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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는 게 별거더냐, 돌아 볼 추억이
있다면 좋은 거지.....
----- 촌놈의 고향 단상 모음
2007년 여름
----- 신 인호
----- 목 차 -----
1.물 감재(고구마) 그리고 조샌(씨)댁 영선이
2.내 친구 Y 땡땡
3.울 아부지( 우리 아버지)
4.수도등에서의 컘핑
5.서문리 000 번지
6.몽당연필 그리고 노 선생님
7.대전 해수욕장의 하루
8.명사십리의 추억
9.조부의 일기
10.우리 장손 형님
11.울 아부지(아버지) II
12.수도암
13.내 후배 윤 00
14.돈이 사람보다 소중해?
15.낚시 이야기
16.섬진강 백사장에서
17.마치골 사람들
18.아! 그리운 봉황산아
2. 내 친구 Y 땡땡!
Y 땡땡은 나와 친구다. 둘도 없는 나의 친구다.
그와 나는 초등학교 때 두 번인가 같은 반을 했다.
그와 나는 키가 비슷한데- 178 혹은 179 cm - 그는 항상 자기가 나보다 0.5센티쯤
더 크다고 우긴다.
평상시에 지나치다 싶이 꾸부정하게 있다가도 나와 키를 대 볼 때면 항상 발을 곧추 세운다.
꾸부정한 자세만 빼면 그는 신언서판이 빼어났다.
많은 형제 중에서도 유독 그와 그의 큰 누이가 성격도 외모도 남달리 좋았다.
그의 큰 누이는 특히 그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외모가 서구적이셨다.
그리고 그는 유난히 큰 누이를 따랐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기실 큰 누이가 일찍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와 모든 면에서 많이 닮아 있었기에 더 그랬다는 것을
그 때도 지금도 나는 잘 안다.
큰 누이는 외모만 서구적 이셨던 것이 아니라 성격도 밝고 활달하셨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를 맞아주시던 그의 누이는 우리 모두의 누님 이셨다.
우리 둘은 초등학교 시절에도 집안 어른들의 공식적인 허락을 받고 교대로 집을 오가며
함께 밤새며 공부하곤 했다. - 사실 반은 몰래 만화책을 보았지만…….
그 당시 Y00은 큰 누이와 한방을 썼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이었다. 그 날도 나와 Y00은 적당히 공부하는 척 하고 열심히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만화책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짱구 박사와 ―이었지 않나 싶다.
둘 다 만화책에 몰두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밤 12시가 조금 넘었을 것이다.
왜냐면 만화책에 몰두해 있었지만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귓전으로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Y00의 큰 누이, 우리들의 누이가 인기척도 없이 조용히 들어오셨다.
그리고는 이내 유난히 천장이 낮았던 Y00의 건넛방의 또 다른 방- 기실은 한 방을 장지문으로
나누어 놓은- 으로 가셔서 소리도 없이 이부자리를 펴신 후 잠자리에 드셨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면사무소에서 면
서기를 하던 내 당숙과 마주치게 되었다. 당숙은 그 당시 쉽게 사기 힘든 양초로 가는
증기 장난감 배를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그 시절 방과 후 면 한때 매일처럼 갑 오징어에서
나오는 하얀 등뼈나 소나무 껍질로 만든 돛단배를 수돗물 받아 놓은 통에 띄워 놀기를 좋아 했다.
가끔 조부 댁에 들렸던 당숙은 나의 그런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곤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난감 배 선물이 부모 없이 조부 슬하에서 자라는 불쌍한 당질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고 감사했었다.
아니 그때는 그냥 좋아서 뛸 듯 기쁜 마음으로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렸었지만 그것이 당숙이 내 입을 막기 위한 뇌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당숙과 Y00의 큰 누이는 그해 가을 양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읍내의 유일한 교회에서 결혼하셨고,
Y00과 나는 사돈이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 당숙과 Y00의 큰 누이는 교회 성가대 연습 핑계로 밤늦게까지 열열이 연애
하셨다하였고 그 당시엔 쇼킹한 뉴스였다.
Y00과 나는 그 후 더욱 의기투합하여 조금은 좋은 일 더 많이 짓궂은 장난을 치며 함께
몇 년을 보내고 Y00은 광주로 나는 서울로 전학 갔다.
