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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북정맥 제 16 구간 산행기
(모래기재 ~ 근흥중학교 앞)
1. 산행일자 : 2007년 12월 23 일(일 요일)
2. 산 행 지 : 퇴비산(165m) - 충남 태안
3. 날 씨 : 맑음
4. 참 석 자 : 박봉하, 박상호, 윤희원, 이용준, 이정연, 장현옥(6명)
5. 산행계획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총 산행 약 15km, 5시간 30분 정도
[2] 구간별 거리
모래기재--2.8km--159.7m--2.2km--유득재--1.9km--장대리--2.2km--장재--1.2km-- 마금1리--1.5km--밤고개--1.3km--윗밤고개--1.9km--근흥중학교(603번 지방도로)
[3] 구간별 소요 시간
(1) 태안, 기상(05:00) ∼ 식사(05:50/06:30) ∼ 모래기재(06:50)
(2) 모래기재(07:00) → 145봉/삼각점(07:40) → 32번국도(08:20) → 유득재(09:30)→ 시목리방앗간(09:45) → 쉰고개(10:40) → 무인기지국(10:50) → 경로당(11:30) →마금1리회관(11:35/점심/12:00) → 매봉산(12:50) → 밤고개(13:00) → 후동고개(13:50) → 73.2봉(14:10) → 근흥중학교(14:25)
(3) 용신삼거리, 603지방도(14:40) ∼ 서산IC ∼ 서해안고속도로 ∼ 수원(17:00)
6. 산행의 실제
(1) 태안, 기상(05:30) ∼ 식사, 차량배치(06:30/07:55) ∼ 모래기재(08:05)
(2) 모래기재(08:10) → 159.7봉/삼각점(09:01) → 32번국도(09:28) → 유득재(10:13) → 우렁각시탑(10:45/10:54) → 쉰고개(11:02) → 마금1리회관(11:37/11:57) → 매봉산(12:21) → 후동고개(13:18) → 103봉(13:24) → 근흥중학교(13:47)
(3) 603지방도(14:00) ∼ 서산IC ∼ 서해안고속도로 ∼ 수원(16:00)
7. 산 행 기
[1] 산행전
전날 산행을 끝내고 「『우정횟집(충남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 509-1 / ☎ 041-662-0736 / H.P 017-420-0763)』에서 저녁 식사겸 산행 뒤풀이로 이스리와 친분이 다소 돈독했는데 숙소로 돌아와 잠자리에 일찍 드는 것이 허전해 윤사장님과 함께 숙소 앞에 있는 토끼탕집을 들렸다. 기름 유출 사고 때문인지는 몰라도 손님도 없다.
주인아주머니께 부탁하여 내일 산행 때 먹을 간식으로 계란을 삶게 하고 이스리를 권하며 아주머니로부터 태안 이야기를 듣다보니 야심한 밤이 되고 말았다. 안주도 푸짐하게 남았는데 내일 산행을 생각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05 : 30분 기상인데 몸도 뻐근하고 눈도 떨어지지 않는다. 어제 산행으로 고단한 탓도 있었지만 과음을 했던 모양이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을 지체하여 숙소를 나와 아침 식사 장소(윤가네 설렁탕)로 이동을 했다. 박사장과 한일아파트 이여사(이정연)가 내려와 있다. 산행에 함께 동참하기 위해 이른 아침 먼 길을 와 준 것이 너무 고맙다.
[2] 산행 들머리 태안여자고등학교 정문 앞
08 : 10, 모래기재(운산면 갈산리. 갈산리에서 가재울로 넘어가는 고개, 모래가 많아 여름 우기에는 사태가 자주 난다고 함)인 태안여자고등학교 정문 앞에 주차를 시키고 태안여고 뒷산을 오르는 것으로 오늘 산행을 시작해야 하는데 길도 뚜렷하지 않고 잡목과 가시나무 길이라 잠시 시멘트도로를 따라 가는 것으로 오늘 산행의 첫발을 내 디뎠다.
08 : 27, 태안여고 강당(ROSE HALL)을 휘감아 도는 시멘트 도로를 7분여 따르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3] 예비군 훈련장
08 : 37, 예비군 훈련장(1789부대) 정문에 도착, 우측 비포장 길로 잠시 진행한다. 4분여를 군부대 울타리를 따르다 좌측으로 진행, 군부대 가시철망을 넘어 서면서 숲 속으로 들어서서 山峰을 오른다.
