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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광활한 대지 천진으로 가서 덕화학당에 입학한 원봉은 중국어와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틈틈이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저자에 나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냈고 독일 조계(租界)에도 자주 갔다. 천진에는 서구 열강 8개 국가의 조계지가 설정되어 있었다. 북경(北京)과 가까운 항구인지라 중국을 수탈하려는 야욕을 가진 나라들의 무대가 되어 있었다. 열강들은 임차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조계지에 제각각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쯤 열강의 군대들은 자기네 조계에서 벗어나 천진 시내를 군악대를 앞세워 행진하며 무력시위를 했다. 한꺼번에 대여섯 나라 군대가 제각각 다른 군복을 입고 행진하는 모습은 흥미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자기 운명을 자기 손으로 열어가지 못하는 민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해 여름방학이 되자, 김원봉은 중국어에 거의 능통해져서 귀국길에 올랐다. 이번에도 배를 타고 압록강 국경 안동으로 갔다. 거기서 압록강 국경을 건너 신의주에서 기차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그는 이륭양행을 찾아가 쇼우를 만났다. “지난해 제게 뱃삯을 안 받으셨습니다. 방학이라 귀국하면서 인사드리러 들렀습니다.” 쇼우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아, 기억하네. 조국을 찾기 위해 공부한다고 했던 조선 청년이지.” 김원봉은 압록강변의 한 여관에서 고모부의 동지인 손일민과 김좌진(金佐鎭)을 만났다. 그는 거기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의 고모부 황상규가 대한광복회 동지들과 함께 대구의 악질적인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1)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사실이었다. 장승원은 유림의 대가이며 의정부 참찬이었던 허위(許蔿)의 도움으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었다. 매관매직이 성행했던 때라 20만 냥은 주어야 얻을 관직이었다. 그가 그만한 돈을 주려 하자 허위는 거절하고 뒷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쓰자고 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기울자 허위는 의병을 일으켰고, 의병대에서 그의 막료를 지낸 박상진(朴相鎭)이 뒷날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었다. 박상진은 부호들을 찾아가 군자금을 강제징수하려다가 일경에 체포당해 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그는 출옥한 뒤 단원들을 시켜 장승원을 찾아가 허위에게 주려던 자금을 기부하면 항일투쟁에 유용하게 쓰겠다고 요청했다. 장승원은 이를 거절하고 밀고하였다. 격분한 광복회원들은 1917년 1월 장승원을 사살했다. 그들은 그 뒤 군자금 기부를 거부하는 도고면장도 살해했다. 그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나고 박상진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황상규는 일본 헌병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만주 땅 길림으로 망명해 한동안 머물다가 한 달 전부터 김대지와 함께 국내에 다시 잠입해 있었다. 손일민은 고향의 후배에게 말을 놓으며 반색했다. “황상규 동지와 김대지 동지한테서 이야기를 많이 들은 터라 처음 만나는 것 같지가 않군. 반갑네.” 손일민은 그 때 서른세 살로 황상규 ․ 김대지와 더불어 밀양 출신 만주지역 항일투쟁 인맥의 중요한 한 축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처음 뵙습니다, 선생님.” 원봉은 그렇게 말하며 손일민에게 큰절을 올렸다. 김좌진은 스물여덟 살로 약관의 나이에 교육사업을 했고,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부사령(副司令)으로 활동하다가 3년 간 옥고를 치르고 중국에 망명해 있었다. 김좌진과 통성명하고 맞절을 할 때 원봉은 머리가 방바닥에 닿도록 깊이 숙였다. “김좌진 선생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가 반 년 동안 조선 땅 전부를 방랑하던 시절 충남 홍성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은 대지주의 아들이었다. 홍성 땅에서 당진이나 서산으로 나가 바다를 보려면 그의 땅을 밟지 않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토지가 많았다. 열다섯 살에 부친이 돌아가서 호주가 되자 김좌진은 수백 명의 소작인과 노비 들을 불러 앉히고 노비문서를 태웠다. 소작인들과 노비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자신은 절반만을 가졌다. 그래서 홍성 땅에서는 칭송이 자자했다.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김좌진 도령님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집을 김원봉은 여러 번 보았다. 원봉이 그 이야기를 하자 김좌진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껄껄 웃었다. “왜놈들이 조선반도의 토지 측량을 막 끝냈소. 그냥 갖고 있었으면 빼앗길 거요. 그렇게 한 게 잘한 일이지요.” 원봉은 이륭양행의 쇼우 사장 이야기를 했다. 손일민이 입을 열었다. “쇼우는 아일랜드 남자와 일본 여자 사이의 혼혈로 알려져 있어. 