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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노벨상 만찬 연설
1967년 12월 10일, 스톡홀름 시청에서 열린 노벨상 만찬에서 행한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의 연설
폐하, 왕실의 전하들, 신사 숙녀 여러분.
문턱에 선 나의 목소리. 아주 먼 곳에서, 나의 조국 과테말라에서 건너온 나의 목소리. 이 아카데미의 문턱에 선 나의 목소리.
한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별들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빛나는 횃불들의 가족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노벨이라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알프레드 노벨의 상속자가 되는 것.
혈연의 유대와 혼인으로 맺어진 친족관계에 또 하나의 혈연, 더욱 미묘한 친족관계가 더해집니다. 정신과 창조적 작품에서 태어나는 친족관계입니다. 아마 입 밖으로 밝히지는 않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이 위대한 노벨상 가족을 만든 창설자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을 거쳐, 세대에서 세대로, 자신의 가족이 속한 세계를 넓혀 가는 것.
저의 경우에는 선택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자격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노벨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아카데미의 뜻에 따라 그 가족으로 들어왔습니다. 이 아카데미의 문은 일 년에 한 번 열렸다 닫히며 한 사람의 작가에게 영예를 부여합니다.
또한 제가 소설과 시에서 말을 사용해 온 방식 때문에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말이라기보다 책임을 지는 말입니다.
그러한 문제의식은 한때 꿈꾸는 사람이었던 알프레드 노벨에게도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훗날 그는 자신의 발명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까지 가장 파괴적인 폭발물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은 광산을 파고 터널을 뚫으며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는 인간의 거대한 작업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비유가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자연으로부터 그 비밀을 빼앗아 낸 파괴적인 힘의 사용은 우리 아메리카에서 가장 거대한 사업들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파나마 운하입니다.
파괴의 마법.
그것은 우리 소설의 충동과도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설 역시 부당한 구조를 무너뜨려 새로운 삶이 지나갈 길을 열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의 삶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광맥들은 몰이해와 편견과 금기라는 수많은 무게 아래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의 서사문학 속에서 솟아오릅니다.
항의의 충격으로,
증언의 충격으로,
고발의 충격으로.
우화와 신화 사이에서 그것들은 모습을 드러냅니다.
글자로 쌓아 올린 둑은 모래처럼 현실을 가로막아 꿈이 흘러가도록 합니다. 혹은 반대로 꿈을 가로막아 현실이 빠져나가도록 합니다.
격변은 광기의 지리를 낳았습니다.
정복이라는 사건처럼 끔찍한 정신적 상처들은 타협적인 문학이 태어날 수 있는 배경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설은 유럽인들의 눈에 비논리적으로, 혹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충격적인 것을 위해 충격을 추구하는 문학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 자체가 엄청났던 것입니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대륙들.
독립된 삶을 시작하려는 순간 거세당한 종족들.
그리고 신세계의 분열.
문학의 배경으로서 이것들은 이미 비극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패배한 인간이 아니라 희망을 품은 인간을 끌어내야 했습니다.
우리의 노래 속을 헤매고 다니는 그 눈먼 존재를 말입니다.
우리는 유럽에서 인간적 규모로 질서 있게 전개된 투쟁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계의 사람들입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우리의 투쟁은 재앙의 규모로 벌어졌습니다.
비계들.
사다리들.
새로운 어휘들.
텍스트를 낭송하던 태초의 방식.
음유시인들.
그리고 다시, 끊어진 궤적.
새로운 언어.
길고 긴 말들의 사슬.
사슬에 묶인 사고.
그리고 가장 격렬한 어휘의 전투를 거친 끝에 다시 밖으로 빠져나와 마침내 우리 자신의 표현에 도달합니다.
규칙은 없습니다.
규칙은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수없이 만들어 낸 뒤에야 문법학자들이 언어를 가지치기하는 가위를 들고 찾아옵니다.
좋다, 아메리카의 스페인어여.
