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기축년의 마지막 공식적인 글쓰기이자, 경인년에 선보이는 공식적인 첫 글입니다. 그것을 홍세화 선생님(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한겨레 기획 위원) 이야기로 하게 됐어요. 저로선 참 영광스럽고 기뻐요. 무엇보다 연말연시는, 성찰과 모색의 시간! 그런 의미에서 홍 선생님이 막 펴낸 『생각의 좌표』(홍세화 지음/한겨레출판 펴냄)는 딱이죠.
전 말이죠. 홍 선생님 같은 노장이 우리 사회에 계시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너, 나이가 몇이야?” “내가 누군 줄 알아?”라며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모르겠는 ‘꼰대’들, 아주 몸서리쳐지거든요. 홍 선생님의 존재감만으로도 뭔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고, 존경할 수 있는 노장이 있다는 사실에 불행하지 않습니다.
시간 나면, 홍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 한 번 들어주세요. 이 야만의 시대, 인간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소수자인 홍 선생님 이야기를 듣는 것, 감히 말하건대,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 모두. 지난해 12월 23일 서울 효창공원 부근의 한 커피하우스에서 홍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홍 선생님을 뵙자니, 꼭 크리스마스를 앞둔 선물 같더군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홍 선생님의 말씀은 아마 새해를 맞아 뜻 깊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고요.
악의 평범성
본론에 앞서, 이 얘기로 시작해보죠. 트라우들 융에. 독일인입니다. 그녀는 한 통치자의 비서였습니다. 2002년 82세로 숨을 거뒀습니다. 22세 때 비서가 됐습니다. 당시 통치자가 다스리던 정당에 소속된 적도 없었지만, 타이핑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그리됐습니다. 그저 묵묵히 일했습니다.
그녀는 통치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상냥한 상사였으며,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상냥하다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말하고 일하는 방식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녀는 통치자의 주선으로 그의 집사와 결혼까지 했으니, 참으로 고마울 만하죠. 월급 잘 주지, 동반자 소개해주지, 그저 일만 잘하면 됐습니다. 그녀는 25세까지 그 아저씨가 자살하는 순간까지 옆에 있었습니다. 유서도 그녀가 타이핑했다죠.
네, 말씀드리죠. 그 통치자, 히틀러입니다. 융에 할머니는 비서 시절, 유대인 대학살조차 몰랐습니다. 그 할머니, 뒤늦게 죄의식에 시달렸습니다. 히틀러 정권에 반기를 든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던 ‘소피 숄’(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을 보세요!)의 묘비를 보고 나서랍니다. 뒤돌아본 과거,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게 ‘전범’이었고, 무고한 사람의 희생에 원하건 그렇지 않건, 일조했음을 자각하게 된 거죠.
융에 할머니, “정치적 무지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말년 다큐멘터리(<맹점 : 히틀러의 여비서>)와 책(『히틀러 여비서와 함께한 3년』) 출판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죽기 전, 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으로 이 말을 건넸답니다. “이제야 나 자신을 용서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아무 생각 없이 지배계급이 주입한 가치나 질서에 갇혀 살았던 융에 할머니. 말년에서야 ‘인간의 길’을 깨닫고 그제야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다는데, 과연 지금의 우리는…….
악은 그렇듯, 평범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했었죠. 20대에 반나치 투쟁에 참여했다고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을 운명이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프리모 레비는, 비록 일흔 살을 앞두고 끝내 자살했지만, 이런 말을 남겼다죠.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p.192)
왜 서러움을 느껴야 하나
하나 더. 최근, ‘직장인 71%가 학벌(학력) 때문에 서러움을 느껴봤다’는 내용의 기사. 한 취업 포털이 직장인 1,245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서러움을 느낀 시점은 ‘콤플렉스 때문에 스스로 위축될 때(38.1%)’ ‘학연 파벌에서 소외됐을 때(28.8%)’ ‘승진에서 밀렸을 때(18.8%)’ ‘동료들이 무시한다고 느낄 때(7.4%)’ 순이었습니다. 성별 차이가 있다면, 여성은 ‘콤플렉스 때문에 스스로 위축될 때(48.4%)’의 답변 비율이 높은 반면 남성은 ‘학연 파벌에서 소외됐을 때(35.0%)’가 높았습니다. 이 때문인지, 자신의 학벌에 대해 74.9%가 ‘만족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네요.