그 후 3년 후 여름 우리는 고향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들만 다닌다는 S대학 법대생으로 나는 최고의 사립대학이라는
Y 대 문과대학생으로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유년기를 살찌우고, 우리의 사춘기를 삭막한 타향의
물기 없는 바람 속에 내 몰아 버린 그 고향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해 여름 우리의 조우는 그는 내게 사회 개혁에 내밀히 참여하는 기회를 주려했고,
나는 그에게 창작을 통한 간접적 사회 개혁의 의미를 불어넣고자 했던 그런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게 진실이 담긴 창작은 뛰어난 상상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한 고 3 그해 여름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와 나는 그저 그렇고 그런,
허지만 좀 친한 초등학교 동창사이가 되는데 그쳤을 것이다.
그 해, 고 3 여름 방학 때 나는 친척 선배의 꾐에 빠져 다시 고향 땅으로 피서를 갈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극심한 부모님의 반대를- 어떻게 고 삼이 입시 공부에 전념하지 않고 라는 보통 부모들의 걱정과 염려이지만 -
무릅쓰고, 딱 10일 간이라는 단서조항을 달아 부모님의 허가를 어렵게받어 내어, 그
당시 막 운항하기 시작한 고향 향 고속버스에 몸을 싫었다.
그 때 내 기억의 저편 언저리에 밀려나 있던 초등학교 동창과 선배들을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뭐 그 당시의 고삼이나 재수생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대부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했는데,
아마도 그때 처음 나도 술과 담배를 입에 대었을 것이다.
지금 기억으로는 담배 맛이나 술 맛을 알었던게 아니고 그냥 호기심과 늦깎이 배움에 대한 멋쩍은
기분으로 애써 뻐금 뻐금 피어대고 벌꺽 벌꺽 마셔대었던 거 같다.
사실 Y00과 고 1때 마지막으로 조우한 후 나는 그야말로 모범생으로 변해 있었다.
오로지 독서와 공부 밖에 염두에 두지 않았고, 나의 일상은 우선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초의 한눈 팔 여유도 없이 꽉 짜여 있었다.
그땐 아마 3-4과목 이상의 과목에 대하여 과외를 매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혹독한 과외 덕분인지 고2 때부터는 항상 S대 진학 반(소위 우반)―인문 계열 지망생 1개 반,
이공 계열 지망생 1개 반 2개 반이었는데, 각 계열별로 대략 전교 1등에서 60등 안에 드는
아이들을 별도로 반을 편성해 수월성 교육을 가르쳤다.―에 속해 있었다.
그래도 고 3 1학기 까지는 인문 계열에서 전교 20등 안에 들었었고, 나의 진학 목표는 S대학 영문과였다.
진학 상담에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나의 고 3 당시 담임도 내 실력 정도라면 S대 영문과
정도는 문제없다고 장담하여 진학 상담으로 가끔씩 방문하는 우리 어머님을 안심시키곤 했으니
공부 밖에 모르는 범생은 범생이었던 모양이다.
허지만 그 해 여름은 내게 너무 많은 악동 친구와 선배를 한꺼번에 안겨 주었다.
그 당시 아무리 입시 준비에 한 눈 팔아서는 안 되는 고 3과 재수생이라 할지라도,
시골 출신들은 어째든 방학이면 고향땅으로 반 연간 먹고 살 양식과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귀향해야만 하는 형편들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이미 몇 해 전에 악동으로 변해 버린 동창과 선배들은 조금은 부러운, 조금은 빈정거림과 장난기가 섞인 시
선으로 나를 대했지만, 그들의 그런 시선도 열흘에 걸친 그들과의 놀이판을 통해 아스라이 잊고
있었던 질펀하지만 사람 냄새가 넘쳐나는 내 고향,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 버리는 나를 막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아침나절 대게 10시쯤 우리는 전날 밤 헤어지기 전에 약속한 동창이나, 선배 집에 모여 점심도 대충 때우고,
저녁때까지 술내기 화투를 쳤고, 저녁때가 되면 대 여섯 명씩 떼 지어 어슬렁거리며 읍내를 헤집고 다녔다.
이 술집에서 1차, 저 술집에서 2차, 또 저쪽 집에서 3차, 그리고 마지막은 항상
우리 집- 조부댁 - 점방 앞 평상에서 새우깡에 소주 1~2병으로 4차를 해치우고,
홍교 다리 난간에 1열로 기대어 마지막 남은 한 개비의 청자 담배를 몇 모금씩 폐부
깊숙이 빨아드리고는 각자의 집으로, 어떤 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어떤 이는 이유 없이 훌쩍거리며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할머님이 열어 놓은 작은 쪽문 -
큰 대문에 한 사람이 들어 갈만하게 만들어 놓은 문- 을 열고, 대청마루 오른쪽 끝에 있는
조부님 방 불이 꺼져 있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고양이 걸음이지만 잽싸게 사랑채로 가곤 했다.
