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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평택아름다운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agenda21
1.평택호의 지리와 역사
1)평택지방의 지리
(1)구릉과 하천사이에 평야가 펼쳐진 고장
평택시는 전체 면적이 452㎢입니다. 이 면적은 경기도의 23개 시(市) 8개 군(郡) 중에서 5번째로 넓은 면적입니다. 평택시에서 가장 넓은 지역은 팽성읍이고 가장 좁은 지역은 통복동입니다. 평택의 지형은 동북쪽이 높고 서,남,동 쪽으로는 평탄지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위면 지역은 용인시를 지나온 광주산맥의 남은 줄기가 서탄면 마무리까지 뻗어있고, 북동쪽은 차령산맥의 지맥인 천덕산 줄기가 덕암산과 부락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쓰여진 산경표에 의하면 평택지방은 한남금북정맥이라고 하여 속리산 문장대에서 한남정맥으로 이어지는 곳의 중간에 해당합니다. 한남금북정맥은 평택시 주변에 올망졸망한 구릉을 만들어놨는데, 평택에만 해도 덕동산(해발 30m), 자란산(해발 30m), 매봉산(해발 30m)가 있습니다.
근대 이전에는 나라의 경계나 행정지역은 대부분 산과 강을 경계로 하였습니다. 산이 적은 평택지역의 행정구역은 대부분 강(하천)이 경계였습니다. 우리고장은 지형이 낮고 바다가 가까워서 하천이 많습니다. 평택지방의 대표적인 하천은 안성천과 진위천입니다. 안성천은 삼한시대에 웅천강(곰내)으로 불렸고, 홍경천, 소사천 등으로도 불렸던 하천으로 만경강이나 동진강보다 길이나 수량이 많은 하천입니다. 진위천은 조선 전기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장호천으로 불렸던 하천으로 진위면 하북리에서 오산천과 합류하고 서탄면 황구지리에서 황구지천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오성면 창내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하여 평택호로 흘러듭니다. 안성천과 진위천 외에도 평택지방에는 오산천, 황구지천 등 중급규모의 하천이 있으며, 통복천, 도일천, 번성천, 지산천, 수월암천, 둔포천, 청호천, 도대천, 관리천과 같은 작은 하천이 있습니다. 이들 하천은 모두 안성천, 진위천의 지류로서 합류하여 평택호로 모여듭니다.
안성천과 진위천 그리고 지류에 속하는 여러 하천들은 드넓은 평택평야의 젖줄입니다. 평택평야는 일제강점기만 해도 대부분 저습지거나 해택지였고 조수가 안성천 중, 상류까지 역류해서 해일로 인한 제방의 유실과 염해(鹽害)를 자주 입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의 농토들은 3년에 한 번 꼴로 수확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염해(鹽害)를 막기 위한 제방과 농업용수를 얻기 위한 제언(저수지)과 보를 축조하였습니다. 제언이나 보가 축조되었던 마을은 1977년에 완공된 아산만 방조제 건설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평택호 덕분에 대부분 농경지로 변했지만 아직까지 방축리, 방죽안과 같은 지명으로 남아있습니다.
<평택시의 지형과 하천 분포도>
(2)평택시의 인구와 인구분포
조선시대 평택시는 경기도 진위현과 충청도 평택현을 중심으로 직산현 지역과 수원부 지역, 양성현 지역이 복합적으로 섞여져 있었습니다. 1789년에 편찬한 호구총수(호구, 인구조사기록)에는 진위현 13개 면에 모두 2,137호(戶) 7,093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중에서 남자는 3,484명, 여자는 3,609명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많았습니다. 이 인구는 1호(戶)에 평균 3.3명으로, 일반적으로 많은 가족이 함께 생활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평택현의 경우는 1,524호(戶)에 5,860명으로, 이 가운데 남자는 2,884명, 여자는 2,976명으로 여자의 숫자가 조금 많았습니다. 두 개의 현을 합치면 12,953명이고, 두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던 고덕면 일부와 오성면, 청북면, 현덕면, 포승면 그리고 평택시의 월곡동, 죽백동, 소사동, 유천동지역을 합하면 대략 2만 명 이상 살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1960년에는 그동안 인구 급증으로 전체인구가 155,879명으로 늘어났으며, 미 공군부대 배후 기지촌으로 성장하던 송탄의 인구가 34,143명으로 급증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평택의 인구는 24,873명, 송탄과 마찬가지로 안정리에 기지촌이 형성되었던 팽성읍의 인구는 18,742명이었습니다. 일반 면 단위 지역에서는 오성면이 14,543명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고 옛 진위면이 8,295명으로 가장 적은 수의 사람이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옛 평택지역 행정의 중심이었던 진위지역이 교통의 중심에서 벗어나면서 급격히 쇄락한 것은 이채롭습니다.
1960년대 이후 평택지방은 도시가 확대되면서 인구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1980년의 인구조사를 보면 전체 인구는 234,356명으로 늘어났고, 지역별로는 평택과 송탄의 인구가 6만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예컨대 이 해에 송탄의 인구는 63,911명이었으며, 평택은 60,815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인구증가와 도시발달로 송탄은 1981년 송탄시로 승격되었으며, 평택도 1986년 평택시로 승격되었습니다. 읍, 면 단위에서는 팽성읍이 31,028명으로 증가하여 인구 3만 명을 넘어섰고, 가장 적은 지역은 서탄면으로 불과 6,826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인구의 도시집중과 농촌인구의 도시 이주에 의한 현상이었습니다.
현재 평택시의 인구는
(2)평택호 물줄기 주변의 마을이름 땅이름
평택지방은 육지보다는 개펄이 반반이었고, 농경지보다는 저습지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바닷가는 생선과 소금의 이로움이 있어 사는 것이 낳기는 하지만, 바람이 많아서 얼굴이 검어지기 쉽고 각기병, 수종, 장학 등의 풍토병이 많으며, 샘물이 모자라고 땅도 개펄이며 혼탁한 조수가 들어와 운치도 적다”고 적고 있습니다. 특히 평택지역은 서부지역에 “소금 굽는 일에 종사하는 집이 수백 호(戶)나 되고 뱃길이 편리하지만, 거친 땅과 기름진 땅이 반반이고 목화재배에 알맞지 않아서 사람살기에는 크게 유익하지 않는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만 해도 이 지역은 생활환경이 지금과 많이 달라서 사람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체 있는 사족들이나 명문가들보다는 흉년이나 홍수 또는 지배층의 수탈을 피해서 떠돌던 사람들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정착하는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택호와 아산만 그리고 평택호로 흘러드는 물줄기 주변의 마을 이름이나 땅이름에는 바다와 하천에 기대어 살았던 민중들의 팍팍한 삶이 뭍어 있습니다.
