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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운봉의 명인들
봉순이는 누워서 발뒤꿈치로 방바닥을 쿵쿵 굴러본다. 그래도 쓸쓸하고 심심하다. 나직한 천장은 따분하고 찌뿌둥한 하늘 같은 생각이 든다. 천장이 딱 갈라지면서 해가 나와주었으면 싶고 구름이 춤을 추었으면 싶고 이산 저산 날아 다니는 노랑새가 날들었으면 싶고 하얀 연이 떠내려왔으면 싶다. '뵈기 싫어! 뵈기 싫대도! 봉순이 기집앤 가란 말이야! 촛대! 까다구!' 조금 전에 삼월이 손목을 잡고서 발을 구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악을 쓰던 서희가 아무래도 야속해 견딜 수 없었다. 시죽시죽 웃으며 서 있는 길상이도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애기씨 머리를 짱구라 안 캅니까.' '짱구가 뭐야?' 봉순이는 반반한 제 이마에 주먹을 갖다 대면서 '이렇게, 이렇게 볼가져서 나온 이마를 보고 짱구라 한다 안 캅니까.' 했던 것이 그만 서희 비위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넌 촛대야! 촛대란 말이야! 깍다구야! 깍다구란 말이야! 개똥네가 그러던걸? 촛대야! 깍다구야!' 서희에게뿐만 아니라 봉순이는 삼월이에게도 야단을 맞았다. '나도 개똥어매가 그래서 그랬는데...'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봉순이는 고쟁이 밑의 작은 버선발로 다시 방바닥을 찬다.
"제집아가, 못일어나겄나!"
일손을 늦추지 않고 봉순네가 나무란다. 해가 서편으로 움직이는 탓일까, 겨울이 다가오는 때문일까, 장짓빛이 푸르스름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오는고나."
김서방댁이 호들갑스럽게 턱을 까불며 방문을 열고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게요. 서리가 벌써 내맀다 카이."
역시 일손을 늦추지 않고 봉순네는 대꾸했다. 방안으로 들어온 김서방도 문풍지 한쪽을 쭉 찢는다. 치맛말기 속에 꼬기꼬기 싸서 찔러놓은 담배를 꺼내어 찢어낸 종이에 말아서 침을 바른다.
"이러다가 날이 떠르르 치버지믄 짐장하니라고 얄 리가 날 긴데."
중얼거리며 김서방댁은 부젓가락으로 화로 속의 불씨를 집어내어 담배를 붙문다. 손목이 나무껍질같이 앙상하다. 봉순이는 모로 누워서 곱친 두 팔 속에 얼굴을 끼우고 김서방댁을 노려본다. 김서방댁은,
"좀 쉬어감소 하라모. 사람죽어서 발 뻗쳐놨나?"
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일이란 미루어 나가믄 한이 있이야제요. 해놓고 놀지."
"아따 손이 일하지, 입이 일하나?"
결국 자기를 상대하여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무신 일이 있었소?"
"내 얘기 좀 들어보지. 아 시상에 사위보고 외손자까지 본 나를 칠까? 이 나이 해가지고 소나아한테 매맞고 살겄느냐 말이다."
"김서방댁이 머 또 잘못했는가배요."
"이사람아, 너거들은 멋이든지 나부텀 잘못이라 쳐놓고, 선후사정도 모르믄서."
"김서방이사 비단길 겉은 사람이니께요."
김서방댁은 담배를 뻑뻑 피운다.
"설령 내가 잘못했다 치자. 내가 질정이 없어서 그랬다 치자. 이 나이 가지고 내가 매맞고 살겄나?"
그러나 김서방댁 얼굴에는 분해하는 빛이라곤 없었다.
"거미가 오줌을 누었는가 뽈개미가 쐈는가, 어짓밤 말이다, 하도 등이 근지러버서 좀 긁어달라 캤더마는,"
봉순네는 피식 웃는다.
"웃일 기이 아니라고."
"그 암된 김서방이 학을 뗐겄소."
