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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스키 연습중
형의 걸음걸이는 재미있다. 완전히 스키 타는 모습이다. 스키를 타는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왕초보로 걸음마를 배우는 모양새다, 그것도 소리 없이 응큼하게. 보통은 걸음을 걸을땐 온 몸이 움직이게 마련인데 형은 그렇지 않다. 팔과 어깨는 멈춰 있고 다리만 움직여서 간다. 그러니까 드라마에서 상체만 보이며 이동하는 인형 같다. 아니면 모노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판토 마임을 하는 배우같은.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 형의 군대 생활은 어땠을까. 느린 듯 양반스런 모습에 혹시 고문관은 아니었을까. 가장 고생한다는 보병 생활을, 그것도 추운 강원 땅에서 어찌 보냈을꼬.
대구로서는 쌀쌀한 날씨였다. 이기철 시인이 멀뚱그러이 뜬 눈으로 역 구내를 쳐다 본다. 이 선생님, 김강탭니다. 여기저기서 '아즈메요, 아즈메!' 소리가 들려서 낯설기도 했다. 서울에서 형을 처음 보았을 때가 지난 가을녘이었던가. 문인 몇 사람과의 조촐한 만남 자리는 너무 겸손하고 조용했다. 나는 그러한 형에게 끌린다. 새 여자애를 만난 것처럼, 대학생 새내기들 대화처럼. 나의 70년대가 그랬다. 그때는 다 큰 여자애들의 모든 게 너무 궁금했다. 깔스럽게 웃는 쟤들은 무슨 얘길 저리 하나. 그러던 중에 마침 한 여학생이 다음과 같이 물어왔다. 좀 안다고 그것두 반말로. 강의실에서 처음 만나 괜찮게 보여 소속을 묻자 '국문괍니다'라고 했던 그 여자애. '국문과예요'도 아니고 '-괍니다'라니. 그래서 '나도 굶는괍니다'로 소개했었지, 아마.
여자:남자애들이 모이면 무슨 얘기하니?
남자:음…, 여자 얘기. 여자애들은?
여자:우리도 남자 얘기하지, 뭐.
그러고 우린 서로들 꾹꾹 웃었다. 아 그리운 시절, 그땐 그랬어. 이기철 형을 만나면서 나는 이 자전이 생각나서 혼났다. 형의 자전소설 《땅 위의 날들》(민음사)은 마치 나를 위해 예비한 내용과 흡사했지…. 입술이 앵도알같던 그애 입술은 얼마나 탐스러웠던가. 지금 뭘 하나. 그런데 바로 내 앞에 환한 시인들이 나타난 거다. 얼굴이 수려한 형과 그의 수제자 4인방의 여자들, 박이화 시인의 취미는 전화하기. 생각도 너끈한, 하얀 유로-엑센트를 끌고 다니는 여자. 시를 지독히 열심히 쓴다는 4인방. 내가 훨씬 전에 알았던 친구 이름과 같아서 흥미로웠다.
형의 배려로 우리는 초원복집(☏053-752-2823)으로 간다. 지난 대선 때 '우리가 남이가'의 시발점이자 대선의 핵탄두가 된 그 초원복(국)집이 아니다. 신촌4동 코오롱 아파트 입구에 있는 가겐데, 쥔네 박숙이 씨도 정열적인 시인이다. 그 집의 기막힌 복국과 찜. 우리가 떠들어대는데도 기철 형은 가만히 정좌해 있다. 외려 내가 더 설을 푼다. 형은 한번 웃은 뒤 끔찍이 한 마디하곤 묵답이지만, 분위기는 다 맞춘다. 내가 만난 제자들도 어깨를 으쓱대며 '선생님은 늘 한결같다'고 입을 돋운다. 오리같다. 우리 일행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담아주던 제자 丁聖起 씨도 마찬가지. 중구 공평동에서 웨딩 하우스 겸 포토 스튜디오 '그리나'(☏053-421-6333·6334)를 경영하는 그는 국문과를 나온 사진가다. 취미가 전공이 된 그는 내내 '선생님' 자랑을 한다. 기사도 잘 좀 써주세요, 하는 청탁도 함께. 정말 하루 왼종일을 그의 선생님과 나를 위해 써주었다. 당신께서 주례를 서 주셨다고. 지금은 캠퍼스가 좋아졌어요. 학교 댕길 땐 술집도 없어서 자전거 타고 저만큼 가서 마시곤 광야같은 캠퍼스를 마구 달렸는데. 씽씽 소리가 귀에 스친다. 나도 3년 가까이 자전거로, 7년간을 오토바이로 출퇴근했는데.
그런데 그의 맑은 눈가를 보면 기미같은 주름이 있다. 그게 참 선하게 감지된다. 맞다, 이기철 형은 천상 시인이고 오래도록 잔잔한 시인이다, 깊은 그리움을 간직한 시인이다. 그러고 보니 형의 내연의 것들이 내 안으로 접혀온다. 신문이나 주간지에 오르내리는 '내연의 처'만 없다. 도대체가 형은 여자 앞에선 돌부처요, 석고상이다. 지나칠 정도의 염결성, 신중성. 그의 내연內燃에 내연의 여성이 있을 리 없다. 그의 안은 백젯말로 '숭하게도' 갖가지 물상들로 가득하다. 무겁다. 잔잔한 웃음 아니면 어눌에 가까운 '떠듬떠듬'이요, 조심스러움이 까탈스럽다. 이것이 형의 부드러움, 매력? 그의 외부엔 요란搖亂이 도무지 없다. 나만 혼자 떠드니 인터뷰가 거꾸로다. 엉망이다. 형은 왜 내 이야길 듣고만 있는 걸까. 그래, 엉망이다. 그래선지 수십 년을 같은 방에 투숙, 동침하는 부인 李順南은 도대체 투기妬忌를 모른다. 통 큰 여인이다. 집요히 괴롭게 물어도 그냥 웃어넘긴다. 동대구여자 혹은 경산여자답다. (현재 내가 아는 지역명이라곤 이것 뿐이니까.) 부인과의 만남은 대강이 이렇다. '제대하고 대학 졸업 뒤, 고교 교사노릇 하면서 우연히 초등학교 여교사를 만나 자연스레 결혼함'이 이기철 형이 실토한 말씀의 전부다. 그는 늘 이렇다. 이렇지 않으면 도대체 형답지 않은 것처럼, 도무지 속사정(=內緣)을 쉽사리 밝히지 않는다. 픽션이지만 자전소설을 읽으니 두 여교사 얘기가 나오던데, 형이 혹시 그런 이미지의 여성을?