다음 날 점심때쯤이면 그렇게 고래고래 박자도 음정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불러 대며 늦은
귀가를 했던 박XX도, 이유도 없이 훌쩍거리며 영희야, 영희야 내 사랑 영희 야를 불러대던
윤XX도 우리 집 홍교 다리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우리 패거리들의 출발 지점은 언제나 우리 집 앞 홍교다리였다.
다리 난간에 기대어 우리는 오늘은 마치 산으로, 내일은 봉황산으로, 모래는 누구네 집으로 즉결 심판을 했다.
마치 산으로 가기로 했을 때면 우리는 마치 산자락에 있는 여산 부락으로 밤늦게 닭서리를
가는 것이 그날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마지막 술자리의 안주는 서리한 장 닭이었다.
봉황산으로 정해지면 우리는 수십 년 아름드리 벚나무가 양쪽으로 장관이었던 등산로
곳곳에 숨어 아스라한 초승달 달빛에 비추는 사랑에 빠진 청춘 남녀들을 놀래게 해주고 낄낄거리며
산자락에 있던 장터 막걸리 집으로 우 몰려가곤 했다.
생전 처음 접해보는 악동 놀이에 빠져 고향에서의 그 해 열흘은 그렇게 고 삼 수험생의 마음을 흔들며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아쉽지만 나는 그 악동들과 다음 해 대학생이 되어 다시 만나기로 하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째든 그 열흘간의 난행과 이런 저런 사연- 언젠가 다시 자세히 말 할 때가
있겠지만-로 Y00은 S대 법대생으로 나는 S대 생이 아니라 Y대 생으로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3년 만에 고향에서 재회하게 된 것이다.
그 해 여름 나는 고 삼 여름 방학 때 난행을 함께 했던 선배, 동창들과 거창한 친목 및
봉사 모임을 결성했고, 그 기념으로 부락 대항 축구대회를 준비하느라고 매일 매일이 한가하지 않았다.
Y00은 우리 모임을 조금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지만 적극적인 내 권유로 마지못해 가입했다.
그리고 내게도 조건을 걸었는데, 그 당시 S대 사회학과를 재학 중이었던 운동권 선배가 조직한 농
촌 봉사 활동에 내가 참여해 주는 것이 조건이었다.
그렇게 나는 Y00과 함께 읍에서 차로 1시간여 떨어진 면사무소 소재지의 어느 부락에 있는 경지
정리 현장에서 처음으로 리어꺼를 끌며 황토 흙을 운반하고, 밤이면 부락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하며 그렇게 1주일을 보냈다.
그런데 그 1주일 사이에 우리가 봉사 활동을 하던 면의 면장님이 2번, 경찰지서 소장이 2번씩 우리가
고단한 주간 농활을 마치고, 저녁 먹을 때쯤이면 수박이나 참외를 한 보따리씩 사들고
우리들의 숙소를 방문하곤 했다.
나는 그 때는 그저 의례것 대학생들이 봉사하느라 고생한다고 그곳 유지들이 위로차
들렸으리라 치부하고 말았다.
후에 안 것이지만, 면장님과 지서장님은 그 당시 지역 여당 국회의원이셨던 부친을 둔 내가 있었기에
열심히 우리들을 위로 방문 왔지만, 만약 내가 없었다면 그 분들은 위로 방문이 아니라 정보부처
상부 보고용으로 감시 방문했으리라는 것을 정보 부서에 근무하는 선배를 통해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물론 운동권 선배의 지침에 충실히 따른 행동이었겠지만, 어째든 Y00은 나를 잘 이용했다.
그리고 나는 순진하게 잘 속아 주었다.