"시상에 돌아누운 채 꿈쩍을 해양지? 그것만이라믄 나도 가만히 있었일 기라. 우짜다가 내 발이 닿았던가배. 발을 탁 걷어차지 않겄나 응? 그래 일어났지. 등잔불을 켜놓고 쫀쫀히 시작했구마. 내 계란 겉은 발이 우째서 그러요! 내가 문딩이가! 자식 셋은 지리산 어느 중놈이 맨들었나! 함서 퍼부었지."
김서방댁의 말은 좀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눈을 까집고 노려보으나 김서방댁은 제 말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봉순이는 천장을 본다. 누리끼리하게 그을은 천장에는 파리똥이 붙어 있었다. 파리똥은 기어가는 벌레 같았다. 봉순이는 눈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파리똥이 벌레가 아닌가, 골똘하게 쳐다본다. 까만 점은 스멀스멀 기어다닌다. 시력을 모으면 모을수록 눈이 맵고 눈물이 나는데 벌레임에 틀림이 없을 것란 생각이 든다.
그때 읍내에 갈 적에 나룻배를 탔을 적에, 나룻배랑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강물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가 대숲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초가지붕들이, 산들이 구름이 바삐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와 비슷한 착각에서 봉순이는 눈을 좁혔다 벌렸다 하며 눈이 매운 것도 참으며 이미 벌레로 생각해버린 천장의 파리똥을 열심히 쳐다다.
"허리뻬가 굳었나! 정 못 일어나겄나!"
봉순네가 자를 들고 봉순의 종아리를 친다.
"아얏!"
말허리를 꺾인 김서방댁이
"내비나 두어라. 아아들이 다 그렇지. 시상에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으,"
다시 하던 말을 이어가려 하는데 발딱 일어나 앉은 봉순이
"내가 우째서 깍다구요?"
김서방댁 옆에 무릎을 바싹 대며 따진다.
"뭐라고?"
"내가 우째서 촛대요!"
"무신 소리고?"
"애길씰 짱구라 해놓고 날보고는 깍다구라고요? 나도 그라믄 개똥이어가 그러더라고 일러줄라요!"
김서방댁은 봉순이 말뜻을 알아차리고 개글개글 웃는다.
"니가 하도 야불아서 안 그랬나. 흐흐흐핫... 그래서 오만 발이나 성이 났고나, 으흐흐흣..."
봉순네가 싱긋이 웃는다.
"밤낮 묵고 할 일이 없인께 남으 숭만 보고, 으으으해해해 하는 거는 누구건데? 지 숭은 뒤에 차고 남으 숭은 앞에 차네."
입술을 헤벌리고 침을 흘리는 개똥이 흉내를 간드러지게 낸다.
"고년 입도 야물다."
"와 욕하요! 개똥이어매가 키었소!"
"이눔의 가시나! 어른한테 무신 악다구니고."
봉순네가 야단을 친다.
"아이고 모르겄다."
김서방댁은 화도 내지 않고 시죽시죽 웃으며 그러나 말할 흥은 깨어진 듯
"나가볼라누마. 봉순이 무서바서."
김서방댁이 나가자
"기여바서 그라는데 어른한테 그라믄 못씬다."
봉순네는 더 이상 나무라지는 않았다. 봉순이는 쪼그리고 앉아서 여히 부르튼 얼굴로 어미의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심심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화가 치미는 것이다. 누가 미운 것도 아니었고 촛대니 깍다구니 하는 말에 비위가 틀어져서도 아니었다. 봉순이는 덮어놓고 화가 나는 것이다. 날개가 있어서 훨훨 날아간다면 화가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옴마."
"와."
"이분 설에도 읍내 오광대 구겡 보내줄 기제?"
"..."
"옴마? 지난 설맨치로 길상이하고 오광대 구겡 갈 기다."
"..."
"월선이 아지매가 자리잡아서 맨 앞에서 구겡할 긴데."
