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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민족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일리리언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일은 없었다. 유독 슬라브 인이 발칸에 들어온 6세기부터 일리리언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북쪽 지역에 거주하던 일리리언은 대부분 학살당하거나 남쪽으로 추방당했던 것이다. 이른바 인종 청소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사건 때문에 북쪽에서는 일리리언을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남쪽에 소수의 인원이 살아 남았다. 이들은 중세에 접어들어 알바노이(Albanoi)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들이 고대와 근대 사이의 연결 고리였던 셈이다. 한때 발칸을 호령하며 살던 일리리언은 ‘천연 기념물’이 될 정도로 인구가 줄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최후의 일리리언인 알바니아 인은 역사에서 ‘아르브리 공국’으로 알려진 중세 봉건 국가를 건설하긴 했지만 이 역시 국가라고 하기에는 수준 미달이었다. 그 후 13세기 말부터 14세기 초 이 공국은 알바니아 지역에서 ‘아르게리아 왕국’을 건설한 아냐우인스(Anjauins)의 통치 하에 있다가 그 후 스테판 두샨의 세르비아 제국 일부로 편입됐다. 이때부터 세르비아 인은 알바니아 인이나 알바니아 영토를 ‘내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가 오늘의 코소보 문제를 남긴 뿌리가 되었다.
스테판 두샨
한때 발칸의 강력한 지배자였던 두샨 왕이 1355년 사망하면서 제국이 붕괴되자 알바니아 인도 독립을 시도했다. 두샨 왕 아래에서 영주 노릇을 하던 몇몇 유력인사가 공국을 설립했으나 1388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최후의 일리리언 알바니아는 또다시 역사 속에서 망각되고 만다. 가끔씩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지는 못했다.
우리가 알바니아 일반사를 주마산간격으로 살펴본 것은 발칸 전 지역에 퍼져 살던 일리리언이 결국 슬라브 인의 이주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을 반추해 보기 위해서다. 우선 슬라브 인은 발칸을 고향으로 삼고 여기에서 발붙이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 이전까지의 발칸 지배 세력은 정주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지배자로 군림하기만을 원했다. 그런데 슬라브 이는 야만적인 일리리언의 꼴이 보기도 싫었던 것이다. 일리리언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은 발전된 선진 문화를 창조해 뒤따라 들어온 슬라브 족이 동화되게 만들어야 했지만 일리리언에게 그같이 발전된 문화가 없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대개 한 지역에 정주해 사는 농경 민족보다는 옮겨 다니는 유목 민족이 잘 무장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칭기즈 칸의 몽고 제국이 단시간 내에 제국을 건설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몽고 제국이 유목 민족이 아니었고 농경 민족이었다면 칭기즈 칸은 쥐꼬리만한 땅에서 추장 노릇이나 하는 주먹 대장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일리리언이 결코 아무런 저항 없이 소멸하지는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가 발칸에 들어온 때에 일리리언의 국부(國父)라고 할 만한 대영웅 스칸데르벡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칸데르벡
알바니아의 수도는 티라나이다. 티라나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호텔 티라나인데, 15층짜리 이 호텔 앞에는 스칸데르벡 광장이 있다. 호텔에서부터 광장을 가로질러 건너가면 왼편에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고 있고 그 오른편에 말을 타고 창을 든 중세 기사의 동상이 보인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스칸데르벡이다.
스칸데르벡 광장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스테판 두샨으로 상징되듯이 알바니아 민족주의가 안착하는 최종역도 바로 스칸데르벡이다. 그는 일리리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마지막 장군이었으며 민족주의가 금기시되었던 공산주의 시대에서 여전히 알바니아 인의 국민적 영웅으로 존재했던 인물이다. 그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알바니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가의 얘기다.
스칸데르벡은 일리리언의 후손 중에서 가장 명문가로 손꼽히던 카스트리오티 가문 출신으로 본명은 기예르기 카스트리오티(Gjergi Kastrioti)이다. 그는 어릴 때 오스만 투르크 군에 잡혀 가 호된 훈련을 받았으며 뛰어난 예니체리 지도자가 된다. 타고난 전쟁 영웅답게 오스만 투르크 황제 술탄으로부터 대단한 인정을 받았다. 술탄은 그의 이 같은 공로를 인정해 스칸데르(Skander)라는 이름을 하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일리리언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만큼 그는 민족의 운명에 대해 늘 고민해왔다. 오스만 투르크 군을 이끌고 자신의 동족인 알바니아 인을 무찔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1443년 마침내 자신의 죄를 속죄할 기회를 얻었다. 자신이 지휘한 오스만 투르크 군이 불가리아의 니시 전투에서 헝가리 군에게 형편없이 패하자 휘하에 있던 3백 명의 알바니아 군을 이끌고 아예 낙향해 버렸다. 이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준비했던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은 즉각 그를 환영했으며 이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에 알바니아 전국에 산재해 있던 영주들이 제각기 봉건 국가(국가라기보다는 마을 정도의 이름이 더 잘 어울릴 것이다)를 설립해 알바니아에는 졸지에 봉건 영주의 전성 시대가 열렸다. 스칸데르벡은 물론 그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스칸데르벡의 투구
그는 각 봉건 영주들과의 연합 전선을 펴기 위해 1444년 레자(Lehza)에서 이른바 ‘알바니아 봉건 영주 지도자 대회’라는 것을 개최했다. 의제는 물론 오스만 투르크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스칸데르벡이 주도하는 일종의 연방을 만들기로 했고 필요한 연합군 조직과 전비를 충당하기 위한 ‘상호 신용 금고’도 창설했다.
오스만 투르크와 스칸데르벡 장군이 이끄는 알바니아 군과의 운명적인 첫 전투는 토르비올리라는 평원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알바니아 군의 대승이었다. 스칸데르벡 군대는 단 1천 명으로 2만 5천 명에 달하던 오스만 투르크 군을 괴멸시키고 만 것이다. 이후 25년간 스칸데르벡은 막사에서 먹고 잠자며 오로지 오스만 투르크 군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를 계속했다. 알바니아 역사가들의 통계에 따르면 그가 죽은 1468년까지 작은 전투는 말할 것도 없고 대전투도 2년에 한 번꼴로 치렀다고 한다.
오스만 투르크 군과 스칸데르벡군의 전투
스칸데르벡 연합군은 수도를 크루야(kruja)로 잡았고 국기는 빨간색 바탕에 검은 색의 독수리 두 마리가 포효하고 있는 카스트리오티 가(家)의 문장을 썼다. 이 문장은 현재 알바니아의 국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공산 시대의 상징인 별이 독수리 머리 위에 모자 쓴 것처럼 붙어 있을 뿐이다.
스칸데르벡이 거주하던 크루야 성
카스트리오티 가문의 문양
명장 스칸데르벡이 사망한 뒤로 그의 자식들이 계속 전투를 했다. 아들인 기욘 카스트리오티(Gjon Kastrioti)가 1481년부터 1485년까지의 전투를, 그리고 손자인 기예르기(Gjergi Kastrioti)가 1494년부터 1506년까지의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싸움은 역부족이었다. 이제 알바니아는 다른 발칸 국가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많은 알바니아 인이 그리스와 이탈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 땅을 완전히 정복한 후에는 모든 것이 파괴되었으며 일종의 군사 봉건 체제인 티마르 체제(Timar System)를 유지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많은 알바니아 인이 오스만 투르크 군 충원의 보고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알바니아는 19세기가 끝날 무렵에야 마침내 민족 의식에 눈뜨게 되고, 결국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지역의 새로운 패권을 잡으려는 세르비아와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기욘 카스트리오티 기예르기 카스트리오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