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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씨 (池氏,智氏, 遲氏)의 연원
池
충주 지씨의 시조는 송나라 홍농(弘農)사람 선의공 경(池鏡)이다. 그는 960년(광종 11년)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였다. 그의 6세손 지종해(池宗海)가 충원백(忠原伯, 충주의 고호)에 봉해졌다. 시조의 이름이 경(鏡)인 경우에 중국의 8학사, 10학사의 일원으로 한국에 동해한 성씨이다. 후손들이 지경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무주 지씨(광주 지씨)는 시조는 신라 후기의 인물 지휜이다. 후백제 견훤(867년~936년)의 사위인 지훤는 무주(武州, 광주의 고호) 지역의 성주로, 903년에 궁예(弓裔)의 부하 장군인 왕건(王建)이 해군을 대동하여 무주을 공격할때,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지휜과 동시대의 인물 견훤은 당대에는 견씨가 아니었고 후대에 일부 후손이 이름을 차용하여 성으로 하였던 점을 본다면, 지휜도 본래 지씨 였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고래 태조는 각 지역의 호족들에게 성씨 사용을 권장하였는데, 신라-고려 전환기에는 성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의 이름을 차용하여 성을 만든 경우가 있었다. 지휜이 본래 지씨였는지 명확하지 않고, 300년 뒤 무주부원군에 봉해진 지윤보의 선조라고 증명할수 있는 문헌이 없다. 한국의 성본 역사에는, 동성이본이 동일 지역에 세거한 경우가 많으며, 개별 성본의 연원이 혼용되는 사례도 있다. 시조 지윤보는 고려 충렬(재위, 1274~1308) 때 인물로, 나라에 공을 세워 무주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은 무주(광주)를 관향으로 하였다.
홍농 지씨의 시조는 중국 명나라 홍농에서 조선 인조 때 귀화 온 장군 지명천의 셋째 아들 지시염을 1세조로 한다. 지시염은 뒤에 지시영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그는 지명천과 홍농 모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조선에서 살다가 병자호란을 피하여 제주도에 피난하여 살면서, 홍농 지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선조의 고향인 중국 홍농를 본관으로 하였다.
울진 지씨(청송 지씨)의 시조는 조선 중종 1510년에 호조참판을 지낸 지서룡(池瑞龍)으로, 그의 후손 지정익은 호조참판을 지냈고 1638년(인조 16년)에 울진에 입향하였다. 지서룡은 영양 채씨의 시조 채성룡과 형제라고 전하는데, 지서룡과 채성룡은 본래 지씨, 채씨가 아니고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지씨와 채씨로 창성하였는데, 선조는 전하지 않는다. 병자호란 때 납속(納粟), 공명첩(空名帖)을 통하여 새롭게 창성된 성본이 있었다.
청주지씨의 시조는 청주를 단본으로 하는 지씨는 동원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계통이 있다. 그러나 청주지씨는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고려 고종때에 시중을 지낸 지순(?~?)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장군를 지낸 지윤심(?~?)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과 평장자를 지낸 지도관(?~?)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경주지씨의 시조는 대학자이신 문성공 지원부(1170~1180년생)이다.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상고 할 수 없다. 중시조 충의공지용도는 1354년 역신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동생 충무공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치는데 공을 세우고 경주부원군에 봉해졌다
智
봉산 지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중장랑이 되어 거란족의 침입을 화주(和州)에서 막아낸 지채문(智蔡文)이다. 그는 왕이 전주, 나주등으로 피난할 때 보호한 공로로 토지 30결을 받았다. 이후 우상시(右常侍), 현종 17년(1026년)에 우복야(右僕射)가 되었으며, 사후 덕종 1년(1032년)에 상장군좌복야, 일등공신에 추증되었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봉산을 관향으로 하였다.
