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 20일 낮 12시 30분경 대구 광역시 대명동 소재 농협 내당동 지점엔 낯선 중년의 남자 네명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 왔다. 같은 시각 선의연대 부인부는 농협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이 부인부는 이내 그들이 박재일 전 이사장, 여상락 이사장 일행이라는 것을 알아 챘다.
부인부는 즉시 가까운 문화회관으로 연락했고 불교회 집행부측 청년부들이 회관 무단침입 이후 구축된 비상연락망을 통해 박재일이 대구에 떴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대구 전 회원에게 알려졌다. 박재일의 97년도 한영신협사건에서 5년이 경과한 후 발생된 사건이다.
이후 30분만인 1시경, 대구 선의연대 회원들이 속소 농협으로 들이닥치자 현장에서 박재일씨와 동행했던 여상락씨와 대구간부는 인출한 현금 23억을 들고 도주하였으나 박재일씨와 조직국장 김인수씨는 미처 도피하지 못하고 지하에 꼭꼭 숨어 들어야만 했던것이다.
선의연대 회원들은 불교회를 정상화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인식, 박재일씨와의 대화를 통해 불교회 사태 해결의 물꼬를 트길 염원했다. 그러나 박재일씨등은 자신들에게는 결정권이 없다는 변명만 앵무새 처럼 되풀이 하면서 탈출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의연대 회원들은 박재일씨의 희대의 연기를 목격하게 된다.
첫째는 경찰 변장 탈출기도였다. 박재일씨는 농협내에 진입한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경찰복으로 위장하고 한 경찰의 뒤에서 바짝 붙어 걸어 나왔다. 이 때 부인부들은 경찰복을 입은 어색한 사나이가 박재일임을 간파 색출해 내었다. 박재일씨는 007영화식의 탈출기법을 사용하려 했지만 부인부의 현명하고 엄한 佛眼(불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둘째는 박재일씨의 고질병인 꾀병이 발병 한 것. 첫 번째 탈출시도가 실패하자 정치권과 경제계의 거물급등이 비리등에 연루되었을 때 많이 사용하는 방식을 모방하려고 하였다. 데굴데굴 어러운 농협 바닥을 박박 기어다니는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직원과 경찰이 엠블런스를 불렀지만 名醫(명의)인 부인부는 '꾀병'이라고 진단, 엠블런스를 돌려 보냈다.
이것이 일국의 이사장이었던 자의 모습이라니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다. 이러한 겁쟁이가 이사장에 있었으니 법화경의 용지를 쓸 수 없어 돈으로 광선유포를 행하려 했음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대구의 선의연대는 몇 개 항목에 걸쳐 대화와 합의(-.지역주민에게 사과 -.농협직원에게 사과 -.선의연대 회원들에게 사과 -.비리감사를 받아라))를 요구 했으나 이들은 발뺌으로 시종일관했다. 이 사이 전국에 속속 몰려든 불교회측 청년부들이 농협진입을 시도했으나 선의연대의 강력한 연대에 번번히 실패했다.
4월21일 일요일 선의연대 1000여명은 대오를 갖춘 채로 계속 박재일과의 대화를 요구, 오후 4시무렵 전경이 강제 해산을 목적으로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부상자가 발생, 응급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팔짱을 낀 여자부를 잡아당게는 전경, 이를 거부하고 발로 전경을 밀치는 부인부, 전경의 군화발과 방패로 전신을 폭행당하는 장년부, 전경에 의해 짓밟혀 쓰러지는 부인부, 대열에서 떨어져 나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부인부, 장년부, 여자부, 남자부등 순식간에 농협 일대는 아비규환의 장소로 화했다.
곳곳에서 정의를 외치는 처절한 절규가 넘쳤으나 농협 내에 있던 박재일씨와 김인수씨는 내내 탈출 궁리에 여념이 없었다. 회원이야 경찰에 맞건 끌려가건 오직 그들의 머릿속엔는 '어떻게 하면 도망 갈 수 있을까?'는 일념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경찰이 농협 정문을 뚫은 시각은 진압이 시작된 후 3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전경은 농협 입구를 확보하고 박재일씨를 호위한채 어디론가 빼돌렸다.
전경이 빠져나간 후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 장을 방불케 했다. 주인 잃은 신살이 나뒹굴고 있었고 4차선 도로 위에 여기저기 실신해 있는 부인부, 눈물로 박재일의 비겁함을 호소하는 부인부, 현장은 온통 눈물과 분노가 한데 뒤섞여 4월 오후를 달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