자기 조국 아일랜드가 영국의 식민지라 우리 조선인한테 동정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 원봉은 만주의 광복회 회원들이 그의 고모부인 황상규에게 보내는 밀서를 품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 때 황상규는 경성에 머물고 있었다. 고모부를 만난 그는 자신의 중앙학교 시절 친구인 이명건과 김두전이 고모부와 선이 닿아 있음을 알았다. 황상규는 관운장처럼 큰 어깨를 흔들며 우렁우렁하는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없는 사이 이명건과 김두전을 여러 차례 만났다. 정말 네가 평생을 같이해도 좋을 사람들이더라.” 며칠 뒤 네 사람은 김원봉의 임시 거처이기도 한 황상규의 하숙에서 함께 만났다. 김원봉과 이명건과 김두전은 한동안 만나지 못하고 각각 다른 길을 걸어왔으나 서로 걱정하고 그리워한 감정은 바닷속처럼 깊었다. 황상규는 술 한 동이를 받아와 사기대접을 하나씩 안겼다. “젊은 나이에는 수많은 벗을 만나지. 그 벗에 한 때 열광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만나지 못하면 그냥 조금씩 멀어지지. 자, 술을 들어. 술을 마셔야 우정이 깊어지는 거야.” 그들은 건배를 외치고 술을 마셨다.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듯 황상규가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이참에 세 사람이 돌림자 또는 뜻을 같이하는 호를 갖는 게 어떤가? 어차피 독립운동을 하려면 본명을 감추는 게 나을 테니까.” 세 사람이 그게 좋다고 반색을 했다. 천재소년 이명건이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같을 여(如)와 같을 약(若)을 앞 자로 넣고 뒷 자는 바다 해(海), 하늘 천(天), 뫼 산 (山), 나무 목(木), 별 성(星) 따위를 넣으면 좋겠어요.” 김두전이 거들고 나섰다. “황선생님이「주역」을 잘 아시니까 저희들 생일 생시를 보고 정해 주시지요.” 세 사람은 생년과 생월과 생일 생시를 적었다. 황상규는 한참을 고심한 뒤에 입을 열었다. “두전이 자네는 약수(若水), 원봉이는 약산(若山), 명건이는 여성(如星)이 좋겠네. 물과 같다, 산과 같다, 별과 같다, 이만하면 어떤가?” 세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좋습니다. 만족합니다.” 그 때부터 세 사람은 본명보다 이 호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원봉은 친구들과 헤어져 고향 밀양으로 갔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우들과 함께 논에서 피를 뽑는 일을 했다. 논 한복판에서 아버지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너는 신상에 아무 일 없는 거냐? 세월이 수상해서 묻는 말이다. 네 고모가 걸핏하면 헌병대에 끌려갔단다.” 장남이 아마도 독립운동에 나설 것으로 짐작하고 하는 말이었다. “일 년 동안 그냥 열심히 공부만 했습니다. 더 아시려고 하시지도 말고 누가 물으면 그렇게 말씀하세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 말하지 않았다. 저녁에 그는 일 년 전 자신의 유학 여비를 대 준 한봉인을 찾아갔다. 낡은 옷을 입고 가겟일을 보는 친구를 보자 그는 마음이 뭉클해졌다. “열심히 공부하고 왔다고 말하려고 왔어.” 친구는 얼굴에 기쁨이 넘쳐났다. “그러면 됐어. 내가 얼마나 기쁜지 너는 모를 거야.” 그는 그렇게 고향을 돌아보고 닷새 만에 경성으로 갔다. 김두전이 학비를 벌 일거리가 있다고 전보로 연락해 온 때문이었다. 김두전은 영등포에 막 지어진 방직회사에 취직해 있었는데 거기서 사무보조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 사람의 평생 동지는 김두전의 숙소에 묵으며 유학 경비를 모으고, 밤에는 독서를 하며 토론도 했다. 새 학기가 다가왔으나 김원봉은 천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중국이 세계대전의 연합국 편에 가담하여 독일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자국 내의 독일인들을 추방하고 덕화학당도 폐쇄해 버린 때문이었다. 학교 폐쇄 사실을 알려 준 것은 헌병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다시 만주로 가서 머물고 있던 고모부 황상규였다. 황상규는 밀서를 통해 경성의 조직원들에게 소식을 전하면서 처조카인 김원봉이 영문 모르고 학교로 돌아오지 않게 전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원봉에게 남경(南京)의 금릉(金綾)대학을 가는 게 어떠냐고 권하고 있었다. 낙심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는 원봉을 김두전이 위로했다. “남경은 손문(孫文)이 중화민국을 세운 곳이야. 현재 중국의 수도이자 중심이지. 금릉대학을 다닌 여운형(呂運亨)이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인데 학비도 싸고,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장학금을 준다는군. 약산, 넌 중국말이 능통해졌으니 아예 거기로 가는 게 좋겠어.” 묵묵히 생각에 잠겼던 김원봉이 머리를 들었다. “조건이 그렇게 좋다면 셋이 다 가야지요. 나 혼자서는 안 갈 거예요. 노동을 해서라도 여비를 모으자구요.” 세 사람은 한 해 뒤에 떠날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원봉은 두 사람에게 중국어의 기초를 가르치는 일에도 열중했다. 한 해가 지난 1918년 여름, 남경행 다짐은 이루어졌다. 세 사람은 중국으로 가기 위해 경의선 열차를 탔다. 압록강 국경을 넘어 안동에서 안봉선(安奉線) 기차로 갈아타고 봉천까지 가서 황상규를 만났다. 원봉이 물었다. “고모부님, 만주에서의 우리 독립운동은 어떻게 진척되고 있습니까?” “수년 전에 선각자들한테 대두된 독립전쟁 해외기지론이 구체화되고 있지.” 김두전이 황상규의 말을 받았다. “서간도와 북간도는 적격이지요. 지난날 우리 영토였고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으니까요. 그 토대 위에서 군사기지를 만들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무관학교를 만들어 장교를 양성할 수 있죠. 