산봉에서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고 능선을 따르다 다시 급경사를 이룬 산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4] 159.7봉
09 : 01, 산봉(159.7m)에 올랐다. 나무에 두 개의 燃燈과 「퇴비산(해발 약180m) 봉화대 추정, 해동대명 약사암→」표지판을 달아 놓았고 삼각점 위에는 작은 부처상을 올려 놓았다. 산악대장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退飛山, 165m』이 아니라 159.7봉이라고 한다.
※ 燃燈 : 燃燈會의 준말, 고려 초부터 있었던 국가적인 불교 행사, 온 나라가 집집마다 등을 달아 부처를 공양하고 나라의 태평을 빌었음. 처음에는 음력 정월 보름에 하다가 후에 음력 이월 보름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사월 초파일로 바뀌었음.
09 : 10, 삼각점이 있는 159.7봉에서 잠시 메모를 하고 급경사를 내려오니 대원들이 멀리 가고 보이지 않는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대원들을 따라 잡기 위해 급경사 峰을 올랐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늦은 만큼 휴식도 짧다. 물 한모금과 간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퇴비산 분기점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꺾어 내려간다.
[5] 유득재와 시목리(柿木里)
09 : 28, 「근흥면」과 「소원면」경계가 되는 32번국도 사거리 도착, 「근흥면」표지판이 있는 시멘트 포장길로 진입을 한다.
「근흥면」의 지형은「백화산의 한 줄기가 근흥으로 뻗어내려 구수산(145m), 대왕산 (140m), 전막산(121m), 장치산, 건지미산, 응봉 인생산, 형제봉, 지령산 등을 이루어 놓았다. 지령산은 근흥면의 주산인데 주변으로 뻗어내러 청룡록, 금고도, 구절봉, 노적봉, 영주봉 석정티산을 이루어 놓고, 다시 한 줄기는 안흥으로 뻗어내려 당봉, 문필봉, 남산봉, 객사봉을 이룩해 놓았다. 이와 같이 근흥면은 전면적의 70% 이상이 산지로 되어 있어, 넓은 농경지는 많지 않으나 곳곳 에 간척지가 발달되어 있어 소규모의 평야가 펼쳐 있으므로 영농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또한 근흥면은 3면이 바다에 접해 있는 반도이므로 수산업이 매우 발달되어 있으며, 따라서 안흥 항은 지난 1975년에 일종항으로 승격되어 명실상부한 어항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으나, 실은 일찍 고려시대부터 여송무역선이 드나드는 국제항으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출처> 태안군지, 근흥면사무소
09 : 38, 『구수산(145m)』 분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진행하여 돌탑이 있는 봉우리를 통과하여 급경사 내림 길로 들어선다.
10 : 08, 32번국도, 시목리버스정거장과 「등나무슈퍼」가 있는 포장도로 사거리『유득재』에 도착했다. 유득재 사거리에서 우측 「심은교회」 방향 표지석이 있는 세멘트 도로를 따라 가면 「시목초등학교」표지판 삼거리가 나오고(10 : 13분경) 2분여를 더 진행하니 시목구판장과 교회가 있는 감나무골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시목리((枾木里)』는 본래 원일면(遠一面)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이 마을에는 감나무를 많이 심어 감의 생산량이 많았으므로 동네 이름을 『감나무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감나무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시목리(발木里) 또는 시목동(枾木洞)』되는데, 지난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원일면의 석문리(石門里)·와야리(瓦也里)·유득리(柳得里)·백교리(白橋里)·괴목리(槐木里)·추동리(樞洞里)·석현리(石峴里)와 근서면(近西面)의 마금리(磨金里) 일부 지역을 합쳐서 리명(里名)을 『柿木里』라 하여 서산군 소원면에, 편입 시켰다.
소원면에 편입된 시목리는 75년간 내려오다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의 復郡에 의해 시목리는 다시 태안군의 관할 지역으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태안군지
[6] 삼곳말(장대리)
10:29, 장대1리(삼곳말) 버스 정거장 삼거리에 도착했다.
