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비긴즈. 정말 의미심장한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회생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을 정도로 망쳐졌던 앞의 에피소드들과 과감히 결별하고 새로이 시작한다는 뜻이리라. 이 놀라운 시리즈의 부활이 가능했던 것은 많은 부분 천재적 작가인 크리스 놀란 덕택이다. 그는 배트맨을 기적적으로 다시 '비긴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후속작인 '다크 나이트'를 통해 진정한 블록버스터의 모범답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다시 한번 배트맨은 스파이더맨을 제친 것이다!
이 영화는 흡사 완벽한 기본기를 갖춘 탄탄한 기량의 축구팀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배트맨를 시작했던 팀 버튼은 굉장히 변칙적이었던 반면 크리스 놀란은 철저하게 정공법을 택한다. 일반관객에게는 놀란의 배트맨이 훨씬 쉽게 다가온다. 그것도 만만치 않은 재미를 동반하고서 말이다.
작년에 선보였던 '다크 나이트'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정나미가 떨어졌다면 '배트맨 비긴즈'는 만화적 우직함과 파괴적 쾌감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한스 짐머와 제임스 뉴튼 하워드 콤비의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심장박동을 닮은 음악은 이 영화를 중요한 순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비록 히스 레저의 신들린 조커는 없지만 난 '배트맨 비긴즈'가 훨씬 더 맘에 든다. 도심의 건물 지붕 위를 광폭하게 달리는 텀블러를 보는 기쁨은 변신 로봇들의 재롱잔치를 훌쩍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