그러나 그 거친 털은 깎아 버려라.
문법은 강박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문법(反文法)의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행동하는 말을 찾아 나서는 것.
또 하나의 마법.
능동적인 언어를 지닌 시인과 작가.
삶.
그 변화들.
미리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문학을 만들지 말 것.
사물을 말로 대신하지 말 것.
사물인 말을 찾을 것.
존재인 말을 찾을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의 문제들.
도피는 불가능합니다.
인간.
그의 문제들.
하나의 대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 아카데미에서 들렸습니다.
우리에게 계보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유파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논문과 이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러분에게 하나의 세계가 지닌 가능성들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독특합니다.
그 움직임도 독특하고,
그 대화도 독특하며,
소설적 사건의 얽힘도 독특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수많은 시대를 거쳐 오면서도
그 세계의 끊임없는 창조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출전: Les Prix Nobel en 1967, Ragnar Granit 편, Nobel Foundation, Stockholm, 1968.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노벨문학상 수상 강연
1967년 12월 12일
라틴아메리카 소설한 시대의 증언
저는 이 만남을 ‘강연’이라 부르기보다는 ‘대화’라고 불렀으면 했습니다.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를 놓고 의문과 확신을 서로 나누는 대화 말입니다.
우선 라틴아메리카 문학 전반의 선행 전통을 살펴보면서, 그 가운데 특히 소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원천을 수천 년 전의 원주민 문학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세 가지 위대한 시대, 즉 마야·아스테카·잉카 문명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원주민들에게도 소설과 비슷한 문학 장르가 존재했는가?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토착문화에서 역사는 우리가 서양에서 ‘역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오히려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들의 역사책,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소설은 아스테카와 마야에서는 그림으로 그려졌으며, 잉카에서는 아직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형상적 방식으로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일종의 그림문자가 사용되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을 읽는 사람의 목소리가 거기에서 텍스트를 끌어내어 노래의 형태로 청중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원주민들에게는 ‘읽는 것’과 ‘이야기하는 것’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같은 행위였습니다.
노래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낭독자, 즉 ‘위대한 혀’는 그 그림문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해석하면서 동시에 새롭게 창조하여 청중에게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훗날 이 그림으로 그려진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새겨졌고, 입에서 입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스페인인들이 가져온 알파벳에 의해 라틴 문자로 그들의 토착언어에 기록되거나 직접 카스티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구 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은 원주민 문헌들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문헌들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역사는 역사라기보다 소설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들에서는 현실이 환상과 전설과 아름다움의 옷을 입으면서 현실 자체가 사라집니다. 반대로 환상은 그 안에 들어 있는 현실의 모든 것을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한 나머지, 마침내 우리가 초현실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하나의 현실을 재창조합니다.
환상이 현실을 소멸시키고 하나의 초현실을 재창조한다는 이러한 특징에는 시간과 공간의 끊임없는 소멸이라는 특징도 더해집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고 특징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병렬적 문체에서 나타나는 말의 반복과 증폭입니다.
즉 동일한 사물을 가리키고, 동일한 생각을 전달하며, 동일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서로 다른 단어들을 병렬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원주민 문헌에서 병렬법은 우리 서양인들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미묘한 뉘앙스의 유희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분명 말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섬세한 시적 단계와 상승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것을 통해 특정한 의식 상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마법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아메리카의 고대 민족들에게 소설과 유사한 문학 장르가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면, 소설적 형식의 탄생은 서사시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영웅전설은 역사적 허구의 가능성을 뛰어넘어 음유시인들의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부족의 ‘위대한 혀’, 또는 쿠이카니메스(cuicanimes)라고 불린 이들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텍스트를 낭송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노래가 지닌 아름다움이 민족들 사이를 돌아다녔습니다.
마치 그들의 신들의 황금빛 피처럼.
