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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docdocdo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963
지난 8일 오후 5시 이화의대 의학관에서는 ‘한국성인지의학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성인지의학(Gender Specific Medicine)은 의학의 연구와 진료, 예방과 재활 등 의학의 전 분야에 걸쳐 남녀의 성차를 적극적으로 고려하고자 하는 새로운 개념의 의학분야이다. 본지는 국내에서는 아직 그 개념이 생소한 성인지의학의 개념과 역사를 살펴보는 차원에서, 이화의대 권복규 교수의 글을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http://www.docdocdoc.co.kr/upload/news/2005/weekly/2005/284/284-26-권복규 (이화의대 교수 / 의학사 · 의료윤리학)
1. 철학적, 인식론적 측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동물 발생론(De generatione animalium)>에서 오로지 남자만이 생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여성은 남성의 능동적 생식력(virtus activa)에 영양물질을 공급할 뿐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을 낳는다’는 원칙 하에 남성은 오로지 남성(아들)만을 낳아야 하는데 여자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남성의 능동적 생식력이 약화되었거나, 혹은 여성이 가지고 있는 질료의 불완전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여성은 남성이 되지 못한 인간이며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이론은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철학과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남성이었으므로 그들에게 여성은 항상 낯선 존재이자 타자, 완전하지 못한 남성으로 보였다.
교조적 기독교의 등장과 성립은 이러한 시각을 더욱 강화했다. 성서에 의하면 여자는 남자로부터 이차적으로 창조된 존재, 남자를 위해서 창조된 존재이며 더구나 그 여자를 통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으므로 남자에게 종속되어 죄값을 치러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창세기 3장 16절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는 내용이며, 디모테오 전서 2장 11절은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는 내용이다.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와 토미즘은 이렇듯 여성을 언제나 부차적인 존재로 취급했으며 여성의 역할은 가사와 생식의 영역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칸트-헤겔로 이어지는 근대 철학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헤겔은 “여성은 교육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고등과학이나 철학, 혹은 고급예술과 같은 활동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들의 행동은 보편적인 요청보다는 자의적인 충동과 견해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이성중심의 서양철학을 전복했다고 일컬어지는 니체 역시 “여자들에게 갈 때는 회초리가 필요하다”는 언급을 했을 만큼 남성중심적인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식의 인식 구조는 여성에게 고등교육과 정치적 권리가 허용되기 시작한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온존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태도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인 차별과 권리의 박탈 이전에 인간의 성차를 바라보는 근원적인 시각에 영향을 주었다. 즉 여성이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로서 취급될 자격이 없는 불완전한 인간이며, 남성만이 인간 종(homo)을 대변하기에 충분하다는 사고가 언제나 일반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인데, 남성에게만 이성이 있고 여성에게는 그것이 없으므로 여성은 인간으로서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에 대한 관심 혹은 연구는 언제나 남성의 그것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으며, 남성(인간)에 대한 연구의 변종, 혹은 잉여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2. 사회적 측면
20세기 이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교육 받은 의사는 거의 모두 남자였다. 여성은 사회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특히 인간의 몸과 질병을 다루는 의학은 특히 여성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분야로 여겨졌다. 무엇보다도 여성이 지식을 쌓거나 학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여성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의료 영역에서 여성은 병자의 간호, 혹은 관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민속의술(folk medicine)을 담당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육아와 가사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나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는 민속의술은 대개 여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술은 교양 있는 ‘신사 의사’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때로는 15~17세기 마녀 재판의 예에서 보듯이 남성 주류 사회의 심각한 비난과 탄압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마녀’로 취급된 여성들 중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약초, 민간요법, 혹은 점술 등에 대한 지식이 있고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치료 경험을 쌓은 연장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교육 받은 ‘남성’ 의사들은 우선적으로 남성 환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사회적으로 가치가 높다고 인정된 상류층 남성 환자들이 의학적 배려의 주된 대상이었다. 고급의학지식은 다른 고등 학문과 마찬가지로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분야였고 근대 이전에 이러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 상류층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민중, 노예, 그리고 여성은 고급 의학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민속의술에 의존하거나, 혹은 교양과는 무관하게 도제 교육을 받은 이발사-외과의(barber-surgeon), 혹은 떠돌이 외과의사나 약장사 등의 주변부 의료인에게 치료를 받았다. 여기서 예외는 상류층의 후손 번식을 위한 산과 및 부인과 분야 정도였다. 그러나 의학 지식과 무관하게 모성 사망률은 여전히 높았고, ‘생식 도구’로서의 여성은 사실상 얼마든지 대치 가능한 존재였다. 일부 교양 있는 의사들이 임신과 출산의 영역에 관심을 가졌다 해도 그 구체적인 실천은 원칙적으로 여성, 즉 여성 산파(midwife)의 일이었다.