"시사니 겉은 소리 말고... 깃이 좀 내려앉았는가."
인두로 깃을 누르다가 봉순네는 자를 들고 깃이 앉은 자리를 재본다.
"세 치 낙낙하믄 제자리에 앉힌 건데 와 처져 뵈꼬?"
혼자 중얼거렸다.
"옴마아!"
"..."
"그라믄 설에는 우리 안 보내줄 기가?"
"내일 말을 하믄 허세비가 웃는단다."
"허세비가 우찌 웃노?"
봉순이 발길질을 하여 가위를 차 내린다.
"내일 모레 설이 오나! 와 이리 숨을 몰아쌌노! 일하는데 정신 산란하게."
"구겡 보내준다 카믄 될 거 아니가."
"..."
"그때 월선이 아지매는 떡국도 끓이주고 콩엿도 사주고 화닥도 갖다주고, 그 떡국 참 맛나든데. 우리집 떡국보다 맛나든데..."
'월선이아지매가 있이야말이지... 생각해 보믄 요눔의 새끼들 땜에 일이 꼬인 거 아니가. 빌어묵을 강청댁, 그 제집이 나만 보믄 못잡아묵어서 응글응글하는 것도 그 때문이제. 그는 그렇다 하고 월선이는 어디 갔이꼬? 추석에는 와서 어매 무덤의 풀이나 빌 긴가 싶었더마는, 고생은 안 하는가 모르겄다.'
"옴마."
"..."
"옴마아."
"정신 산란타 캤는데 니 질기 이럴 것가!"
"치이."
저고리 안을 붙여나가는데 봉순네의 손은 날 듯 빨랐다. 바늘에 가득 찬 주름을 실 쪽으로 밀어내며 부챗살을 펴듯 쭉 펴서는 매듭을 짓고 실을 물어 끊는다. '그만 돌아올 거 아니가. 오믄 지 입 하나 못 묵겄나. 마님께서도 돌봐주실 모앵이고, 객지서 고생하느니보다, 안 할 말로 강청댁한테 얹히서 살믄 우떻노. 기왕지사 일은 그리 된 기고. 없는 농사꾼이 두 가숙 거느린다는 기 남으 이목에 안됐기야 하겄마는 그것도 팔자 소관 아니가. 그러다가 씨라도 하나 떨어지믄 그거나 보고... 쯔쯔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제집이 서방 얻어가지는 안했을 긴데, 강원도 삼장사 따라갔다 카지마는 누가 봤나? 제집이 우찌 그리 박복한고. 지 일신 하나를...' 봉순이도 혼자 주절주절 지껄이고 있었다.
"분 바르고 비단옷 입고 참 이삐든데 별당아씨맨치로 이삐든데, 노래도 잘 부르고 참 노래도 잘 부르던데,"
"머라꼬?"
"오광대 말이다. 옴마니는 오광대 구겡 안 했나?"
"실이 노이 되도록 오광대 노래만 불러라. 그라믄 밥이 나오고 옷이 나올기다."
"나도 후제 크믄 비단 입고 분 바르고 노래 부를란다."
"뭐라꼬?"
봉순네는 고개를 쳐들었다. 봉순이의 눈은 꿈꾸듯 몽롱했다.
"후제 크믄 나도,"
"이년아! 그런 소리 또 해라! 윤디로 주둥이를 지지부릴 긴께!"
"와? 그라믄 어떻노?"
"신세가 번할 기다! 니 하나 바라고 산 에미 신세도 번할 긴께!"
"와? 그라믄 와?"