원주민 아메리카 문학에는 이러한 서사적 노래들이 매우 풍부하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가 ‘소설적 플롯’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스페인의 수도사들과 교리 교육자들은 그것을 ‘허황된 이야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소설적 이야기들은 본래 그들의 오랜 역사와 기억, 그리고 위대한 행적의 명성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하도록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환상―또 하나의 현실―이 뒤섞인 이 문학은 정복과 예속이 시작되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위대한 문명들이 남긴 수많은 깨진 항아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되었습니다.
다만 이제 그 기록이 증언하는 것은 위대함이 아니라 비참함이었습니다.
자유가 아니라 노예 상태였습니다.
지배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속된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아메리카 문학은 한 시대의 텅 빈 침묵을 채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 꽃피던 문학 장르들은 아메리카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주의 소설과 연극이 그 예입니다.
오히려 수액이며 피이고, 강이며 바다이며 신기루와도 같은 원주민 세계의 거대한 분출이 최초의 위대한 아메리카 소설을 쓰게 될 첫 스페인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작품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누에바 에스파냐 정복 사건의 진실한 역사》**입니다.
이 작품은 ‘소설’이라고 불러야 마땅합니다.
그 병사가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진실한 역사’라고 불렀던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지나친 일일까요?
소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인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그 위대한 연대기 작가의 작품을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지나친 일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제가 너무 대담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에게 이 보병이자 온갖 무기를 다루었던 사내의 거칠게 달리고 숨 가쁘게 몰아치는 산문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산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오히려 순수한 환상의 작품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테노치티틀란 성벽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베르날 자신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디스 기사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의 광경 같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책이 스페인의 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스페인적인 것이라고는 저자가 이베리아반도 출신으로 과테말라의 산티아고 데 로스 카바예로스에 정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그 영광스러운 원고를 우리는 그곳에 보존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옛 카스티야어로 쓰였다는 사실 정도뿐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원주민 문학 특유의 변장과 변형의 방식에 훨씬 더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고전 스페인 문학에 누구보다 정통했던 돈 마르셀리노 메넨데스 이 펠라요조차 이 산문이 풍기는 독특한 맛을 이상하게 여겼으며, 그것이 한 병사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학자는 베르날이 여든 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원주민 문학의 텍스트를 들으면서 그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종의 삼투작용을 통해 아메리카를 자신의 몸속으로 흡수하여 이미 아메리카인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또 하나의 친연성이 있습니다.
이미 정복당한 원주민들은 마지막 비통한 노래 속에서 정의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역시 “그토록 싸우고 정복한” 뒤 자신이 망각 속에 버려졌다는 사실에 항의하며, 자신의 가슴을 열어 포효와도 같은 항의의 연대기를 쏟아냅니다.
이 순간부터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문학, 노래와 소설은 각 시대의 증언일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작가 아르투로 우슬라르 피에트리가 말했듯이 ‘투쟁의 도구’가 됩니다.
모든 위대한 문학은 증언이며 권리의 회복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가운 문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손에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설득할 수 있는 도구가 들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써 내려간 열정적인 페이지들입니다.
남쪽에서는 한 명의 메스티소가 등장합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메스티소입니다.
게다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도록 그는 아메리카 최초의 망명자이기까지 했습니다.
잉카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
이 망명한 크리오요는 이제 사라져 버린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이어받아 페루의 억압자들을 고발합니다.
잉카 가르실라소는 자신의 빼어난 산문 속에서 단순히 아메리카적인 것도, 단순히 스페인적인 것도 아닌 두 피가 융합된 혼합, 그리고 삶과 정의를 향한 동일한 요구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잉카의 산문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의미는 독립전쟁기에 이르러 분명해집니다.
그때 잉카는 이른바 ‘두 개의 칼’, 즉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 간 인물의 위용을 지니고 다시 등장합니다.
스페인 당국은 그토록 우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우수에 찬 글 속에 어떤 메시지가 숨어 있었는지를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잉카 가르실라소의 역사서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원주민들이 그 책에서 “해로운 많은 것들”을 배웠다는 이유였습니다.