①평택시
*소사(素沙) :
평택에는 소사벌, 소사천, 소사동 등 소사(素沙)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안성 천도 조선 후기에는 소사하라고 불렸던 적도 있습니다. 소사(素沙)라는 말은 흴 소(素)자 에 모래 사(沙)를 쓰는데, 원 소사마을 앞 냇가의 배후습지에 흰 모래톱이 형성되어서 붙 여졌습니다. 조선시대에 원소사 마을은 삼남대로가 지나가는 큰 길목이었고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관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사내를 가로지르는 나무다리가 놓여져서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많았습니다. 일제 강점 초기만 해도 소사내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오고 소금이나 강다리와 같은 생선을 실은 작은 배들도 들어왔습니다.
*서지골 :
소사동에서 원소사 마을 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조 세를 쌀이나 각종 곡물로 받아서 각 지역의 지정된 창고에 보관했다가 배나 수레로 한양 까지 운반하였습니다. 서지골에는 조세를 보관하는 조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창의 세 곡을 운반하기 위해 쇠죽을 쑤어 먹이던 마굿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쇠죽꼴로 불렸다 가 나중에 음을 순화시켜서 서지골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창말 ;
소사동에서 동방학교가 아래쪽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나루터가 있었으며,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 추수 때 거둬들이는 의창(義倉)과,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궁민(窮民)을 구휼했던 사창(社倉)이 있던 마을입니다.
*배다리 :
배다리는 영풍원 옆의 배다리 방죽에 있었던 다리입니다. 배로 다리를 놓았기 때 문에 주교(舟橋)라고도 하고 그냥 배다리라고도 부릅니다. 배다리는 소사동에서 갈원(칠 원동)으로 이어진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어서 매우 중요한 다리였습니다. 그래서 매 우 중요했지만 배다리 방죽이라는 저수지가 생기고, 근대 들어 신작로에 밀려 교통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없어졌습니다.
*조개터 :
합정동 공설운동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조개터 앞에는 안성천의 지류인 백 량천이 흐르고 바닷물이 이곳까지 역류하여 부전조개 등 많은 조개들이 서식하였습니다. 가난한 민중들은 이곳의 조개를 채취하여 생계에 보탬을 주었기 때문에 조개터라는 이름 이 생겼다고 합니다. 합정동이라는 이름도 조개 합(蛤)자를 쓰고 있어 “조개우물”이라는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현재는 재개발사업으로 택지 및 상업용지로 탈바꿈하고 있는 마을 입니다.
*배미 :
합정동 평택고등학교 동쪽 마을이며, 야미(夜味)라고도 부릅니다. 배미라는 말은 바 다나 강쪽에 돌출된 지형을 말하는데, 이 마을의 지형이 안성천 배후습지 쪽으로 돌출되 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황룡동 :
유천동을 이루고 있는 자연마을 이름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 때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다고 해서 군두포(軍頭浦)라고도 부르고, 안성천 갯가에 나루터가 있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신포리(新浦里)라고도 부릅니다. 전설에 따르면 안성천 변에 용이 승천 한 웅덩이(용담)가 있었다고 해서 황룡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군문동 :
군문동은 조선시대에 군물진(軍物津)이 설치되었던 큰 나루였습니다. 이 나루는 조 선시대 10대로 가운데 하나였던 충청로가 지나가는 나루였고, 평택지역의 경우 경기도 진위현에서 충청도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였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빈 번하였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때에는 청나라 군대가 작은 배를 이용하여 이 나루로 상 륙하고 진을 쳤다고 해서 “군문포(軍門浦) 바꿔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통복개 :
통복동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통복개”라고 불렀습니다. 통복개라는 지명은 통복 천 갯가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주차장 등으로 만든 통복천 배후습지는 1977년 아산만 방조제가 최종 완공되기 전만 해도 갯벌이었습니다. 19세기에 편찬된 진 위현 읍지(邑誌)에는 이곳에 “통복보”가 있었다고 하는데 위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통 복동”이나 “통복천”과 같은 지명도 통복개에서 나왔습니다.
*화촌 :
화촌은 안성천 변에 인접하여 나루가 있었던 마을입니다. 화촌이라는 이름도 곶이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졌다고 합니다.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만 해도 화촌 나루에 는 소금이나 새우젓, 각종 어물과 생선들이 들어와 거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장터도 열렸 다고 합니다. 그러나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배들이 들어올 수 없고, 화물운송이 철도나 자 동차로 이뤄지면서 쇠퇴하였습니다.
*삽다리 :
신대동의 자연마을입니다. 삽다리(揷橋)는 작은 개울가에 놓는 나무다리를 말합니 다. 이 마을에는 안성천의 지류들이 휘돌아 흘러 삽교를 놓았다고 합니다.
*고잔 :
신대동의 자연마을로 가장 오래되었습니다. 고잔이라는 이름은 “곶안”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곶”은 바다 쪽으로 돌출된 지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고잔이라는 말은 “바다 로 돌출된 지형의 안쪽 동네”라는 뜻입니다.
*세교동 :
일명 “잔다리”라고 부릅니다. 이 마을은 잔다리 벌잔다리, 안잔다리, 은실로 이뤄졌 는데, 통복천을 건너는 가는 나무다리가 놓여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이 나무다리들은 콘 크리트로 변하였고, 옛 마을들은 아파트 빌딩 숲으로 가로막혀 보이지 않습니다.