엄격한 유가의 막내딸로 자란 그녀를 취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는 정숙한 미인으로 소문난 '이 선생님'을, 71년에 학교에 무작정 찾아가 꼬드기기 시작, 73년에 결혼에 골인한다. 부인은 말한다. 처음엔 너무 미남이라 안 좋게 생각했어요. (어유, 서로 미남미녀래∼) 그런데 부친께서 이뻐하셨지요. 당시 순남은 부친을 가장 존경했다 한다. ―불만이 있다면? (세번을 물어 겨우 답을 이끌다.):예를 들어, 전구가 나가도 갈아끼울 줄 모르는 남자. 야간용 스위치불이 나가도 '스위치불이 왜 나갔느냐'고 묻곤 몇 날이고 그냥 놔두는 남자. (그래서 대판 싸웠다고.) 기계 조작이라면 영 할 줄 모르는 남자. 그리고 너무 밋밋해보이는 분위기…. 시인이 뭐 그래요? ―자제분에 대하여 간단히:아들이 대학교수는 절대 안 한대요. 딸은 현모양처로, 좋아하는 아빠 앞에서 야살 부리길 좋아하지만. ('얄개'란 뜻인 '야살'이란 말이 재밌다.) 이상히도 아들과 딸이 적성은 아빠를 닮고 성격은 저를 닮았어요. ―남편의 술과 담배는?:담배는 전혀 안 태우고, 주량은 많지만 요즘은 별로 안 드신다. 주석에서 남의 말과 시중을 들고 처음엔 술을 아껴서 조금씩 마시다가 늦게 취하는 편. 그리곤 밤새 이기지 못해 야단이죠, 요즘엔 안 그렇지만. (훈련소에선 식사 속도가 느려 고생했다며 형이 말을 거든다. 베란다에 동백이 청초하고 난분도 의연히 놓였다.) ―종교는?:저는 불교쪽이고 저인 없어요.
별안간 형수가 작은 카탈로그를 꺼내며 중매를 부탁한다. 첫눈에 인상깊은 첼리스트 박 아무개. 나이가 좀 있는, 그러나 <정서장애 아동과 가족을 위한 음악회>에 스스로 참여한 고운 여자다. 공부하고 연주하느라고 늦었단다. 내 사랑하는 후배, 혼기를 놓친 평론가 송 아무개를 소개할꺼나. 글쎄, 세련미와 '덜 세련미'의 만남? 의사를 약간 비취니 宋을 아는 형은 '글쎄'를 연발하고, 형수는 '그래도 모르죠. 둘이 서로 혹할지.'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나, 앞으로 중매쟁이 될란다.
자택에서의 야간 인터뷰에서 미리 와있던 형의 제자시인 김상환을 만난다. 박사 학위 논문 심사 중이라고. 권투 선수같은 코, 술을 쏟아부어도 쓰러지지 않을 듯한 다부진 몸매부터 해서 사람이 참 좋아뵌다. 형이 나의 파트너로 특별 배려한 것이다. 젊은 사람들끼리 통해야지, 뭐. (헛헛, 내가 취재하러 오긴 왔는가.) 이기철 시인은 늘 이러히 세심, 철저하다. 김 형도 선생님께 세뇌 받았는지 꼭 말을 받쳐준다. 에에, 선생님의 산문은 시정신이 강해서 좋습니다. 인간적인 따스함, 늘 사제간의 도타운 정을 느끼게 하시는 분이죠. 말투의 정감이 참 도탑다. 다음 날 아침, 우린 해장국을 먹으러 하루 24시간 연다는 대덕식당(☏053-656-8111·623-0613)을 찾는다. 이곳을 모르면 대구 시민이 아니란다. 값도 저렴하고 특히 소피국(선지국)이 얼큰하고 좋았다. 저녁 모임에서 만난 유지들, 이웃사랑 사장 안태영, 또 박영호(외과의사)·윤성도 두 시인(계명대 산부인과)의 시집이 고맙다.
모범경작생 이기철
형은 한 달에 두세 번 서울 나들이를 한다. 그곳에 눈에 쳐넣어도 시원찮을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딸 秀眞이, 아들 康協이가 그의 분신이다. 모두 형 자신이 이름 지었다고 자랑한다. 어? 그럼 자식 이름을 아비나 어미가 짓지 않고 누가 짓나, 요상허네요. 그러니깐 형은 별 거도 아닌 걸 신나게 뽐낸다. 이게 형의 진짜 순진한 모양새다. 수진은 금년 이대를 졸업 후 동아그룹 산하에 근무 중이고, 강혁은 서울대 건축과 3년 재학 중이다. 형은 시와 아내와 제자들, 그리고 '요것들' 때문에 산다. 고것들 키우고 공부시키느라고 돈도 수없이 들어가지만, 아비로서 그는 최대한 절약하고 있다. 몸에 아주 꽉꽉 배었다. 사실인 즉, 고것들이 그런데 기대만큼 잘 자라주어서 부부는 기분이 매우 됴-타. 형은 정말로 모범생이자 모범경작생이다. 처음엔 그가 시인이라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교 갔다가 때만 되면 착실히 귀가하는 우등소년 같아서 싫은 구석도 있다. 그의 말은 느리고 쉽게 맺지 않고 띄엄띄엄하는 쪽이다. 시로 다 말해버리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형은 취미가 없다. 취미며 특기는 읽기와 시 창작이다. 학자라면 뻔한 거, 흔한 잡기조차 없다. 형이랑 대화하다가 멈추면 내가 시간의 틈을 막아야 한다. 부인도 남편만 말꼼히 쳐다본다, 말 않기로 작정이나 한 듯이. 그런데 부인은 서각과 서예가 취미다! 아호가 云井. 처녀 때부터 입문했다고. 이미 타계한 肯濃 선생에게 처녀시절부터 오랫동안 사사한 바 있다. 곧 작품전을 열 거라고. 억지로 작은 방을 보여 달라니 부끄러이 문을 연다. 방이 글씨와 그림으로 그득하다. 내 눈에 글씨는 예서체가, 사군자에선 대나무가 좋았다. 글씨와 그림이 화면에서 빼곳, 삐죽삐죽. 남편 이기철이 집을 비우면 왼종일 글씨만 쓴단다. 