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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고( 2006/12/8)
노벨 문학상을 탄 이렇게 유명한 작품을 이제야 읽었다. 어머니는 내게 노벨 문학상을 탄 작품만 읽으라고 하신다. 나는 그러면서도 처음 1막에선 자꾸만 뒷 페이지를 넘겨다보며 다 읽을까 말까 했다. 무슨 내용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고도(Godot)를 기다리자고 자꾸만 그러는데 그 고도라는 말이 정말 사람 이름인가? 아니면 영어 단어인 altitude를 가리키는 말인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도는 ‘옛날에 다니던 길’ ‘옛날의 도의’라고 나오는데 이 뜻인가?
하지만 조금 읽다 보니 그건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거였다. 그리고 그 고도는 사무엘 베케트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알 수도 있겠다.
이 책은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방랑자가 고도라는 인물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이 없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그래서 지금은 고도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겐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칠 대로 지쳐 온갖 노력을 다해 본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하여, 고도를 꼭 보기를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서로 질문하기, 되받기, 욕하기, 운동하기, 장난과 춤추기, 지루함과 초조, 낭패감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지껄이는 그들의 광대놀음 등등... 하지만 시간이 지나던, 누가 방해를 하던, 어떻게 됐든, 무엇이 됐든 간에 그들은 고도만 기다린다.
그리고 고도를 만나는 날- 어느 날엔가 끊임없이 기다리면 고도라는 놈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최고점에 도달하는 거다. 불교에서는 성불 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들은 그때가 되면 죽을 수도 있는 거다. 지금은 고도를 기다리느라 죽을 수도 없는 상황... 시간만 할일 없이 보내며 고도를 기다리는데, 정작 고도라는 작자는 기억력이 전무한 소년만을 심부름시켜 자꾸만 약속을 미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시골길에서 누군지도 모르며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고도를 기다려야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그들은 수년 동안 오직 고도를 만나려하는 사람이다. 인생의 목표가 고도를 만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온 늙은 방랑자들이다. 작품의 캐릭터들은 대부분 기억력 감퇴에 시달리는 것 같다. 에스트라공이나 포조나 모두 바로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기억을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어찌됐든 단 한 가지 분명히 옳은 건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할 일은 오직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 책이 끝난다 해도 그들의 기다림은 또 다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면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허울뿐인 말이다. 말은 동작을 유발하고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그들은 기다림을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한다. 생각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함으로써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부분을 보아도 그들은 장난, 말 뿐이다. 그들은 기다리면서 고통과 절망을 자살로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무와 개울도 있는데 목을 매던지 빠져 죽던지 하지는 않았다. 다시 지껄임으로써 기다림을 유지하고 내일을 기약한다. 오직 고도를 보길 위하면서...
그래도 그들은 서로를 격려한다.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해서......” “뭐든 말을 해봐” “지금 찾고 있는 거야......” “기다리면서 뭘 하지?” “말을 하니까 시간이 잘 간다”
그들 앞을 지나가는 낯선 두 나그네도 말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한다. 포조는 사사건건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가 경청할 것을 강요하며, 팔려가는 늙은 노예도 갑작스러운 장광설로 자신의 존재를 선언한다. 쉼표도 없이 3페이지나 이어지는 그 내용은 외부의 힘에 의해 비로소 중단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상대방을 향한 화자이자 배우이며 포조와 럭키가 등장했을 때는 또한 연출자이자 관객이 된다. 그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상대방에게서 이야기를 도출하고 듣고 교환한다. 이야기는 그들에게 삶의 도구이며 위안이다. 나아가 위에 보았듯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 주며 그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다.
이 내용은 전반적으로 무척 희극적이지만 무척 공포스럽다. 내가 직접 이 공연을 봤더라면 더 희극적이면서도 공포심이 더할 것이란 상상이 든다.