서러움의 첫 이유가 의미심장합니다. 어이없는, 바꿔야 할 현실을 콤플렉스로 내면화하면서 서러움이 찾아온 셈이지요. 지배계급이 주입한 의식화(!) 작업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맞아요. 개천에서 용 나는 일, 이젠 없습니다. 최근 김희삼 한국개발연구원(KDI) 부 연구 위원이 경제적 대물림 정도를 분석해 펴낸 보고서 「세대 간 경제적 이동성의 현황과 전망」은,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해줍니다. 앞으로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인생을 좌우하는 정도가 커지고, 교육이 계층 상승 사다리 구실을 하기보다 경제적 지위의 대물림 통로로 변해가고 있다고 김 부 연구 위원은 지적합니다.
맞습니다. 이젠 교육도 돈으로 좌우되는 세상입니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이미 사회계층의 단순 재생산을 합리화해주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지배세력은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강조함으로써 경쟁을 통해 대물림으로 지배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교육과정이 계층의 단순 재생산을 합리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가리는 효과도 얻는다.”(pp.47~48)
학력조차도 보증수표가 되질 못합니다. 스펙이라는 이름의 고혈을 짜는 신종 빨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 자격증, 외모 관리 및 성형, 공모전 수상 외에 봉사활동까지도 스펙의 범주로 삼켜버린 세상. 스펙을 쌓고 경력을 관리하는데 일상을 반납했습니다. 스펙이라는 퍼즐을 완성하지 못하면 이 사회는 낙오자 혹은 ‘루저’라는 주홍글씨를 단박에 새깁니다. 학력이나 스펙조차 없는 이들은 빈곤의 굴레에서 뒹굴어야 하는 야만의 세상.
이런 현상은 거의 동물적입니다. 동물은 생각이나 이성이 아닌 ‘반응’을 합니다. 무의식이 발가벗겨져 있기에 동물이고, 솔직하지만 무섭기에 야만입니다. 거울을 보지 않기에, 성찰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렇게 동물이, 야만이, 괴물이 되고 있지요. 자유와 해방은 나 몰라라 내쳐 버린 지 오래, 차라리 개가 됩니다. 우리 속에 길들여진 야만과 권력에의 의지만 번뜩입니다. “최소한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말이, 너무도 절박하게 들리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언감생심, 개가 되고 말았으니 주인으로 군림하는 자들은 윽박을 지릅니다. 물어라, 쉭. 이빨 드러내고, 눈빛 번뜩이며, 물어뜯고 헐뜯어라. 다른 놈들 누르고 일류가 돼라. 아니면 아예 죽어버려, 개새끼야. 특목고를 위해 달려가는 아이들의 눈빛, 아니 정확하게는 어른들의 욕심에서 ‘사람’은 없습니다. 괴물이 되어버린 우리들. 받아들이기 싫어도, 그것 또한 현실.
<씨네 21>의 종신 필자 김소희 씨의 말마따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시대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은 일상다반사. 지배 집단이 박아놓은 개새끼 규율에 제식 훈련하듯 맞춰가는 지금의 시대. ‘나를 술 푸게 하는 세상’입니다. 에잇,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웃다가 그만 씁쓸해지고 마는 우리네 풍경. 벽보라도 크게 내붙이고 싶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여기, 어떻게 하면 개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홍 선생님이 들려주십니다. 내 생각은,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그것이 진짜 나의 생각일까. 태어났을 때 없던 생각이 지금 어떻게 내 생각이 되었을까. 자, 2010년 경인년은 내 생각의 좌표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는 거 어떠세요. 우리 당장, 인간까지는 힘들어도 최소한 괴물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무엇보다 야만의 세상에서 버티고 견디기.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는 살아내야 한다.”(p.119)
돈독 오른 사회의 부박함
영구 귀국하신 지 7년 반이 지났습니다. 그 시간, 한국 사회는 더욱 가파르게 물신에 종속당한 사회가 됐습니다. 다시 돌아오셔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한국 사회의 변화가 있었다면 듣고 싶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돈독이 너무 올랐어요. 돈만 아는 세상이 된 거죠. 인간을 평가하는 데도 돈으로 평가하고. 존재에 대한 성찰이 없어지니까 욕망에 매몰됐어요. 자유의 길을 모색하지 않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굴종의 길을 자발적으로 가는. 그런 소유의 욕망, 물질적 욕망이 덧씌워져 기존 체제나 시장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길이 아닌 굴종이 확연하게 두드러졌습니다.