거실 벽의 시화 한 폭은 남편 글씨에 아내 그림에 낙관은 따님 수진이 것, 3인의 합작품이라고 자랑한다. 거실 정면에 김수영 시인의 초상화가, 서재엔 김영태 시인이 그린 형의 캐리커쳐가 걸려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미래사 판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엔 없다. 서점에서 참고로 찾아보던 나는 아뿔싸(!), 했다. 백 명 중에? 우습다. 횡포? 나는 기철 형님 댁을 향해 ☏053-423-3943을 찍다가 말았다. 연구실 ☏053-810-2120을 눌러도 보았다. 묻고 싶었다. 그러나 중간에 끊었다. 이·기·철, 그가 지방에 살아서? 문인끼리 잘 몰라서? 중앙과 지방이 서로 잘 통하지 않아서??…. 상이 다는 아니지만 그래두 그는 괜찮은 상을 받은 시인인데, 튼튼한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진한 순수란 멋 외에 별로 가진 것 없는 남자, 제 아내와 학교와 詩밖에 모르는 남자. 그래도 그는 큰 문인들께 두루두루 인정받는 시인인데. 실제로 시인들이 얼마나 존심·고집으로 똘똘 뭉쳤는데. 허기사 흥정과 거래를 요구하고 밝히는 편집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속이 시커먼 중늙은이 비평가애들을 동원하여 철조망을 치곤 그 안에 맹목으로 안주, 횡포 부리는 카리스마성 치매중증 환자그룹들. 어그, 생각만 해도 아찔해. 앞으로 나도 좀 인성이 좋아져야겠어. 다만 형이 썬파워가 아닌 건 싫다, 간혹 비치는 여린 시의 모습이 조금은.
사랑, 그리고 음악선생님
그의 산문은 아름답다. '아침의 햇볕은 늘 맑고 아침의 흙빛깔은 늘 따뜻하다'는 그의 마음도 매우 훈훈하다. '때까치 들거미 굴뚝새 귀뚜라미 산가재 말매미 다람쥐 말똥구리 사마귀 쓰르라미…, 이런 이름들이 우리가 사는 같은 땅 위에 같은 시간 속에 살아 호흡'한다든지, 사물에 새로운 이름 붙이기를 시도한 '구름할미새 눈썹새 버들가재 유리병머리새 병아리발톱벌레 각시붕어' 등의 표현이 기막히게 생생한 이름으로 살아있다. 형은 신선, 향기로운 언어 찾기 작업을 계속한다. 그런 말들은 내용과 이데올로기, 사상과 의미 이전이라는 역설. '시를 시답게 하는 기능의 반 이상이 언어의 모습에 달려 있다. 그러나 언어들은 자유분방하고 야생마와 같아서 그것을 잘 길들이지 않으면 문학의 마굿간으로 인도할 수 없다' '어찌보면 언어는 아주 유순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또 어찌보면 언어보다 완강하고 고집센 것도 없다'면서.
여린 젊은 시절, 음악 선생님을 연모했던 남학생 이기철. 형과 나는 너무도 비슷한 데가 많다. 강원도에서의 군대생활, 학창 시절 아리따운 음악 선생님을 사모한 이야기며…. 나도 어떤 빗소릿날, 챠이코프스키가 새어나오는 댁 주변을 돌며 아슴한 커튼 사이의 선생님 손길을 한참이나 훔쳐보았지. 마치 은어떼가 그녀의 건반에서 뛰어노는 듯한 격정에 나는 문을 노크한 뒤 두 개의 파란 풍선 선물로 내 마음을 전했지. 고2 수학여행지에서 선생님과의 꿈결같은 데이트! 대학 때는 <나는 파란 풍선만큼이나 당신을 사랑했습니다>라는 시를 대학신문에 당당히 발표했던가. 그녀는 이미 미국으로 가버린 뒤였지만.
첫사랑에 실패한 나의 형님(이기철 시인은 누님이 대상)은 공군에 장기 복무 지원, 여린 형님에 비해 억척스런 형수를 만난 이야긴 아직도 조심스럽다. 동네누나가 가르치는 친구 과외시간에 우연히 들렀다가 뜨겁게 접한 소월 시, '접동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가람가에 와서 웁니다'에 농염해지던 내 마음, 정신의 황홀한 방탕. 또 초등학교 3년 때 고교생 길태 형(꼭 10년 연상) 교과서에 실린 <진달래꽃>과 영랑 시편을 단번에 외워 형에게 칭찬 받던 그때 그 설레임들. 그래, 나의 첫키스 대상은 동네누나였지…. 또 한 여자, 나에게 쓸쓸함과 그리움을 가르쳐 준 교회누나. 앞으로 기철 형처럼 자전소설집을 내고 싶다는 건방진 생각을 하면서 형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래서 형의 《땅 위의 날들》은 뜨겁고 숨 막히고 재미있다. 인용시도 매우 절실한 것들이다. 고급(박사/교수급) 운전기사 솜씨가 좀은 그랬지만. 형과 나의 여러가지 사연에 대한 종합 정리는 다음과 같다. 이 도표는 형과 나의 절실한 고백의 일부다. (내가 너무 튀었나?)
이 기 철
러브 스토리 학창 시절, 음악선생님은 진줏빛 노랫말과 함께 그에게 처음으로 슬픔의 빛깔도 일러주었지. 진한 그리움도 함께. 한데 그녀가 어느 남성과 긴 포옹을….
시를 찾아서 음악 선생님과 자살한 佛堂처녀와 욕지섬의 여교사와의 대화 및 그들이 보여준 시와 시집들, 아름다운 충격들.
첫 키스 고교 졸업 직후, 초등학교(출신교)의 풍금 치던 여교사의 달콤한 입술로부터.
가족 이야기 광인이 된 아나키스트 사촌 형의 슬픔. 어느 날, 공군하사 복장으로 나타난 형과 그 변신에 놀란 기철.