여성의 몸과 질병에 대한 근대 이전의 무관심은 동양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대개 남성인 의사와 여성 환자 간에 강한 성적 금기가 있었기 때문에 의사들이 여성 질환을 자세히 경험하고 연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의학은 여성의 몸을 생식기를 제외하고는 남성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예컨대 동의보감의 ‘부인(婦人)’편은 소아(小兒)와 함께 ‘잡병(雜病)문’에 속해 있으며 다른 질병 서술은 모두 남성의 그것을 기준으로 한다. 게다가 부인편의 내용은 거의 전부 성생활과 임신, 출산, 수유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남아를 낳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부인과 소아를 주류 남성 집단의 잉여로 보는 사고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나마 동양의학은 음양(陰陽)의 조화로 건강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일부 질환에 대한 설명과 치료에서 남녀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신체-병리 현상을 과학적이고 실체론적으로, 또 ‘보편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서양의학에서 이러한 식의 사고는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의료접근도 역시 차이가 컸다. 남자는 몸이 아프면, 그리고 진료비를 지불할 수 있으면 의사를 찾아갔지만 여성은 자가 치료나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여성이 호소하는 증상은 흔히 ‘엄살’이나 ‘히스테리’로 간주되었다. 대부분의 문명에서 고통이나 아픔을 잘 참는 것이 보다 남자다운 일이라고 여겨지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증상을 호소하면 그것은 정말 아픈 것이지만, 여성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며, 엄살을 잘 부리고, 감정에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라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히스테리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hystera’에서 유래하였고 대단히 여성적인 증상으로 간주되었다. 덧붙여 자궁과 연관된 여성의 성, 월경, 그리고 성적 욕망 등은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혹은 지나치게 무시되었다. 전통 시대에 여성은 남성에게 성과 생식의 도구에 불과하였으며 여성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는 물론, 학계에서도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3. 생물학적 · 윤리적 측면
여성에 대한 빗나간 사회적 편견과 제약이 여성의 몸과 질병에 대한 연구를 가로막았지만 장애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육안해부학이 발달하면서 인체에 대한 해부실험이 활발해졌으나 그 대상이 되는 시신은 대부분 남자였다. 법의 목적의 부검이 아닌 경우-또 그렇다 하더라도-대부분의 해부용 시신은 사형수, 혹은 장례를 치러줄 가족이 없는 떠돌이들이었는데 이들 중에는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리고 젊은 남성의 육체가 근육과 장기를 가장 선명하게 잘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었는데 여성은 상대적으로 근육과 장기의 크기가 작고 체지방이 많으며 섬세하기 때문에 조악한 해부기술로는 남성보다 취급이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구조적 차이를 떠나서 남녀의 생리적 차이가 알려지게 된 것은 생식의학과 내분비학이 발달한 19세기 말 이후의 일이다. 인간의 생체 기능에 미치는 호르몬, 특히 남녀 성차와 생식에 미치는 호르몬의 영향이 알려지고 나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즉 주기적으로 월경을 하는 여성-또는 암컷 실험동물-은 호르몬 상태에 따라 각종 신체 현상과 검사 수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안전한 기준을 설정하고 실험 자료를 얻는 데 장애가 되었다. 따라서 호르몬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는 남성-또는 수컷 실험동물-이 대부분의 연구의 표준이 되었으며, 여성에 대한 연구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국한된 내용, 즉 생식생리와 산부인과 영역에 집중되었다. 인간에 대한 실험적 자료는 모두 남성의 것이었으며 여성은 이러한 자료를 ‘외삽(extrapolation)’하면 충분하다는, 별로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전제가 의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와 일본군의 잔혹한 인체실험에 대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뉘른베르크 강령으로 알려진,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있어서의 윤리 원칙이 수립되었고 그후 신약의 임상시험 등 각종 인간에 대한 연구는 매우 엄격한 윤리적 검토와 피험자의 동의를 얻어 실시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 되었다. 게다가 20세기 중반 임신부에게서 수천 명의 기형아를 낳게 만든 탈리도마이신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때까지의 ‘안전한 자궁’의 신화가 깨졌다. 즉 여성의 자궁은 태아에게는 아주 안전한 보호막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외부의 힘(약물, 방사선 등)으로는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기존의 이론이 무너지고 임산부와 태아의 취약성이 대단히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임산부, 그리고 장차 임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젊은 여성들을 의학 연구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결과를 빚었다. 1976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임산부, 혹은 가임여성을 임상시험에서 배제하는 규정을 만들어 이를 제도화하였다. 19세기 이전 여성들은 ‘연구할 필요가 없어서’ 배제된 반면, 20세기 중반 이후의 여성들은 ‘그들을 보호할 필요 때문에’ 마찬가지로 연구에서 배제된 것이다.
여성, 특히 임신부나 가임여성에 대한 의학 연구는 매우 복잡한 법적, 윤리적 문제들을 제기하며 이들은 낙태 및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 논란과도 깊이 결부되어 있다. 여성 특유의 생리적, 의학적 현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성을 연구해야 하지만, 이러한 법적, 윤리적 문제들로 인해 훨씬 더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된다. 더구나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자발적으로 임상연구에 참여하려는 경향이 낮으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여성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얻어내기가 불가능하다. 여성은 생물학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남성에 비해 연구하기가 훨씬 까다로운 존재라는 점도 과학적 연구의 시선이 이제까지 미치지 못했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첫댓글 와 좋은 글 고마워! 본문 가서 읽고 와야지
철학적 측면도 새롭다
남성 중심이 아닌 분야가 어디 있을까,, 아 가사노동이 있었네 ㅅㅂ
글 잘 읽었어. 의학 뿐인가 모든 분야가 그렇겟지 뒷 시다바리하는 직종들 빼고 ㅎ
지구상에 모든 자댕이들은 평생 남혐당해도 할말 없어야됨 ㅎ 역사적으로 여자가 당한 차멸과 멸시의 업보라고 생각해야지 빼액거리기나 할 줄 알지 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