귀국하셔서 황우석 사태도 겪으셨습니다. 그 사태 이후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판단 능력은 진일보했어야 하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겠으나 기존 생각을 수정하기는커녕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지만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 성숙을 위해 자기를 부정하고 성찰하면서 수정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럴 용기가 없는 거죠. 훈련도 안 돼 있고. 자기 생각과 욕망 체계를 고집하기 위해서 외려 끊임없이 합리화하는 데만 용기가 있어요.
마르크스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생각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라면 지배계급이 나에게 갖도록 요구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배계급의 의식에 속절없이 함몰되는 가장 큰 이유를 뭐라고 보시는지.
유럽에선 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19세기 말 후반에 투표권을 줬어요. 여성에게 안 줬지만. 그때 투표권을 줬을 때, (지배계급이) 아무 준비도 없이 줬겠어요?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을 통해 욕망 체계나 기존 체제에 대해 숙달된 조교가 되도록 한 거죠. 공부 잘하는 것이, 곧 숙달된 조교가 되는 것이죠. 지배세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되고, 지배계급의 이념이 일반 민중에게 관철되는.
미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의 사회화 과정에 중요하고 보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교육과 미디어인데, 그것을 지배세력이 장악하고 있어서 당연히 (지배계급의 이념에) 매몰될 수밖에 없어요. 매트릭스죠.
지금의 우리, 몸은 비대하나 생각은 야윈 불균형이 심합니다. 특히 생각은 몸과 달리 아파도 자각증세가 없기 때문에 생각이 아프기 전에 스스로 묻고 답하는 훈련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요.
나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 내 몸과 생각입니다. 몸은 자각증세가 있어서 병원에 가면,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묻잖아요. 이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물론 암은 자각증세가 늦게 오는데, 내 생각은 암보다 더 지독해요. 내 삶을 오도하는 생각은 자각증세가 있기는커녕 고집하게 만들죠. 그건 스피노자가 강조한 것(“사람은 이미 형성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입니다. 어떻게 내 생각이 내 생각이 된 건지, 성찰하고 회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생각을 고집하는 사람이지만, 생각을 고집하며 살아가지만, 그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느냐. 자기 성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의 학교를 버려라.”
교육 문제로 들어가 보죠. 암기와 문제 풀이 능력으로 학생을 줄 세우는 현 제도 교육은 윤리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육 문제를 논의하자면 7박 8일도 부족하겠습니다만, 제도 교육을 차라리 시키지 않는 편이 나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학교를 버리라고 하고 싶어요. 그럴 정도로 우리 학교가 갖고 있는 문제는 심각합니다. 자발적 복종을 내면화하고 있어요. 우리의 근대식 교육 자체가 일제강점기 때 터 잡은 것이고, 당시 학교는 ‘존재를 배반한 의식’이 목적입니다. 그 틀이 바뀌지 않았고, 학교가 민주화돼 있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학교가 민주화돼야 민주적 시민이 형성됩니다. 학교는 학생, 학부모, 교사 세 주체가 주인이 돼야 하는데, 지금 보면 장학사나 교장·교감, 이사장이 주인이잖아요. 이런 구조를 보면, 지금 학교는 민주공화국의 학교가 아닙니다.
또 대학 서열화에 의해 학문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정밀과학이 아닌, 논리와 사고와 감수성을 요구하는 학문인데, 그런 것을 통해서는 줄을 세울 수 없고, 대학 서열화에 맞출 수가 없어서 인문·사회과학을 암기과목으로 바꿨어요. 그러다 보니 주입의 주체는 당연히 지배세력이고 주입받는 자는 자발적 복종의 길을 가게 되죠. 민주화되지 않은 학교가 지배세력에 의해 이용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학교를 계층 상승의 기회로 보지만 그런 사람은 이미 계층화가 이뤄졌고, 중산층 이하는 옛날과 달리 그럴 기회도 없고,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물림 구조의 부속물로 학교가 있는 거죠. 돈은 돈대로 들고. 제 자식이 한국에 있으면, 아이와 충분히 토론한다는 전제하에 학교에 안 가고 책 읽고 여행 다니는 쪽으로 이끌고 싶어요. 강제는 못하겠지만, 홈스쿨링이나 다양한 방식의 대안학교를 모색하는 탈학교의 길로. 제도 교육의 학교를 버려야 합니다.