김 강 태
빗소릿날, 챠이코프스키가 들려오는 음악선생댁 주변을 돌며 한참동안 아슴한 커튼 사이, 선생님 손길을 훔쳐 보았지. 마치 은어떼가 건반에서 뛰놀 듯.
초등학생 때 친구의 과외교사인 동네누나와 우연히 얘기하다가 주워들은 소월 詩. 학창시절엔 시인 최승렬 님께 배움.
또다른 동네누나로부터 입맞춤 당함. 지금은 아직 소상히 밝힐 때가 아님.
첫사랑 실패, 가난해서 진학 못한 형님이 공군에 장기 복무를 지원한 뒤, 오늘날까지 술에 젖어버림.
대표시 몇 점
이기철의 시적 변모는 비교적 다양하다. 크게 1)자연에 관한 시(자연시), 2)고향에 관한 시(고향시), 3)정신의 높이에 관한 시(정신시)로 나눌 수 있다. 다음 시편을 살펴보자. 1)'자연시' 계열로는 <청산행><산에서 배우다><地上의 길><초록을 보며><서쪽을 가며> 등이 있다. 김우창은 《청산행》 해설에서, 이기철이 '경박한 재치를 시적 언어로 착각하는 실험적 언어'를 추구하진 않지만 '시적 언어의 긴장'을 위한 '형식적 실험을 필요'로 한다면서 '주로 자연을 말하는 시인'으로 정리한다. 1)자연시 계열을 살펴보자.
손 흔들고 떠나갈 미련은 없다/며칠째 청산에 와 발을 푸니/흐리던 산길이 잘 보인다./상수리 열매를 주우며 人家를 내려다 보고/쓰다 둔 편지 구절과 버린 칫솔을 생각한다./南方으로 가다 길을 놓치고/두어번 허우적거리는 여울물/산 아래는 때까치들이 몰려와/모든 野性을 버리고 들 가운데 순결해진다./길을 가다가 자주 뒤를 돌아보게 하는/서른 번 다져 두고 서른 번 포기했던 관습들/서쪽 마을을 바라보면 나무들의 잔 숨결처럼/가늘게 흩어지는 저녁 연기가/한 가정의 고민의 양식으로 피어 오르고/生木 울타리엔 들거미줄/맨살 비비는 돌들과 함께 누워/실로 이 세상을 앓아 보지 않은 것들과 함께/잠들고 싶다.
─ <창산행> 전문
이 작품은 이기철의 대표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편의상 '자연시' 계열로 넣었지만, 정신의 기초 일단을 보여주는 시다. 그의 정신은 가난해서, 청빈해서 더욱 돋보인다. 그런데 정신성은 생목 내음을 띠고, 야성 가운데서도 더욱 순결해지므로 귀하다. 그의 시가 '청산'에서 시작해서 '청산'으로 이어진다고 봐도 무리 없을 듯 싶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의 내면은 정신적 가난을 바탕으로 더욱 풍요해진다. '그러나 나는 가야 한다, 한번의 가을도 거짓으로 꽃 피운 일 없는 들을 지나/작은 물줄기가 흐름을 시작하는 산을 지나/아직도 정신의 열대인 내 가혹한 시간 속으로/나는 가야 한다(<地上의 길> 부분)'에서 보인 '정신의 열대'가 그의 치열한 시정신을 대변하고 있다. <서쪽을 가며>(부분)도 자연을 배경으로 그의 특성이랄 수 있는 우수를 보이는 시다. 이기철의 떨림은 과연 무엇일까. 자신을 지탱해주는 모든 힘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山 그늘에 지워지는 草屋 한 채를 바라보며/떠나온 날들과 돌아갈 집들을 생각한다./가슴 속에 묻어둔 한 겹 우수를 꺼내 보며/참으로 소중했던 것들 다 잃어버린 어둠 속을/머리칼 쓸어 넘기며 혼자 걸어간다./이 밤에 바람은 멎고 또 길게 불어/우리의 영원은 모래알 하나에 잠겨들고/갯풀 베던 사람들의 따스한 꿈조각이/맹목의 길 위에 나와 오들오들 떨고 있다.
2) 고향에 관한 시:염무웅은 82년판 《청산행》 해설에서, 지금까지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단정하고 예절 바른 데에 불만'을 표했지만, <월동엽서><이향><옛날의 금잔디> 등이 '드물게 정직하면서도 놀랍도록 차분하게 자기 현실을 순화된 예술적 형상 속에 담아'낸 작품이라고 반긴다. 그렇다. 고향이란 주제는 어머니처럼 영원한 안식처임이 당연하다. 대체로 그의 '고향시'를 보면 안정된 정서가 차분히 느껴온다. 유년을 배경으로 쓴 시 '순이, 손을 몇번 불어서 그 겨울은 지나갔나/미나리 잎새 얼어서 얼음 밑에 묻혀 있던 그 겨울/장작개피 책보에 얹고 가던 등교 길/(…중략…)/너는 이제 두 번째 아이를 낳고 들길에 나가 너의 아이들에게/새로 핀 꽃이름을 가르치고 있는가/이 겨울에 난로 꺼지면 나는 양말을 갈아신고/저 죽은 풀빛의 들판이나 밟으면서/겨울의 가장 따뜻한 곳으로 걸어가야겠다/눈이 내리면 다시 시린 손을 불며 (<越冬葉書> 부분)'에서 나는 이기철만의 특이한 그리움에 젖는다. 중요한 것은 이런 유년의 추억을 잊지 않고 옮겨 적는 시인의 포근한 심성이다. 이는 <유리, 마을><고향>에서도 한껏 맛볼 수 있다.