그런 다음 국내로 쳐들어가는 거지요.” 황상규가 말했다. “신흥학교에 대해 들어 봤는가?” 이명건이 답했다. “이회영 선생 형제들이 6천 석이나 되는 토지와 전 재산, 돈으로 따지면 40만원2)이나 되는 재산을 팔아서 세웠다는 학교 말이군요.” “학교 설립에 밀양 출신 선각자 윤세용 선생도 참가했어. 최근 그 학교가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로 옮겨졌어. 곧 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꿀 거야. 그리고 북로군정서는 3백 명 이상의 군대를 만들었고 아라사 연해주 땅에서도 홍범도가 군대를 튼튼히 일으켰다는 소식이 있어.” 김원봉이 황상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고모부님, 저희 세 사람의 소원도 궁극적으로는 왜놈들과 싸우는 건데요. 아예 이참에 신흥학교로 가는 게 어떨까요?” 황상규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언제고 조국이 자네들을 필요로 할 때가 올 거야. 그러니까 남경에 가서 공부를 해 놔. 중국 친구들 사귀는 것도 잊지 말고.” “알았습니다.” 세 사람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들은 봉천에서 며칠을 쉬고 대련(大連)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상해로 가는 기선을 탔다.
김약산 ․ 김두전 ․ 이명건이 남경에 도착한 것은 경성을 떠난지 거의 한 달이 넘어서였다. 남경은 장강(長江)을 끼고 발달한 도시였다. 수운의 이점이 있어 옛날부터 강남의 중심이 되었고 삼국시대에 손권(孫權)이 오(吳)나라를 세운 이래 10개의 역대 왕조가 수도로 삼았던 유서 깊은 도시였다. 근대에는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洪秀全)이 거점으로 삼았으며 손문도 중화민국의 임시수도로 삼은 곳이었다. 그들은 금릉대학 영문과에 등록했다. 김원봉은 천진의 덕화학당에 다닌 기록이 있어 면제되었지만 김두전과 이명건은 중국어 회화와 작문 시험을 보아야 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세 사람은 입학 허가서를 손에 든 채로 자금산(紫金山)에 올랐다. 아름다운 현무호(玄武湖)와 무수히 많은 나무들에 파묻혀 있는 유서 깊은 거리,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장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폭이 십 리가 넘고, 중국 대륙 2천 리를 적시며 흐른다는 장강. 그들은 너럭바위에 앉아 장강을 굽어보며 주머니에 넣어온 고량주를 꺼내 한 잔씩 나눠 마셨다. 유학 성공을 자축하고 우정을 맹세를 했다. 이 때 김두전은 27세, 김원봉은 21세, 이명건은 18세였다. 금릉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김원봉은 영어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고, 김두전과 이명건은 철학, 논리학, 세계사 등 인문학에 매달렸다. 한 학기가 지났을 때 원봉이 사전을 펴놓고 쉬운 영문소설을 읽는 것을 보고 이명건이 혀를 내둘렀다. “약산 형이 영어 소설을 읽다니 놀라운 발전이야.” 김두전이 나섰다. “우리 셋은 비슷하게 두뇌가 좋지. 그런데 나와 여성은 이것저것 욕심이 많은데 비해 약산은 한 구멍만 파는 지독한 집념이 있지. 그게 약산의 장점이야.” 방학이 됐지만 세 사람은 저자에 나가 노동을 해서 돈을 모으며 영어와 철학 공부에 열중했다. 좋지 않은 소식이 왔다. 금릉대학에서 2학기차부터는 학비를 면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세계의 힘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에 조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찾으려 했다. 유럽에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전쟁 종결처리를 둘러싼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고,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의 고비를 치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막내인 이명건은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작한 공부니까 어떻게든 대학을 마쳐야지요. 그런 다음에 독립운동 전선에 서도 늦지 않아요. 온 세계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협박해 강제로 합병했음을 알려야지요.” 김원봉은 생각이 달랐다. “식민지를 경영하는 열강들이 외교적으로 우리 조선을 도울 것 같은가? 어림도 없어. 답은 하나야. 왜놈들이 무력으로 우리 조선을 강점했으니 우리도 무력으로 왜놈들을 몰아내야 해.” 연장자인 김두전은 신중했다. “약산, 군대를 어떻게 조직하나. 먹이고 입힐 자금이 있어야지.” 김두전의 말을 듣고 김원봉은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작은 군대를 만드는 거지요. 대원 하나를 잡기 위해 적 천 명이 덤벼야 하는 전쟁, 숨어서 하는 전쟁 말이에요.” 이명건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약산 형, 암살단을 만들자는 말이지요?” “암살단이 아냐. 군복 없는 대원들로 조직한 작은 군대이지. 여기서는 우리 조국이 너무 멀어. 학교 공부를 계속할지, 독립투쟁에 뛰어들어야 할지 지혜로운 판단을 할 수가 없어. 우리 셋 중 하나가 상해를 거쳐 만주에 다녀왔으면 좋겠어. 일단 가 보면 우리가 갈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내 생각은 약수 형이 가는 게 좋겠어.” 김두전과 이명건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늘 그런 식이었다. 여섯 살이 많은 김두전과 세 살 젊은 이명건 사이에서 마지막에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원봉이었다. 김두전은 만주로 떠났고 김원봉은 이명건과 남경에 남아서 노동을 했다. 밤에는 공부에 맹렬정진하며 모국과 비교할 수 없는 강남의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김두전에게서 전보가 왔다. 