나도 Y00도 대부분의 곱게 자란 양반집 아이들처럼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고 은연중에 그 시절의 황폐하고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Y00은 적지 않게 운동권을 배출한 호남의 명문고 출신답게 드러나지 않게 운동권 친구와
선배들과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다. 직접 행동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심정적으로는 언제나
그들보다 앞장서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그 당시 여당 의원이셨던 부친 때문에 직접 운동권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주동한 데모에는 항산 선두에서 두세 번째 줄에서 구호와 돌팔매질만 열심히 해 대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어느 날 대학 동기와 나는 선두에 섰던 까닭에 주동이 아니었지만
Y대 관할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의 부친은 " 그 녀석들 그 긴 머리나 깎아서 내 보내 주시오." 했다고 관할 경찰서장이
서장실에서 시원하게 깎인 우리들의 머리를 쓰담으며 웃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시위 때마다 선두에 서서 함께하지 못함에 대한 죄책감을 씻으려 했었다.
그러나 중요 한 것은 그 여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촌마을에서의 농활이 Y00과
나를 다시 초등학교 시절처럼 끈끈하게 이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해 늦 가울 Y00은 다시 한 번 나를 운동권으로 유인하려했었다.
거리에는 마지막까지 끈진 목숨을 붙들어보려 했던 철지난 진노오란 은행잎들이
아스팔트 이곳저곳에서 무더기로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 유난히 길었던 1971년 늦가을이었다.
Y00은 아무 설명도 없이 내게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나를 수유리 4.19 탑 부근 차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Y00처럼 유난히 키가 크고 깡마른 한 선배를 내개 소개해 주었다.
내게는 그저 소개뿐이었고 대부분의 대화는 Y00과 선배의 몫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깡마른 선배는 수배중인 운동권 핵심이었고 나는 말하자면 수사진의
감시를 따돌리는 DECOY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면서도 짐짓 그 DECOY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수년 뒤 내가 미국에서 출장차 귀국 했을 때 , 그 선배는 광주지역에서 방송관련
사업을 하며 제법 사업가로 자리 잡고 있었고 내가 그를 위해 DECOY 역할을 해준 보답이었는지
어째든 거나하게 한잔 샀다.
그해 내내 교련 반대 시위와 그에 따른 휴교, 유신 반대 시위와, 위수령으로 인한 휴교의 지루한
반복 끝에 우리는 또 다시 겨울 방학이라는 공식적인 휴교를 맞게 되었다.
조금은 지루했던 그 겨울 방학 어느 날, 나와 Y00은 우리 집안 형님이며, Y00형님의 친구이신 분의
주선으로 더블 미팅을 했다.
Y00의 파트너는 우리 고향 도청 소재지에 있는 명문 J여고를 나와 E여대 재학 중인 재원이었다.
뭐라 할까, 뛰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고만 고만한 생김새에 그런대로 호감이 가는 그런
여학생이었지 않았나 싶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별다른 뚜렷한 인상을 주지 못했던 그 여학생이 지독한 자기희생적인
현모양처 타입임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 당시 나는 내 파트너로 나온 여학생의 미모에 홀려 Y00의 파트너를 자세히 볼
경황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후 Y00과 함께 나는 그 여학생 친구를 몇 번인가 보았다.
우리가 그 당시 함께 했던 곳들은 대부분 Y00학교 근처 학사 다방이나 허름한
선술집이었다.
당시 Y00은 고시냐. 학업 계속이냐는 현실과 이상의 선택 속에서 현실이라는 선택지를 택해
고시 준비에 열공 중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다분히 그 여학생 영향이 컸음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그녀는 그의 하숙집에 삼단짜리 도시락을 야식으로 날랐다고 Y00의 고백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Y00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들의 만남은 어설프지만, 순수한 첫 사랑이었다.
그 당시 Y00은 변해 있었다. 그녀를 만난 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Y00은 언제나 유약해보이지만 강한 신념을 가진 사회 개혁주의자였다.
그녀를 만난 후 Y00은 현실론자로 많이 기울러 있었다.
그 전에는 고시를 통한 현실적인 입신양명보다는 그 당시의 열악한 사회 구조 속에서 학문을
통한 느리지만 점진적인 사회 개혁 쪽에 무게 중심이 기울어 있었다.
그전엔, 고시에 대해 짐짓 무시한 체 했지만, 이제는 적극적이었다.
어째든 그에게 그녀는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해준 변곡점으로 이끌어 준
존재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Y00은 정말 열심히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내 고향 뒷골에 있는 절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뜨거운 여름 한철을 법전과 씨름하며 보내기도 했다.
허지만 타 법대생들 보다 뒤 늦게 고시 준비를 시작해서였는지, Y00은 3번째 도전 끝에
최종 시험을 통과했다.
내가 생생하게 Y00이 3번째 도전 끝에 사법연수원 입소 자격을 얻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특이하게도 Y00은 매번 사시 2차 시험이 끝나면 내게 불쑥 찾아오곤 했기 때문이다.