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石里라는 곳/그곳엔, 여름엔 장다리꽃 피고/겨울엔 마른 수숫대 위로 싸락눈 온다//세상 사람들 아무도 그곳을 몰라도/나와 가재와 다람쥐는 그곳을 안다/꽃진 그루터기마다 볕살이 와서 한시름 놀다 가고/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데/메밀꽃 제 신명에 하얗게 핀다
─ <琉璃, 마을> 부분
② 양달에서는 작년처럼, 너무도 작년처럼/삭은 가랑잎을 뚫고 씀바귀 잎새가 새로 돋고/두엄 더미엔 자루가 부러진 쇠스랑 하나가/버려진 듯 꽂혀있다/발을 닦으며 바라보면/모래는 모래대로 송아지는 송아지대로/모두 제 생각에만 골똘했다/바람도 그랬다
─ <고향> 부분
3) 정신의 높이에 관한 시:역시나 이기철의 매력은 '정신시'에 있다. 이는 내년에 나올 제9시집 《유리의 나날》의 중심만 보더라도 눈치챌 수 있다. <멱라의 길 1>(부분)은 시인 이기철의 현상학 그대로다. 정신의 빛나는 극한대極寒帶가 서늘히 둘러지는.
구강 장강 물 굽이치나 아직 언덕 무너뜨리지 않고/낙타를 탄 상인들은 욕망만큼 수심도 깊어/이 물가에 사금파리 같은 꿈을 묻었다/어디서 離騷 한 가닥 바람에 불려오면/내 지상에서 얻은 병 모두 쓸어 저 강물에 띄우겠네//(…중략…)//일생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일생이 勞役과 상처 아문 자리로 얼룩져 있어도/상처를 길들이는 마음 고와서 아름다운 사람은 있다/때로 삶은 우리의 걸음을 비뚤어지게 하고/毒 묻은 역설을 아름답게 하지만/멱라 흐르는 물빛이 죽음마저도 되돌려주지는 못한다
'멱라'란 중국 서정시의 효시인 <楚辭>를 지은 초나라 굴원이 주변의 참소로 분함을 이기지 못해 빠져 죽은 호남성의 강으로 유명하다. 여기서는 '정신의 강'으로 비유되었다. 그렇다면 작품에서 그가 그리는 '이소'란 무엇인가. 이기철은 굴원이 멱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기까지의 시름을 적은 장시 <이소>에서 착상, 시름을 만난다는 뜻으로 썼다고. '캄캄한 흙 속에 서식하는 씨앗의 인력처럼/불빛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둠의 肉質을 칼로 베면/칼날에 묻어나는 숨 가쁜 생명의 과육들/나는 길들이지 않은 언어로 그를 노래하고 싶다(<정신의 처녀림> 부분)'는 읊조림도 이기철답다. 물큰, '싱싱'이 켜진다. 매캐한, 길들이지 않은 결에 길들여져 나는 부끄럼 모르는 성성이가 되고 싶다, 새빨간 엉덩이를 내놓고 성애性愛를 구하고 싶다, 이럴 때 나는.
<열하를 향하여>(부분)는 '쓰라린 시대에는 쓰라린 정신만 남는다'는 시구가 나의 형편없는 나타懶惰를 몹시 후려친다. '趾源은 하룻밤에 아홉의 강을 건너/거친 모래 땅 열하에 도달했다지만/나는 아홉 밤을 불면으로 지새워도 한 개의 강을 거너지 못했다/마음 덮으면 없는 강이 마음 밝히면 열의 강으로 소리를 높인다//숱 많은 머리카락 날리며 바람은 어디로 불어가는가/메마른 계절일수록 마음은 불타 올라/쓰라린 시대에는 쓰라린 정신만 남는다'를 보라. 어디 뭣같은 정신만 쏴잡는, 이렇게 정교한 45구경 피스톨은 없는지.
시인의 생애<年譜>
1943. 1. 9.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석리)에서 부 李明儀, 모 朴順朱 사이에 5남매 중 네번째(차남)로 출생. 본관 전주(全州), 효령대군의 18대 손으로 몰락한 양반의 가난한 후손, 16대 조부가 조정으로부터 땅마지기와 남녀 노복 수삼인을 얻어 남하, 충청 보령과 경상 합천을 거쳐 산골짜기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에 이주/·전형적인 농가의 아들로 자라며 극히 어려운 통학길로 중학 3년 개근/·중학 입학시험에 수석 합격, 교사들의 총애와 친구나 여학생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추억/·중학생 때부터 국어가 좋아 교과서 수록시들을 모두 외움. 김광섭, 박두진, 소월에 반했고 베를레느의 <가을의 노래>를 즐겨 읽고 외움/·소년 시절에 꽃과 새, 나무와 곤충들의 이름을 새로 지어 부르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음/·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출신의 음악담당 여선생에게서 받은 《상화와 고월》을 읽고 감명/·읍내 고교 진학. 이때부터 이성에 눈떠 알게 된 난초같은 여학생에게 '蘭'이라 지어줌. 현재 서울에서 사업 하는 윤충묵, 진주의 고교 교사 박경묵 등과 친함/·고향 아림(거창의 옛이름)의 아림예술제 '고교생 한글시 백일장'에서 <새>로 난생 처음 장원. 시골 다방을 빌어 시화전/·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 낙방. 거기서 오래 전 당선한 시인 박재삼 이형기의 이름을 알고, 서울서 온 심사위원 이헌구 모윤숙 설창수 등의 문인을 보고 가슴 설렘.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신중신 시인을 알았으나 그에게 따뜻한 손을 주지 않았음.
