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정에서의 삶
♣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모본을 보이라
모든 가정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 ......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요14:23).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하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아기가 태어나야 할 가정은 하나님의 가정이다. 하나님의 어린 것들이 사는 곳은 얼마나 신성한 곳인가! 모든 아이는 경건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고, 경건한 가정에 태어날 권리가 있다.
부도덕한 남자와 여자가 천진난만한 아기를 그 아기가 그의 부모의 영향으로 저주를 받게 될 가정에 데려올 권리가 있는가? 법적으로는 있겠지만, 윤리적으로는 안 된다.
아버지가 그에게 태어난 아이들, 언젠가는 그가 한 대로 따라할 아이들에게 해를 끼칠 나쁜 습관들을 형성함에 있어 그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들을 만족시킬 권리가 있는가? 없다.
모든 아버지는 자식들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골로새서 3:21을 보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
여러 해 전에, 내가 들은 예화가 있는데, 실화이다.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어떤 사람이 증류주 양조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위스키를 만들어 팔았다. 그는 확인할 일이 있어서 헛간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눈이 수북이 쌓였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니, 다섯 살 쯤 되는 그의 어린 아들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고 걷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아, 돌아가라. 눈이 너에겐 너무 깊단다."
"아, 아빠. 아빠의 발자국을 밟고 걸어가니 괜찮아요."
이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나머지 교회에 나와 구원을 받고 그의 양조장을 없애버렸다. 그의 다섯 살 된 아들이 자라서 아버지가 한 대로 할 것이라고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된다.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대다수가 꼭 그렇게 된다. 모든 아버지는 자식들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다.
다시 골로새서 3:21을 보자. 거기서는 아버지에게 그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이 낙심할까 해서다. 하나님께서는 아기들을 세상으로 보낸 다음, 그들을 나쁜 영향력과 나쁜 모본으로 망쳐버린 아버지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6:4은 말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다른 번역본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주의 향기로운 영향력과 훈계로 그들을 양육하라."
나는 켄에게(어린 아이일지라도) 나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내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가 잘못했다. 지금 아빠가 하는 행동(아들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것 - 역자 주)이 옳은 거야. 아빠가 너를 바로잡아줬어야 했었는데, 아빠가 그걸 잘못한 방법으로 했구나. 아빠가 화를 내서 미안하다. 아빠가 회개한다."
내가 아들에게 나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만 내가 아들을 노엽게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에베소서 6:4의 의미이다.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사랑의 법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자랄 때, 그들은 그 사랑의 법에 비추어 행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 그다지 큰 문제들이 없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제1장에서 나의 매제 이야기를 했다. 매제와 내 누이 사이에는 아이들이 둘 있었다.
어느 날 밤 내가 어떤 사람의 집에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나의 매제가 오겠다고 했다. 성경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의 가족에 대해 그에게 말했다. 그가 귀를 기울여 듣더니 우는 것이었다. 눈물이 그의 얼굴에 줄줄 흘렀다.
내가 말했다. "덕, 있잖아. 자네에게 어린 아이들이 둘이야. 19개월 터울 밖에 안 돼."
나는 기회가 왔을 때 그에게 주님을 증거한 적이 있었다. 나는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그 문제를 꺼내곤 했다.
내가 그에게 말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 문제에 가슴이 아프네. 왜냐하면 우리 가정이 깨졌거든. 나는 아버지도 없고, 내 기억이 나는 때부터 열일곱 살 때까지 내 인생에 남자 롤 모델 하나 없이 고아로 남겨졌네."
"내게 무엇 하나 주는 사람이 없었네. 우리 이모가 한 번 5센트 백동화를 한 개 주셨지, 그것도 17년 만에 한 번일세! 아이로서 겪는 고통, 배고픔, 빈곤함이 무엇인지 나는 알아. 그러나 나는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도 내 몸을 질질 끌고 이웃집의 꽃밭에서 잡초를 뽑기 위해 척척 움직였다네. 10센트를 벌려고 말이야."
"우리 엄마는 자식들 넷을 맡아 부지런히 뛰어보려고 애썼지만, 수년간 몸에 병이 났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 엄마는 신경쇠약에 걸렸거든, 나는 아홉 살 때,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네. 우리 할머니는 나를 사랑해주셨지만, 나이가 서른인 우리 이모가 그때 아직도 집에 함께 살고 있었어. 우리 이모는 모든 관심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나를 아주 싫어했지. 그래서 이모는 나에게 아무런 애정도 표시해주지 않았어. 나는 자연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네."
나는 내 매제인 덕에게 그가 우리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말했다. 여자들과 놀아나고, 술 마시고, 도박으로 돈을 다 날리고 ......
내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네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해야 하네. 나도 자네 아이들의 처지에 있어봤어. 그래서 그 아픔과 상처를 알아."
그는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의 삶에서 아무런 변화도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진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행하기 시작했다. 자라서 아홉 살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일곱 살짜리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문제와 씨름하느라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금식하며 기도했다. 나는 여러 시간을 들여 그의 아들을 치유 받게 하려고 애를 썼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의 영은 괜찮다. 그러나 그의 뇌에 매독이 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결국 그 아들은 주립 정신병원으로 보내야만 했다.
얼마 후에, 아내와 내가 그 아들이 있는 같은 도시에서 집회에 참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러 갔다. 그 병원 원장이 내게 말했다.
"목사님, 그 아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세요?"
"네, 알고 있지요."
"그 아이가 여기에 온 지 2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최근에야 그의 문제가 뭔지 알아냈어요."