증언하는 것은 시와 허구 작품만이 아닙니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클라비헤로,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알레그레, 안드레스 칼보, 마누엘 파브리, 안드레스 데 게바라처럼 뜻밖의 작가들까지도 망명자의 문학을 탄생시켰으며, 그것은 그 시대의 증언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과테말라 시인 라파엘 란디바르에게도 그만의 저항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의 항의는 침묵입니다.
그는 스페인인들을 아무런 형용사도 붙이지 않고 그저 hispani, 즉 ‘스페인인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란디바르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가장 덜 알려진 작가 가운데 하나이지만, 우리의 땅과 사람과 풍경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아메리카 문학의 기수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페드로 엔리케스 우레냐는 란디바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페인 식민지의 시인 가운데 그는 최초의 풍경의 거장이다. 르네상스의 관습을 과감히 깨뜨리고 신세계 자연의 특징, 즉 그곳의 식물과 동물, 들판과 산, 호수와 폭포를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다. 풍속과 산업과 놀이에 대한 그의 묘사에는 우아한 생동감이 있으며, 시 전체에는 살아남은 원주민 문화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가 흐르고 있다.”
1781년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라파엘 란디바르가 쓴 3,425행의 라틴어 육보격 시가 10개의 노래로 나뉘어 《루스티카티오 멕시카나(Rusticatio Mexicana)》라는 제목으로 출간됩니다.
이듬해 볼로냐에서 제2판이 나옵니다.
메넨데스 펠라요가 ‘근대의 베르길리우스’라고 불렀던 이 시인은 유럽인들을 향해 아메리카의 땅과 삶과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합니다.
그는 구세계 사람들에게 베수비오와 에트나 화산에 맞설 만한 멕시코의 호룰로 화산이 있고, 유명한 카스탈리아와 아레투사의 샘에 견줄 과테말라 산페드로 마르티르의 폭포와 동굴이 있음을 알리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목구멍 속에 사백 개의 목소리를 지녔다는 새 센손틀레를 노래할 때에는 명성의 왕국에서 그 새를 나이팅게일보다 더 높이 날게 했습니다.
그는 들판의 보물을 노래합니다.
세상을 귀중한 화폐로 채우고 있던 금과 은을 노래하고, 왕들의 식탁에 오르는 설탕 덩어리를 노래합니다.
그 시에는 유럽인들을 놀라게 하기 위한 아메리카의 풍요에 관한 통계까지 등장합니다.
말과 소 떼, 양 떼, 염소와 돼지, 약효가 있는 샘물, 유럽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팔로 볼라도르 같은 민속놀이, 그리고 과테말라의 카카오와 초콜릿의 영광도 빼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란디바르의 노래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원주민에 대한 그의 사랑입니다.
그는 인디오를 노래하면서 어떠한 일에서도 훌륭히 해내는 민족을 찬양합니다. 원주민들이 만들어 낸 수상정원의 경이로움을 그려 내고, 그들의 우아함과 솜씨를 모범으로 제시하면서도 그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을 잊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나 부정되어 온 한 가지 사실에 시적 실체를 부여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농민으로서, 장인으로서, 노동자로서 지닌 뛰어난 능력입니다.
유럽에서 널리 퍼졌고, 원주민을 착취하는 아메리카인들 자신조차 믿어 버린 ‘악하고 게으르며 타락한 인디오’의 이미지에 맞서, 란디바르는 아메리카의 노동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져 왔으며 지금도 짊어지고 있는 인디오의 모습을 내세웁니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시 속에서 우리는 직접 인디오를 봅니다.
카누에 올라 상품을 나르거나 여행하는 인디오.
자줏빛 염료와 연지벌레 염료를 채취하는 인디오.
비단을 만들어 내는 눈처럼 흰 누에를 펼쳐 놓는 인디오.
바위에 끈질기게 매달려 장밋빛 붉은색을 내는 귀중한 조개를 떼어 내는 인디오.