·61년 영남대 진학. 아동문학가 이재철 선생에게 사사. 2년 때 경북대 신문사 주최 전국 대학생 문예현상모집에 시 <여백시초> 당선. 심사위원 김춘수 선생을 찾아감. 그의 분필가루 묻은 야윈 손을 지금도 잊지 못함. 유치환 선생에게 작품을 보냈으나 답을 얻지는 못함/·64년 김현승 선생에게 시를 보냈지만 추천 받지는 못하고 격려편지 받음. 이 편지가 유명시인으로부터 받은 생애 첫 편지로 아직도 그 감격을 못 잊음. 여름에 서울 수색동 김 선생 댁을 찾아가 손수 끓여준 커피에 감읍. 보들레르를 알게 됨/·64년경부터 문덕수 발행의 《시문학》에 연구작품 발표. 홍신선의 <희랍인의 피리> 추천을 부러워함/·65년 3학년, 경희대 신문에 '한국 현대시는 창녀 시'라는 조태일 시론에 '자국의 시에 애정을 갖지 않고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반론 실음/·67년∼70년 강원도 횡성, 원주에서 보병 복무. 1.21 김신조 사건으로 유격과 공수훈련 중 두 달간 원주병원 신세/·70년 제대, 71년 졸업. 이재철 선생이 습작시 두 편을 문덕수 선생에게 보인 계기로 72년 현대문학 11월호에 <5월에 들른 고향><너와 함께>가 추천 완료/·74년 첫시집(제1시집) 《낱말추적》을 대구 중외출판사에서 자비 발간했으나 아무도 인정치 않음. 경주 다보호텔의 시협 세미나를 처음 구경. 박목월 박남수 박재삼 시인 등을 뵘/·76년부터 자유시동인. 반시동인과 함께 서울 평론가들에게 70년대의 대표적 젊은 동인이라는 상찬 받음/·78년 세계의문학 여름호에 <청산행><이른 봄> 등이 실리자, 조선일보 월평에서 황동규의 호평을 받음. 현대문학의 최하림 월평에서 호평과 충고/·78년 영남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 포항 전문대 전임강사·<서쪽을 가며><초록을 보며><족두리꽃이 지는 날> 등, 자연 친화의 시들을 세계의문학에 연달아 발표/·80년 마산대 전임강사/·81년 당시 영남대 김춘수 선생이 민정당 창당 주비위원이 되면서 그를 영대 시론교수로 부름.
1982년 김우창 선생이 '오늘의 시인총서' 시집을 내라는 연락에 고려대로 달려감. 제2시집 《청산행》 출간. 이 제목을 황동규 선생은 노인같다고 반대. 김 선생이 시의 내용에 어울린다 하여 결정/·85년 문학과지성사에서 김주연 선생 주선으로 제3시집 《전쟁과 평화》 발간. 고 김현 씨가 악평했다 함. 겨울에 동경 츠쿠바 교토 나라 나고야를 부인과 여행/·86년 대구문학상 수상/·88년 민음사에서 제4시집 《우수의 이불을 덮고》 출간. 러시아·헝가리·체코·독일 여행/·89년 문학과비평사에서 제5시집 《내 사랑은 해지는 영토에》 간행/·90년 시론집 《시를 찾아서》, 심상사/·91년 우리문학사에서 제6시집(장시집) 《시민일기》 펴냄/·92년 김대중 선생의 호를 딴 후광문학상을 우리문학사로부터 받음/·9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제7시집 《地上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냄. 이 시집으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심사위원 김우창 황동규 김영무 김치수 김광규. 이영준 주간은 '가장 논란이 없고 가장 짧은 시간 내에 결정했다'고/·93년 대구 금복주 회사의 금복문화예술상 받음. 경북 문경에서 도자기 예술가 陶泉의 도천문학상 수상/·94년 산문성 소설집 《땅위의 날들》을 민음사에서 냄/·95년 교육부 한국학술진흥재단 주선으로 뉴욕 스토니 부룩Stony Brook의 뉴욕 주립대에 1년간 연구교수로 체류. 한국인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뉴욕 문인들에게 한국문학 강의. 부인과 함께 미국의 50개 주중 45개 주를 자동차 여행. 캐나다를 두번, 멕시코를 한번 여행. 민음사판 제8시집 《열하를 향하여》/·96년 귀국, 1997년 민음 시선집 《청산행》/·97년 제9시집용 《유리의 나날》 원고를 문학과지성사에 넘김/·후배 박상순을 92년 心象에, 남영숙을 96년 現代文學에 소개. 현재 98년판 시선집 《못붙인 편지(가제)》(좋은날)를 제작 중이며, 가급적 짧고 쉬운 시를 쓰고자 노력하고 있음.
어린 시절, 가족사·등단사
가야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는 고향인 거창군 가조면은 조선조 이중환의 擇里志에 의하면 도읍터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싸여있고 가운데는 큰 내와 들판이 있기 때문이라고. 기철은 이곳 서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마을 石里에서 소년시절을 보낸다.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전주 이씨의 재실齋室인 원모재遠慕齋를 짓는 것이 소원이자 숙원이었다. 이 원모재를 지을 때, 기철은 마당에 세워둔 목마에 올라가 놀다가 거꾸로 떨어져 오른 팔을 부러뜨린 일이 있다. 6.25가 터진 초등 1년 때의 사건인데 꼬마로선 중상인데도 아버지께 꾸중 들을까봐 울지도 못한 기억이 새롭단다. 중학 1학년 때 위암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때부터 어머니의 눈물겨운 삶을 가슴에 쌓으며 살게 된다. 시인은 이처럼 한 많은 어머니 무덤이 지금도 그 곳에 있다고 전한다. 순간 '어머니'라는 낱말 앞에서 나도 잠시 우울, 우린 공통분모를 가진 우울리스트가 된다. 어머니, …나의 엄니.
고교 졸업한 해, 고향의 초등학교 여선생이 연주하는 풍금 소릴 듣고 찾아가 음악과 문학을 얘기하다가 그녀가 보인 김기림 시집 《바다와 나비》《기상도》 등을 처음 읽는다. 얼마 후 그가 여선생 댁에 가서 처음으로 독한 술(양주로 기억)을 마시고 취해 누웠다가 동네 청년들에게 봉변 당한 얘기는 자전소설집에 소상히 소개되었다. 기철이 어렸을 적에 하고픈 일은 두 가지였다. 시인과 선생님인데, 지금은 다 소원 성취했다. 선생으로서 그는 초등교에서 중고·대학까지 골고루 해봤으니 회한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좋은 시를 쓰고픈 욕망은 날이 갈수록 목말라지네요. 아직도 아쉬움이 남은 형의 목소리다.