이건 아이도 아이지만 부모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교육 문제 때문에 부모들 중에 자유인의 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도 자식 교육을 통해 무너지고 있어요. 그 점에서 교육 문제는 부모의 블랙홀입니다. 교육 문제에서 해방돼야 소수의 부모들이 가고자 하는 자유의 길, 자아실현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자식들 때문에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소수의 부모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탈학교를) 모색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교육은 이미 세습화를 위한 도구니까, 즉 교육이 아닌 거죠. 교육을 손아귀에 넣은 지배계급의 계략이 먹혀들어간 거죠?
계층화도 이뤄졌고 더욱 강화될 거예요. 상층부는 교육을 통해 영어 유치원부터 사립 초등학교, 국제중, 특목고, 이른바 SKY 상위권 대학, 미국 유학을 통해 대물림 지배 구조를 만들어요. 또 그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계층화도 강고하게 이뤄지는 현실입니다. 과거처럼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자식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다면 오기가 나서 그들을 위한 들러리 역할을 시킬 수 없다고 할 거예요. 아이들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학교 구조나 내용이 바뀌진 않는 한, 이 문제에 대해 일상에서 시민사회 운동을 하는 분이라면 헤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어렵기 때문에 할 만한 일이고요.
인문·사회과학을 반학문으로 만든 줄 세우기 풍토에 반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글쓰기를 강조하셨습니다. 자기 생각과 논리를 만드는 갖게 하는 글쓰기, 어떻게 만나면 좋을까요?
우선 공유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독서는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글쓰기는 사람을 정확하게 한다.” 이 말은 진리입니다. 문제는 우리 학교가 바로 이 두 가지를 안 한다는 거죠. 독서를 하면, 공부 안 하고 뭐하냐고 타박하는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싶어요. 글쓰기는 더더욱 안 하죠. 오로지 대학 입시를 위해 논술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점수에 맞추기 위한, 자기 생각을 갖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왜곡된 글쓰기를 하고 있어요.
한국 학생들과 유럽 학생들에게 백지를 나눠줬을 때, 채워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암기를 해서 똑같은 단어를 몇 번이고 거듭 쓰는 것으로 채워져요. 유럽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담은 글쓰기로 채워지죠. 일상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 사회는 공부 시간이 제일 많지만 사회문화적 소양이 없고, 자기 생각이 부박합니다. 그건 글쓰기가 없는 데서 비롯된 겁니다.
그렇다면 글쓰기가 왜 없어졌나.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거라, 등수를 매길 수가 없죠. 핀란드처럼 절대평가를 하는 나라에서는 가능하지만 우리처럼 등수를 매겨야 하는 구조에선 생각을 물을 수 없어요. 대학 서열화가 글쓰기를 소멸시켰습니다. 풍요롭고 정교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한데, 우리는 학교에서 그걸 배제하는 상황입니다. 대학 입시에 종속되고 왜곡돼서. 거기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그것으로 명확해지죠.
자유, 존재의 지향점
예나 지금이나, 편한 비루함보다는 불편한 자유 쪽에 서려고 했던 궤적을 그리고 계십니다. 책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만, 그 자유라는 귀중한 가치,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의 지향점이 자유라고 봅니다. 어떤 억압도 없이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과 적성에 따라 그 사회에 기여하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는, 그러면서 생존이 담보되는 것이 자유인의 개념이죠. 누구나 그런 내면의 욕구를 갖고 있어요. 자유인을 지향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사회와 같은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고 싶은 겁니다. 많은 이들이 거부하길 기대하고 있고요. 인간이 애당초 편함을 추구하지만, 굴종에 의한 세속적인 편함이라면 저는 거부합니다. 불편해도 자유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거죠.
지금, 자유라는 가치가 왜곡돼서 받아들여집니다. 자유의 반대말이 억압이 아닌 무질서와 불안이라는 것에서도 드러나죠. 지배계급의 아전인수식 강요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 결과가 아닐까요?
