로는 부족하나 뛰어난 내정으로 대오스트리아 전쟁으로 피폐해진 헝오 제국을 복구시켰다.
초대황제 야망왕, 관용제 라슬로 7세, 라슬로 6세와 이오나 사이에 나온 적장자로써 오스트리아 완전 정복을 완수하기 위해 베르가모를 침략하였고 베네치아 견제를 위해 트렌티노를 정복하였다. 결국 신성로마의 황제국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헝가리가 추구한 영토를 실현시키며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 왕국 내의 국민과 모든 민족의 인정을 얻고 라슬로 7세는 초대황제로 즉위하였다. 이에 그는 전국토를 순회하며 각 민족들을 위로하고 추대해주며 전민족 동등이라는 자그라브 칙령을 내리며 거의 모든 문화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알바니아와 국교를 정상화하며 신 발칸 대동맹에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쓰다보니 뭔 소설을 썼네;;;
민족 구성
헝가리인을 중심으로 많은 고난과 영광을 같이 한 슬로바키아인, 트란실바니아인이 국가의 주역이다. 그리고 오헝과 달리 헝오는 모든 민족이 동등하다.
그러나 수용한 순서는 있는데 종교 문제가 많았던 루테니아인을 제외하고 체코, 오스트리아인들이 먼저 수용되었고 완전한 황금기인 라슬로 7세 치세 당시 폴란드,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인 심지어 바이에른인까지 모두 수용되었다.
그러나 통합에 많은 반발을 주었던 세르비아인은 수용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트렌티노의 베네치아인들과 라티보르의 슐레지엔인들은 너무 소수라 그들의 문화를 잘 보존하게 두었다.
지역 안정도
와우
열강 4위
식민지 뻥튀기인 포르투갈과 비교해 실질적 3위였음.
이념은 이렇게 찍었다. 선방어는 아즈텍님 글에 많이 영향을 받아 택했다. 그리고 정복한 땅도 확실히 활용하기 위해 인본을 택하게 되었다. 영향은 보헤미아 동군을 고려해 찍었고 이후 판도를 위해 루사티아 변경국을 세웠을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요즘 다시 각광받고 있는 양 이념 찍었는데 사기 맞다. 그리고 혼트 금광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경제까지
하지만 목표는 이뤘으니 이 판은 이 쯤으로 끝낼 것이다.
그외 세계 정세
구대륙
되게 권역 별로 예쁘게 나뉘어짐
신대륙
홀란드으으으으ㅡ으으으ㅡ으으으으ㅡ으으으으으!!!
그리고 본토에서 완전히 으깨진 카스티야의 혼신의 식민지 경영은 눈물이 났다......
그외 신기했던 점
자연산 아이슬란드
예상 외로 평화롭게 잘 지내는 중
아이고 조상님 ㅠㅠㅠ 나쁜 놈들 좋은 땅만 먹은 거 봐
이번 판은 최전성기 재현도 아니었고 역사적인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시도해볼 연대기 작성을 위해 한번 과몰입하여 시도해봤는데 어땠나요? 보고 싶은 최전성기 국가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다음 글은 미국입니다.
첫댓글 합스부르크 가는 어디로 갔나요ㅜㅜ
아우크스부르크 임시정부에 생존하고 있습니다.
@테멀레인 역시 합스부르크의 생명력은 지독하군요ㅋㅋㅋ(?)
@테멀레인 그러고보니 후녀디 가문 방계가 오스트리아를 다스린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이벤트로 다시 튀어나온 건가요?
@A.E.I.O.U 네 그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합스부르크로 오헝제국을 만드셨어야죠
헝가리는 후냐디죠!
헝가리 십자가는 왜 꺾여있나요 선생님
성 이슈트반 왕관의 십자가가 실제로 꺾여서 그럽니다.
보스니아 빼고 베네치아 드시는 선택지도 있었을텐데요?
국명으로 아시다시피 베네치아 잡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이 아닌 대타협 이후 헝가리의 비중도 큰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모티브로 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