②팽성읍
*계양 :팽성읍 노양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이 마을 앞으로는 평택호 물줄기가 유입되는 수로가 있고, 마을 앞에는 큰 제방이 있습니다. 이 수로(水路)는 고려시대 하양창이 있던 나루이며, 조선시대에는 경양포라고 불렸습니다. 하양창은 충청도 서북부, 경기도 남서부의 세곡을 모아 개경으로 실어가던 조창이었습니다. 조선이 건국된 후 하양창이 아산의 공세창으로 옮겨가면서 이 포구는 경양포라고 불렸고, 직산현의 세곡을 모아 한양으로 실어갔습니다. 아산만 방조제 물막이가 최종 완공된 1977년 이전만 해도 배가 들어와서 어업과 상업이 이뤄졌습니다.
*노산 :
노양리의 자연마을로 꽃동산이라고도 부릅니다. 꽃동산은 봄이면 마을 뒷산(꽃산)이 꽃이 만발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노산에는 조창(租倉)이 있었고, 상업과 어업이 번성했던 마을입니다. 그래서 고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마을이 번창하여 수 백호가 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조건 때문에 특산물로는 어란(魚卵)이 유명하며, 시집온 새악시가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집이 많았다는 말이 전해옵니다.
*도두리 :
조선 후기 만해도 배가 드나들어서 돛머리라고도 했고, 삼국시대에 돈두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당나라로 가는 사신들이 이곳에서 쉬어가기도 했다고 해서 이름이 만들어진 마을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돈두정리라고도 불렸습니다.
*대추리 :
혼지머리라고도 불리는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시기 이 마을에는 혼지머리 나루라는 큰 나루가 있었습니다. 이 나루는 당나라로 가는 해상통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당나라로 가는 사신이나 당진, 서산, 당은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이 나루를 왕래하였습니다.
*서근보 :
석근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석근리에는 둔포 쪽에서 바닷물이 유입하였는데 그 바닷물이 석근리 윗쪽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포구(浦口)가 만들어졌고 배들이 왕래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근포라고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 바닷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보를 쌓았기 때문에 서근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석봉리 :
이 마을은 안성천의 갯가에 위치한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앞에는 검은돌(黑石)로 된 봉우리가 있어서 흑석리라고 불렀는데 조선 말기에 흑석리를 한자어로 고쳐 석봉(石峯)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마을에는 나루가 있어서 군물진이나 아산만으로 나갈 수 있었다.
③고덕면
*원동고 :
동고리의 자연마을입니다. 동고(東古) 마을은 홍수로 오래된 엄나무 묘목이 떠내려와서 자랐기 때문에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아래소청이라고도 불렀는데, 마을 앞에 아래소청나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아래소청나루는 경기도에서 충청도 평택현이나 아산현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많았고, 소금과 새우젓이 거래되는 장(場)이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마을 앞에 농경지로 변하여 옛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소시동 :
방축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이 마을은 고려 말 소씨 성을 갖고 시랑(侍郞) 벼슬을 하던 사람이 낙향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소시동 또는 소시랑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을은 조선 후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마을 앞은 넓다란 갯벌이었는데, 이 곳에 활 연습장이 있어서 활딱지라고도 부릅니다. 지금은 조선 후기부터 진행된 간척사업으로 내륙 깊숙이 들어온 마을이 되었습니다.
*율포리 :
일명 밤개울, 밤개로 불리는 마을입니다. 조선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간척사업이 있기 전까지는 서정천을 타고 바닷물이 역류하여 나루가 형성되었고 해산물이 들어왔습니다.
*좌교리 :
마을 앞에는 좌교천이 흐르는데 이곳을 건너는 낮은 다리가 있다고 하여 일명 “앉은다리”라고 부릅니다.
*해창리 :
조선시대에 해창(海倉)을 두었던 마을이다. 이곳 해창은 남양만 아래쪽의 수원지역과 진위현의 세곡(稅穀)을 모아 저장하였다가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옮겨가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변지역에서는 큰 마을이었으며, 사람의 왕래가 많았습니다. 원해창은 해창나루가 있던 마을이며 창고는 대창(大倉)마을에 있었습니다.
④오성면
*교포리 :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앞에 바닷물이 들어오고 갯벌이어서 작은 포구가 있었고 나무다리를 놓고 건너다녔습니다. 그래서 다릿개라고 하였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한자로 변형하여 교포리라고 하였습니다.
*월랑촌 :
오성들이 간척되기 전 이 마을에 가려면 저습지와 작은 개울들을 건너서 가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똘건너라고 하였는데 한자표기로 월량촌이라고 하였습니다.
*당거리 :
당거리는 안성천 하구 바닷가에 위치하여 어업이 발달했던 마을입니다. 그래서 풍어(豊漁)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이 발달하였습니다. 옛날에 이 마을에는 일곱무당이 있어서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막힌 후 어업이 쇠퇴하면서 무속신앙도 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당거리 마을의 당제(堂祭)는 아직도 마을 공동으로 크게 드려지고 있습니다.
*길마원 ;
당거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일제 강점기 간척사업을 하면서 형성된 마을인데, 간척사업을 할 때 소에다 길마를 얹어서 흙을 날랐던 곳이라고 하여 “길마지”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길마원으로 바꿔 불렀다고 합니다.
*길음리 :
이 마을은 본래 갯가에 위치해서 습지가 많아 땅이 질었기 때문에 “질음”이라고도 부르고, 닭울음소리가 났다고 해서 “계음”이라고도 불렀는데, 나중에 길음리로 한자표기 하였던 마을입니다.
*미촌 :
길음리의 자연마을로 미삐라고도 부르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갯가에 위치한 낮은 지대여서 밀물과 썰물 때 토지의 유실이 심하고 염해(鹽害)를 많이 입었던 마을입니다. 그래서 마을 전체가 폐촌되었는데, 나중에 새로 형성되었습니다. “미삐”라는 말은 방언인데 “밑빠진 독”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대조두 :
숙성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옛날 이 마을 앞은 갯벌과 바다였습니다. 그래서 밀물 때 바닷물이 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다고 해서 “밀머리”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한자로 조(潮) 두(頭)라고 불렀습니다.
*안화리 :
진위천과 관리천이 합하는 지점이라고 해서 “우다내”로 불렸던 마을입니다.
*양교리 :
마을 앞 관리천이 흐르는 곳에 작은 다리가 두 개가 있어서 “양다리”라고 불렸던 마을입니다.