봉주 지씨의 시조는 조선 선조 때 원병(援兵)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군 지우덕(智友德)이다. 그는 동원장사(東援壯士)로 뽑힌 장남 지어약(智漁若), 차남 지신약(智辛若)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전공을 세우고 귀국하였다. 그후 장남 어약가 명나라 의종때 나라를 위해 순절하였고, 명나라가 망할 때 그의 자손들이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오자, 조선의 헌종은 그들의 선조 지우덕(智友德)의 전공에 보답하는 뜻으로 귀화한 그들에게 봉주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봉주을 본관으로 하였다.
한국 지씨 [池氏]
1924년에 간행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89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경주·광주·단양·밀양·수원·전주·진주·청송·청주·충남·충북·충주·평산·평창·해주·홍농 등의 본이 전한다. 이 가운데 대본(大本)인 충주와 청주·경주·단양·광주(무주)·울진(청송)·홍농 등 7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들은 시조(始祖)가 분명하지 않고, 문헌도 남아 있지 않아 상계(上系)를 고증하기 어렵다.
경주지씨는 고려 때의 문성공 지원부를 시조로 하나 그 선계를 알 수 없고, 고려 말기의 무신 충의공 지용도(池龍圖)를 중시조로 한다. 또한 해주정씨 시조 정숙은 그의 사위이다. 충의공 지용도는 1364년(공민왕 12) 최유(崔濡)의 반란군이 의주(義州)를 포위하였을 때 동생 충무공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이를 물리쳐 경주부원군(慶州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광주(무주)지씨는 신라 후기의 지훤을 시조로 하나 자세한 기록을 알 수 없고, 그의 후손 윤보가 고려 충렬왕때 무주부원군(武州府院君)에 봉해져 무주(광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홍농지씨는 지경을 시조로 하고, 중국 명나라 홍농에서 조선 인조때 귀화한 장군 지명천의 셋째 아들 지시염을 중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지씨(池)의 연원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홍농 7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각각 울진지씨, 경주지씨, 충주지씨, 청주지씨, 단양지씨, 광주지씨, 홍농지씨 대종회을 따로 함
경주지씨와 충주지씨, 울진지씨, 모든지씨사이에는 아직 정확한 고증 계대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
1. 경주지씨 유래
◑ 대동항렬표 (大同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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勳(훈),德(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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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龍(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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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태),弘(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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錫(석),光(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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煥(환),重(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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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상),承(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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淵(연),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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景(경),鉉(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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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선),燮(섭) |
39 |
相(상),求(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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培(배),喆(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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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승),晟(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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秉(병),行(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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鎰(일),原(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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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수),辛(신) |
시조 문성공 지원부이며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인 정숙은 해주정씨 시조이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 수 없다.
충주지씨에서 갈려져 왔으며 설과 또다른 지씨성을 중국에서 귀화하였다는 설이 있습니다.
시조 문성공 지원부는 충주지씨 시조 지경의 후손인지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문성공 지원부의 사위는 해주정씨 시조 정숙은 생존연대는 대략 1190~121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합니다.
문성공 지원부의 생존연대 1170~118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를 것입니다
충주지씨 시조로부터 충무공 지용수의 조부 지원부까지의 약 300~400년의 상계는 정확한 문헌 없어 고증하기가 어렵다.
현재 충주지씨 대동보에 실려있는 지원부 계보도는 잘못된 정보이며 아직 고증이 안되는 부분이다.
중시조 충의공 지용도이다.
공은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으며 경주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명을 배출했다.
충의공 지용도의 6세손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禍)를 입은 지정이다. 지정은 본래 이름은 지봉원이며 우의정 정분의 생질이다. 공은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그 외에도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경주지씨(慶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경주지씨 인구수는 1만3000여명이다.
2. 울진지씨(일명 청송지씨라고함)의 유래
도시조(都始祖) : 지서룡(池瑞龍), 지정익(池廷翊)
시조(始祖) : 지대원(池大元), 지무원(池武元)
시조를 달리하는 2계로 나뉜다.