인내심과 완고함으로 밭을 가는 인디오.
쪽을 재배하고, 광산에서 은을 캐고, 금맥을 파헤치는 인디오…….
란디바르의 《루스티카티오》는 우리가 위대한 아메리카 문학에 관해 말해 온 것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의 풍요로운 땅 위에서 굶주린 민중이 살아가는 한, 아메리카의 위대한 문학은 수동적인 역할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으로 보아 이 작품은 일종의 운문으로 쓰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0년 뒤 안드레스 베요는 그의 유명한 **《실바》**에서 아메리카의 모험을 새롭게 펼쳐 보입니다.
불멸의 완벽한 작품인 그곳에서 신세계의 자연은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옥수수는 “이삭을 단 부족의 오만한 우두머리”로 등장하고, 카카오는 “산호빛 항아리”에 담겨 있으며, 커피나무와 바나나, 식물과 동물의 힘으로 충만한 열대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이 장엄한 ‘풍요로운 땅’의 모습과 대조되어 가난해진 주민이 등장합니다.
베요는 망명자라는 점에서 잉카 가르실라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란디바르와 같은 아메리카적 혈통에 속합니다.
두 사람은 조금의 더듬거림도 없이 세계문학을 향한 아메리카의 위대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신세계 자연의 이미지는 유럽에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란디바르와 베요에게서 볼 수 있는 뜨겁고 충실한 모습으로는 결코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샤토브리앙은 《아탈라》와 《나체즈족》에서 그것을 경이롭고 목가적이며 낙원적인 것으로 변형하여 보여 줍니다.
유럽인들에게 자연은 배경막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리오요 낭만주의에서는 자연이 강력한 무게를 갖게 됩니다.
낭만주의자들은 당시 시인과 소설가들의 창작 속에서 자연에 영구적인 자리를 마련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노래한 호세 마리아 데 에레디아가 그러했고, 《포로가 된 여인》에서 황야를 묘사한 에스테반 에체베리아가 그러했습니다.
아메리카에서 낭만주의는 단순한 문학 유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애국주의의 깃발이었습니다.
시인과 역사가와 소설가들은 정치 활동과 창작의 꿈 사이에서 자신의 낮과 밤을 나누어 살았습니다.
아메리카에서 시인이 된다는 것이 이보다 더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조국을 뮤즈로 삼은 시인 가운데 호세 마르몰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널리 읽힌 소설 가운데 하나인 **《아말리아》**의 작가입니다.
중앙아메리카를 황폐하게 만든 독재정권을 우리 자신의 몸으로 겪고 있을 때, 우리는 열에 들뜨고 땀에 젖은 손가락으로 이 책의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비평가들은 마르몰의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작품의 불균형과 거친 문장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작품은 가슴속에서 심장이 뛰어오르는 상태로 쓰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심장의 박동은 문장에, 단락에, 페이지에 흔적을 남깁니다.
조국 전체를 앓게 했던 살아 있는 불완전함의 빈맥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메리카 소설이 남긴 가장 뜨거운 증언 가운데 하나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말리아》는 호세 마르몰의 저주와 절규처럼 독자들을 계속 뒤흔들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신념의 행위가 됩니다.
바로 그 순간 사르미엔토의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그는 세기의 문 앞에 그 유명한 명제를 세웁니다.
“문명이냐 야만이냐.”
그러나 사르미엔토 자신도 《파쿤도》가 오히려 자신과 모든 사람을 향해 무기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하게 됩니다.
《파쿤도》는 죽기를 거부하는 크리오요 아메리카의 진정한 대표자를 자처합니다.
그 아메리카는 이미 단단해진 자신의 가슴으로 ‘문명 또는 야만’이라는 대립적 도식을 깨뜨리고, 그 두 극단 사이에서 각 민족이 자신들 고유의 본질적 가치를 통해 진정한 정체성을 이루는 지점을 찾으려 합니다.