자유의 개념을 자유주의·자유세계, 즉 공산세계와 반대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해요. 그 자유는 영업의 자유밖에는 안 됩니다.(웃음) 인간의 내면·사상의 자유가 아니고. 국가보안법이 아직 폐지가 안 된 것을 보면, 과거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그 자유만 강조해왔던 끝물이 아직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다 보니 자유의 반대가 억압인데, 불안이나 무질서를 얘기하게 되는 거죠. 지배세력이야 자기들이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안전하게 보장받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질서, 안보 그런 가치를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더 중요한 가치가 정의, 진정한 의미의 자유, 평등인데 말이죠.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이 곧 자유이다. 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p.124)
진보 의식의 성숙, 무엇을 담보로 해야 할까요. 자기부정의 과정?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소수파입니다. 그런데 이들도 진보 의식을 단련과 성숙의 과정을 통해 가진 게 아니라, 반전을 통해 가졌다고 봅니다. 대개 스무 살 안팎에 선배 잘못 만나서, 책 소개를 잘못 받고, 누나나 오빠, 부모 잘못 만나서.(웃음) 그때까지 제도 교육이나 미디어로 생성된 생각을 뒤집어서 갖게 된 진보 의식이죠. 어렸을 때부터 진보 의식을 가져서 사회현상과 부딪히면서 단련된 게 아닙니다. 이건 나름대로 문제가 있습니다. 예컨대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뒤집었는데, 양성평등이나 성소수자 문제에 있어선 수구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적잖이 봅니다. 진보 의식이 성숙·단련을 통해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반전을 통해 갖게 됐을 때의 한계죠. 그래서 다양한 부문에서 내가 정말 진보적인 감수성 의식을 갖고 있는지 자기부정을 통해 점검해야 합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폭력적인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통해 흘러나오는 사회입니다. 이건 비정상인데요, 대중매체의 윤리 불감증,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엄청난 문제입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소유에 매몰되지 말고 어떻게 존재를 가꿀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광고 문구는 소유가 존재를 규정한다고 규정하죠. 이런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사람들이 존재를 가꿀 생각은 않고 어떻게 하면 소유할까에 매몰됩니다. 존재가 굴종함으로써 비루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지죠. 그런 따위를 어린 학생들이 듣고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 작은 성찰만 해도 그런 광고를 낼 수가 없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이나 인식이 지극히 오염돼 있음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우리 사회는 건국 이후 반공, 방첩, 숭미와 질서, 시장, 국익, 경쟁, ‘기업하기 좋은 나라’, 즉 지배계급의 가치가 국시처럼 강조됩니다. 국민들도 이런 몰염치한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나눔과 분배에 대한 이중적인 시선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눔에 대해서는 조중동도 강조합니다. 같은 말인데 분배에 대해선 싫어하면서. 이중적 시선이죠. 나눔은 순수한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서? 아니죠.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나눔은 원조, 시혜의 성격이 강합니다. 주체는 가진 사람들이고. 분배는 성장과 대립되는 용어인데, 공적인 부분이고 강제성 띠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조·중·동 세력들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가진 사람의 시혜나 온정을 기대하지, 공공성 같은 건 잊으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빅토르 위고의 얘기입니다.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아닌데, 분배가 있고 나서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나눔만 강조돼서는 안 되는데, 사람들은 나눔을 얘기할 때 받는 쪽을 생각하면서 나눔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눔을 생각할 때, 주는 쪽에 서서 생각하고 사적인 시혜를 받는 사람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뉘앙스로 얘기했습니다. 인간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나눔보다 분배가 중요하게 자리 잡혀야 합니다.
나눔이 사적 영역이고, 시혜, 온정, 베풂의 의미를 가졌다면, 분배는 성장의 반대로 공적 영역이고 제도에 의한 강제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조·중·동처럼 양극화된 사회에서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나눔을 강조하는 것은 나눔으로 분배의 요구를 무력화하려는 데 있다.(p.164)
무상교육·무상 의료는 공화국의 소박한 요구
책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선생님께서 꿈꾸시는 무상 의료,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강조해 주신다면요.