다음날 갑자기 눈이 먼 소경이 되어 나타난 포조나, 노예의 삶을 자청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동물 같은 럭키나, 자꾸만 고도를 기다리도록 목표의식을 일깨우는 블라디미르나, 멍청한 일상에서 고통을 얻는 에스트라공이나 모두 모두 희극적이면서 공포스러운 존재다. 사람의 삶을 이토록 공포스럽게,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게 쏙 빼내고 쓴 작자의 역량이 오히려 원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기다림의 끝은...
그냥 가만히 기다리기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루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 그리고 일생이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 라고 하면 될까..? 어제 만난 그 사람과 또 여전히 잡담을 나누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을 나누기보다 기억조차 하지 못할 그냥 그런 이야기들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그러다가 만났던 사람인지 아는 사람인지조차 확실히 인식하지 못한 채 그리고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살아가는 모습.. 어떻게 보면 사르트르의 말처럼 구토를 해야 하는 상황이며 현실의 부조리를 느껴야 하는 상황인데, 이 책에서는 그 내용은 없다.
‘고도’라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조차 혹은 정말로 오긴 오는지조차 모르는 누구 또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는 것.. 그 기다림에 과연 끝은 있는가..?
고도는 형상이 없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그저 막연한 존재일 뿐 구체적인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도, 우리는 고도에 대해 막연한 미래, 다가오는 희망 등의 여러 가지 상상을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고도는 그저 고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고 보는 우리와(나는 생각을 조금 했다. 도대체 고도라는 사람이 누구일지...) 어린이들과의 시각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어느 책에서 보았는데 어린이들과 대학생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대학생은 그림을 보며 함축적인 의미가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하는 반면, 어린이들은 그림 그 자체를 그대로 느끼고 발표를 했다. 오히려 우리보다 어린이들이 이 작품을 보는데 더 재미를 느낄 것 같다.
이 책을 보면서 느낀 점 한 가지. 우리는 너무도 많은 생각들로 인해 상상력이 가로막히는 것 같다. 너무 많은 생각들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독이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게 하는 작품이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그것을 바란다는 그 믿음 하나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희망을 가지며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다림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살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스트라공이나 포조처럼 쓸데없이 일상생활을 보내지 않고, 그 막연한 것을 형상화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인간이 가진 장점 중 하나가 아닐까...?
나도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야겠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 고도를 기다릴 이유도, 필요조건도 없다. 나는 그냥 인생을 살며 앞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 그것이 나에겐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베케트에게 물어본다. 고도를 기다리고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에스트라공이나 포조처럼 쓸데없이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냥 하루하루를 대충대충 보내며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나는 이 책의 한 케릭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쓸데없는 일상생활을 보내지만 말로써 그들은 위안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물론 나도 그렇긴 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보며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무식한 사람은 처음 본다, 거니와 저런 사람들은 참 한심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저들에게 동정심을 주고 싶다.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도 든다. 저렇게 끈기와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나 공부 같은 것을 해서 충분히 좋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보며 베케트가 우리에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나 포조처럼 한심하게 일상생활을 보내지 말 것이며 그들처럼 인내와 끈기심을 가지고 자기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와 닿는다.
또 한 가지 생각한 것은 내가 앞으로 블라디미르나 에스트라공처럼 그냥 그렇게 시간 죽이기에 몰두하며 전락하는 수밖에 없을까?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불안과 염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 분주하게 몰입하여, 때로는 행복한 것처럼 스스로를 위안도 하고 위장도 하며, 그냥 그렇게 있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이 아직 남아 있는가?
베케트는 나에게 도저히 잠 못 이루게 하는 문제를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파헤쳐 놓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다. 도저히 잠 못 이루겠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이며 대표작인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의 저자인 하이데거를 인용하겠다. 어쩌면 문제를 주는 것은 작가의 일이고, 답을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일지도 모르니까. 하이데거는 권태를 ‘표면적 권태’와‘깊은 권태’로 나누었다.
김용규의『철학까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2006년,180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책에 표현 된 내용이 나에게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서 길지만 그대로 인용한다.
“자기 자신이나 상대 때문에 생기는 이런저런 특수한 상황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지루해지는 것이‘표면적 권태’또는‘비본래적 권태’이다. 이런 권태는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항하는 ‘시간죽이기’가 가능하다고 했다. 비본래적인 일상생활에 몰입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권태를 잊는 것이다.