이런 일화가 있다. 72년에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뒤, 74년 첫시집 《낱말추적》의 서문을 받기 위해 미당 선생께 가려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는 용기가 안 났다고. 그래서 문인 이재철·문덕수, 친구 윤충묵을 대동하고 관악구 예술인 마을의 선생 댁을 찾는다. 그때 처음 나온 경주 법주 한 병을 사 갔는데 선생께서 '어, 잘 사왔어. 먹세 먹세.' 하며 채근하시는 바람에 맥주 한 박스를 더 시켜 먹은 기억이 새롭다. 곁에는 이형기 시인이 있었으나 문덕수 선생과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이윽고 댁을 나오려 하자, 약주가 거나해진 미당이 함께 동행하려 하기에 선생을 떼어놓느라고 이들은 꾀를 낸다. 이웃의 이원수 선생을 전화로 오시게 하여 두 분을 대작시켜 놓고, 일행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며 웃는다. 여기서 시인의 문청 시절을 돌아보자. 그가 본심에 처음 오른 건 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심사위원이 조지훈·송욱 선생이었는데, 심사평을 보니 '오탁번과 이기철이 최후까지 겨루었음'을 알린다. 결국 당선작은 오탁번의 <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로 결정되고, 그의 <트라클의 병동>은 차점 낙선. 찬찬히 읽어본 그는 오탁번의 시가 한 수 위라는 걸 시인한다. 그 순간은 씁쓸했으리. 30년이 지나도록 이런 사연이 있는 오 시인을 그는 아직도 만난 일이 없다. 언젠가 소주 마시는 자리에서 정진규 시인에게 전했더니 '오탁번과 만나는 자리를 반드시 주선하겠다'고 했으나 아직은….
이 시인은 자기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견해를 철저히 스크랩한다. 다음은 주요 평문들/·황동규 <틀을 벗어난 시들> 조선일보(78. 6. 21)·최하림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현대문학(78. 9월)·박희철 <꿈과 현실의 변증법> 문학사상(79. 8월)·하종오 <출신 위주 탈피의 문학> 신아일보(79. 10. 24)·김명수 <고향 상실, 그리고 분홍꿈의 시들> 자유시 6집(80)·장석주 <세계에의 비극적 전망의 시들> 세계의문학 27호(83. 봄)·황동규 <따뜻함이 체온이 된 시> 중앙일보(85. 3. 25)·장정일 <삶과 문학간의 간격 메우기> 문화비평 2호(89. 5월)·박원식 <유토피아적 서정의 종말> 매일신문(89. 9. 27)·신동욱 <이웃에 드리는 작은 인정> 동아일보(90. 3. 21)·최동호 <왜곡된 삶의 시대와 진정한 서정> 평론집, 민음사(91)·손진은 <일상사의 세먹을 통한 초월> 문화비평(93. 겨울)·송희복 <이기철의 '유리의 나날'에 관하여> 현대문학(96. 6월)·이진흥 <유리, 가난 그리고 사랑> 문학과창작(96. 8월)·정끝별 <유토피아의 서정, 서정의 부활> 현대시(96. 10월)·김선굉 <온대이며 열대인 슬픈 서정의 영토> 대구문학(97. 가을)과 그외 다수가 있다.
좋은 평문 몇 점. 김영무는 '꼼꼼하고 섬세하나 번잡하지 않고 여유만만하나 나태하지 않고 평화로우면서도 눈부신 긴장이 있고 거기에 더하여 일상성에서 우러나온 깊은 예지가 깃든 시들이 이기철의 《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의 시들이다. 이기철에게서는 세상을 투명하게 관찰하는 눈이 있어 좋다(세계의문학 93. 겨울)'고 밝힌다. 김광규는 '이기철의 시는 어느 편을 읽어보아도 소리내어 읊조리고 싶은 시들로 가득하다. 옛날 선비들의 정조까지 깃들여 자연의 삶을 재생시킨다(같은 책)'는 친근미를 주었다. 또 황동규는 '《지상에서…》는 얌전한 시를 써오던 시인이 갑자기 폭발한 예가 된다. 그런 폭발을 우리는 다른 시인에게서 본 일이 없다(같은 책)'며 극찬했다고. 슬쩍, 자기 작품에 대해 솔직히 말해 달라고 하자 93년 김수영 문학상 수상 소감 일부를 소개한다. '거칠고 누추한 이 시대에 그것의 가슴에 불어넣는 따뜻한 말 한 마디, 시인이 아니면 누가 그것의 가슴에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불어넣을 것인가? 나는 될 수 있으면 시대의 첨단이 아니라 시대의 뒤안길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주우며 거기에도 생명의 싹이 있음을 노래하려 한다. 지름길보다 둘러가는 길, 남들이 뛰어갈 때 나는 잠시 길섶에 앉아 하늘 한번 쳐다보고 가는 길을 택한다. 시는 나 자신의 스승이자 길동무이지, 출세의 방편은 아니다'라는 고백문. 그렇지, '시는 나 자신의 스승이자 길동무'라는 말, 이게 바로 시인 이기철의 본성이 아닐까.
― '문청'과 젊은 시인들에게 긴밀히 주고 싶은 말은?
'기다리던 질문'임을 상기시킨 그는 이렇게 단단히 힘주어 말한다. '시는 시인의 아들이다. 누가 자기 아들에게 가식의 삶을 가르칠 것인가? 유행을 좇다보면 시가 겉치레만 화려한 의상사의 치맛자락이 될 수 있고 곡마단 광대의 천박한 분장이 될 수도 있다. 시는 인생의 걸어온 흔적이요, 기록이다. 진실한 데서 시는 피어날 것이고 가식에서 시는 이울고 말 것이다. 시는 일생을 걸고 하는 작업이지, 일시에 유명해지거나 백만장자가 되는 도박이 아니다. 걸어가라, 발밑에 밟히는 흙과 하늘에 떠있는 구름도 보면서 가라. 그러면서 물어보라. 흙이 왜 아파하는가를, 구름이 왜 흐르다 잠시 머무는가를.' 누가 그를 약하다고 하는가. 누가, 강태가? …명구절에 거듭 나의 눈길이 쏟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은? 그리고 주목하는 신인은?
'《퇴계마을의 시》라는 고전류다. 이퇴계(이장우 편역)의 한역시인데 지식산업사에서 97년에 간행했다. 심심하면, 가끔 김우창 씨의 《궁핍한 시대의 시인》을 본다. 시가 잘 안 씌어질 때는 발레리와 김현승을 읽는다. 신인은 유용주를 주목하고.' 그래, 유용주라면 96년 겨울 《크나큰 침묵》(솔)을 낸 시인이 아닌가. 삶의 치열성이 성큼 다가와 나를 잠시 언어의 감옥에 옭아맨 신인이라는 기억―. '격렬한 분노가 나를 지탱시킨다'는 격한 언어를 구토해냈지. 좌충우돌의 시인 유용주.