봉순이는 약을 올려주려고 일부러 따지고 든다. 기승을 부리던 봉순네는 그만 어리벙벙해서 말을 못한다. 말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심 매우 당혹했다. 아이들에게는 분 바르고 비단옷 입고 훨훨 타는 장작불에 비친 여광대의 모습은 황홀하게 아름다웠을 것이다. 노름꾼 머슴들 장돌뱅이를 가릴 것 없이 청하기만 하면 해우차를 받고 몸을 파는 여자라고 차마 알려줄 수 없는 일이다. 봉순네는 사당이건 광대이건, 창을 하든 재주를 부리든 계집이면 모두 몸을 파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대개가 또 그러했었다. 탈놀음과 남창은 엄한 법식에 따라서 오랜 세월 피나는 수련을 한 광대들인데 따라서 나이도 지긋했었고 그들은 자신의 업에 대하여 고집과 자부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과 달리 법식도 없고 사장도 없고 닥치는 대로 잡동사니를 내용으로 하며 이마을 저마을 뜬구름같이 떠돌아 다니는 게 사당들인데 그네들은 굿거리에서 매춘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여사당이 위주가 된다. 여사당에게는 거사라는 남편이 있고 이 거사는 계집의 시중을 드는 대신 벌어들이는 해우차는 인솔자인 모갑에게 일부를 바치고 나머지로써 생활을 꾸려가는, 말하자면 계집 팔아서 의식을 해결하는 사내였다. 그런 만큼 여사당은 매춘부치고도 아주 비천하며 역시 뜨내기 신세인 매분구와 다를 바 없는 창녀인 것이다. 당대의 명창들을 무색하게 했던 여광대 채선이는 여자가 있어서 그의 이름이 한량들에게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창극을 무척 좋아했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그간의 소식이야 봉순네가 알 까닭이 없겠으나 설령 알았다 한들 농사꾼 계집이 되어 펼 날 없는 고생을 바랐으면 바랐지 결코 딸이 광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단옷 입고 분 바르고,"
봉순이 심통도 보통이 아니다. 약을 올려주려고 또 지껄이는데 참다못한 봉순네는 으이잉! 하며 아이의 머리통을 쥐어박는다.
"밖에 못 나가겄나!"
결국 울어야 끝장이 난다. 봉순이는 울음보를 터뜨릴 기회를 잡기나 한 듯 울면서 밖으로 나간다. 봉순네는 저고리 안팎을 맞추어 시침을 두며 '빌어묵을, 속도 없는 짓을 내가 했지. 괜히 오광대 구겡은 보내가지고 자는 호랭이 건디리놓은 것 아니가. 그놈 길상이놈 탈바가지가 동티라이.' 봉순네는 움찔하며 놀란다. 행여 봉순이 문밖에 서있다가 놀라는 자기를 보지나 않았을까 의심이 났던지 재빨리 문 쪽에 눈을 보내는 데 낯색이 변한 것이 역력하다.
"외가도 골육은 골육이니께, 가시나가 나믄서부텀,"
눈앞이 아슴해지면서 일감이 잘 보이지 않는다. 봉순네의 조부는 운봉사람이었다. 구례 순창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운봉에서 창극조의 명인들을 많이 낳았는데 명창 중의 명창이요 창극의 중시조며 가왕이라 일컬어진 오만하고 괴벽스런 송홍록도 운봉 태생이다. 송홍록말고도 동생 송광록과 그의 아들 송우룡에 양학천 등이 있어 모두 동편의 거장들이었다. 봉순네의 조부도 한때는 알려졌던 광대였으나 말로가 시원치 않았다. 봉순네의 기억에는 볼품없는 초라한 늙은이, 중풍이 들어서 팔을 못 쓰게 된 늙은이의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햇볕에 드는 마루에 하부죽한 입술을 떨며 어린 손녀를 상대하여 곧잘 얘길 해주곤 했었다. '옛적에 권삼득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 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심은 혔으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이 밖에도 조부는 괴팍하고 오만한 송홍록 못지않게 괴팍하고 기상이 센 기생 맹렬이, 그들의 곡절 많았던 정사 얘기며, 굶주리며 헐벗으면서도 끈으로 상투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각고 끝에 명창이 되었다는 염계달의 얘기며... '허 명창이 절로 되는 줄 아나벼? 어림없는 소리여. 명산대천에 가서 십 년 이십 년 피를 동우로 쏟아감서 목을 다듬는디, 그래가지고도 목을 못 얻은 사램이 인게로 예삿일이간디? 참말이제 뻬를 깎고 피를 쏟고 났이야, 어떤 명창은 절기둥을 안고 돌믄서 소리를 지르는디 제 목소리 터지는 거를 천둥이 떨어진 줄 알고 까물어졌이야. 예삿일 아니랑게로.' 늙은이는 봉순네 철이 들기 전에 죽었다. 봉순네 부친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병들어 중도에서 업을 폐한 늙은이의 생애를 애석히 여겨 눈물을 글썽이곤 했었다. 비록 극의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으나 소질은 불행한 늙은이보다 부친에게 더 있었던 모양으로 이따금 목을 가다듬고 가조 일곡을 일창하는 모습을 봉순네는 여러번 보았으며 지금도 그 청담한 목청이 귀에 쟁쟁했다.