그가 말했다. "목사님이 아세요?"
"그럼요. 알고 있어요."
"그의 문제가 무엇이죠?"
"그의 뇌에 매독이 있어요."
그가 말했다.
"목사님은 의사가 아니신데,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말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게 말씀해주셨어요."
"그 말씀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2년 동안 그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없었거든요."
그러더니 그 의사가 말했다. "가족들 아무에게나 다 연락해주세요. 그 아이를 보기 원하면, 지금 와서 보는 게 더 낫다고요. 왜냐하면 그가 더 오래 살 가능성이 없을 것 같아서요."
나는 집으로 돌아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알렸다.
아내와 내가 거리를 걸어가다가 그 아이의 아빠를 보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서른일곱 밖에 안 되었는데, 마치 노인처럼 온 몸이 흔들거렸다. 그는 그곳에 서서 울었다. 기회를 무시하면 후회가 오는 법이다. 불신자의 삶이든, 그리스도인의 삶이든 마찬가지다.
그가 우리들 가까이 왔을 때, 그가 말했다.
"켄 목사님, 맞으시죠?"
내가 말했다. "그래. 나야, 덕."
우리는 노상에 있었다.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다. 갑자기 그가 울기 시작했다. "내 아들이 어디 있어요? 그가 어디 있는지 목사님이 아세요?"
"그럼,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알지."
그런 다음, 의사가 한 말을 그에게 전했다.
"자네가 아들을 보려면, 지금 바로 가보게나."
그는 거리에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기회를 무시한 자의 고통이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내가 아들을 도울 수 있나요? 내가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그가 울부짖었다.
"없어," 내가 말했다.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 자네가 뭔가 조치를 취할 수 있었는데 말이야. 자네가 뭔가를 했었어야 했는데. 내가 자네에게 뭔가 조치를 취하게 하려고 애썼지만, 자네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어."
나는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를 기억한다. 켄이 태어났을 때, 나는 그 어린 것을 두 손으로 안고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 아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 어린 것을 두 손으로 안을 때, 나는 내 손으로 생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을 안고 있다고 자각합니다. 나는 그를 훈련시키고, 그 앞에서 바르게 살고, 그에게 모범을 보일 책임이 내게 있음을 압니다. 내가 훈련시킨 결과로, 그가 죽을 때 그가 천국에 가든지, 아니면 지옥에 갈 것을 나는 압니다."
그건 엄숙한 생각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우리 아빠에게서, 또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보아왔다. 내가 우리 아이들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은 중요했다.
성경에서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면 나도 능히 할 수 있다고 항상 믿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로 결심했다. 성경은 말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그 다음에, 내가 말했다.
"이 아이는 강하고, 건강하며, 질병이나 약한 것이 없이 자랄 것입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깨어 있고, 영적으로 강건하게 성장해갈 것입니다. 아멘."
내가 기도를 했을 당시, 그는 태어난 지 불과 2시간 반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또 다른 기도를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를 위해서 수십 번 기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우리 딸 팻이 태어났을 때도 똑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나는 내 역할을 다 하고, 딸 앞에서 바르게 살며, 사랑으로 행하기로 서약했다. 나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 딸을 양육하겠다고 주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우리 자녀들 중에 누가 구원 받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적이 없다. 왜? 내가 이미 말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구원 받을 걸 알았다.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일 내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아이들을 버리고 마귀처럼 살았다면, 나는 아무것도 주장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나의 영적 권세와 나의 권리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둘 다 어린 나이에 구원을 받았다. 그 둘은 둘 다 성령 충만을 받았다. 물론, 그들은 아이들이었다. 아이에게 어른처럼 대하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부모들이 겪었던 것 같은 문제들은 결코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고백하는 것을 믿는다(해긴 목사님은 소위 믿음의 말씀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이다. 이 신앙 분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소리 내어 고백하는(Confession) 가르침을 아주 중시한다. 한국에 많이 알려진 말씀 고백의 책으로는 찰스 캡스의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 「혀의 창조적 능력을 사용하라」 등이 있다 - 역자 주).
그러나 바른 고백은 내가 먼저 말씀대로 바르게 살지 않으면 역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놓치는 게 바로 거기다. 그들은 올바른 법칙을 가동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계속 말씀 고백을 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말씀을 고백한대로 바르게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켄이 태어났을 때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그 나이에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켄이 어떻게 될 지를 예언했다. 무슨 계시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성경 말씀의 지식에 근거해서 한 것이다. 나는 또한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태어난 아기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예언했다. 내가 어떻게 했던가? 나는 그들 부모들이 말씀을 "행하는 자"인가(약1:22-26)를 지켜보았다.
그들이 말씀에 비추어 행하였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가정에서 신성한 사랑으로 행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 관해서도 빗맞혀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들이 모두 자랐을 때, 나의 예언은 100% 적중했다. 만일 그들의 부모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계속 살면서 사랑으로 행하지 않을 경우, 설령 그들이 구원 받고 성령 충만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자녀들은 결국 똑같이 될 것이라고 나는 예언했다.
아이들은 가정에서 하나님의 유업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는 더 이상 그들 자신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연합이 빚어낸 이 새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아이는 그 자신의 삶에서 부모를 그대로 재현하게 되어 있다. 아빠의 힘과 사랑과 엄마에 대한 헌신 그리고 엄마의 사랑과 인내와 아빠에 대한 상냥함이 이 사랑의 열매 안에서 합쳐져야 한다. 아이들은 영적 존재이며, 영적 존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