시창작 강의
형은 대학 선생노릇 말고 대학 내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도 한다. 어른학생들과 '문학의 밤'도 준비하고 수필 쓰기 시간도 갖는다. 힘들지만, 힘들지 않은 것이 수강생들의 진지한 면학 분위기 때문이란다. 내가 찾아간―형이 일부러 내 시간에 맞춰 주었지만― 강의실 분위기는 매우 진지했다. 두번째 찾은 시인대학도 그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이방인을 위해 그들은 미안하게도 늦은 시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놀란다. 대학 2학년생부터 50대까지 그(그녀)들은 철저한 수강생이었다. 나는 형의 '정신의 치열성'이 주제인 <정신의 처녀림>과 <정신의 열대>를 연상하듯 정신의 지순한 염결성을 처녀성에 비유, 그들과 멋진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형기 선생도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이젠 완쾌하셨는지.) 나는 말없이 그들과 악수를 나눈다. 뜨거운 반김, 진지한 수강 태도와 질문, 그리고 따스한 차의 향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젊은이들이 황금 시간대에 맑은 낯빛으로 시공부를 하고 있다니! 아아 대구·경산의 앞날은 밝고 또 밝다, 부럽다. 이토록 착한 곳을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이편 저편 가르나, 왜들 영호남을 들먹이며 떠들어대나. 아무래도 형은 여기에 계속 남아 있어야겠다.
영남대를 찾는다, 카메라맨 정성기 형도 함께. 어마어마한 120만평, 이 배경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후락의 특혜 시비가 일화로 남아 있다. 교문이 없는 점과 원효대사가 압량면에서 생활했다 해서 유명한 곳이다. 정 형은 이 날따라 추운데도 '선생님'을 위해 온 정성을 쏟아 바지런히 촬영한다. 아니 완연한 예술작품 제작 모습이다. 나도 특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강의를 마친 풋풋한 여대생 둘도 피사체 대열에 합류한다. 낙엽이 무척 좋다. 저 멀리 이 학교만의 '러브 로우드love-road'가 있다. 연인과 벚꽃이 양쪽으로 핀 신작로를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얘기. 지금은 벚꽃잎 대신 낙엽이 지고 있다. 나도 걷고 싶다.
연구실로 들어간다. 1930년 초 동그란 안경이 인상적인 시인 정지용의 얼굴이 보인다. 휘문고보 재직 때의 사진이다. 그 옆에 엘리어트가 있다. 영국 훼이버 출판사 편집이사 시절의 모습으로 내겐 여지껏 외경의 대상이다. 또 있다, 세익스피어. 그도 외경의 큰 극작가다. 난 요즘 5막 비극인 《햄릿》을 새로 읽고 있다. 고전 독해가 너무 부족해 부끄러우므로. 왕비 거투르드가, 급서한 남편 햄릿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와의 혼인 장면을 이해할 수 없지만 《햄릿》의 압권은 역시 미친 연인 오필리어의 죽음에 이은 햄릿과 레어티즈의 마지막 펜싱 시합(결투) 장면이다. 결국 주연급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다. 여기까진 읽지 못했으나 지금 내 마음은 콩닥이며 그 콩밭으로 가 있다. (지금도 끔찍한 독서 체험→고2 때 한 달에 걸쳐 시립도서관 특별열람실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읽은 《파우스트》!) 요즘 치른 '수능 시험'이 엄청난 고득점을 양산시켜 난린데, 대학은 점잔치 못하게 수험생들을 논술로 골탕먹이려는 모양이다. 그나마 시사 중심이 아닌 고전 쪽으로 출제한다니 다행인 걸. 그렇다, 고전을 읽어야 산다. 그저 새 것에 병들지 말고 우리 모두 고전을 읽고 또 읽자.
연구실 탁자 유리 안에는 <우수의 이불을 덮고>가 그림을 배경으로 놓였다. 햇빛이 한 점 닿다가 곧 유리면에서 부서진다. 자꾸 날아온 빛살이 꺾여 나동그라진다. 연구실은 작은 간이침대와 서책과 월간지 들로 온통 빼곡, 차곡하다. 봄에 출간되는 시집 《유리의 나날》은 삶의 정신적 높이와 유리처럼 맑고 정화된 삶을 희구한 연작시집으로 약 2년여에 걸쳐 써왔다고. 많은 얘기를 나누며 걷다가 우린 캠퍼스 끝 까치분식점에서 추어탕을 든다. 동동주도 한 잔씩 들이는 '아즈메'. '아-'자에 악센트가 든, 그 '아즈메!'를 나는 반복해서 불러댄다. 재밌다. 참, 저만큼 만추 늦게 후박나무숲과 단풍 든 메타세쿼이어라는, 마치 전나무 형상인 '소나무과의 교목喬木'이 밭전자로 서 있구나. 사진가의 친절한 알림인데 눈에 꽤나 젖는다. 싱그럽다. 우린 캠퍼스내의 명물 '거울못'도 가봤지만, 동그만 갈대밭과 닭오리 놀던 자연스러움을 훼손한 정방형 연못은 거울처럼 빛나기는커녕 살벌하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바람이 인다. 이제 서울로 가야겠다, 이들의 따스함을 간직하고. 잠깐동안 대구에서의 일박이 그리울 것 같다.
그만둘까 하다가 밝힐 게 있다. 이기철 시인을 첫날 만났을 때 나는 '선생님'으로 호칭하곤, 다음 날부터 '형'이라 부르기로 쌍방 합의했지만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건 전적으로 형의 책임이다. 워낙 한결같은 모습이라 내가 약간 주눅이 든 거다. 거듭 말하거니와 형은 자신만의 카메라 노출이 더 필요하다. 한참 후배인 나에게 '김 선생' 하시면 되나요. 나는 시인 이기철이 교수·시인보다 '사람 이기철'이 훨씬 좋다. 기철 형님, 나요 나. 강태! ―오는 날 저녁은 나 혼자였다. 제9기 시인대학 총무 나현에게 고마움의 목소릴 남긴 뒤 귀경 기차에 오른다. 아아 날이 저문다. 해가 기운다. 모든 이에게 황홀한 새해이기를.
<1997년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