*창내리 :
해창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창내(倉內)라고 불렀는데,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습지였던 지역이 간척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원창내, 구창내, 신창내 같은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⑤현덕면
*권관리 :
조선 말기 수원군 가사면에 속한 지역으로 곶이 형성되어서 “가사곶‘이라고 불렸습니다. 권관리에는 고잔, 계두봉, 계두진 같은 자연지명이 많은데, 모두 아산만의 바다와 관련되었습니다. 고잔이라는 지명은 ”곶의 안쪽“을 의미하고, 계두봉은 아산만 방조제 초입 아산정이 있는 바위 봉우리이며, 계두진은 계두봉 아래에 있었던 나루입니다. 특히 계두진은 이 지역에서 아산이나 당진 쪽으로 갈 때 이용했던 나루였습니다.
*대안리 :
구진개, 큰박골, 작은박골, 사랑현, 의경재와 같은 자연마을이 있습니다. 구진개는 구진나루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진의 구(鳩)는 갈매기를 뜻하는 글자로 갈매기가 많이 날아들었다고 해서 붙여졌습니다. 큰박골, 작은박골은 마을에 돌무더기가 많아서 붙여졌습니다. 이 돌무더기는 아산만을 통하여 왜구나 수적(水賊)들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이어서 마을을 방비하기 위해 쌓았다고 합니다.
*신왕나루 :
신왕리에 있는 나루입니다. 고려시대까지 이 곳에 광덕현이 있었기 때문에 광덕나루라고도 부릅니다. 이 나루는 아산의 백석포나 창용리 구룡말로 건너가는 큰 나루였습니다. 아산만 방조제가 준공되기 전만 해도 이 나루를 통하여 어업도 발달하였는데 방조제 건설후 쇠퇴하고 나루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리 :
도대리는 지형이 배의 돛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돛대”, “되때”라고 불려지는 마을입니다. 마을 이름이 바다와 관련된 돛대인 것은 주변지역이 간척되기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갯고랑이 있었고 그곳에 고목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배위에 돛대를 세운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옛 수로(水路)와 갯벌이었던 지역이 간척되어서 내륙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왕좌봉 :
권관리에 있는 봉우리입니다. 이 봉우리는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러 공주로 가려고 계두봉 아래 계두진에서 배를 타고 아산으로 건너가려다 이곳에서 쉬어갔다고 해서 왕좌봉이라는 전설이 있는 봉우리입니다.
*황새울 :
권관리에 있는 자연마을로 “문곡마을”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 마을에는 황새가 많이 날아와 서식하였으므로 황새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은곡 :
덕목리의 자연마을로 은골 또는 연화동으로 불립니다. 이 마을은 고려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공주가 고려로 올 때 같이 왔다가 정착한 곡부 공씨들의 동족마을입니다. 특히 어촌공은 고려 멸망 후 절의를 지켰다는 어촌공이 낙향하여 은거하였다고 해서 은곡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장수리 :
옛날에는 산너머 해변가에 마을이 생겼다고 해서 “두메”라고 불렀는데, 1970년대에 지명을 정리하면서 두메라는 단어의 느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장수리라고 하였습니다. 장수리는 긴 해변을 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⑥포승면
*곡교 :
포승면 원정리에 있는 자연마을입니다. 이 마을 앞에는 개울을 건너는 굽은 돌다리가 있어서 “굽은 다리” 또는 “고분다리”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한자음을 따서 곡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마을이 포승공단에 수용되어서 집단 이주했습니다.
*호암 :
원정리의 자연마을로 “범바위”라고 불렸습니다. 원정리에서는 봉우재 동쪽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래서 해산물이 풍부하고 어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러다가 해군 제2사령부가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집단 이주당하여 현재는 산 건너편 수도사 입구에 집단취락을 이루고 있다.
*원정리 :
원정리는 8개의 자연마을로 나눠져 있는데, 원 원정마을에는 고려, 조선시대에 국가가 경영하는 목장(牧場)이 있었습니다. 이 목장은 홍원목장의 관할 아래 있었는데, 방목하는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토성(말목장)을 쌓았습니다.
*봉우재 :
조선시대 양성현 지역으로 괴태곶 봉수가 있어서 봉우재라고 불렀습니다. 이 봉수는 남으로 팽성읍의 망해산 봉수와, 화성군의 흥천산 봉수와 연결되었습니다.
*멍거니 :
원정리 북서쪽에 삐쭉 나온 곶으로 된 반도입니다.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지금은 기호물류 등이 자리잡아 본래의 모습이 없어졌습니다.
*괴태장 :
괴태곶 봉수 밑의 마을로 조선시대에 홍원목장에 딸린 목장이 있었던 마을입니다.
*승학동 :
내기리의 자연마을입니다. 마을의 모양이 학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모양이어서 승학동(乘鶴洞)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도곡리 :
자연지명으로 “뒷들” “도틀”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을은 들판의 뒤쪽 마을이라고 해서 뒷들이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고, 마을 뒤 불당산에 절이 있어 승려들이 수도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도틀”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는 조선 후기 이 마을은 너무 가난해서 날품팔이를 해서 곡식을 되뜨기로 구해 먹고살았다고 해서 “되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주장이 가장 신빙성이 있습니다. 도곡리라는 이름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무수:
도곡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조선 초 최성윤이라는 사람이 처음 개척한 마을로 “세상의 근심을 잊고 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에서 “무수(無愁)”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당두 :
도곡리의 자연마을인데, 당집이 있어서 “당머리”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로 “당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 앞에는 커다란 염전이 있었는데 포승국가공단이 건설되면서 없어졌습니다.
*만호리 :
만호리에는 조선시대에 “만포(滿浦)”라고도 하고 “대진” 도는 “한진”이라고도 하는 나루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느지”라고 부르는데 의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포나 대진, 한진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현재 이곳에 평택항이 자리잡았고 마을 위로 서해대교가 지나가는 것은 옛 나루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원터 :
만호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원(院)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지명은 역원이 있었거나 관리들이 머물렀다는 의미인데, 본래 포구는 국가 행정의 말단기관으로 관리들이 주둔했었고, 만호리 대진나루가 군사적으로나 교통로 확보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은 포승국가공단 건설과 평택항 건설로 마을의 일보가 사라지고 이주민이 많아져서 원래 모습이 많이 변모했습니다.