울진지씨(일명 청송지씨)의 선조 지서룡(池瑞龍)은 1510년(중종 5년)에 울진에 입향하
였으며 벼슬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지서룡의 후손 지정익(池廷翊)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1638년(인조 16년)에 울진에 입향하였다. 충주(忠州)로부터 입향하였다. 묘소는
울진군 원남면 갈면리에 있고, 자손은 울진군 원남면 기양리에 분포하고 있다. 지서룡의 그러
나 상계를 고증할 문헌이 없고 보첩이 전하지 않아 정확히 상고할 수 없다. 일설에는 창씨(創
氏)하였다고 한다.
현재 충주지씨와 정확한 혈연관계는 아직 불투명이다.
지서룡와 지정익의 후손인 첨중추을 지내신 지대원(1650~1700)와 지대원의 찰방진사을 지내
신 지무원(1664~?)이며 각각의 울진지씨 시조(始祖)가 되었다. 최근에서야 두 사람은 형제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향인 청송 또는 울진을 본관으로 하였다.
당시 경북 울진에 살던 지효원의 후손 지중성(池重成)에 의하면, 지씨의 본성은 정확한 모르
고 지효원이 지씨로 개성(改姓) 및 창씨(創氏)하였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당나라 황실의 이
(李)씨의 종친이었으나 조선에 큰공을 세워 인정받아 지씨를 성으로 하사 받았다는 설이 있습
니다.
조사 때 정확히 300여명이었던 울진지씨(蔚眞池氏)는 당시 경북 울진에 살던 지무원의 후손
지중건(池重健)에 의하면,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의 종친이었으나 임금에 대한 충정을 인정
받아 지(池)자를 성으로 하사 받았으며 추측설과 일본에서 귀화하였다는 설과, 충성군 지계
최장군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최근에서야 충성군 지계최장군의 후손이 아닌 걸로 판명되었다.
울진지씨(일명 청송지씨라고 함) 집성촌
경상북도 울진군 원남면 일원
시제 10월 1일이다.
◑ 대동항렬표 (大同行列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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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弘(O홍) 德(덕O) |
9 |
秉(병O) 滾(O곤) |
10 |
龍(용O) 學(O학) |
11 |
重(중O) 仁(O인) |
12 |
秀(O수) 光(광O) |
13 |
冠(O관) 正(정O) |
14 |
淵(O연) 朝(O조) |
15 |
星(성O) 原(O원) |
16 |
永(영O) 錫(O석) |
17 |
行(O행) 烈(O렬) |
현재 2006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 170가구에 64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3, 충주지씨 유래
지씨(池氏)는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89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충주, 울진, 경주, 청주, 단양, 광주 6본으로 전한다. 그들은 아직 정확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증하기가 어렵다
황명만성통보(皇明萬姓統譜)와 운부군옥(韻府群玉)에 『지씨(池氏)는 서하(西河:중국의 지명) 땅에서 나서 그 산 곳(居住地)의 이름으로 성(姓)을 삼으니 치음(徵音:五音의 하나)에 속(屬)한다』하였고 또 성씨 비고(姓氏備考:책이름)에는「서하(西河)는 경치 좋은 곳으로 계속하여 물이 맑게 흐르는데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으뜸인 고장으로 지자화(池子華)는 지(秦)나라 승상(丞相)이었고, 지몽리(池夢鯉)는 송(宋)나라 함순(咸淳:南宋-1265~1574)년간에 특별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으며, 한(漢)나라 지원(池瑗)은 중모령(中牟令)으로 어진이(賢人)로 이름이 낫고, 송(宋)나라 지광정(池光庭)은 진사(進士)로 문학(文學:글과 학문)으로써 이름을 떨쳤는바 모두 『장계(長溪) 사람이다』하였다.