남경 체류 정리 후 급래요망 봉천역 요녕반점 약수 김원봉과 이명건은 짐을 꾸렸다. 여비는 마련됐지만 한 푼이라도 더 모으려고 갖고 있던 책이며 책상 걸상까지 닥치는 대로 팔았다. 육로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제남(濟南)역에 내렸을 때, 그들은 그 곳 신문의 기사를 보았다. 그 제목은 ‘조선 독립혁명 발발’이었다. 두 사람은 흥분한 채로 신문을 읽었다. 조선 인민들이 일본의 압제에 항거해 일제히 봉기하였다. 3월 1일 정오 조선 민족대표 33인 은 한성 시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 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 인민이 자주민임을 만 천하에 천명하였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한성에서 2만 명이 모인 만세 시위가 일어났고 조선독립만세의 함성은 전국으로 확산 되고 있다. 일본의 헌병경찰과 군대가 총격으로 진압해 시위대 수십 명이 죽었으나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는 조선인들의 독립 열망은 꺾이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얼싸안았다. “약산 형, 우리 민족의 혼은 죽지 않았어!” “그래, 여성아. 이젠 조선인이란 게 부끄럽지 않아.” 두 사람은 여비를 벌기 위해 제남에서 닷새를 또 묵었다. 다시 구해 본 신문에서 조선의 독립혁명이 일본의 무자비한 진압에 꺾이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래서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북방으로 길을 떠났다. 이 무렵 김약산의 고향 밀양에서도 3․1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김약산의 이웃에서 태어나 자란 청년 윤세주가 주도자 중 하나였다. 김약산이 서울의 중앙학교와 천진의 덕화학당, 그리고 남경의 금릉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서울의 오성(五星)학교를 나온 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독립신문」지국을 운영했다. 1919년 봄 고종황제가 붕어하고 3월 3일이 인산일(因山日)로 정해지자 그는 사촌형 윤치형(尹致亨)과 함께 거기 참가하기 위해 상경했다. 두 사람은 3월 1일의 파고다 공원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를 품고 귀향했다. 그리고 청년 동지들을 규합해 만세 시위를 계획하여 3월 13일 밀양 장날을 맞아 장터에 13,000명의 군중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일본 군경은 하나밖에 없는 동구를 막아 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해 노인과 부녀자를 포함하여 수십 명이 다쳤다. 밀양장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청년들 중 윤세주 ․ 한봉인 ․ 한봉근 ․ 김상윤은 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이 있는 만주 길림으로 떠나고, 최수봉과 김병환(金鉼煥)은 고향에 남았다. 봉천의 여관에서 김원봉은 김두전을 만나 조국의 상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봉천은 압록강 국경도시 안동과 안봉선 철도로 직접 연결되어 있어 조선반도의 소식이 빠르게 전해지는 곳이었다. 김두전은 조선에서 밀반출되어 온 독립선언서를 내밀었다. “약산, 이걸 읽어 봐. 비폭력을 천명하고 있어. 수십만 명이 평화적인 시위에 참가했어. 전국이 물 끓듯이 만세소리로 넘쳐나고 있어. 어제는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어.” 김원봉과 김두전은 논쟁을 벌였다. 김두전은 만세 시위로 봉기한 민족의 총체적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귀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원봉은 비폭력 평화시위는 실패할 것이므로 중국에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고 우겼던 것이다. 이명건도 김두전과 생각이 같았다. 새벽이 되자 결론은 내려졌다. 김두전과 이명건은 만세 시위로 봉기한 민족의 총체적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귀국하는 길을 택했고, 김원봉은 중국에 남아 무장 투쟁을 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명건이 짐을 꾸리다 말고 달려와 원봉의 손을 잡았다. “비록 다른 길은 가더라도 우정은 변치 않는 거예요.” “물론이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거야.” 김원봉은 그렇게 말했다. 세 사람은 함께 역 앞으로 가서 든든히 아침을 먹었다. 3월이라지만 만주 내륙도시의 날씨는 코끝이 시리도록 찼다. 김원봉은 마음마저 을씨년스러워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약산, 이걸 걸치고 다녀. 난 따뜻한 남쪽으로 가니까 필요 없어.” 김두전이 털모자와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겨울 한 철을 만주에 와서 지낸 김두전은 어디서 구했는지 든든한 여우 모피 옷을 입고 있었고, 강남의 도시 남경에서 겨울을 보내고 온 원봉과 명건은 옷차림이 부실했다. “고맙수다, 약수 형님.” 원봉은 입고 있던 중국식 옷 마꿸을 벗어 김두전에게 주었다. 원봉은 봉천역에서 두 사람을 태워 보내고 혼자 기차를 타고 길림으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고모부 황상규와 은사 김대지를 비롯하여 손일민 ․ 김좌진 등 옛 광복회 회원들과 저명한 지도자인 여준(呂準)을 만났다. 여준은 신흥학교 교장을 지내다 길림으로 와서 의군부 주석을 맡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원봉을 따뜻하게 맞았다. 원봉은 그들과 함께 두 달을 보냈다. 