*연암 :
원만호 마을 우측에 있습니다. 한자로는 “제비바위‘이지만 본래는 ”솔개바위“라고 불렀던 것을 한자로 연암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가 평택항 건설로 완전히 내륙으로 들어왔습니다.
*원희곡 :
희곡리의 자연마을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입니다.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마을 앞에 갯벌이 형성되었고 바닷물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희여울” “흐열”로 불렸는데, 한자로 희곡리라고 표기하였습니다.
*가장동 :
신영리의 자연마을입니다. 본래 물이 많고 좋은 논이 많아서 가장동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그보다는 벽장골로 많이 불려집니다. 벽장골이라는 말은 이 마을이 워낙 으슥하고 후미져서 도피자들이 많이 숨어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신전포 :
신영리의 자연마을로 옛날에 초지에 밭을 개간하였기 때문에 “새밭 땅”이라고 불렸고, 마을 앞에 나루가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용하기도 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신전포”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중간촌과 직산말 :
신영리의 자연마을로 중간촌은 “양성말”로 불렸습니다. 본래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양성현 땅과 직산현 땅이 만나는 경계였기 때문에 마을 이름도 행정구역 명칭을 따른 것입니다.
*이평 :
방림리의 자연마을로 옛날에 군대가 진을 쳤다고 해서 “진틀”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의 군대는 해안방어를 위한 “진(鎭)”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진틀이라는 지명을 진흙틀로 생각하고 “이평리(泥坪里)라고 했습니다.
*토전촌 :
방림리의 자연마을로 “성(城)너머”라고 부릅니다. 이 마을은 활과 화살을 만들었던 마을이어서 활 전(箭)자를 써서 토전촌이라고 부릅니다. 이 마을이 활과 화살을 만들게 된 것은 이평 마을의 진(鎭)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하전촌 :
방림리의 자연마을로 “살치미”라고도 부릅니다. 이 마을도 조선후기가지만 해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활과 화살을 만들던 마을입니다.
*감기 :
석정리의 자연마을입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만 해도 이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마을 앞에는 갯벌이 펼쳐졌습니다. 일명 감탕개라고도 부르는데, 바닷물이 들어오면 멱감을 수 있는 곳이어서 붙여진 것입니다.
*현석 :
마을에 검은 돌이 많아서 “검은돌”이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현석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성외 :
석정리에서 가까운 홍원리에는 조선시대에 홍원마장이라는 말목장이 있었습니다. 이 말목장의 말들은 방목하였는데, 말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홍원반도를 가로질러 장성(長城)을 쌓았습니다. 이 마을은 장성(長城)의 바깥쪽 마을이어서 “성밖‘으로 부르다가 한자음을 따서 성외(城外)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해조 :
해조골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 홍원마장의 목부(牧夫)들이 거주했던 마을입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마을 앞은 갯벌이어서 바닷물이 들어왔습니다. 해조(海潮)라는 말은 바닷물이 처음 닿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장 :
이 마을은 홍원마장이 있던 마을입니다. 마을의 지형도 북동쪽으로 부드럽게 패여서 목장터로 안성맞춤입니다.
⑦청북면
*대곡 :고잔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보통 서대울 또는 큰골이라고 부른다. 주변 골짜기 중에서 큰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원고잔 :
고잔리의 자연마을로 고령 신씨들의 동족마을이다. 본래는 “도마지”라고 부르는데, 신숙주의 후예들이 이 마을로 도망와서 숨어살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삼계리 :
남양만의 바닷물이 역류하고 세 갈래의 하천이 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옹포 :
삼계리의 자연마을로 남양만 방조제 건설이 있기 전에는 바닷물이 이곳까지 역류하여 새우젓배 등이 드나들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새우젓독을 팔았기 때문에 옹포(擁浦)라고 부르게 되었다.
*월곡 :
삼계리의 자연마을이다. 보통 “윗삼계” 또는 “달마골”이라고 부르는데, 마을에 비친 달빛이 아름다워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어소리 :
옛날 이 마을에는 큰 양어장(漁沼)가 있었기 때문에 어소리라고 불렀다.
*구설창 :
어소리의 자연마을이다. 설창(雪倉)은 관가의 곡식을 보관하던 겨울창고를 말하는데, 시대는 분명하지만 이 마을에 설창이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설창은 옛 용성현의 치소(治所)였던 용성리 설창마을에도 있는데, 본래 이 마을에 있다가 나중에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옥길리 :
일제강점기 이전만 해도 옥길리는 해변가여서 사람들은 조개 등 해산물을 잡아서 생계를 이었다. 그런데 이 조개껍질이 옥같이 아름다워서 옥길리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토진리 :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만 해도 마을 앞 진위천 변에는 바닷물이 역류하였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토진(土津)이라는 나루터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루터의 이름을 따서 토진리라고 불렀다.
*고좌 :
토진리의 자연마을이다. 보통 “높은자리”라고 부르는데, 주변이 간척되고 남양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높은 곳에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망포 :
한산리의 자연마을이다. 보통 “망개울”, “방죽거리”라고도 부른다. 망포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나루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래하였고, 망개울은 마을 앞 진위천 지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방죽거리는 마을 위쪽에 방죽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판교 :
한산리의 자연마을이다. 마을 앞 진위천변에 널빤지로 된 다리(판교)가 놓였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다. 다른 이름으로 장이 섰다고 해서 “너더리 장터”라고도 부른다.
*무릉골 :후사리의 자연마을 이름이다. “능골”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무사들이 이 마을에서 무예를 닦았다는데서 유래한다.
*신포 :
남양만 방조제 건설 전에는 이 마을까지 바닷물이 역류하여 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는 새로 만들어진 나루라고 해서 신포라고 했으며, 이 곳에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지금도 장(場)이 선다.
⑧서탄면
*농소리 ;금각리에 있는 자연마을입니다. 이 마을의 논 가운데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두 개가 있어서 용의 눈과 같다고 해서 “용소말”로 부르다가, 샘을 메구고 농경지로 만들면서 농소리로 부르게 되었다.
*상금각 :하금각 마을과 함께 진위천이 범람하는 곳에 있어서 장마 때 모래가 쌓인 자리에 마을을 이루면서 금각이라고 하였다.