【시조】시조 선의공 지경(池鏡, 903~1003, 시호는 선의, 자는 자운, 호는 암곡)은 중국 송나라 중원 홍농 사람으로 960년(고려 광종 11년)에 귀화했다. 당시 태학사(8성씨[곽씨,])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태보, 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 지경의 묘는 평안도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주요파】충주지씨의 세계는 크게 8파로 나뉘고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서 대소 30여 파로 분파된다.
▲충의군파(忠義君派, 파시조 17세조 지용기)▲ 판관공파(判官公派,파시조 15세조 지윤) ▲주서공파(注書公派, 파시조 15세조 지정)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용하) ▲판형공파(判形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천봉)▲주서명천공파(注書明川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을현)▲봉사영흥공파(奉事靈興公派, 파시조 17세조 지을생) ▲낭장공파(左營公派, 파시조 12세조 지일삼)
시조 지경은 중국 송나라 사람이다. 고려 광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에 귀화했다. 그의 5세손 지종해가 평장사를 역임하고 충원백에 봉해진 이후 본관을 충주로 했다. 한편 지중익의 후손은 ▲충주어씨(忠州魚氏)로 갈려 나간다.
충주지씨는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16세까지 모두 11대 36평장사를 내었다.
그중 충의군파(忠義君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으며, 전체인구가 특히 충의군파(忠義君派)가 전체 충주지씨의 80%를 차지한다. 고려에 36명이 정승에 버금가는 평자사의 고위직을 역임했다. 조선에 문과급제자 12명, 진사 75명과 많은 무장을 배출하였다.
고려말 지씨 세력의 대표적 인물인 지용기, 지윤 등이 역성혁명의 과정에서 숙청된 이후 가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조선조말과 일제하의 민족항쟁기의 인물로 이름이 높은 이는 지석영과 지청천이 있다.
지석영은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보고 느낀바 있어 1879년 부산의 일본 병원 제생의원에 가서 종두법을 배웠다. 다음해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종두약 제조법을 배우고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참의, 동래부사를 지낸 다음 1899년부터 10년간 경성의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는 국문연구에도 공헌하였다. 1905년에는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에게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안에 국문연구소를 설치케 하였다. "우두신설(牛痘新說)" "자전석요(字典釋要)"가 전한다.
지청천은 본명이 지대형이고 일명 이청천(李靑天)이라고도 한다. 구한말 정부파견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망국 후 졸업, 일군 소위가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일본을 탈출하여 3.1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敎成隊長)을 지냈다. 그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대를 이끌고 대한독립군단에 편입, 여단장이 되었다. 1921년 흑하사변이 일어나자 한때 적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1940년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중국군과 협력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1천여년 동안 47세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4. 청주지씨 유래
청주지씨는 중국 성씨로 도시조(都始祖) 지경(池鏡)은 중국 송(宋)나라 홍농(弘農) 사람으로 960년(광종 11)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청주를 단본으로 하는 지씨는 동원이면서도 계보를 달리하는 3계통이 있다.
그러나 청주지씨는 그 중간 계보를 잃어버려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고려 고종때에 시중을 지낸 지순(?~?)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장군를 지낸 지윤심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과 평장자를 지낸 지도관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있고 있다.
첫째 시중을 지낸 지순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으며, 지순은 고종 25년(1238)에 실시한 과거에서 문과와 무과, 양과에 급제하시니 우리 청주지씨가문에서 뿐 아니라 고려 광종때 과거제도가 생긴 뒤로 최초의 일이었다. 청주지씨가문의 재주있는 혈통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지순의 후손 지승해가 판도좌랑과 상장군을 역임하고 예성부원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다.