그 사이에 그는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서 세워진 한성임시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 등 임시 정부들을 통합하려 애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황상규 ․ 김좌진 등 지도자들은 무력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거 참, 임시정부 몇 개를 세우면 뭐하나. 무력으로 왜놈들을 무찌르는 일이 더 급하지. 임시정부는 무력 투쟁으로 독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세워도 늦지 않지.” 김좌진의 말에 의군부 지도자들은 동의했다. 원봉은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고모부를 비롯한 그들 지도자들이 안은 고민이 자기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당장 군대를 키우고 싶지만 군자금이 없어 병력을 모으지 못하는 아픔 바로 그것이었다. 만세운동이 민족의식을 깨워 일으켜, 국내와 만주 동포 청년들을 얼마든지 불러 모을 수 있지만 입힐 옷과 식량과 무기를 구하는 길은 참으로 요원했다. 그가 꿈꾸어 온 ‘적을 은밀히 처단하는 군복 없는 대원들의 집합’도 성취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묵묵히 의군부의 일을 했다. 봉천과 길림에는 숱하게 많은 애국지사와 애국청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모두 김약산처럼 피 끓는 애국심으로 일신을 던질 각오를 한 사람들이었다. 애국지사들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끄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김시현(金始顯)이라는 사람으로, 메이지(明治)대학 법학부 출신이었다.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면 판․검사와 군수 자리를 차고 나갈 수도 있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투쟁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었다. 사려가 깊고 겸손하여 약산으로서는 몹시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나이가 열다섯 살이나 위인데다 인연이 닿지 않은지 직접적인 교유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또 한 사람은 이종암(李鍾岩)이었다. 그는 김약산보다 두 살이 위로 대구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망명한 사람이었다. 대구은행 출납주임이던 그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은행돈 1만 5백 원을 인출해 서간도행 유랑농민들 사이에 끼여 만주로 왔다. 거기서 김약산의 동화학교 은사인 김대지를 만나 독립투쟁의 방략을 논의했다. 김대지의 권유로 친구인 구영필(具榮必)을 데리고 봉천으로 가서 7천원을 투자해 삼광(三光)상회라는 무역상을 열었다. 사업을 이재(理財)에 밝은 구영필에게 맡겨 독립투쟁의 자금을 만들게 하고 길림으로 나왔다가 김대지의 소개로 김약산을 만났다. “남경 금릉대학이라는 명문학교를 다니다가 독립투쟁을 하려고 중퇴했다고요? 대단하십니다.” 이종암의 말에 김원봉은 웃으며 대꾸했다. “은행 출납주임 자리를 던지고 망명한 분이 더 대단하지요.”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의기투합했다. 김원봉은 김두전 ․ 이명건과 헤어진 터라 이종암과 행동을 같이하며 지냈다. 6월 초의 어느 날 여준 선생이 두 사람을 불렀다. “어서들 신흥무관학교에 가게. 일본 육사를 나와 대위로 복무하다가 탈출해온 지대형(池大亨)과 김광서(金光瑞), 그리고 막 중국의 정규 무관학교인 운남강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온 이범석(李範錫)이 교관단에 합류했어. 그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 장교 교육 과정의 교범(敎範)과 전술을 재빨리 신흥무관학교에게 적응시키기 시작했어. 어서 가서 착실히 전술을 공부해 두게.” “알았습니다, 선생님.” 두 사람은 여준의 추천장을 받고 급히 짐을 꾸렸다. 김원봉과 이종암은 신록이 무성한 산길을 걸으며 오솔길 전방을 응시했다. 떡갈나무 숲에 집채 만한 검정색 바위가 앉아 있었다. 그 앞은 세 갈래길일 것이다. 걸음을 빨리하자 세 갈래길이 나왔다. 두 사람은 검정바위를 끼고 오른쪽으로 굽어진 길을 주목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입학 추천장을 써준 여준 선생이 그려준 약도와 요가구(遼家溝)라는 중국인 마을에서 길을 일러준 노인의 말대로라면 이제 곧장 길을 따라 10리만 가면 신흥무관학교가 나올 것이었다. 근처에 인기척이 있는 듯해 그는 두 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어디선가 외치는 소리가 났다. 그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움켜쥐는데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누군가가 두 사람이 지나온 길이 아닌 왼쪽 길에서 팔을 휘저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여보시오’라는 말이 모국어라는 것을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다. 달려오는 몸짓으로 보아 상대는 그들 또래의 청년이었다. 곁으로 다가온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두 분은 조선 사람이시디요?” 이종암이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형씨도 우리처럼 신흥무관학교 찾아가는 길이군요?” “그렇습네다. 약도를 받아 갖고 왔는데 잘못된 거였습네다.” 언뜻 평안도 억양이 실려 있고 얼굴과 옷차림새가 먹물께나 먹은 인텔리겐치아라는 느낌을 주었다. 세 사람은 보조를 나란히 하여 걷기 시작했다. 평안도 사투리 청년이 악수를 청했다. “내레 평양에서 온 김훈(金勳)이라 합니다.” “나는 밀양 출신 김원봉입니다. 