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호테>와 얼싸안다
김용만
흔히 인간의 성격 유형을 <햄릿> 형과 <돈 키호테> 형으로 나눈다. 전자를 행동없이 생각만 하는 유형으로 본다면, 후자는 생각 없이 행동만 하는 유형으로 본다는 말이다. 물론 반론도 있지만, 세르반테스는 소설 <돈 키호테>에서 기사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독특한 성격을 창조함으로써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묘사의 대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돈키호테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 판사의 저속한 물질주의와 대조를 이루면서도 서로 상보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데, 두 사람의 그런 인간성은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느끼게 한다.
무협지를 탐독하다가 어떤 미치광이도 가져보지 못한 기이한 공상에 빠져 밤에는 황혼부터 동틀 무렵까지, 낮에는 동틀 무렵부터 어두울 때까지 책을 읽은, 익살스런 허풍쟁이였던 귀족 돈 키호테는 추진력이 강한 남성상의 전형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불가능하고 쓸모없는 비현실적인 공상에 사로잡힌 부정적인 인간상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이상을 향한 불굴의 투사형으로 부각된다. ‘쳐부수고자 하는 부조리, 바로잡아야 할 폐해, 처리해야 할 부채가 산더미같이 쌓여있어 자기가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있으면 그만큼 세상이 받는 손실이 크다는 생각’ 속에 빠져있는 동 키호테는 어쩜 오늘날에 꼭 필요한 인물인지도 모른다. 요령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치는 현실에 가차없이 창을 들이댈 용사. 돈 키호테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 하나만이 아닐 것이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출발하여 옛 고도인 톨레도를 지나자 정적이 감도는 마을 캄포 데 크리프타나가 나타난다. 아담한 전통 가옥들의 새하얀 벽이 강렬한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구불구불한 고샅길을 20여 분 걸어가니 집들 사이로 하얀 풍차들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그때 비쩍마른 애마(愛馬) 로시난테의 안장에 올라타고 창을 겨눈 돈 키호테의 환영(幻影)이 나한테 다가온다.
그 어이없는 고매한 자태를 보는 순간 나는 금방 이상주의자로 환원 된다. 찌들고 탈색된 내 육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이상주의가 돈 키호테를 만나는 순간 다시 활개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풍차가 있는 언덕으로 달려간다. 돈 키호테가 로시난데의 등에서 내려와 나를 부등켜 안는다.
"잘 오셨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소. 자그마치 400년 동안 기다린 거요. 그 사이 내 애마도 늙고 둘씨네아는 땅 속에 묻혔다오. 산초 판사는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오."
돈 키호테가 희미한 시선을 유채꽃이 만발한 평원에 던져둔 채 서럽게 울먹인다. 어느새 내 눈자위에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돈 키호테씨, 당신은 현실과 싸우느라 세월을 잊어왔지만 나는 비현실과 싸우느라 몸이 이렇게 삭았다오.
"나도 삭을 대로 삭았소. 나는 400년 동안 상상의 세계를 꿈꿔왔지만 이젠 정말 지쳤소."
"아뇨. 꼭 그런 시대가 도래할 거요. 당신은 키호티즘(Quixotism)을 완성했잖소. 그것이 전설로 남는다 해도 당신은 영원한 승리자요."
"당신은 종교를 만들었잖소."
“천만에요. 그건 종교가 아니라 어리석은 도그마일 뿐이었소. 나는 평생 그 어리석은 독단에 빠져왔소. 세상을 잘 못 산 거요. 허무와 싸우는 게 아닌데.....”
이번에는 내가 돈 키호테의 메마른 몸을 끌어안으며 울부짖는다. 그때 어디에선가 종소리가 들려오자 돈 키호테의 환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는 고샅길에 홀로 서서 땀을 훔치는 초라한 여행자로 남아 있다.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일상으로 돌아온 그 환멸에 맥이 빠진다.