지난 세기 중엽, 과테말라에서는 또 한 명의 열정적인 낭만주의자 호세 바트레스 몬투파르가 등장합니다.
익살스러운 이야기들 한가운데에서도 독자는 어느 순간 축제를 잊고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불멸의 호세 바트레스 몬투파르는 쓰디쓴 우수를 품은 놀라운 우아함으로 당시 이미 뜨거운 문제들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북에서 남으로 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호세 마르티의 목소리입니다.
망명지에서든 조국에서든 그는 시인과 언론인의 불타는 언어로 그곳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자신의 삶 자체를 모범으로 그곳에 존재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시인들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불멸의 루벤 다리오와 온두라스의 후안 라몬 몰리나 같은 극소수의 이름을 제외하면, 이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시인들이었습니다.
시인들은 현실에서 도피합니다.
어쩌면 그것 역시 시인이 되는 한 가지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의 작품에는 살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점차 공허한 수다로 변해 갔습니다.
그들은 원주민 음유시인들의 명료한 가르침을 무시했습니다.
우리 위대한 문학의 토대를 세운 식민지 시대 작가들을 잊었습니다.
다른 지역의 시를 피 한 방울 없이 모방하는 것에 만족했으며, 우리의 해방 투쟁을 노래했던 시인들을 지방적 애국주의에 눈먼 사람들이라며 조롱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한 줌의 사람들, 인간이자 예술가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한 재정복에 나섭니다.
그들은 원주민적인 것을 찾아갑니다.
우리의 어머니와도 같은 스페인적인 것에 다시 닿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아메리카 문학은 이제 다른 표징 아래 다시 태어납니다.
더 이상 운문의 표징 아래서가 아닙니다.
이제 촉각적이고 복수적이며 형식에 불경한 산문, 신비로 향하는 길들에 상처 입은 산문이 새로운 십자군의 목적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 첫걸음은 현실 속으로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실 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것.
현실을 객관화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있지 않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사건들 속으로 파고들어 인간의 문제들과 연대하려 했습니다.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현실적인 것은 그 무엇도 아메리카와의 접촉을 절실히 요구하는 이 문학에 낯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 소설입니다.
오늘날 이 소설이 세계 소설 장르의 선두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든 나라에서 다양한 경향의 작가들이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설 속 모든 것이 아메리카의 재료가 되고, 우리 역사적 순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 됩니다.
오늘날 아메리카의 소설가인 우리는 우리 민족에 대한 끊임없는 책임이라는 전통 속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문학과 그것을 떠받쳐 온 시가 바로 그 전통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우리 역시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되찾아야 할 땅이 있습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할 광산이 있습니다.
마테차 농장에서 죽어 가고, 바나나 농장에서 불타며, 사탕수수 공장에서 인간의 찌꺼기로 변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요구해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진정한 아메리카 소설은 이 모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입니다.
수세기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 수천 수만 페이지로 퍼져 나가는 절규입니다.
진정 우리 자신의 소설은 그 페이지마다 똑바로 서 있습니다.
정신에 충실하고,
우리 노동자들의 주먹에 충실하며,
우리 농민들의 땀에 충실하고,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우리 아이들의 고통에 충실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광대한 땅의 피와 수액이 또다시 바다를 향해 흘러가 새로운 대도시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에 맞서 항의합니다.
이 소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원주민 문헌의 특징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생생하고, 상처 입었으며, 힘차게 솟구치는 그 문헌들.
식민지의 한밤중에 새벽을 기다리며 내다보던 크리오요들의 눈에 담긴 고뇌.
그러나 그 식민지의 한밤중조차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이 한밤중보다는 밝았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소설은 종교재판에 맞서 사람들의 의식 속에 길을 뚫어 해방자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했던 문필가들의 확신과 정화의 낙관주의를 이어받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소설, 우리의 소설은 진정 우리의 소설이 되려면 우리의 모든 위대한 문학을 이끌어 왔고 지금도 이끌고 있는 위대한 정신을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의 어조를 빌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직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면, 그것을 불태워 버려라!
