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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만사형통 인생안내서 유감
-차동엽 신부의 <무지개 원리>를 읽고
참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 한 권이 있다. 이리도 진도가 안 나가는 이유는 새로울 게 없는 글을 부득이 한번쯤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겉표지 부터 나 같은 사람은 필수적으로 꼭 읽어야 한다는 눈짓을 보낸다. 우리는 이제 ‘전인적 자기계발 원리’가 필요한데, 이 책에서 필자는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책을 읽은 뒤에 드디어 그 원리를 자신이 발견하였다고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 정도 공력으로 얻은 지혜라면 누구라도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으리라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45년 동안 그다지 부유한 축에도 성공한 사람의 축에도 끼지 못한 채 어찌 보면,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부 인생들이 지니기 쉬운 ‘실패하기 쉬운 인생관’을 켜켜이 몸에 마음에, 필자의 언어대로 ‘뇌’에 쌓아둔 채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인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인생관을 배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랴!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내 인생관과 내가 그동안 존경해 마지않던 스승들을 옆으로 밀쳐 두어야 가능한 것을, 좁아터진 마음에 그렇게는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성공’하는 삶을 목표로 두고 훈수를 두고 있는데, 내가 사귀던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실패’를 자초해왔던 사람들뿐이다. 결국 사람이 잘 되려면 친구를 잘 만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존경해 마지않던 인물 중 하나인 토마스 머튼은 수도자들이란 주변머리밖에 없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중세 이후로 수도자들은 하나같이 주변머리만 남기고 머리의 가운데 부분을 비어두었다. 이를 두고 머튼은 수도자란 자고로 세상의 주변에서 세상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실상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스스로 주변인으로서 중심에 있는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그러니 신실한 제자일수록 그분처럼 세상의 주변에 머물려고 하는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서울에서 일을 보지만, 주말엔 식구들이 사는 경주로 내려간다. 강풍이 몰아치는 경주, 그날 저녁에 갑자기 아내가 영화를 보자고 한다. 언제 한번 봐야지, 하고 밀쳐두었던 비디오가 한 편 있었던 것이다. <티벳에서의 7년>. 장 자끄 아노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산악인이었던 하인리히 하러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우여곡절 끝에 달라이 라마를 만나서 경험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중에서 인상적인 장면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하러가 티벳에 와서 양복 재단을 하던 한 여인을 만나는데, 그 여인에게 암벽 타는 법을 선보였다. 자랑하는 하러에게 그 여인이 이렇게 말한다. “정말 우리와는 다르군요. 선생님들은 항상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모두 버리려고 애쓰니 말입니다.” 서구인에게 정상을 정복하려는 것이 ‘성공’이라면, 티벳사람들은 그게 다 무상함을 배우려 한다는 말일 게다. <무지개 원리>에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성공과 행복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 뜻을 거듭거듭 새기고 나아간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고, 넘지 못할 산이 없으며, 마침내 ‘성공’하리라는 것이다. 359쪽에 걸쳐서 필자는 우리가 세상에서 바라던 성공을 이루고, 남는 복은 다른 이에게 나누어 주어 더 큰 복을 얻어 누리라고 가르친다. 참 고마운 말이다. 누구나 바라던 바다.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이 책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는 글을 쓰려 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이가 대뜸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데 뭔 말을 하느냐”하는 것이다. 그 책 때문에 손해 본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다. 사는 데 도움이 되고, 하는 일마다 꼬여서 힘든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정작 책을 읽어보면, 절로 수긍이 가는 이야기도 많고 평소 내 생각과 맞아 떨어지는 구석도 많았다. 그리고 세상을 신나게 살아가는데 보탬이 될지언정 해를 입히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자도 책에서 여러 차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필자와 책에 대하여 고맙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보면 팬클럽에 속하는 이도 실제 많아보였다. 한 책이, 한 사람이 인기를 누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꾸 생각을 모으는데도 꺼림칙한 구석이 남아있다. 실상 <무지개 원리>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것들이 태반이고, 여기저기서 ‘속독하면서’ 집어넣은 정보들을 다시 가공했을 뿐인 것 같은데, 어찌 이리 인기몰이를 하는지 참 요상하다.