남경에서 오는 길이지요.” “나는 대구에서 온 이종암입니다.” 초여름의 10리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세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김훈은 김원봉과 동갑이었다. 평양의 숭실대학에 다니면서 3․1독립선언서를 배포 낭독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는데 그로 인해 헌병대에 쫓기게 되자 망명해 온 것이었다. 작은 언덕길을 올라가자 시야가 탁 트이면서 개활지가 나타났다. 신흥무관학교라는 한문 현판이 달린 교문이 보이고, 교문 안으로 몇 개의 막사와, 연병장에서 총검술을 하는 생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초의 안내를 받아 교장실로 갔다. 이시영 교장은 세 사람을 면담하고 굳게 손을 잡았다. “잘들 왔네. 입학을 허가하네. 부디 조국 독립을 위해 분투해 주게.” 이 학교는 초창기에 생도수가 60여명에 불과했으나 3․1 만세시위 이후 2천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생도들은 크게 장교 과정과 하사관 과정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지원자가 밀려들고 있어 1년 과정으로 운영했다. 전체 생도들이 연합하여 훈련을 할 때도 있었다. 부대 편성을 하여 자율적인 지휘력을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경 금릉대학 중퇴자인 김원봉은 김약산이라는 가명으로 장교과정에 편성되었다. 평양 숭실대학 중퇴자인 김훈과 대구농업학교 졸업생인 이종암도 그러했다. 김약산은 거기서 반가운 옛 친구들도 만났다. 옆집에 살던 동화학교의 후배 윤세주, 그가 천진으로 유학 갈 때 학비를 내놓았던 한봉인, 한봉인의 사촌형 한봉근 등이었다. 그들 역시 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의 인맥을 타고 망명해 와서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이었다. 김약산은 묵묵히 고된 훈련을 받았다. 생도들은 전원 합숙을 했으며 식사는 순번제를 정해 공동취사로 해결했으며 조밥에 시래기를 넣은 소금국을 먹었다. 무관학교인데도 총은 5~6정밖에 없었다. 그것은 화기학(火器學) 시간에 교육재료로 썼으며 생도들은 집총 훈련 때 목총을 사용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기본적으로 갖출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수백 명을 입히고 먹일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교지보다도 훨씬 넓은 둔전(屯田)을 갖고 있었고, 생도들은 교육보다 사역을 더 많이 해야 했다. 군복과 신발은 낡아 떨어지고 먹는 것도 형편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실망하지 않고 묵묵히 훈련에 열중했다. 생도들은 대개 중학교 졸업 또는 전문학교와 대학에 재학 중인 사람으로 독립전쟁에 한 몸을 바치겠다고 달려온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세 사람의 신임 교관들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지대형은 이청천이라는 가명을, 김광서는 김경천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본명을 그대로 쓰는 이범석은 생도들의 우상이었다. 이범석은 진해군수의 3대 독자로 경성제일고보 1학년 때 한강에 나갔다가 낚시질하는 여운형을 우연히 만나 한 시간 쯤 대화를 나누었다. 그것이 민족적 각성을 안겨 줘, 가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부모를 뿌리치고 여운형을 따라 겨우 열다섯 살 나이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눈치 빠르고 영리함을 주목한 상해의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이 운남강무학교로 보냈고,3) 그는 거기서 유수한 중국 군벌의 자제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특별해.”라고. 그것은 적확한 말이었다.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시영 교장 형제와 교관들은 물론 생도들도 그러했다. 북경대학을 나와 나이 서른에 이곳으로 달려온 박정규(朴正奎)라는 생도에서부터, 열네 살 나이에 도쿄 유학을 집어치우고 달려와 장교과정에 편입된 영리한 소년 장지락(張志樂)까지 평범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신흥무관학교에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이 모인 탓으로, 김약산의 존재가 처음에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두 달이 지나가자 그는 생도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로 떠올랐다. 그는 늘 조용조용히 말하고 행동이 크지 않았으며 남들을 자기주장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생도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어느 날 전학년 생도들이 연합 야영훈련을 할 때였다. 김약산의 분대에는 이종암과, 그의 고향 출신인 윤세주와 한봉근 ․ 한봉인 형제가 들어 있었고 그밖에 신철휴(申哲休) ․ 이성우(李誠宇)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먹밥으로 저녁식사를 때우고 야간 기습훈련을 하고 잠자기 위해 천막에 들어가기 전 이성우가 말했다. “경상도 출신들이 모였는데 나를 따뜻이 대해줘 고맙네. 사실 난 여기 끼이고 싶어서 온 거야.” 이성우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두만강 접경인 연추(延秋)4)에서 홍범도 부대의 훈련을 구경하며 자란 청년이었다. 나이는 김약산보다 한 살 많았다. 이종암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이성우 형. 우리를 패거리라고 여기진 말게. 우린 모두 다른 개성과 주장을 갖고 있으니까. 