둘째 대장군을 지낸 지윤심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으며, 지윤심의 후손 지찬은 공민왕 3년(1354)2월에 지찬을 밀직부사을 역임하고 청주부원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일으켰다
셋째 평장사를 지낸 지도관을 일세조로 받들고 있으며, 그의 후손 낭장를 지낸 지석숭는 이자겸(李資謙)의 난(亂: 인종4년 1126 丙午 2월에 이자겸이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자기집으로 모셔다가 害하려한 일이 있어 5월에 왕이 拓俊京에게 비밀히 명하여 이자겸을 잡아 귀양보내게 하고 12월에 사형시킨 일이 있다) 때에 정성을 다하여 좌우에서 왕을 보호하였으며, 인종 13년(1135)에는 병마사(兵馬使)로서 서경(西京, 平壤)의 반역자 묘청(妙淸)을 토벌(討伐)하여 평정(平定)하였다 .
청주지씨는 조선시대 현달한 인물 배출하지 못하였다.
청주지씨는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732가구, 93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5.단양지씨의 유래
단양지씨는 충주지씨 시조 선의공 지경의 후손이나 선대의 기록이 없다.
단양지씨의 시조는 안찰사(按察使)를 지낸 지득심(池得深)이다. 그의 선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시조(始祖)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양지씨는 고려와 조선시대는 이름이 알려진 성씨가 아니었고, 현달한 인물도 없다.
단양지씨는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420가구, 13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6. 무주(광주)지씨의 연원
무주(광주)지씨는 지훤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무주(광주)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후손 고려충렬때 상장군으로 지윤보는 무주부원군(武州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무주(광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러나 지훤은 태어난 해와 돌아가신 해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 수 없다. 다만 신라의 개국공신 지충강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현재 충주지씨 시조 지경선생와 개국공신 지충강와의 혈연관계 등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원래 두권이 있는데 그중 한 권는 족보가 없어져 중간세계(世系)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후백제 견훤의 사위인 지훤는 무주(武州:지금의 光州) 지역의 성주(城主)였다. 903년(견훤 12)에 그당시 궁예(弓裔)의 부하장군으로 있던 왕건(王建)이 해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무주지역으로 쳐들어왔으나 성주인 그는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역사에 나타난 두드러진 인물로는 그의 후손 장숙공 지윤보는 충렬조(忠烈朝)에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일찍이 왕이 원(元)나라에 갔을 때 모시고 갔던 노고(勞苦)로 상(賞)을 받았으며 시호(諡號)는 장숙공(莊肅公)이다.
광주지씨는 조선시대 현달한 인물 배출하지 못하였다.
광주지씨는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에 총 295가구, 9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7. 홍농지씨의 유래
도시조 선의공 지경은 충주지씨의 중흥조(中興組)이다.
선의공 지경을 시조로 하면서 선의공 지경의 후손으로 조선 인조 때 귀화 온 장군 지명천의
셋째아들 지시염을 중시조로 한다.
지시염은 뒤에 지시영으로 이름을 고쳤는데, 그는 지명천과 홍농모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 우리나라에서 살다가 청나라의 난을 피하여 제주도에 피난하여 살면서, 우리가 아는 홍농지씨의 중시조가 되었고 선대의 출신지인 중국의 홍농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들은 "벼슬 멀리 하고 영달하기를 바라지 말라"는 시조 지시염의 유언에 따라 부
귀와 벼슬을 멀리 했던 탓으로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족세(族勢)를 크게 떨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홍농지씨는 조선말기 귀화한 성씨이며 오늘날 홍농지씨는 충주 지씨(忠州池氏)와는 통혼(通婚)을 하지 않으며, 경기도를 비롯한 강원도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위 지씨(池) 성씨연원은 한국지씨(池)족보. 기타 모든 기록에 동일하게 정의한 지씨(池) 성씨역사입니다.
지씨(智氏) 유래
「조선씨족통보」 에는 지씨의 본관을 13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관향은 봉주, 봉산 2본으로 전한다.
1. 봉산지씨 유래
봉산 지씨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 때의 명장인데,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는 경주정씨 시조 정지백호와 신라개국공신지충강의 후손이라고 하며 또 충주지씨의 시조 선의공 지경와의 가까운 친족이라고 한다. 충주지씨 지경와 봉주지씨 지채문는 가까운 친족이라고 합니다. 어떤 문헌은 가계도 보면 6대조이나 8대조부터 갈려져 나왔다고 합니다.