*내천리 :
황구지천의 하류 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장마철에 급하게 길을 가는 어느 나그네가 황구지천 강가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 수 없게되자 “어찌하리오”하고 탄식하였다고 해서 어찌 내(奈)자를 써서 내천리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말머리 :마두리의 자연마을이다. 마을의 역사가 1천년이 넘는 마을로 마을의 모양이 말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심교리 :
수월암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옛날에 도도리에서 이 마을로 건너려면 다리가 있어야 햇는데 없어서 어느 부인디 큰 돌을 안아서 징검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심교라고 불렀다.
*적봉리 :마을의 산봉우리가 붉은 황토 빛이어서 “적봉리(赤峰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황구지리 :
황구지천과 진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황구지리는 조선시대 “항곶포”가 있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진위천이 홍수가 나면 황토물이 마을을 뒤덮고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서 “황구포(黃口浦)로 불려졌다.
2)평택지방의 나루와 포구
근대 이전 철도교통과 육로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주로 수로(水路)와 해로(海路)가 교통과 통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국가운영의 근간이 되는 조세(租稅)의 운송은 거이 대부분 내륙 수로와 해로(海路)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조선과 같은 나라는 안전한 조세운송로의 확보와 교통 통신망의 확보를 위해 주요 해로(海路)에 성(城)을 쌓고 진(鎭)과 영(營)을 설치하였고, 내륙수로에는 조창(租倉)을 설치하였으며, 나루와 포구를 말단 행정구역으로 삼아 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평택과 주변지역의 연안과 내륙수로 주변에는 나루와 포구를 중심으로 성(城)이 축조되고 교통로가 형성되었습니다. 예컨대 평택지방과 가까이 있는 황구지천 중류 항곶포 주변지역인 화성군 양감면과 남면지역에는 사창리성, 소근리성, 길성리 토성, 이 축조되었고, 용성현(안중면 용성리)의 입구포구였던 용포, 광덕현의 입구포구였던 신흥포 주변에도 무성산성, 자미산성, 비파산성, 용성리성, 강길마을성, 덕복리성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내륙수로와 관련이 있습니다.
평택지방은 해발고도가 매우 낮아서 일제강점 초기만 해도 대부분 습지가 많았고, 내륙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서 농경지는 적었습니다. 또한 농경지라 할지라도 자주 발생하는 해일과 우박 등의 천재지변이 많아서 농경에 부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초기를 기준으로 볼 때 황구지천은 서탄면 내천리까지, 남양만 지역은 창북면 현곡리 신포와 삼계리 옹포까지, 안중면 지역은 학현리까지, 만호리 지역은 방림리까지, 진위천은 진위면 신리부근까지 그리고 안성천 하류 쪽은 팽성읍 도두리들 전체가 갯벌과 수로였습니다. 물자의 유통과 조세의 운반, 군사적 목적 등 다양하게 이용되었던 수로와 나루와 포구주변에는 시장이 서는가 하면 창고나 옹기가마 그리고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생활의 모습과 문화들 그리고 사람과 물자의 유통구조는 지역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평택과 주변지역의 수로(水路)와 나루와 포구>
①항곶진(포) :
황구지천은 본래 항곶천, 내천 등의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항곶천이라는 이름은 조선후기 지리서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나오는데, 항곶진(항곶포)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서탄면 황구지리에 있는 황구지 나루가 항곶진입니다.
황구지천의 본류는 수원 광교산에서 발원합니다. 그러다가 수원시내를 관통하면서 유천과 합류하고, 다시 대황교에서 원천천과 합류하여 흐르다가 서탄면 내천리에서 내천이 되고, 항곶포가 있는 황구지리 부근에서 황구지천(항곶천)이 되어 진위천(장호천)과 합류합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항곶포는 화성군 양감면과 팔탄면 사람들이 진위방면으로 넘어가는 나루였습니다. 또 해방과 6.25전쟁 후까지만 해도 아산만에서 올라오는 조류(바닷물)가 항곶포 북쪽 내천리까지 역류함에 따라 봄, 가을이면 새우젓배가 내천리나 진위천이 흐르는 마산리 앞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지금은 다리가 놓여서 나루의 기능을 못할 뿐 아니라 이동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량도 줄었고, 아사남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바닷물의 역류도 없어 모든 것이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
②동청포 :
고덕면 동청리와 청북면 어연리, 한산리를 연결하는 나루였습니다. 이 지역은 양성현 땅이었는데 조선 태종 17년에 수원부에 내속시켰고 18세기에는 진위현 고두면으로 편입되었던 지역입니다. 그러다가 조선 말에는 수원부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동청나루의 위치는 현 동연교 아래였는데, 여러 차례 다리를 놓게 되면서 흔적마저 없어졌습니다. 나루가 있을 때에는 나루터 옆에 창고와 시장이 섰으며, 현재 농협정미소 앞에 장이 섰습니다. 동청포는 항골, 밤뒤, 한산리, 백봉, 토진리 사람들이 송탄이나 서울 등으로 갈 때 사용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청북면 사람들이 서울을 갈 떼에도 동청나루를 건너가야 서정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습니다.
나루터 근처는 아산만의 바닷물이 역류하여 민물과 합류하는 지점이었으므로 어패류가 풍부햇습니다. 대표적인 어종으로는 우여, 붕어, 메기, 뱀장어, 바다새우, 민물참게(고치레) 등이 잡혔고, 작은 배를 타고 새우젓, 조개젓, 황새기젓 등이 올라와 거래도기도 했습니다. 또 인근의 들판에서 수확된 부재지주들의 소작료와 조세들도 동청나루를 통하여 아산만을 거쳐 서울 등으로 운송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할 때문에 역대 왕조는 주변지역의 방비에 힘을 써 인근에 백봉리 산성을 쌓고 외침에 방비하였습니다.
③해창포 :
고덕면 해창리는 조선시대에 해창(海倉)이 있던 마을입니다. 해창은 조세로 받은 세곡을 모아두던 창고로서 지금으로 말하면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같은 것이었습니다. 해창리의 해창은 진위현 서부지역과 수원부 남쪽지역, 양성현 일부지역에서 거둔 세곡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조창(組倉)은 수로(水路)와 나루가 가까운 곳에 두었습니다. 해창리에 조창이 있었던 것은 이 마을이 진위천 변에 있었고 나루가 가까웠으며 주변지역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입니다.