나는 그 이유를 몇 가지 ‘상상’해 보았다.
(1) 필자가 천주교 ‘사제’라는 것이다. 개신교 목사들보다 더 신비하고 스님들보다 합리적일 것 같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제가 인생철학을, 더 정확히 인생 가이드북을 썼다는 데 있다. 책 제목이 ‘원리’이듯이 이 책은 결코 신앙서적이나 철학책이 아니다. 일종의 인생지침서다. 이런 류의 성공론 책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 다르게 ‘요즘 흔하다.’ 그렇지만 ‘단지’ 사제가 썼다는 게 메리트를 가질 수 있다.
(2) 대중적 관심에 호소하는 상업주의 정신에 투철하다. 천주교 신자이든 아니든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돈과 건강’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중에서 이 책은 ‘돈’으로 상징되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미끼를 던진다. 물론 책에서 천주교 사제답게 성공은 돈이나 명예, 권력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말하지만, 본문에 다시 들어가면 현실적 의미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오매불망 바라는 사람들에게 대단한 매력을 던져준다. 한마디 돈 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3) 광고의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였다. 될 만한 일에는 과감하게 투자할 필요가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책이 나왔을 때, 그 즈음에 내가 펼쳐 본 가톨릭, 평화 등 교계신문에는 몇 주에 걸쳐서 계속 올컬러 전면광고로 <무지개원리>를 선전하는 책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료 비싸다고 소문난 매일미사 책에도 광고가 실렸다. 뭐 하면 경품도 준다고 했다. 교계신문잡지의 주력 광고였던 돌침대를 밀어내고 한때 빛나는 광고주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더구나 항상 참신한 소재를 찾기 마련인 방송사에게도 사제의 성공론 강의는 잘 들어맞는 컨셉이었다. 적어도 <무지개원리>의 경우엔, 과연 “하는 일 마다 잘 되었다.”
필자가 머릿말에서 이미 예견하여 이야기하듯이 이런 무지개 빛 성공 앞에서 내가 지금 배 아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있는 까닭이다. “되도록이면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이 책을 읽고 제발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아파하지 말고’ 이 땅에 컨그레츌레이션 문화를 확산시켜 내실있는 3만불 시대에 진입하였으면 좋겠다.” 남 잘 사는 것 부러워하지 말고 투정 부릴 시간에 무지개 원리로 무장해서 너도 한번 성공해 보라는 말 같다. 그러나 보라. 우리 현실이 나 하나 바둥거린다고 신수가 훤하게 바뀔 수 있는지. 아무리 대한민국 경제가 3만불 시대로 돌입해서 나아간다고 해도 대다수 국민은 개인의 자질과 상관없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남아, 사회 주변에서 배회할 것이다. 신화창조를 통하여 소수의 잘나가는 인생의 대열에 들어서라고 말한다면, 정말 필자는 실수하는 것이다. 필자에게 메리트로 작용했던 ‘사제’란 직함이 자신의 발목을 걸테니 말이다.