정말 단순합니다. 한 사회가 근대 공화국이라면 공공성의 기치, 즉 퍼블릭 개념이 중요합니다. 군주국이 군주의 사적 소유물이라면, 근대공화국은 인민, 민중의 것이죠.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무상교육·무상 의료를 확충하는 건 공화국의 단순하고 소박한 요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화국 알기를 군주제 반대로만 알지, 공공성이라는 핵심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치료나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상 의료·무상교육이야말로 공공성이고, 사회 구성원들이 연대 의식을 형성할 수 있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그것이 실현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학교나 병원에서 돈이 보이질 않고, 은연중에 연대 의식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사회환원의식’입니다. 쉬운 예로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의 의사는 대부분 친절합니다. 대학 병원은 돈도 안 받고 친절해요. 우리는 돈을 많이 받아도 많은 의사들이 친절하지 않아요. 심하게 얘기하면 유럽은 환자 중심, 우리는 의사 중심이에요.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한국 의사들이 불친절 DNA를 타고난 게 아닙니다.(웃음)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비용도 많이 들였으니 사회 나와서 뽑아내야죠. (본전 의식 아닐까요? 하하) 유럽 의사들은 학비가 없으니 자기가 돈을 안 내요. 자기가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사회가 대준 비용에 의해서라고 생각해요. 의사가 되면 되돌려 준다는 생각이 가능한 거죠. 그것이 그들이 돈도 안 받으면서 친절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구조 자체를 바꾸고 사회 환경에 엄청난 변화를 줄 수 있어요. (무상교육·의료 효과는) 바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책도 그 필요성을 이렇게 얘기하죠. “무상교육제도는 그 자체로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이다. 계층 간 연대, 즉 횡적 연대의 실현인 동시에, 세대 간 연대, 즉 종적 연대의 실현이다. (…) 이와 같은 횡적, 종적 연대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무상교육제도는 가난한 서민들에게도 교육받을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더해 교육과정에 있는 어린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연스럽게 연대 의식을 갖도록 한다는 점에서 또한 중요하다.”(p.170~171)
책은 그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한 소수에게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를 건네라면, 어떤 말로 위무와 격려를 전하고 싶으세요?
사람은 결국 편함을 추구하는데, 문제는 편함을 추구하기 위해 남의 불편함을 요구하고, 불편함을 넘어 불행, 고통, 죽음까지 요구하는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자가 됐고 지배하게 됐겠지만,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나름 올바른 길을 가려고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발적 불편함을 선택하는 건 소수일 수밖에 없죠. 진정한 자유인의 길이 뭔지, 한 번 태어난 것,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분들도 소수고. 그런 소수들이 만나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나름대로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것이 그런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한국에서의 만남이 돈이 연결된 것밖에 남아있질 않다고 해도,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충족시킬 수 있고,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며 나아가서는 용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책은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형성에 관한 생각을 풀어냈습니다. 좀 더 미시적으로 접근해도 좋을 듯한데, 후속작을 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음, 그건 좀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문제 제기는 이미 했는데, 탈학교 문제에 대해서는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고. 도발적인 얘기를 했는데, 책임을 져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탈학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보고 한국 사회에서 실제적인 모색이나 실천이 있는지, 어떤 성과물이 있는지 살펴봤으면 합니다. 그런 면에서 혼자 쓰는 것이 아닌 같이 만들어나가게 될 것 같아요. ‘학교를 버려라’라는 솔직한 제목으로 쓰고 싶어요.
용산이 곧 1년입니다. 하고 싶은 말씀 많으시겠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세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용산을 보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폭력적인 사회가 됐는지 실감했습니다. 공자도 그랬지만,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두 가지가 수오지심, 측은지심이며, 이것들을 지키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국민을 대상으로 진압 작전을 펴고, 1년이 되도록 장례도 못 치르게 하고, 수사 기록마저 내놓지 않는 뻔뻔스러움이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인간의 탈을 썼을 뿐 인간성이 얼마나 훼손된 사회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우리가 과연 인간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욕망의 노예가 돼서 인간성 자체가 얼마나 오염됐는지 되돌아보고, 같은 사회 구성원이 겪고 있는 고통에 동참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요구됩니다.
이제는 전자 상가로 대변되는 곳이 아닌, 우리에겐 국가가 없고 기업만 있음을 알려준, 용산. 선생님을 뵌 후 곧 장례식을 치르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우리는 국가라는 우산을 잃은 사회적 고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든든하게 우리를 보호하고 어머니의 마음만큼이나 따뜻하고 극진한 보살핌을 주는 것이 국가라 생각했다. 우리의 보호자인 나라가 있어 기를 펼 수 있으니 우리 또한 나라를 아끼고 사랑해야 마땅하다고 당연히 배웠다. 그러나 우리의 보호자이어야 할 국가가 국민을 유기하고 이간질시켜 서로 욕보이게 하고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 내 안에 있던 인간과 국가가 부서졌다.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고아였다.”(p.213)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이십니다. 1년이 넘어 현재 15호까지 나왔는데, 어떠세요?
