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해미읍성을 끼고 커브 길을 가다가 고창동 마을에서 서해안고속도로 교각을 안고 신창저수지를 지나 약3km쯤 들어가면, 깊은 산속에 천년고찰 개심사(開心寺)가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 나들목을 이용하거나 당진~서산간 국도 32호선 중 당진과 서산시 경계인 역천을 지나 서산시 운산면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약1㎞쯤 가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골라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눈을 뜨게 한다는 이름의 천년고찰 개심사를 가는 길은 외국의 어느 목장처럼 아름다운 전원 풍경과 함께 아름다운 벚꽃 길로도 유명한데, 이 목장은 3공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김 모씨의 삼화목장이었으나 정권이 바뀐 뒤 부정축재로 몰려서 지금은 농협 한우개량본부가 되었다.
서산시에서는 운산면 여미리의 유기방 가옥에서 시작하여 선정묘(0.3㎞)~유상묵 가옥(0.8㎞)~미평교(4.7㎞)~고풍저수지(5.5㎞)~용현계곡 입구(6.8㎞)~서산 마애삼존불상(7.4㎞)~보원사지(8.9㎞)~개심사(13.0㎞)~임도접경지(15.3㎞)~분기점(공터 16.3㎞)~정자(조망대 17.0㎞)~해미읍성 앞(20.2㎞)으로 이어지는 이 길을 바다의 고유어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쳐서 서산 아라메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라메 길은 바다와 산이 만나며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대화와 소통의 공간으로 만든 친환경 트레킹 코스로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재와 유적지를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직 사자도. |
수덕사와 보원사, 서산마애삼존불이 자리 잡고 있는 가야산의 옛 이름인 상왕산(象王山) 남쪽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에 있는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1)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하면서 개원사(開元寺)라고 했으나, 고려 말인 충정왕 2년(1350)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고쳤다고 한다.
지금은 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의 말사인 개심사는 천년고찰답지 않게 최근에 세운 일주문이 조금은 낯선데, 일주문을 지난 길가 왼편에 세심동(洗心洞), 오른편에 개심사 입구라고 새겨진 작은 돌멩이가 오랫동안 일주문 구실을 했었다.
대체로 사찰은 고색창연한 가라배치와 주변의 우거진 숲, 기암괴석 등이 사찰을 더욱 중후하게 하지만, 개심사는 전통적인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수미산의 1금당1탑식의 백제 건축양식이 아니라 가파른 구릉을 따라 3단으로 깎아서 옹기종기 배치한 것이 마치 여염집 본채와 행랑채 건물을 보는 듯하다.
돌계단을 오르면 기다랗게 네모난 연못이 마치 천왕문 역할을 하는데, 이 연못은 봄이면 벚꽃 잎이 가득하고, 여름에는 녹색 숲과 나무들이 고스란히 물에 비치는 수채화 같고, 가을에는 형형색색의 단풍잎으로 곱게 물들어서 개심사의 사계(四季)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게다가 여염집 마당 같은 경내는 봄이면 ‘겹사구라’라고 하는 왕벚꽃과 매년 사월초파일을 전후로 만개하는 푸른 빛깔의 청벚꽃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꽃이어서 이맘때면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물이다.
단층으로 지은 법고각인 안양루(安養樓)와 무량수전 사이의 좁은 문을 지나면 대웅전과 안양루가 남북으로 배치되고, 무량수전과 심검당(尋劍堂; 충남도문화재자료 제358호)이 동서로 배치되어 □자형을 이루는데, 범종각이며 법고각, 심검당의 기둥과 대들보 등이 비뚤어진 목재들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이색적이다.
개심사 대웅보전. |
대웅전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대웅전(보물 제143호)을 해체 복원공사 할 때 발견된 묵서로서 조선 성종 6년(1475) 큰 산불로 개심사가 소실되자 성종 15년(1484) 중건했음을 알게 되었는데, 전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과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어서 백제시대의 기단 위에 조선시대의 다포식을 절충하고 있어서 성종 때 중건했음을 실감하게 해준다.
대웅전에는 목조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보물 제1619호)과 영산회 괘불탱화(보물 제1264호)가 있는데, 지난 4월 25일 오방오제위도(五方五帝位圖) 및 사직사자도(四直使者圖; 보물 제1766호), 제석천도· 범천도(帝釋天圖·梵天圖) 및 팔금강·사위보살도(八金剛·四位菩薩圖; 보물 제1766호) 등이 새로이 보물로 지정되어서 개심사는 다시 한 번 문화재의 보고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모두 9폭으로 그려진 오방제위도는 사찰에서 수륙재, 영산재 등 의식을 거행할 때 내거는 불화로서 임진왜란 이후 1676년 일호(一浩)스님이 그린 것으로 명시되어 제작연대, 제작과 관련한 시주자, 증명· 화원· 화주 비구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존 도량장엄용 불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져 가치가 높다고 한다.
또, 제석·범천도 및 팔금강·사위보살도는 1772년 개심사 괘불 조성 당시 함께 제작된 도량장엄용 의식불화로 14폭으로서 현존하는 것이 드물게 종이에 그린 번(幡·의식용으로 거는 그림)일 뿐만 아니라, 괘불도와 도량옹호번이 함께 남아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하는데, 시기적으로도 양산 통도사의 오계수호신장번(五戒守護神將幡) 이후 두 번째 오래된 번이라고 한다.
법종각과 법고각(왼쪽)과 명부전. |
대웅전 앞에 5층 석탑과 그 오른편에 명부전(충남도유형문화재 제34호)이 있는데, 개심사가 오랫동안 전쟁으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역할을 해왔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철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10 대왕을 봉안한 명부전은 기도의 효과가 크다는 입소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특히 대웅전 왼편에 있는 심검당은 본래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서 선실(禪室) 또는 강원(講院)으로 사용되는 건물에 붙이는 이름인데, 유모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자연히 굽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건물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고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소개한 이후 개심사를 전국적인 명물로 만든 건물이기도 하다.
심검당. |
사실 천년고찰 개심사가 이처럼 작은 사찰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은 지리적으로 해미읍성과 가까워서 해미읍성이 외적이나 민중봉기를 당할 때마다 덩달아 수난을 당한 상처 때문이기도 한데, 고려 말 무신집권기에 공주 명학소의 천민인 망이·망소이 형제가 일으킨 천민의 난 때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명종 4년(1174) 9월 서경유수 조위총이 명종 복위를 부르짖으며 난을 일으키자 조정의 모든 군사력이 서경으로 집중된 틈을 타서 명종 6년(1176) 정월 공주 명학소의 천민 망이·망소이 형제가 난을 일으켜서 공주목을 함락하니, 조정에서는 반란군에게 불처벌 약속과 함께 망이·망소이 형제의 출신지인 공주 노성 지역을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켜 주며 회유했다.
그러나 관리들의 횡포에 망이·망소이 형제가 다시 일어나 공주는 물론 인접한 예산과 덕산의 가야사, 서산의 개심사를 습격하고, 경기도 여주·진천까지 함락하자, 조정에서는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격하시키는 한편 총공격에 나서서 망이·망소이 등 반란군을 청주감옥에 가뒀다가 그 해 7월 처형함으로서 1년 7개월 만에 반란은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