방에서 쫓겨난 봉순이는 저만큼 오는 길상을 보자 이미 눈물은 말랐는데 새삼스럽게 훌쩍거린다.
"와 그리 찔찔 울고 있노?"
"울믄 와! 니가 무신 상관이고."
"으응? 그라믄 울어라. 많이 울어라."
길상은 봉순이 옆을 휙 지나가버린다. 뭐라고 몇 마디 말을 걸어주었면 울음을 그칠 건데 싶었으나 길상은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서운하고 괘씸했다. 더 울어볼까 싶었지만 억지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봉순이는 마구간 앞에 갔다. 나귀 두 마리는 산으로 가고 없었으며 구간이 텅 비어 있었다. 나머지 한 마리가 멍청한 눈을 하고 봉순이를 바라본다. 봉순이는 마구간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쌉쌉한 마구간의 냄새가 풍겨왔다. 나귀는 유리구슬 같은 눈을 꿈뻑꿈뻑했다. 갈기는 여름보다 빛깔이 짙고 윤이 났다. 나귀는 희유끄름하고 푸르뎅뎅한 것 같고 불그스름한 것 같기도 한 혓바닥을 내밀어 마른풀을 입속에 말아넣는다. 봉순이는 커다란 콧구멍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나귀는 다시 혀를 내밀고 풀을 입속에 말아 넣더니 맷돌 갈 듯 으석으석 소리를 내며 씹는다.
'아이 싫다! 저눔으 세빠닥, 뭐 같을꼬? 징그러바라!' 봉순이는 후딱 돌아앉는다. 웬일인지 집안은 조용했다. 넓은 집안에 살던 사람들이 모조리 보따리를 싸가지고 달아나버린 듯 소리가 없다. '간난할매가 죽었다!' 눈앞에 간난할멈의 쪼그라든 모습이 솟는다. 봉순이는 눈을 부릅떴으나 간난할멈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 다시 강물에서 자맥질하는 사람들 모습같이 간난할멈의 얼굴이 솟아났다. 파뿌리 같은 머리칼이 얼굴을 덮고 부스럼과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이가 다 빠져버린 입을 반쯤 벌리며 간난할멈은 숨차했다. 봉순이는 무섬증이 났다. 생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간난할멈이 무서워 견딜 수 없다. 길상이 얘기해주던 지옥 생각이 났다. '지옥은 말이다. 팔열지옥이라고 여덟 곳이 있는데 말이다, 등활지옥서는 죄인끼리 원수가 돼서 서로 물어뜯고 뼈다귀만 남을 때까지 싸운단다. 그라믄 옥졸이 철퇴를 가지고 와서 죄인들을 가루로 맨들고 괴기겉이 저미고, 그래가지고 죽어부리믄 고만인데 바람이 한분 불어오믄 다시 살아나서 말이다. 또 물어뜯고, 그 지옥살이를 오백 년 동안을 하는데 이 세상에서 살생을 한 사람이 가는 곳이라 카더라. 다음은 흑승지옥인데, 여기서는 천년을 산다카는데 도끼로 찍고 벌겋게 달군 쇠줄로 쳐서 살을 찍어내고.' 절에서 자랐으므로 길상은 지옥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죄인을 쇠절구통에 넣어서 쇠절구공이로 찧는다는 둥, 쇠붙이로 된 사자 범 이리 독수리가 몰려와서 죄의 골수까지 먹어치운다는 둥, 죄인을 쇠꼬치에 끼워 불에 구우면 오장이 다 터져나온다는 둥, 봉순이는 무서움을 쫓으려고 처마끝을 올려다본다. 봄에 왔던 제비는 없고 제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제비야 제비야 강남 제비야."