나는 김약산, 저 친구에게 마음이 끌려서 이 학교까지 따라 온 걸세.” 이성우는 빙긋이 웃었다. “나도 김약산 때문에 이 분대에 들어왔지.” 별들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성우는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며 다시 말했다. “약산, 너는 왜 우리와 다른 거지?” 김약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다르지 않아.” 이성우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냐. 너는 달라. 나는 봤어. 지난주 무장 구보로 연병장을 백 바퀴 돌던 날, 모두 헐떡거리며 주저앉았는데 너는 거의 무릎으로 기어가듯이 움직였어. 네 체력은 생도들 중 중간 쯤 되지. 하지만 집념은 최고이지.” “그건 해야 할 임무였어. 그렇게 해야 왜놈들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달린 거야.” “그게 바로 우리와 다른 거야. 또 하나 말해 볼까? 생도들은 기껏 부족한 보급품과 식사, 둔전의 사역에서 보다 많이 얻고 보다 편하게 지내는 일에 온통 관심을 갖고 있어. 독립전쟁에 몸 바치겠다는 각오로 집을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격도 대개 거칠고 행동적이지. 왁자지껄 떠들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 하지. 하지만 넌 그런 걸 넘어서고 있어.” 신철휴도 나섰다. “그래. 김약산, 너는 멱살을 잡고 싸움을 벌이는 생도들이 있으면 조용히 나서 양쪽 의견을 들어보고 차분한 음성으로 설득해 화해를 시키지. 유창한 말솜씨를 가진 것도 아닌데 동기생들은 네 말에 설복을 당한단 말이야.” 김약산은 두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좋게 봐줘서 고마워. 하지만 나도 힘들고 괴로울 땐 편한 걸 찾고 싶어. 다만 참고 그러지 않을 뿐이지.” “네 포부는 뭐야, 약산?” 신철휴가 물었다. “천 명쯤 되는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왜놈 군대를 질풍처럼 짓밟는 거야.”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이성우의 말에 약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큰 군대를 조직하는 날이 올 때까지 숨은 군대를 만들어 싸울 거야. 러시아 인민들이 황제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는 파르티잔 같은 군대를….” “어쩌면 너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구나.” 이성우가 말했다. 이종암이 벌떡 일어섰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런데 다른 친구들 생각은 어때?” 이종암은 그렇게 말하며 나머지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김약산 생도와 뜻이 같아.” 윤세주가 소리쳤다. 그 날 이후 그들은 가까워졌다. 김약산은 그날 다른 분대의 분대장으로 지명되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야기에 끼이지 못한 김훈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훈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젊은 친구들끼리 숨은 군대를 만든다고? 나는 반대야. 김경천 ․ 이청천 ․ 이범석 등 선배 무관들이 언제고 군대를 만들 거야. 거기서 초급장교를 하며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해.” 김약산을 주목하는 것은 교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생도대에서 영향력 있는 존재로 떠오르고 있는 김약산을 보고 독립전쟁 전선에서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하기 시작했다. 많은 생도들이 젊은 교관 이범석을 우상처럼 따르고 있었으나 약산은 김경천이 더 좋았다. 물론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젊은 이범석에게 복종하며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김경천 대위를 마음속으로 더 크게 존경하고 있었다. 김경천은 가장 열성적이었으며 그것을 묵묵함 속에 묻어두고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생도들을 존중했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았으나 생도들의 나이와 출신지와 학력과 가족 관계 따위를 모두 알고 있었다. 생도들 사이에는, 아마도 교관단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추측되는 이야기들이 흥미롭게 회자되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명성 높은 무관 가문에서 출생한 김경천은 100:1의 경쟁을 물리치고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그러나 재학 중 조국이 일본에 강점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는 육사 3년 후배인 지대형 ․ 홍사익(洪思翊) 등과 요코하마(橫濱)의 공동묘지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통곡했다. 일본의 전술과 군대 경영을 익혔다가 뒷날 탈출해 독립전쟁에 나서자고 맹세했다. 그 뒤 도쿄 한복판에서 2․8독립선언이 일어나고 조선 땅 전체가 3․1만세 운동으로 물결치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지대형과 함께 탈출해 신흥무관학교로 왔다. 어느 날 약산은 김경천 교관의 부름을 받고 함께 연병장을 걸었다. “김약산, 너는 생도들을 끌어당기는 힘을 갖고 있어. 장교로서 갖춰야 중요한 덕목이지. 그걸 어디서 배웠느냐?” 약산은 표충사에서 병법과 은인자중의 교훈을 가르쳐준 원주 스님 이야기를 했다. 김경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은 경험이었군. 그걸 잃지 말아라.” 