그는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이 평정된 후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 :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시조 채문의 증손 녹연(祿延)은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음보로 벼슬에 올라 동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을 지냈고 1104년(숙종 9)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전중사어사(殿中寺御史)가 되었으며, 예종 때 내시지후를 거쳐 경상도 안무사(按撫事)·동북면 병마사(兵馬使) 등을 역임한 후 1125년(인조 3) 동지중추밀원사(同知中樞密院事)에 이르렀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득남(得男)은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 현의 별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능한산성에 들어간 뒤 전세록·김여간·계숭로·임여택 등과 함께 선천의 월봉에서 천 여명의 의병을 모아 적을 대파하였으므로 이름이 후세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2. 봉주지씨의 유래
봉산지씨와 봉주지씨 시조가 다르므로 어명히 다른 집안입니다.
봉주지씨(智氏)는 조선 선조때 우리나라에 원병(援兵)을 데리고 온 명나라 지우덕(池友德)장군을 시조로 한다.
[봉주지씨 을축보]에 의하면 그는 동원장사(東援壯士)로 뽑힌 장남 어약(漁若), 차남 신약(辛若)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많은 전공을 세우고 귀국하였다.
그후 장남 어약가 명나라 의종때 나라를 위해 순절하였고, 명나라가 망할 때 그의 자손들이 우리나라로 망명하여 오자, 조선의 헌종은 그들의 선조 지우덕(智友德) 장군의 전공에 보답하는 뜻으로 귀화한 그들에게 봉주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봉주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증손 성(城)가 판중추부사와 대사헌를 역임했고,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석우(錫于)은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성의 손자이며, 석우의 아들 정현(汀顯)은 어모장군에, 석우의 손자 세호(世湖)는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올랐다.
그외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봉서(鳳瑞)와 상호군을 역임한 헌순(憲淳), 경(鏡)가 유명했으며, 군자감정을 지낸 태윤(太潤)는, 공조참의를 역임한 경근(敬根), 호조참판을 지낸 봉혁(鳳爀)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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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지씨(太原遲氏) 유래
遲(지) 성(姓)의 하나
지씨(遲氏)는 본래 중국(中國)성씨이며, 우리나라 지씨(遲氏)는 동래(東萊)한 연유와 시대를 고증(考證)할 문헌이 전(傳)하지 않아 상고(詳考)할 수 없고, 전해지는 본관(本貫)으로는 태원(太原) 단본(單本)이다.
태원지씨(太原遲氏)의 선계(先系)는 초간(草磵) 권문해(權文海)가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기록에 그 조상이 중국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씨(遲氏)의 성(姓)을 하사(下賜)받고 관향(貫鄕)을 태원(太原)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沙), 연(燕), 해(解), 고(高), 진(眞), 국(國), 백(?), 막(莫), 지(遲) 등 보인다.
또한 고구려가 막 국력이 뻗어나가던 시기 중국 화북은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가 통일합니다. 이때 선비족 유력 부족 중에 울지부(蔚遲部)가 있습니다. 효문제 때 한화정책을 쓰자 울지부 구성원 중 일부는 둘째 글자를 따서 성을 지씨로 바꿉니다.(<위서> 관씨지)
그러나 일부는 당나라 때까지 계속 울지씨를 쓰는데, 역사에 기록이 남은 인물로 당 태종을 섬긴 울지경덕(蔚遲敬德)이라는 장수가 있습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기원에 대해 선비족 귀화인설이 계속 나도는 유력한 증거가 되면서 유명해졌지요. 당대 이후 남아 있던 울지씨도 대부분 지씨로 성을 바꿉니다.
국제조사 떄 10가구정도 확인하였다.
위 지씨(遲) 성씨연원은 지씨(遲)족보. 기타 모든 기록에 동일하게 정의한 지씨(遲) 성씨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