해창리의 나루는 본래 해창4리 “뱃말”에 있었고, 조창은 해창리의 자연마을인 대창마을에 있었습니다. 이 곳에 보관된 세곡은 일부는 보관하고 나머지는 배를 이용해서 아산만의 공진창으로 옮겼습니다. 공진창에서는 관선이나 경강상인들의 사선 중에서 세곡운반선을 이용하여 한양의 마포나루로 옮겨 경창(京倉)에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해창과 해창포는 국가운영의 기간이 되는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담당했던 중요한 나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④다라고비진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다라고비진은 수원부에 속한 나루로서 남쪽 67리 지점에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나루는 항곶천(황구지천)과 장호천(진위천)이 합류하여 흘러온 물이 홍경천(안성천)과 이 곳에서 합류하여 아산만 바다로 흘러간다고 하였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소청나루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궁안교라는 다리가 소청교로 불렸기 대문입니다. 현재의 위치는 고덕면 궁리 궁안휴게소 자리를 마을 주민들이 다루지나루라고 부르는 것으로 봐서 이곳이 다라고비진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데 현재 진위천과 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은 고덕면 창내리 앞이기 때문에 현재 제시하는 위치는 위의 내용과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만 해도 현재 평택 안중간 국도인 38국도 변 방축1리까지 바닷물이 올라왔고, 동고리들, 오성들이 해방 전후까지만 해도 습지나 수로였기 때문에, 물줄기가 현재와 달리 방축리 들을 휘돌아 궁리부근을 지나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주민들에 의하면 다루지나루는 1930년대 말까지 막사리 때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온 조기젓 배들이 돛대를 쓰러드리고 황구지가지 올라갔으며, 일제강점기 소청다리(궁안교)가 놓이면서 배들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이 나루에 배를 대었다고 합니다. 이 나루에 들어온 배들 중에는 덕적도에서 올라온 배들도 많았는데, 이 섬에는 곡식이 나지 않아서 조개젓, 새우젓, 소라젓을 가지고 와서 곡식과 바꿔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산만 방조제 건설 후 배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도로교통이 발달하면서 내륙수로가 닫히게 되자 점차 쇠퇴했고 지금은 간척과 매립으로 옛 모습을 잃었습니다.
⑤이포진 :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 수원부 읍지에 이포진은 금물촌면에 있다고 기록되었고, 다른 읍지류에는 평택현으로 넘어가는 나루였다고 되어있습니다. 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수원부 남쪽7십리지점에 있으며 평택으로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금물촌면은 조선 후기에 오타면에 병합되는데, 오타면은 지금의 고덕면 궁리, 동고리, 방축리 일대입니다. 그러므로 이포진은 이 곳 그 중에서도 진위천과 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인 동고리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 지점은 현재 나루터의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주변지역이 간척되지 않고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만 해도 물줄기가 좀 더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습니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이포나루는 바다갈대가 무성한 습지 사이로 난 물길을 거슬러 올라 동고리 부근에 있었다고 합니다. 실제 동고리와 주변마을에는 홍수 때 큰 고목이 떠내려와 자랐다거나, 홍수로 물길이 1km나 변해서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도 신빙성을 더합니다.
⑥신흥포 :
현덕면 신왕리에 있는 나루로 현재는 신왕리 나루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갈매기나루라고 부르는 구진이 있기도 하지만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나루가 신흥포임에 틀림없습니다. 조선 후기 지리서인 대동지지 수원부조에는 신흥포가 없고 “당포(堂浦)라고 기록하였는데, 이 포구가 신흥포입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수원부 영역으로 고려 때에는 광덕현이 있던 곳입니다.
이 나루는 평택현이나 아산현으로 건너갈 때 이용하던 포구인데,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어항으로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조선시시대 조세기록인 “수언부선세혁과성책”에 보면 청어1동마다 5전, 조기 1동마다 5전, 미역 1동마다 2냥을 거뒀으며, 백화염 1항아리마다 3전, 고등어 1동마다 5냥을 거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포구에서는 어업과 더불어 제염업도 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⑦경양포 :
팽성읍 노양리의 계양마을과 노산마을은 고려시대부터 포구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시대 이곳에 경양현이 있었으며 전국 8대 조창(租倉) 중에 하나였던 하양창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경양현의 수령은 염(鹽)장관을 겸하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매우 귀한 물건이었던 소금을 경양현 지역과 현덕면 해안에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는 노산마을에 창고와 시장이 서고 거주인구도 많아서 수 백 호(戶)의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초 태종 때 조창(租倉)을 아산만 입구의 공세창(공세리)으로 옮기면서 중요성이 낮아졌고 직산현에 포함되면서 경양현은 폐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경양포는 나루와 포구로서의 기능을 하였습니다. 직산현은 이곳에 해창(海倉)을 설치하고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아산만 하구를 중심으로 어업이 발달하여 크게 번창했습니다. 나루터 자리는 지금도 수로(水路)와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⑧계두진 :
계두진은 현덕면 권관리 계두봉 아래에 있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보면 수원부에서 남쪽으로 80리인데 아산으로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나루는 아산만 하구에서 맨 끝에 위치한 나루였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공주를 거쳐 온양을 지나온 나그네가 이 나루를 건너야만 남양만의 당항성에서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또 신라의 경우에도 경주에서 대구, 청주, 진천을 거쳐 북상한 나그네가 둔포나 백석포 쯤에서 배를 타서 이 나루를 건너면 빠른 시간에 당항성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이 길로 당항성에 가다가 포승면 원정리 수도사 부근에서 잠을자던 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계두봉이나 계두진은 형체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1970년대 아산만 방조제를 건설하면서 계두봉의 바위돌을 방조제 공사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배수갑문을 지나면 조금 남은 바위가 있고 그 옆에 아산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졌는데 이곳이 계두봉입니다. 계두진은 본래 이 봉우리 아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 곳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노랑바위 근처가 나루터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⑨군문포 :
평택시 군문동 군문교 아래에 있었던 나루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나루의 본래 이름은 군물포였고 충청도 평택현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894년 청일전쟁 때 아사남ㄴ을 통하여 들어온 청나라 군대가 작은 배로 안성천을 거슬러 올라와 이 나루로 들어오면서 군문포(軍門浦)라고 바꿔 불리게 되었습니다.