<무지개 원리>에서 예를 드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한결같다. 필자가 이미 전인적 자기계발 원리를 “노벨상을 가장 받은 민족인 유다인이 매일 두번씩 암송해야 하는 ‘세마 이스라엘’ 속에서” 발견하였다고 말했듯이, 그는 탈무드를 무지개 원리의 기본틀로 삼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노벨상 받은 유다인들은 많으나, 주로 과학과 문학 분야이며, 그 중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는 별로 없다. 대개 세상을 위한 투신보다는 탁월한 지력을 통하여 자기실현을 한 사람들이다. 유다인 중에는 시몬 베이유와 도로시 데이 같은 가난한 이들과 노동대중을 위해 헌신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유다인적 뿌리와 전통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적 영성에 뿌리를 내렸던 사람들이다. 즉 탈무드가 별로 인생에 미친 영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다인의 탈무드를 운운한다는 것은, 실제로 유다인의 상인적 기질과 승부사적인 기질을 높이 산다는 것이다. 중세부터 자본주의적 정신을 살았던 유다인을 자기 원리의 바탕에 둔다는 것 자체가 무지개의 원리에서 말하는 성공의 색깔을 암시해주고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직접 유다인임을 암시하는 인물이 나온다기 보다 주로 출세한 미국인들이나 일본인들이 모범으로 등장한다. ‘사치 앤 사치’사의 케빈 로버츠는 일찍부터 인생을 투자란 관점에서 바라본 인물로 칭찬받는다. 힐튼호텔 창립자 콘라드 힐튼, 마이크로소프사의 빌 게이츠, 미식축구선수 하인즈 워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 스타벅스 커피의 하워드 슐츠, 올림픽 육상선수 찰리 패독, 코카콜라 회장 아사 캔들러, 카네기, 록펠러, 그리고 200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인 코시바 마사토시, 와타미 주식회사의 창립자 와타나베 미키, 일본 마쓰시타 전기회사의 창립자 마쓰시다 고노스케 등등. 모두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미국과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필자가 인용하는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미국인이듯이, 이른바 ‘성공학’에 대한 철학과 처세술에 대한 책들이 주로 미국에서 출판된 것들이며, 미국이야말로 기업의 지원아래 ‘실용주의 심리학’이 발전한 까닭이다. 미국은 이른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나라이며, 가장 세속적인 관심이 심한 나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수입된 많은 이론과 사례를 <무지개 원리>에 차용하는 것이다. 어쩌면 저자 약력에서 피력했듯이, 필자가 한때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교환장학생’으로 공부한 것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필자는 성공과 행복에 관련된 국내외 저술들을 두루 읽어보고, “그 저술들이 가진 부분적인 성공법칙들과 행복법칙들을 통합한 결과 마침내 만사형통의 7법칙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 만사형통의 7법칙이란 사람이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서 출세하는 방법을 꼭 집어서 일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말하는 성공과 행복은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완전함이나 지복(至福)과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일까, 한번 묻고 싶다. 우리 신앙 안에서 온전한 의미의 행복을 살았던 사람들은 ‘성인’들이다. 그들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이 원하시던 자기를 실현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천상의 복됨 안에서 살았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보여주듯이, 그들은 출세할 기회를 버리고 세상과 세상적 가치를 버렸다. 맘몬(재물신)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으로 떠나고,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마더 데레사는 -필자는 마더 데레사를 인용하기도 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출세가 아닌 가난한 이들에게로 갔다. 그들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처럼 실패자였다. 세상 속에서 주변으로 남았고,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을 갈망했으며,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살았다. 그들은 결코 세상일에서 만사형통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만사형통한다면 천상에서는 사면초가일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열반에 이를 때까지 스스로 부처되기를 거절했던 보살의 마음이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앙이 바라는 이상형이다.
갑자기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내가 가마,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라고 쓰고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어린 시다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분신을 했던 전태일이 설 자리를 빼앗아 가버리는 성공의 철학과 행복의 처세술은 ‘저들만의 천국’을 꿈꾼다. 스스로 완전하지만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삶이란 속빈 강정이 아닌가? 겉모습은 그럴듯하나 수수깡처럼 여물지 않은 생애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세속화 시대의 성공을 탐하는 이들에게 그 탐심(貪心)을 오히려 장려하고, 생태계와 지구환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절약해서 부자 되려고 수돗물을 아끼는 자들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성공의 방법이 아니라 성공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무리 하면서 얼핏 고개를 쳐드는 생각은 필자의 <무지개 원리>가 단월드(단학선원)의 행태와 무척 닮아있다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뉴에이지 운동을 박멸하기 위한 십자군을 자처한 적이 있었다. 단월드와 이승헌 선사는 영성을 상업주의와 교묘하게 결합시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전국에 수련원을 세우고, 잡지를 발행하였으며, 출판사를 차려 책을 보급하였다. 이 삼박자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주식회사가 되었는데, 논술세대를 맞이하면서 그들의 뇌호흡 열풍은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하나의 아이템으로 다방면에 걸친 성공을 이끌어내는 수완이 뛰어났다. 한 사제가 가톨릭교회 안에서 신호교론을 주장하더니, 요즘은 ‘성공론’의 전도사 되었다.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고 자책과 열등감에서 벗어나 혼신으로 몰두하면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는 논리는 사뭇 ‘뉴에이지운동’의 논리를 닮아 있다. 그리고 실상 우뇌, 좌뇌, 뇌량 운운하면서 온갖 실용심리학의 견해를 끌어대는 것은 뉴에이지의 학설과 상당히 중첩되어 있으니 참 아니러니하다. 매스컴을 이용하는 탁월한 능력도 단월드와 다르지 않다. 때로는 “한국판 탈무드”라는 식의 광고문안의 선정성조차 닮아있다. 이 모든 기우(杞憂)가 쓸데없는 것이길 바란다. 이 모든 넋두리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길 바란다. 성공을 위해서 제목만 떼고 이것저것 가져다 쓰는 국적불명의 인생담론이 아니길 바란다. 차라리 생면부지의 우리 교회와 전연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면 나도 즐겨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군.”하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가 될 수도 있으련만, 툭 털고 맘 가볍게 그리 넘길 수 없음이 내 마음을 사서 고생하게 한다. /한상봉 2007.8.