르몽드 신문과 월간지인 르몽드 드플로마티크는, 제가 프랑스에 있을 때,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래서 한국판 편집을 맡는 것도 흐뭇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어요. 비미국·탈미국은 물론 유럽의 진보적인 담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소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쉽지는 않습니다. 현재 희망은 좀 더 부수가 많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20만 부가 나가는데, 한국에서는 프랑스의 10분의 1이라도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진보적인 담론의 힘이 (이 사회에) 있을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구독에)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에는 지나치게 부풀린 욕망 체계가 있습니다. 아주 쉬운 질문으로, 나라는 존재가 서른 평이 넘는 아파트가 왜 필요할까, 내 존재의 요구인가, 라고 물어봐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존재의 요구가 아니고 덧씌워진 욕망이라고 봅니다. 존재가 훼손되는 겁니다. 욕망을 채우려니까 굴종하고 비굴해지는 거죠.
둘째는 사회 안전망, 공공성 문제입니다. 미래를 전망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이 오늘을 저당 잡고 있습니다. 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 가능성 때문에 오늘을 빼앗긴 거죠. 이게 우리 학생들과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지나친 욕망 체계를 제거하면서 부족한 한국의 사회 안전망과 공공성의 확충을 모색하는 것이 나름대로 진보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싶어요.
굴종이 아닌 자유가 있는 사회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바라는 사회를 남이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 무지와 무관심은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몰상식의 자양분이며 영악한 자들이 뻔뻔하게 군림하는 토양이 된다.”(p.182)
2010년, 어떤 한 해가 됐으면 하시는지요. 개인적인 바람과 사회적인 소망을 나눠서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별로 없고, 아내가 현재 아픈데 치유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사회적으로는 2009년의 화두가 절망과 무기력입니다.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인권이나 남북관계 역시 거꾸로 가고 있는 한편으로 반민주적인 이명박 정권이 보여주는 행태 속에서 무기력함을 느낀 사람이 많습니다. 또 2008년에는 촛불시위로 희망을 봤다면, 2009년에는 반사적으로 무기력과 절망을 느낀 사람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이 사람들도 소수인데, 2010년에는 용기를 잃지 않고 연대할 수 있도록, 지금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단초가 있었으면 합니다.
돌아오는 길, 히죽거렸습니다. 내 이십 대 민무늬 정신에 한 주름을 보태주신 홍 선생님을 뵌 것은 작은 축복이었으니까요. 홍 선생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의 책 덕분에, 저는 지배계급의 마수에서 슬슬 벗어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유인이 돼 가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대신 가난이 찾아오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어떻게든 저는 버티고 견디면서, 루저나 위너가 아닌, 행인(걸어가는 사람)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게 이상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같은 것, 없습니다. 그저 세상이 극도로 나빠지는 것을 막는 일에 아주 사소하게라도 힘을 보태는 것, 덜 슬픈 세상을 만드는 데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는 것, 문제의식을 놓지 않는 것,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계속하는 것, 그 정도? “이상 사회를 미리 그려놓고 그것을 향해 사회운동을 펼쳐 나가기보다는 오늘 이 사회의 불평등과 고통과 불행을 덜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p.179)
올해도 고꾸라지지 않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버티고 견디면서 커피향을 계속 맡을 수만 있다면 올 한 해도 성공이지요. 상상하는 것 또한 놓지 않았으면 하고요. <판의 미로>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이말. “나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상상력과 희망으로 버티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 상상은 도피가 아니다. 진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2010년, 소원을 하나 보탰습니다. 홍 선생님의 사모님께서 완쾌하셨으면 좋겠다는. 평소 소원이 많은 인간이 아니니까, 그 정도는 들어주시겠죠? 아울러,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의식이 어떻게 주입됐는지 고민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과 함께 온전히 자기 안에서 우러나온 사랑(이라는 감정)에도 충실한 한 해 되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홍 선생님의 이 말씀으로 마칩니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한다.”(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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