각고에 노력 끝에 사시에 최종합격 했지만 그사이 그녀는 이미 남의 여자가 되어 버렸고
그 일이 아마도 Y00 을 더욱 분발하여 합격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Y00은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판사가 되었고, 나는 어찌어찌하여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싫게 되었고, 우리는 각자의 삶의 방식대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가 몸담은 조직과 사회에 부대끼며 가끔 내가 한국 출장 시 잠깐 잠깐 얼굴을 보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 Y00과 나는 내가 미국에서 영구 귀국하여, 그는 부장 판사 출신 변호사로 나는
모 대기업 이사로 다시 만나 보통의 조금 잘난 사람들처럼 골프치고, 술 마시고, 대충 국가와
사회를 걱정하며, 그렇게 또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앞서 언급했던 Y00의 큰 누이, 우리들의 누이가 열차 사고로 급사하셨다는 거였다.
우리들의 누이는 원래 세례까지 받은 개신교 권사이셨으나, 3대 독자 외아들의 대를 잊기
위한 간절한 간구는 예수님보다 부처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 덕에 개종하시어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셨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면 몰입하는 우리Y00 집안의 가풍대로 누이는 정말 열심히 불교를
믿고 스님들을 유난히 따르고 봉공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수해 전부터 청화 스님이라는 우리 시대가 낳은 대표적인 선승을
봉공했다.
청하 스님은 입적하시기 직전에는 수많은 불사를 친람하셨던 곡성에 소재한 선찰 성륜 사를
홀홀히 떠나오시어 의정부 소재 조그마한 사찰에서 선방을 차려 다시 수행에 전념하시었다.
그러던 청화 스님께서 세수를 다하시지 못하시고 그 이듬해 입적하시었다.
그리고 입적하신 스님의 다비식이 곡성의 성륜 사에서 거행된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들의
누이, Y00의 큰 누이는 그 다비식이 열리는 곡성으로 가는 버스 집합 장소로 가다가 일산부근 전철역에서
마주 오는 전동차에 치여 세상을 하직하셨다.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던 분들 전언에 의하면 누이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전동차가 수회에 걸쳐
기적소리를 냈음에도 괘념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천천히 철길을 따라 걸었다
했다. 우리는 모두 입적하신 청화 스님이 데려가셨다고 슬픔에 잠긴 유족을 위로하며
겉치레로 말을 건넸다. 허지만 후에 어떤 스님에게 들은 말이지만 청화 스님 같은 큰 선사는
염력이 있어 본인이 열반하실 때 가장 아끼는 제자나 도반 혹은 가장 총애하는 재가
신도중 몇을 함께 열반에 들게 할 수 있다고 경전에 나와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러니까 Y00과 나는 사돈인 관계로 나의 어머니에게 Y00의 누이는 5촌
시누이였다. 촌수를 떠나 Y00의 큰 자형, 내게는 5촌 당숙을 나의 선친은 유난히 아꼈기에
다른 인척과 다르게 어머니와 큰 누이는 절친하게 지내셨다.
그날 큰 누이 장례식장에서 나의 어머니를 뵌 Y00은 나의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에게 그의 큰 누이는 어머니 같은 존재 이였기에 나의 어머니를 뵙고 불연
서러움이 북받쳤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Y00이 그렇게 소리 내어 우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Y00은 그의 부친이
별세하셨을 때도 그렇게 울지 않았고, 언제나 슬픔도 기쁨도 한결같이 마음속에서만 느끼는 타입 이였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이심전심으로 Y00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혼자말로 속삭였다.
“울지 마라, 친구야! 나의 가장 소중한 지기야!
누이는 결코 떠나지 않았다.
부처님의 무량하신 자비심으로 이승 너머에서 억겁 영생 하실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심이 삼천 대천 세계에 비추일 때 누이의 꺼지지 않는
사랑과 자애의 광영이 세속에 더럽혀진 우리들의 가슴 가슴마다에 다시 스며들 것이네.
그리고 청화 스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우리의 마음은 원래 광대무변하다고,
우리가 불행한 것은 마음이 본래 광대무변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무한계의 마음을 분별과 시비를 내서 논하고 한계를 두어 자승자박 하고 있기에 라고
말이네.
우리 그만 이제 육신의 눈물도 마음의 눈물도 모두 거두세, 나의 친구 Y00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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