맥없이 불러보지만 강남으로 벌써 떠난 제비가 있을 리 없다. 봉순이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쫓아나간다. 마음속으로는 간난할멈에 대한, 지옥에 대한 무서움이 가득 차 있었으면서 '누가 애기씨한테 갈까봐? 치이, 안 갈기다! 길상인 머심앤데 함께 놀라지, 누가 갈까바서, 삼월이가 코도 닦아주고 얼굴도 닦아주고, 치이.' 언덕 아래 강물은 초겨울 햇빛을 받고 희미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구름 없는 하늘은 한없이 높이높이 보였다. 타작마당에 조무래기들이 놀고 말과 사람을 실은 나룻배는 강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마을로 내려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길상이 초당에 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봉순이는 당산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돌층계위에서 내려다 본 초당에는 길상이 있는 기척이 없다. 뒤켠으로 돌아가 내려다보았지만 아궁이 쪽에도 길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누각 앞에 또출네가 우뚝 서 있었다.
"또출네!"
그나마 반갑다 싶어 봉순이 불렀다. 그리고 그에게로 다가가며 뒷짐을 지고
"머하요?"
"나 말까?"
햇빛을 똑바로 노려보고 선 채 또출네는 이빨을 드러내며 흠씬 웃는다.
"기별 받을라고 중문까지 나왔구마."
"무신 기별?"
"아따 귀는 시집 보냈는갑다! 세상도 세상도 우찌 그리 무서븐고? 백미 오백 섬을 부처님께 바치고 골짜기마다 등을 달았거마는, 천년만년 영화를 빌었거마는 부처님도 눈이 멀고 신장님도 눈이 멀고 터줏대감도 눈이 멀고 조상님도 눈이 멀었고나아!"
별안간 또출네는 손뼉을 치며 외친다.
"벌떼겉이 포졸들이 오는고나아! 내 아들이 동학당 우두머리라꼬요? 당치 않은 말씀 마오! 보소 나으리, 형방 나으리. 우리 아들 서울 갔소. 과거 보러 서울 갔소. 하모 진정이오! 아암 그렇고 말고. 수의사또 이몽룡이 뉜지 아니요? 서문고개 목신님께 백일기도 디리서 얻은 금지옥엽 겉은 내 아들이란 말이요.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요, 날 어쩌고 가시랴요."
봉순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우짜믄 그리 밤도 긴고. 추야장천 긴긴 밤에 임의 얼굴 보고지고. 옥 겉은 임의 얼굴, 달 겉은 임의 거동, 지리상사 보고지고. 동풍이 온화허니 임의 해포 불어온가. 반가울사 춘풍이요, 춘풍에 피는 꽃은 웃난 듯 임의 얼굴, 저 꽃겉이 보고지고."
그러다가 또출네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빨을 모두 드러내고 벌죽벌죽 웃으며 춤을 춘다. 간밤에 어느 길목에서 도둑떼나 등짐장수 아니면 행실 나쁜 길손이 욕을 보였는가, 찢어진 아랫도리 옷자락이 마구 흔들리고 퍼어렇게 멍이 든 허벅지를 드러내며 또출네는 춤을 춘다. 어느덧 엷은 햇빛은 꼬리를 감추고 서편에는 놀이 타고 있었다. 나무들이 지껄이며 골짜기에서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