당신이 불태우지 않는다 해도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당신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남기를 바라야 하는 곳, 즉 민중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과거에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소설을 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모든 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들을 기억합니까?
반대로 우리 가운데 증언하기 위해 썼던 사람들의 이름은 얼마나 쉽게 되풀이할 수 있습니까.
증언하는 것.
소설가는 증언합니다.
이방인의 사도처럼 증언합니다.
소설가는 바울과 같습니다.
도망치려 할 때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포효하는 현실과 마주치게 되는 바울입니다.
우리를 질식시키면서 동시에 눈부시게 만드는 우리 나라들의 현실.
우리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이렇게 외치게 하는 현실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이 현실에 쫓기는 사람들입니다.
그 현실은 마리아노 아수엘라, 아구스틴 야녜스, 후안 룰포의 인물들 속에서 멕시코혁명 민중의 살이 됩니다. 그들의 사상은 그들이 지닌 칼처럼 날카롭습니다.
호르헤 이카사, 시로 알레그리아, 헤수스 라라와 함께할 때 그것은 원주민 착취와 방치에 맞서는 항의의 절규가 됩니다.
로물로 가예고스의 《도냐 바르바라》에서는 우리의 여성 프로메테우스를 창조합니다.
오라시오 키로가와 함께할 때 그것은 우리를 열대의 악몽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너무나 키로가 자신의 것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아메리카적인 악몽이기에, 그것 자체가 그의 문체처럼 느껴집니다.
호세 마리아 아르게다스의 《깊은 강들》, 아르헨티나 작가 알프레도 바렐라의 《어두운 강》, 파라과이의 로아 바스토스의 《인간의 아들》,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의 《도시와 개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땅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피 흘리고 있는지를 봅니다.
만시시도르와 함께 우리는 유전지대로 갑니다.
미겔 오테로 실바의 《죽은 집들》의 주민들은 집을 버리고 그곳으로 향합니다.
다비드 비냐스와 함께 비극의 파타고니아와 마주하고, 엔리케 베르니케와 함께 마을을 집어삼키는 물결에 휩쓸립니다.
베르비츠키와 마리아 데 헤수스와 함께 우리는 대도시의 단테적인 비인간적 빈민촌으로 들어갑니다.
테이텔보임의 《초석의 아들》은 초석 광산지대의 고된 노동을 들려주고, 니코메데스 구스만은 칠레 노동자 지역 아이들의 삶을 손으로 만지듯 느끼게 합니다.
나폴레온 로드리게스 루이스의 《하라과》에서는 엘살바도르의 농촌을, 플라콜과 클라리벨 알레그리아의 《이살코의 재》에서는 우리의 작은 마을들을 만납니다.
귀랄데스의 《돈 세군도 솜브라》 없이 팜파스를 생각할 수 없고,
에우스타시오 리베라의 《소용돌이》 없이 밀림을 말할 수 없으며,
조르지 아마두 없이 흑인들을 말할 수 없고,
기마랑이스 호자의 《대 sertão: 오솔길》 없이 브라질의 세르탕을 말할 수 없으며,
라몬 디아스 산체스 없이 베네수엘라의 평원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책들은 문학공화국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선정주의나 잔혹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와 지리와 삶을 통해, 이 풍요롭고 부유한 아메리카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수백, 수천, 수백만의 아메리카인들과 이어진 인간들입니다.
우리의 소설은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힘을 세계 속에서 움직이게 하려 합니다.
우리 문학의 메스티소화 과정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습니다.
아메리카가 자기 자신과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그 장엄한 자연에 인간적인 차원을 부여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원주민 문헌에서처럼 신들을 위한 자연도 아니고,
낭만주의자들의 작품에서처럼 영웅들을 위한 자연도 아닙니다.
인간을 위한 자연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의 문제들이 힘차고 대담하게 다시 제기될 것입니다.