첫댓글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그러나 돈 그 자체와 돈을 사랑함은 다름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 악을 교묘히 이용하는것은 분명 문제입니다만 그 길을 가는 여정속에 선까지 행해진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성경속에 구약은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뭘 먹어야 할지 입어야할지 이미 모든것을 알고 계십니다. 믿음은 나약한 인간으로선 복을 간구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신약이 있어야 하느것 아닐런지요. 누구나 출발은 미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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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일칠팔구사님, 점잖은 양반이 입이 좀 거칠군요. 사이버상이지만, 조목조목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곳은 싸움판이 아닙니다. 비판을 하는 것은 자유이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무척이나 열받으신듯 하군요. 님은 토론이나 비평은 감당하지 못하는 단순 다혈질적임을 솔직하게 이 짧은 댓글에다 드러내 보여 주셨군요.험한 얼굴 대한것 처럼 불쾌감을 받는답니다.
평범한 삶님, 소감 감사합니다. 복을 비는 마음은 누구나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다만 그 복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도록 이끌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이 세상에 주어진 이유가 퇴색하겠지요.제가 너무 엄격한 잣대를 대고 있는 게 아닌가, 저어허면서도 한번쯤 말을 올려야 할 것 같아서 쓴 글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어떤 매력을 가져야 한다면, 세상과 사뭇 다른 가치를 제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는 '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기쁨, 환희, 자유를 너희에게 주노라. ' 하셨으나 당신께로 향한 길은 너무나 힘든 가시밭 길 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자 '차동엽 신부님'은 당신보다 한 수 위 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세상이 줄 수 있는 평화, 기쁨, 자유, 환희를 저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그 분을 현존 최고 인기짱 전국구 신부로 흄숭하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뒤켠으로 밀려 주십시오. 제대 성체함에서 당분간 나오지 말아 주세요. 만사 형통좀 해야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여유가 생기면 찾아 뵙겠습니다. 요즘 나, 이렇게 기도 한다우 ~
ㅎㅎㅎ 웃음을 주셔서 감사..하지만 진정 웃을일인지는..
내보기는 님이 예수님보다 차신부님보다 더위입니다. 존경합니다!
뭘 알기나 하는지??? 문제를 삼으면 더욱 궁금해지고확산되는거... 다시읽어봐야겠군!!! 잊어갈즈음인데... 고맙수당!
한상봉님(괜찮겠죠? 글 끝에 밝히셨으니요)께서 가지신 유감의 이유 저도 동감입니다.