군문나루는 한양에서 수원을 거쳐 충청병영이 있던 보령지방으로 내려가는 충청로(忠淸路)의 길목이었습니다. 충청로(忠淸路)는 조선시대에 전국 10대로에 속했던 큰길이었습니다. 한양에서 충청도 서부지역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삼남대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갈원(칠원동)에서 갈라져 통복동을 거쳐서 군문포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군문포에는 평택현으로 건너가는 사람과 물자 뿐 아니라 충청도로 내려가는 사람과 물자도 이 나루를 거너갔습니다. 또한 군문포에는 아산만에서 안성천을 타고 올라온 새우젓배, 소금배, 생선배들이 올라왔습니다. 이 것들은 군문포를 통하여 진위지방이나 안성지방으로 올라가거나, 일제강점기에는 평택시장에서 거래되었습니다. 군문포는 해방 전후까지도 내륙수로교통으로 큰 역할을 하였던 포구입니다.
❶곤지나루 :
곤지나루는 팽성읍 대추리에 있는 나루였습니다. 대추리는 도두리벌 등 주변지역의 간척사업으로 지금은 바다와 관련없는 마을이 되었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안성천 하류와 잇닿는 마을이었습니다. 18세기에 편찬된 팽성지에는 “이곳이 수원으로 왕래하는 나루이다. 밀물 때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썰물에는 옷을 걷고 건널 수 있다. 고깃배 새우젓배들이 나루에 메여져 있다.”고 기록되어 조선 후기까지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택현 조에 보면 곤지나루는 소개되지 않고 신덕포(新德浦)가 소개되면서 “본 읍에서 서쪽으로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때의 신덕포가 곤지나루의 거리나 위치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에는 신덕포로도 불렸다고 생각됩니다. 이 나루를 건너면 수원지방이었던 길음리나 당거리, 신왕리 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고 어물이나 생선과 같은 것들이 거래되었습니다.
❷통복포 :
평택시 통복동을 흐르는 통복천 하류에 있었던 나루였습니다. 통복천 하류는 바닷1970년대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 만해도 바닷물이 역류하여 하천 양쪽에 넓은 갯벌이 있었습니다. 팽성지에는 “이 나루는 평택현청에서 북쪽으로 8리 지점에 있는데, 진위현과 수원부로 갈라지는 경계이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 볼 때 신대동 고잔마을과 화촌 마을 사이에 있었던 고잔포도 통복포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포구는 아산만 방조제 건설이 있기 전만 해도 고깃배, 새우젓배, 소금배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화촌 마을에는 장(場)이 서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❸대진 :
신증여지승람에는 대진(大津)이라고 기록되었지만 기록에 따라 한진, 대포진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대진은 지금 평택항이 건설되는 만호리 나루입니다. 이 나루는 수원부로부터 서남쪽으로 1백리 길이며 바닷물의 흐름이 사나웠다고 합니다. 대진나루는 만호리에서 홍성(주)과 면천(주)를 비롯하여 당진의 한잔나루를 비롯하여 충청도 각 읍으로 건너가는 나루였습니다. 대진나루는 해방 후에도 이 지역의 어업의 중심포구였으며, 평택항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생선과 해산물이 풍부한 어항이었습니다. 만호리 마을 위쪽으로는 서해대교가 지나가고 있어서 이제는 육로를 통해서도 당진이나 서산, 예산 등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❺삽교포 :
삽교는 평택시 신대동에 있는 자연마을입니다. 정확한 위치로는 안중에서 평택으로 오는 38번 국도 평택 우회고가도로가 시작되는 지점 아래 쪽 마을입니다. 현재 신대교가 놓인 자리에 옛날에는 개울을 건너는 삽교가 있어서 “삽교”마을로 불렸습니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 초기만 해도 진위천과 안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했습니다. 팽성지에는 “이곳이 서울로 왕래하는 지름길이다. 밀물과 썰물이 봄과 가을이 달라서 가을과 겨울에는 나루가 몹시 험하고 봄이나 여름에나 겨우 건널만 하며, 한겨울에는 어름을 타고 건널 수 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습지와 들판이어서 기후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루를 건너면 통복동(개)과 갈원(칠원동)을 거쳐 삼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❻옹포 :
청북면 삼계리에 있습니다. 조선 후기 지도인 청구도에는 “저포”라고도 기록되었고, 마을사람들은 “독개”라고 부릅니다. 이 지역은 고려 때 감미부곡이 있었던 지역이며 조선시대에는 양성현 땅이어서 “양성독개”라고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보래는 옹포 위쪽의 현곡리 신포까지 바닷물과 배가 들어갔지만, 일제강점기 뚝을 쌓으면서 옹포까지만 물이 들어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벼 2백섬을 싣는 배들이 인천 도정공장으로부터 들어와서 벼를 싣어갈 정도로 큰 나루였다고 합니다. 또 신포에는 장(場)이 서서 지금도 신포장터라고 하는데, 5일장과 연계한 물화들도 옹포를 통하여 들어왔습니다. 신포장은 해방 후 안중장이 커지면서 쇠퇴하다가 없어졌습니다. 수원부선세혁파성책에 따르면 옹포를 통해 들어와 거래된 품목들을 알 수 있는데, 청어, 조기, 갈치, 고등어, 북어, 등 생선과 미역, 대합, 김 등 해산물 그리고 쌀, 소금, 소가죽, 백목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고, 포구주인(객주나 여각)들에게 조세를 걷은 것으로 봐서 객주나 여각도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❼토진포 :
청북면 토진리에 있는 나루로, 현재의 지명으로는 토진1리 마을에 있던 나루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톳나루”, “텃나루”, “선살미나루”라고도 부릅니다. 토진리 옆으로는 관리천이 흐르는데 이 나루는 관리천을 건너 어연리 황곡마을로 건너다니는 나루였습니다. 만약 양교리나, 백봉리, 토진리 사람들이 송탄방면이나 진위방면으로 가려면 토진나루를 건너 어연리 항곡(황새울)을 거쳐 동청나루를 건너야 했습니다. 토진나루는 진위천의 지류에 위치한 나루였고 바닷물이 역류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외침이 있을 때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백봉리에 산성을 두고 방비를 하였습니다.
자료출처 김해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