훌륭한 아메리카인답게 우리는 사물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일에 열정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설 하나하나는 언어의 모험이며 위업입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연금술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완성된 작품만 보아서는 그 작품에 사용된 재료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집념이 필요했는지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 재료란 바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
그러나 어떤 법칙으로 사용된 말인가?
어떤 규칙으로 사용된 말인가?
그 말들은 지금 막 형성되고 있는 세계의 맥박처럼 놓여 있습니다.
나무처럼 울립니다.
금속처럼 울립니다.
그것이 의성어입니다.
우리 언어의 모험에서 가장 먼저 제기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의성어입니다.
우리의 말과 문장 속에는 우리의 풍경과 자연에서 나온 얼마나 많은 메아리들이 결합되고 해체되어 들어 있습니까.
소설가에게는 언어의 모험이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는 소리를 따라갑니다.
듣습니다.
자신의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의 가장 뛰어난 소설들은 쓰인 것이 아니라 말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말 자체가 품고 있는 시의 언어적 역동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소리로 나타나고,
그다음에 개념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히스패닉아메리카 소설들은 진동하는 거대한 음악적 덩어리입니다.
그 소설들과 함께 태어나는 모든 사물이 탄생하는 바로 그 격동의 순간에서 포착된 음악적 덩어리입니다.
언어들의 합류 속에서도 이 모험은 계속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들이 그 구성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이 사용하는 온갖 언어들이 섞입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로 가져온 유럽과 동양의 언어들이 서로 뒤섞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언어가 소리와 말 위에 빛을 뿌립니다.
이미지의 언어입니다.
우리의 소설은 말만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이미지로도 쓰인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을 영화처럼 눈앞에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극적인 독립성을 과시하려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설가들이 자신의 민족의 목소리를 보편적인 목소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리가 풍부하고,
이야기가 풍부하고,
이미지가 풍부한 언어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언어도 아니며, 이른바 ‘시적 산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민중의 말 속에 라틴아메리카 소설의 언어를 특징짓는 온갖 서정성과 환상, 우아함과 재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 있는 언어입니다.
우리 소설을 떠받치는 시-언어는 말하자면 그 소설의 호흡과도 같습니다.
시의 폐를 가진 소설.
초록빛 폐를 가진 소설.
식물의 폐를 가진 소설.
아메리카 밖의 독자들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것은 아마도 우리 소설이 이 다채로운 언어를 통해 성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이국적 풍물 묘사에는 빠지지 않는 언어.
풍경의 음악에 밀착되어 있기에 의성어적인 언어.
때로는 원주민 언어의 소리와도 이어지는 언어.
그 언어들의 먼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흔적이 우리 소설의 산문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솟아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말 자체의 중요성입니다.
말은 절대적인 존재이며,
상징입니다.
우리의 산문은 카스티야어의 통상적인 통사질서에서 벗어납니다.
우리의 언어에서 말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원주민 언어에서 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
개념.
소리.
매혹적이고 풍요로운 전환.
말에서 그 주술적인 힘을 제거한다면 누구도 우리의 문학을, 우리의 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과 언어는 독자를 우리의 창조물이 살아가는 삶에 참여하게 할 것입니다.
독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마음을 뒤흔들고,
그의 동의를 얻어 냅니다.
그러면 독자는 자신의 일상생활을 잊고 상황과 등장인물들의 놀이 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함께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소설은 인간적 가치를 온전히 간직합니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왜곡하기 위해 사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완성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우리 소설이 사람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뒤흔드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소설을 사상의 전달 수단으로, 민족을 해석하는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그 도구는 문학적 차원을 지니고,
헤아릴 수 없는 마법적 가치를 지니며,
인간을 향해 깊숙이 뻗어 나가는
언어입니다.
출전: Les Prix Nobel en 1967, Ragnar Granit 편, Nobel Foundation, Stockholm, 1968.
저작권 © 노벨재단,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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