Blessing of the Rainbow를 무지개 원리로 제목으로 선정했는데 무지개의 담은뜻은 꿈과 희망의 의미도 있지만 한낱 청춘의 일장춘몽같은 헛된 꿈(이상)이란 의미도 같이 있습니다. 거기에 Blessing이 첨가됐으니 제목을 이해하기가 좀 어렵군요. 내용은 안읽어 보았으나 요즘 차동엽신부님의 강론을 잘 듣고 있습니다.봄날께서 지적하신것은 기우에 그쳤으면 하구요...만약 그게 현실로 닥아올 수 있는 소지가 있다면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아무튼 예리하고 바람직한 내용으로 비판해주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대부분의 글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습니다. 수고하세요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 좀 있습니다. 그냥 일반인의 저술이라면 인생을 이렇게 살았을 때 "성공할 수 있겠구나"하고 공감할 수 있겠는데 자칫 잘못 읽히면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위해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필자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자가 천주교 사제라는 핸디켑 때문이지요. 하느님 안에서 정정당당하게 열심히 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 여겨집니다.
얼마전에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그런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이 책에서는 실패한 사람들, 실패할 수 없는 사람들, 고통받고 있는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게 아쉽다고. 이왕이면 AS차원에서 이렇게 해도 잘 안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이 있으면 좋겠다는...
읽어서 도움이 될 것같으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취하지 않으면 될 것을 무엇하러 사서 고생을 하며 헐뜯는지......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할 나이가 찬 사람들 같은데도 굳이 그래야 할까. 공감하는 곳만 살아내도 세상은 엄청나게 바뀔 수 있는 일인데 말입니다. 이왕지사 태어났으면 입을 잘 쓰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분별력을 이용하여 좋은 것만 펼쳐도 얼마나 좋을까요.
간디가 그랬다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의견이 다를수는 있겠으나 가톨릭 사제가 희망을 갖고 살자는데 뭘 그리 쌍심지를 치켜세우고 난리법썩인지? 그래서 얻어지는건 뭐냐고??? 위 글 다신분들! 다들 예수님보다 장본인 차신부님보다 훌룽해, 훌륭해!!! 책 한권씩 내셔들~~~ 훌륭해... 내 기꺼이 사보리다! 우리나라는 잘난 사람천국이라 시궁창이지. 음!
s17894 님은 좌,우뇌가 불균형이군 .. 무지개책 다시읽고 뇌량 (뇌 또랑)좀 청소하시오. 어험!
뭐~~~ 대충 훓어보기는 한 모양이지. 우뇌타령씩이나? 잘해보슈~~~
그래도 난 간다면 가톨릭으로 갈겨~ 그래도 맑잖여? 사제가 출세하면 장가간대나?! 왜 날릴까?
제가 이책을 읽었을때는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이곳에서 두서너번? 이런글들이 씌여지는것을 보고 좀 의아했던 기억이 있군요. 글쎄요 그냥 그야말로 이렇게까지(좋고나쁜비평그 무엇이든간에) 구설수에 올라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은 책이지요. 사제가 그동안 읽어왔던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서 발췌하거나 당신의 생각을 넣어 쉽게 나름대로 살아가는 종교적인것과 아우러 지침을 쓰신것 같은데 왜 이렇게 화두가 되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유명해지고 싶은것? 사제가요? 그 믿음에 대한것을 의심조차 해 보지 않았는데....
전부를 읽지 않아서, 통틀어 비판을 할 순 없지만, 차신부가 인용한 글 가운데, 노만 필 박사의 글들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면서, 웬지 씁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28년 전 삼성그룹에 입사할 때, 신입사원 교육에 앞서, 그룹 비서실에서 노만 필 박사의 저서를 읽으라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일컬어, 'Can Do Spirit'이라고나 할까요? 한 때의 경영필독서가 일시적인 유행(fad)가 되곤 하던데, 벌써 출간된지가 40년이 가까워 오는 낡아빠진 책을 인용하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세속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더 노력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색케 합니다.
그람 천년도 넘게 내려오는 성경이나 불경, 가지가지 고전들은 우짠대...? 그런걸 피터정님! 모순이라고 하지라잉~~~ !
참 말뽄새가 고약하네~
니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뭔 오사리 잡탕들의 집합손지... 난 그만 시궁창에서 아웃할테니 잘 놀아보시오.
그래도 난 간다면 가톨릭으로 간다구? 오지마. 당신말마따나 오사리잡탕들의 집합소에 왜 얼씬거리려고 해? 우끼는 양반일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