세르반테스는 현실이 진짜가 아니고 가상이나 환상 같은 데가 있다고 믿었다. ‘진실과 꿈이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는 진리를 세르반테스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세르반테스가 만들어낸 동 키호테는 우스꽝스럽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창출해낸 세계를 믿는 의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돈 키호테는 상상의 세계가 현실인 듯이 행동하지만 둘씨네아 아가씨에 대해서처럼 현실을 환상으로만 보지는 않는다. 그는 ‘세상에 둘씨네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 아니다.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돈 키호테는 보잘 것 없는 여자 마리토르네스를 ‘어느 공주와 조금도 다름없는 아름답고 고귀한’ 여인처럼 느끼는데, 돈 키호테적 사랑이 때로는 여성을 만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모든 사랑의 시작은 다소 돈 키호테적이랄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근대라는 말을 사용하듯 세르반테스도 당대에 있어서는 근대적인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모더니스트라고나 할까. 그는 당시에 만연했던 기사도 작품의 인기를 타파하기 위해 <돈키호테>를 썼다고 하는데, <돈키호테>도 기사 이야기의 패러디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극작가인 세르반떼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 - 1616.4.23)는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생을 엮어간 사람이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조금 떨어진 대학도시이며 출판의 중심지인 아깔라 데 에나레스에서, 떠돌이 외과의사의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로드리고 데 세르반테스는 외과 의사라지만 정식 의사가 아니고 마을을 찾아다니는 떠돌이 의사여서 평생 구차하게 지냈다. 세르반테스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작해야 열일곱 살 때 연극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소년기의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그 고달픈 실정을 짐작할만하다.
21세에 마드리드에서 인문학자 로뻬스 데 오요스에게 배웠다는 자료가 있고, 이듬해(1569)에는 홀연히 로마에 나타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마드리드에 주재한 교황청 특사 꾸아비바 추기경의 시종으로 동행했다는 설과, 젊은 시절의 분별없는 행동으로 추방당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세르반테스는 현지에서 보병에 입대하여(당시 스페인은 이태리 남부를 지배), 이태리 여러 곳을 다니며 그 문화를 익혔고, 이듬해(1571)에는 그의 생애를 뒤바꾼 유명한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게 된다. 교황청. 스페인. 베네치아가 신성(神聖)조약을 체결, 기독교 공동의 적인 오스만 투르크와 대결한 이 전쟁은 서유럽이 거둔 대 이슬람 첫 승리전으로 기록되며, 이후 터키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이 격전에서 그는 가슴에 두 발, 왼팔에 한 발의 총상(혹은 언월도로 찔렸다는 설도 있음)을 입어 왼팔 불구자로 일생을 보내게 되어 '레판토의 외팔'이란 별명을 얻는다. 덕분에 왕의 아우인 해군제독 돈 후안 데 아우스뜨리아의 추천장으로 대망의 귀국길에 올랐으나 프랑스 리용만에서 회교계 해적에 피납되어, 알제리로 끌려가 5년간 갇혀있다가 신부들 도움으로 배상금을 내고 석방된다. 그는 한때 유랑극단에 참가하여 희극배우 노릇까지 했다고 한다.
세르반테스는 여배우와 잠시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가졌으나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기대했던 출세의 길도 걷지 못한 채, 18세 연하인 소지주의 딸 빨라시오와 결혼한다. 하지만 1년만에 다른 여인에게서 아이를 갖는 등 사이가 악화되어 2년만에 떠돌이 생활로 돌아간다.
소설 창작만으로는 생활을 지탱할 수 없던 그는 무적함대(국왕 펠리페 2세가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과 대결전을 각오하고 준비중이던)에 납입할 밀보리 구입계원이 되어 안달루시아 지방을 두루 다니던 중 교회로부터 파문 당하기도 한다. 창고의 밀을 무단 매각한 죄로 벌금형을 받았는가 하면, 무적함대의 패배(1588) 이후 그라나다의 세금 징수원이 되어 다시 안달루시아 지방에 갔지만 징수한 예금을 맡았던 은행가가 도주하는 바람에 옥살이를 하고, 그 뒤에도 또 다른 이유로 투옥 당한다. 세르반테스는 이때 <돈 키호테>를 구상, 일부는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옥후 바야돌릿에서 여동생 둘, 질녀, 딸 등과 어렵게 지내는 동안 출간된 <돈 키호테> 전편(1605)이 일약 유명세를 탔으나, 집 앞에서 중상을 입은 기사를 치유해 주다가 그가 죽게 되자 또 투옥 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바야돌릿에서 수도 마드리드로 이주(1608), 후원자 레모스 백작이 나폴리 총독에 임명되자 동행을 바랐지만 탈락, 창작에 전념하던 중 <돈 키호테>의 가짜 후편이 나돌게 되어 서둘러 <후편>을 완성 출간(1616)한다.
세르반테스는 죽음을 앞두고 후견인 레모스 백작에게 ‘나는 지금 목숨을 거두오. / 다른 세상에서도 만족하고 있는 당신들을 만나고 싶소.’ 라고 편지를 쓴다. 그의 유해는 마드리드 우미아델로 수도원에 묻혔다가 깐따나라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스파냐 문학의 황금기에 등장한 그는 섹스피어, 몬테뉴 등과 동시대 사람이며, 공교롭게도 섹스피어와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