신흥무관학교는 그 해 가을에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깊은 밤에 마적단의 습격을 받은 것이다. 생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윤기섭 교감과 생도 몇 사람이 납치당했다. 납치당했던 사람들은 곧 돌아왔지만 이 일은 학교에 큰 상처를 남겼다. 마적단에게 훈련용 총을 빼앗겼고, 식량도 강탈당하고 말아 입을 줄여야 할 형편이었다.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무관교육을 시킨다는 학교가 마적단의 습격을 받고도 반격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교직원이나 생도나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김약산은 김경천 교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가르쳐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졸업이 석 달 남았지만 미리 학교를 떠나고자 합니다. 지금 나가서 왜적과 싸우겠습니다.” 김경천은 한참 숙고한 끝에 입을 열었다. “혼자인가?” “윤세주 ․ 이종암 ․ 한봉인 ․ 한봉근 ․ 신철휴 ․ 서상락(徐相洛) ․ 이성우 ․ 권준(權晙) ․ 강세우(姜世宇)가 뜻을 같이 했습니다.” “떼를 지어 나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네. 동기생들의 사기를 생각해야 하네. 자네는 미리 나가서 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졸업을 하는 게 낫지. 가서 교장님의 허락을 받게.” 김약산은 이시영 교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끝까지 잃지 않겠습니다. 떠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허락하지 않으시면 졸업 날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시영 교장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너 혼자 우선 떠나거라. 네가 알다시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학교가 지시하는 곳에 가서 두 해 동안 봉사할 의무가 있다. 나는 너와 뜻을 같이할 생도들에게 일본군을 습격하는 비정규 습격대 복무를 명하겠다.” 이시영 교장은 학교를 뛰쳐나가는 김약산에게 냉정하거나 서운함을 표시하지 않고 신뢰와 기대를 보였다. 그는 급진적이고 과격한 투쟁을 지지하는 지도자가 아니었지만 그런 의열 행동이라도 벌여야 민족 전체에 독립정신를 일깨울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장님.” 김약산은 큰절을 올렸다. 김약산과 단짝이었던 평양 출신의 김훈이 짐을 꾸리는 김약산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약산, 이렇게 헤어지는구나. 교장님과 교관님들도 붙잡지 않으니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나는 너의 결정을 반대하지만 그게 너의 신념이라면 존중한다. 부디 성공하기를 빈다.” “미안하다, 김훈. 독립전쟁 전선에서 싸우다 보면 언제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거다.” 그는 김훈의 팔을 굳게 잡았다. 그 때, “어디로 갈 거야, 김약산 형?”하고 나이 어린 장지락이 물었다. “우리는 길림으로 갈 거다. 왜놈들에 대해 비밀 습격을 감행할 거야.” “형, 나도 거길 찾아갈지 몰라.” “언제든지 와.” 그는 장지락의 어깨를 두드렸다. 뜻을 같이할 동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김약산은 푸른 하늘에 높이 떠서 펄럭이는 태극기와 교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교문을 걸어 나갔다. 김약산은 밀양공립보통학교, 동화학교, 중앙학교, 덕화학당, 금릉대학, 신흥무관학교 등을 모두 중퇴했다. 끝까지 다닌 것은 29세에 입학한 황포군관학교뿐이었다. 끈질기지 못하고 성급한 성향을 가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보통학교는 일장기를 변소에 넣은 사건으로 퇴교했고, 동화학교는 강제 폐교되었고 덕화학당은 독일의 패전으로 중국당국이 문을 닫았다.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목표를 향해 집중하는 끈기가 무척 컸음을 알 수 있다. 두 차례 암살 파괴작전의 실패로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고도 의열단을 다시 일으켜 이끌어간 것을 보면 마치 불사조 같은 의지를 느끼게 한다. 평생의 목표인 군대창설을 해낸 것도 그렇다. 또 하나, 중퇴했음에도 약산이 그 학교 교원이나 동문들과 견고한 연결을 유지한 것도 흥미롭다.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 동창들이 그를 찾아 만주로 가서 의열단원이 되거나 고향에서 의열단의 의거에 호응했다. 중앙학교의 스승과 동창들도 그를 끝까지 잊지 않았다. 금릉대학은 그에게 민족혁명당 창당식장으로 사용하도록 대례당(大禮堂) 건물을 내줬고 신흥무관학교 스승과 동창들도 그를 그 학교 출신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 김약산은 그렇게 불리한 것마저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탁월한 책략을 이미 청년 시절에 몸에 갖춰가고 있었다.
1) 8․15 광복 후 수도경찰청장을 지낸 장택상의 아버지이다. 1947년에 김약산은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 수사국장에게 직접 체포되어 장택상 청장의 방으로 끌려갔다. 2) 연구가들은 2000년대 화폐가치로 비교하면 600억 원에 이른다고 환산한다. 3) 이범석은 봉천을 거쳐 상해로 가서, 군관학교 예비학교인 항주체육학교를 몇 달 다녔다. 그리고 신규식의 추천으로 운남강무학교에 입학했다. 신규식은 손문으로부터 한인들의 군관학교 입학 승인을 받아놓고 있었다. 4) 러시아 연해주 한러 국경에 인접한 포시에트 지역에 있던 옛 한인 집단 거주 지역. 1937년 한인 강제이주 후 크라스키노로 지명이 바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