호기심 가는 대로 관광, 관람, 패션, 레저, 인터넷, TV, 게임 등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니며, ‘누가 ~ 했대’라는 어법으로 잡담을 나누고 또 퍼트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거다. 사회문제와 같은 자기 밖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문제마저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신 잡담이나 호기심에 의존하여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러는데 뭐’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결정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간 죽이기’는 그 대가로 퇴락과 전락을 반드시 치르게 되겠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아무튼 그냥 지루해’라고 표현되는 무조건적인 권태가 있는데, 이것은‘깊은 권태’또는‘본래적 권태’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권태에 대해서는‘시간 죽이기’가 불가능하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모두가 근원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권태가 바로 이‘깊은 권태’이다.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숙명적인 권태이다. 따라서 이 권태는 그 어떤‘시간 죽이기’로도 벗어날 수 없는 거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시간 죽이기’가 실패로 끝나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이데거는‘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실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세상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존재 가능성’을 구상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러한 행위를‘기획투사’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기획투사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행위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자기, 본래적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좋은 내용이다. 나는 이 내용을 읽고서 생각 한 것이 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깊은 권태’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실존하는 것 이라고 했다. 나는 비겁한 사람보다는 자립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과연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세상 사람으로 살 것인가?
2006/12/8 잠 오지 않는 밤에 대일이가 글을 쓴다...
첫댓글 대일님의 독서 일기가 오히려 책을 대신하는 기분으로 잘 읽었습니다. 읽고 보니~ 우리는 어쩌면 원래 고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정신없이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길없는 길을 가는 현대인이 되어버린 거 같아요. 나 자신을 찾아서 길을 떠나 봅시다.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해야되는데 말입니다.
전생의 마지막에 죽어도 잊지말자고 다짐했던 뼈저린 기억과 본래자리에서오는 간절한 회귀의 바램. 막연한 고도가 아니라 우리는 확실한 고도를 아는 사람이니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찾아갈수 있으니 참 행복사람입니다. 오늘도 이 순간도 '바로 그것'으로 실존하기 위해 나무아미타불 합니다. 대일거사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러기위해 부처님이 존재하고 우리가 염불을 하는게 고도를 찾는게 아닐까 합니다
무진당님을 어머니로 가지신 대일님은 참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글 솜씨도 무진당님 닮으셨나요? 여간 뛰어나신게 아니네요.
피를 이어받았죠 뭐.ㅋㅋㅋㅋㅋ
훌륭한 독서 일기 "고도를 기다리며" 대일 부처님 아미타불! ^^ 화~이~팅~ _()_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읽고나서 우쭐해진 대일거사. 친구들에게 한마디 했답니다. "너, 데미안 아냐?" 그러자 친구 왈, "뭐? 래미안? "ㅋㅋㅋㅋ. 핸드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독서일기이지만, 그리고 원고지 칸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말을 질질 끌어가지만 그래도 참 좋은 시간 보내고 있는 줄 알기 바래용~대일거사님~'대일'은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뜻하는 거 알고 있지요? 보리방편문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부처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비겁한 사람보다는 자립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대일거사님!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대일거사님 행복한 사람입니다. _()_()_()_
나그네님도 행복한사람입니다....아미타불~
"깊은 권태를 빠져나가다.. " 대일님!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진당엄니! 참말로 부럽습니다. 나중에 만나면 한 수 가르쳐줘요._()_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점 감사합니다
삶의 진수를 일찍 배워가는 대일님이 대견합니다. 멋진 어머니와 함께 화이팅입니다.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대일님 글 읽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정말 대단하신 근기입니다. 훌륭하신 어머님만난 인연에 감사하세요. 덕택에 복습잘 합니다. 멋진 대일거사님 화이팅
자립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기 자신으로 살 것인가? 세상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의미심장한 물음입니다... 멋진 대일님~~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부처님께서 경험하시고 보인 확실한 길을 가는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대일님. 멋지세요. ^^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