『장대리(將臺里)』는 본래 태안군 원이도면(遠二導面)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이 원이도면이 원이면(遠二面)으로 개칭됨에 따라 이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1914년의 행정 구역 폐합 때에 내동리(內洞里)·고현리(高峴里)·송우리(松隅里)·석문리(石門里)·추동리(樞洞里)·삼봉리(三峰里) 등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그대로 장대리라 호칭하여 서산군 원북면(遠北面)의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어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 태안군이 復郡됨으로서 장대리는 다시 태안군의 원북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대리는 옛날 군사 지휘에 사용하던 장대(將臺)가 있는 밑에 해당되므로 마을 명칭을 장대 또는 장대문이라고 명명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7] 우렁각시 탑
오르내림이 없는 평탄한 길이어서인가? 뛰는 걸음으로 걸어 선두를 따라 잡기가 힘들다. 30여분을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이 지루하고 빨리 걷다보니 오금이 절이다.
10:45, 앞서 가던 선두가 부지런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자리를 잡는다. 잠시 휴식을 할 모양이다. 급한 걸음으로 도착해 보니『우렁각시탑』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표지판이 지시하는 방향(도로 우측)으로 약 10m를 걸어 가 보니 무덤 3기가 있고 무덤 아래쪽으로 독 같은 모양의 돌탑을 쌓고 탑 상단부에 「우렁각시 추모비」새긴 돌을 올려놓았다.
이 마을에서 우렁각시 이야기(民譚) 생긴 것인가?
「가난한 노총각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 농사를 지어 누구랑 먹고살고?” 하자, 어디선가 “나랑 먹고살지, 누구랑 먹고살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총각이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가 보니, 우렁이 하나가 나왔다.
우렁이를 집에 가져와 물독 속에 넣어 두었는데, 그 뒤부터는 매일 들에 갔다 오면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상히 생각한 총각이 하루는 숨어서 살펴보았더니, 우렁이 속에서 예쁜 처녀가 나와서 밥을 지어 놓고는 도로 들어갔다.
총각이 처녀에게 같이 살자고 하자, 처녀는 아직 같이 살 때가 안 되었으니 좀더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총각은 억지로 함께 살았다. 하루는 우렁이각시가 들일을 나갔는데, 지나가던 관원이 보고는 자기 처로 삼으려고 데려오게 하였다.
우렁이각시는 자기를 데리러 온 관원의 하인에게 반지·비녀·옷고름·겉옷을 차례로 내주면서 이것 밖에 없더라고 말해 달라고 했으나, 끝내 관원에게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를 안 총각은 애를 태우다가 마침내 죽어서 파랑새가 되고, 우렁이각시도 죽어 참빗이 되었다.」는 설화다.
<출처> 한국 구비문학 대계
어떤 연유에서 이 탑을 세웠는지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이 설화와 흡사한 사연이 『장대』마을에 전해오고 있는 모양이다.
[8] 쉰고개
무덤가 잔디밭에 앉아 느긋하게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10 : 54분)이다. 배낭을 챙긴다했는데 선두는 모롱이를 돌아가 보이지 않는다.
우렁각시탑을 출발하여 비포장도로를 다라 걷기를 7,8분, 『유득재』에서 횡단했던 32번국도를 다시 만나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약 500여 m를 도로를 따라 걷다 「새마을 상회」가 있는 『쉰고개』에서 도로를 횡단하여 「만수가든」옆 비포장길로 접어들었다.
[9] 공수골(마금1리 다목적복지회관)
11:10, SK 이동통신기지국 통과
11:14, 넓은 임도 "Υ" 갈림길에서 좌로 진행 ---> 묘지---> 우측으로 꺾어지는 넓은 임도 ---> 숲 ---> 묘지 ---> 임도 ---> 소나무 숲--->세멘트 도로--->좌측 숲--->묘지(김건태)---> 民家를 지나(11 : 34분경)
11:37, 『마금1리 다목적복지회관(공수골)』앞에 도착했다. 회관 앞으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가고 「수룡저수지」가 보이며 회관 옆에는 창고와 수령이 100년 된 소나무 보호수가 있다.
<<<마금리(磨全里)>>>
“『마금리(磨金里)』는 본래 태안군 근서면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일본 강점기(日本强占期)었던 지난 1914년 그들이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우항리(牛項里) · 접지리(接地里) · 낭금리(浪金里) · 용요리(龍루里) 둥을 병합하여 리명(里名)을 다시 마금리(磨金里)라 개칭하고 서산군 근흥면에 편입시켰다.
이렇게 근흥면에 편입된 마금리는 그 후 70여년 내려오다 지난 1989년 1월 1일에 태안군이 다시 復郡됨에 따라 태안군의 관할 지역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마금리는 달리 『마금동(磨金洞)·마김(磨劍)』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주위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서 마치 동네가 온화하고 포근함이 막은 것 같다 하여 우리말로 「막음→마금」이라 부르던 것을 지명의 한자표기(漢字表記)에 따라 본래의 뜻과는 관계없이 취음으로 마금(磨金) 또는 마김(磨劍)이라 기록함으로써 혼동을 가져오게 했다.
