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깊어지면 전국의 초록도 더욱 짙어간다. 비라도 한바탕 퍼붓고 나면 온 산은 매서운 속도로 초록으로 갈아입는다.
장성 백양사로 향했다. 백양사 가는 길에는 아름다운 숲이 있고, 자그마한 연못이 있고, 계곡도 있다. 밤새 여름을 재촉하는 봄비가 내렸다. 빗줄기에 흠씬 시달린 땅은 축축이 젖은 채 서늘한 기운을 뿜어낸다. 대기는 가시지 않은 물방울의 잔흔으로 희붐하고 코가 아프도록 싸했다. 청명하게 닦인 하늘은 먼 곳으로부터 날로 우뚝우뚝 다가오는 초록의 행진을 감춤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백양사는 나무와 숲이 좋은 산사다. 늦봄 숲길은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고 아름답다. 아름드리 수목이 많아서 숲길은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원래 백양사는 단풍이 유명하다. 그렇다고 봄 풍광이 뒤지는 것은 아니다. 단풍이 좋으면 신록이 좋은 법. 어느 사찰 숲보다도 녹음이 우겨져 있다. 더구나 가을 애기단풍을 보려온 관람객도 없으니 시끄럽지 않아 좋다.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 몸도 마음도 지쳐 있을 때. ‘지쳤다’ 생각되면, 주저 없이 찾아볼 만한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백양사로 접어들면 호젓한 오솔길 양쪽으로 단풍나무와 굴참나무, 은행나무가 저마다의 빛깔을 뽐내며 방문객을 안내한다. 이곳의 굴참나무는 600년 된 거목으로 전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나무들이다. 백양사 바로 앞에는 회색빛 돌로 계곡을 막아 만든 자그마한 연못과 쌍계루가 있다. 연못위에 드리워진 비자나무 잎이 맑은 물에 반영돼 한 폭의 수채화를 이뤄낸다. 휘어진 가지와 푸른 잎사귀 하나까지 선명하게 비치는 물그림자. 정갈한 비자나무숲 한가운데 자리한 부도탑에는 소여대사 부도를 비롯한 18개의 부도가 오랜 가람의 역사와 고승들의 향기를 전한다. 쌍계루는 백양사 누각의 백미(白眉)다. 밖에서 보아도 아름답고, 누각에 올라서 보아도 아름답다. 고개를 들면 백학봉의 학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다. 짙푸른 녹음에 싸여 산사의 늦봄을 한층 운치있게 해준다.
쌍계류를 지나 계곡에 놓인 다리를 넘으면 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의 현판은 해강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쓴 글이다. 마당 한가운데 크게 자란 보리수 곁을 돌아 이층 건물인 우화루를 지나면 너른 절 마당이 나온다. 마당에는 백암산 쪽으로 대웅전이 있고 좌측으로 칠성각, 진영각, 극락보전, 명부전이 차례로 둘러 서 있다.
경내는 단아하면서 조용하다. 송광사와 더불어 호남 최대의 고찰이지만 법당은 오히려 화려하지 않고 수수하다. 일반인이 출입이 가능한 곳도 대웅전과 극락보전 등 몇 곳에 불과하다. 당우는 상당 부분이 선도량으로 사용돼 담 너머로 슬쩍 구경하는 게 고작이다. 참선하는 스님들의 독경 소리만이 허공을 가른다. 진지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세계. 자연의 품안에서 고즈넉이 앉아 있는 산사에서 온갖 상념에 잠겨보면 금세 일상을 훌훌 털어 낼 수 있다.
백제 무왕 33년(632년) 지어진 백양사는 1,370년 역사를 지닌 가람. 본래 이름은 백암사. 조선 선조 때 지완 스님이 영천굴에서 설법을 할 때, 하얀 양(白羊)이 산에서 내려와 들었다고 해서 이름을 백양사로 바꿨다고 한다. 조계종 제 18교구의 본사로서 각진국사를 비롯해 만암 대종사, 서옹 종정 등 이름난 스님들이 거쳐 갔다. 운문암, 청류암, 천진암 등 10여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백양사의 특징은 대웅전이 입구 정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서인지 입구 우측 학바위 쪽에 위치해 있다. 직각에 가깝게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한참 올라가면 약사암에 닿는다. 백양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약사암 뒤로는 영천굴과 약수가 있다. 영천굴에는 예전에 쌀이 나왔으니 지팡이로 그 자리를 찔렀더니 피가 흘러 벽이 붉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늦봄에 접어든 오월. 절 입구 연못과 경내에 연등이 가득 달렸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세상은 열기로 가득하고 머리는 무겁다. 맑은 숲과 푸른 물이 그리울 때 백양사로 한번 가보자. 세상사에 닿고 지친 마음을 내려놓고 백양사 숲길을 걸어보자.
◇찾아가는 길 = 호남고속도에서 백양사 I/C에서 빠져나와 1번 국도로 진입 후 약 8킬로 정도 가면 738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가면 백양사에 닿는다. 숙박은 백양사 입구에 있는 백운각호텔(061-392-7531), 백양관광호텔(061-392-0651)과 주변 모텔을 이용하면 된다. 장성군청 문화관광과 061-390-7224. www.jangseong.jeonnam.kr
◇주변 가볼만한 곳
▶영화민속촌 ‘금곡마을’ - 영화 ‘태백산맥’ 과 ‘내 마음의 풍금’ 등을 촬영한 마을. 전봇대를 전부 뽑아내고 지하로 전기매설을 한 덕분에 초가지붕을 얹은 옛날 가옥과 모습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입구에는 다랑이 논 사이에 고인돌 20여기가 듬성듬성 박혀 있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와 모정에서 바라본 마을전경은 50~60년대 농촌마을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축령산 자연휴양림 = 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90여만 평의 상록 수림대가 조성된 국내 최대 조림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통나무 휴양림이 아닌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삼림욕의 최적의 장소로 알려지면서 일본인·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필암서원 = 인종이 세자 때 교육을 담당한 하서 김인후를 모신 곳으로, 임금이 서원 이름을 지어내린 사액서원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호남에서 단 한 곳만 남은 유서 깊은 곳이다. 우동사, 숭의제, 진덕제, 청절당, 확연루, 전사청, 장판각, 한 장사 등의 건축물이 있으며, 노비보 등 14책 64매의 고문서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책과 목판을 보관하는 경장각에는 인종의 ‘묵죽도’ 목판화가 보관돼 있는데, 현판은 정조의 친필이다.
▶홍길동 생가 =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허균의 홍길동전의 주인공인 ‘홍길동’ 의 실존인물이 밝혀짐에 따라 생가를 복원했다. 홍길동전시관에는 출토된 유물과 600여권의 홍길동 관련 책자, 다양한 캐릭터, 입체영상물이 전시되어 있어 홍길동의 생애를 감상할 수 있다.
발췌: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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