많은 인사들이 단순히 이「磨金과 磨劍」의 뜻을 풀이하여 옛날 이 곳에서 금세공술(金細工術)이 발달했다느니 또는 군사들이 칼을 갈았다는 식으로 무리하게 풀이함으로서 견강부회(牽强附會)를 저질렀는데, 이는 모두 막음(원형은「막다」이다)의 뜻을 이해치 못한 데서 야기된 것이다.”라고 태안군지에 지명 유래를 밝혀 놓았다.
이곳에서 간식 겸 점심 대용으로 준비해 온 떡을 먹을 모양이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도 약간 부는데 땀으로 옷이 젖어 찬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든다. 마을 가게라도 있으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었으면 몸이 풀릴 것 같다. 출발할 때 착안하지 못한 것이 해 아쉽다.
[10] 전막산과 매봉산
11:57, 몸에 寒氣가 들고 갈 길도 바빠 떡으로 簡易 점심을 하고 바로 출발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약 3분여를 진행하다 축사가 있는 길로 접어들었다. 마루금 표지기가 없어 잠시 헤매다가 草地를 가로질러 나가니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12:11, 시멘트 도로를 건너 산으로 진입했다. 오랜만에 가파른 산을 오른다. 숨소리도 거치러지고 다리도 뻐근하다.
12:18, 산봉 우측 삼거리(좌측은 전막산이고 마루금은 우측길)에서 우측으로 진행
12:21, 묘지를 지나 삼각점이 있는 101.6봉 『매봉산(태안군 근흥면)』삼거리에서 좌측 송림이 울창한 산길을 따라 간다.
[11] 후동고개
12:30 묘지군 도착, 앞서가던 산악대장, 잠시 마루금을 노치고 길을 찾는 동안 휴식. 이런 경우가 자주 있으면 가벼운 산행을 할 수 있는데 --- 마루금 표지기를 찾아 다시 진행, 시멘트 마을 길 삼거리에 도착. 도로를 횡단하여 소나무 숲으로 올랐다 다시 전봇대가 있는 시멘트 도로 삼거리를 만나 건너편 임도로 올라서 묘를 지나 民家가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한다.
12:53, 밭 뚝 길---> 시멘트 도로 삼거리(좌) ---> 집과 대나무 밭이 있는 곳으로 진입하여 산봉(89m, 남산)을 오른다.
13:18, 봉우리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내려가니 시멘트 포장길인 고개 마루가 나타난다. 등산로 입구 표지판이 있고 산으로 오르는 길 입구에는 계단이 설치되 있다. 박사장, 『후동고개』에 도착했다고 한다.
[12] 근흥중학교 가는 길
13:24, 장시간 걸음품을 판 때문인가. 계단을 밟고 급경사를 오르는 것이 힘겹다. 마지막 봉 오름이라 땀을 연신 훔치며 다리에 힘을 주고 능선봉(103m)에 올랐다. 나무 의자도 설치 되 있고 돌탑도 쌓아 놓았다. 아마도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자주 이 산을 오르는 모양이다.
13:30, 전망이 툭 터지며 바다가 보이는 묘지에 도착했다. 이제 내려 갈 일만 남아 묘 가장자리에 배낭을 내리고 물 한 모금 마시며 휴식을 가졌다.
13:37, 다시 출발이다. 4분여를 진행하니 마루금에 삼각점(근흥 409-1999년 복구, 73.7)이 있다.
13 : 42, 운동 시설이 설치된 곳을 지나 넓은 길을 따라 5분여를 내려가니 오늘 산행의 목적지 「근흥중학교」건물이 나온다. 힘들다, 힘들다하면서도 꾸역꾸역 걸어 1박 2일 23.7km 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이 너무 홀가분하다.
[13] 산행 마무리
14 : 00시경 차에 올라 수원으로 출발
16 : 00시경 수원 고색동(태산아파트) 「한국관?」들려 저녁 식사 겸 이스리 한 잔을 부딪치며 산행 뒤풀이를 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쳤다.
첫댓글 이제는 이산인지 저산인지, 충청도였는지 전라도였는지도 오락가락하고있는데 회장님 글 덕분에 다시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