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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어머니의 실타래☆]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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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실타래]
김명림 시집 / 열린시학기획시선 775 / 도서출판 고요아침(2013.11.1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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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실타래
김명림
어머니의 실타래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실타래 속엔 팔 순 등 굽은 소설책이,
절뚝거리며 걸어온
우여곡절이란 길이 펼쳐져 있다
골다공증으로 걸을 수 없는 깡마른 두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그 길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왔다 갔다 하시며
내 귀에 발자국을 찍으신다
콕콕 지팡이까지 찍으신다
찍힌 귀에 옹이가 박혀버렸다
이젠 십리 밖에서도
어머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당신의 주름진 세월 너머로 해는 지려하는데
실타래 끝은 보이질 않고 먼지만 폴폴 날린다
고백
김명림
추석 다음 다음 날
시어머님 생신입니다
보름달에 가리어
생신 상 한번
변변히 받아보지 못하신 어머님,
흰봉투 슬쩍 건네면서
저희 집에 가시자는 말을
마음이 자꾸 밀어냅니다
어머님의 씁쓸한 미소
가을 바람 거두워갑니다
속내 들킨 것 같아
구두 속에 얼른 집어넣고
나오는데 그만!
마음을 삐끗, 삐고 말았습니다
공범
김명림
늦은 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쓰레기를 버리러 갔는데요
바람도 매섭게 부는 한겨울
다리 한쪽 없는 어미고양이가
새끼들의 허기진 울음소리 들으며
맛난 냄새 솔솔 풍기는
음식물 찌꺼기 통을
목이 빠져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그림자에게라도 들킬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음식물 찌꺼기통, 꽉 다문 입
활짝 열어젖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요
그날따라 만삭인 달이
제 뒤를 쫓아오며
야릇한 웃음을 흘리는 게 아니겠어요.
설마 저도 머지않아 어미가 될 테니
동네방네
고자질이야 하겠어요?
찔레꽃 필 무렵
김명림
외할머니 가슴앓이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꼭 잡고 놔주지 않았다 보릿고개 힘겹게 넘으며 낳은 맏아들 전쟁터에 나가 생사조차 알길 없으니 쩍쩍 갈라터진 논바닥만큼이나 외할머니 가슴도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 어린 나를 당신의 무릎위에 앉히고 네 외삼촌 언제쯤 돌아오나 머리 긁어보라시면 뒤로 가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앞머리를 긁으라며 눈짓을 하곤 하셨지만 내 고사리 같은 손은 어느새 뒷머리로 향했었지 앞마당 찔레꽃 가시에 찔려 아픈 줄도 모르고 종일토록 어루만지던 어느 날엔가 앞머리 긁고 있는 다섯 살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다 미역국 한 솥 끓여 놓으시고 아들 환갑상 차려 주러 떠난 외할머니 찔레꽃 푸른 향기 하늘까지 닿았겠다
어머니의 시詩
김명림
시를 쓰면
돈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
구수한 된장찌개 끓이는
뚝배기 속에 시가 들어있습니다
호미자루에 묻어나는
풀 한 포기 흙 한 줌에도 시가 묻어 있고
이른 아침 학교에 가는 손에
도시락을 건네주며
이마의 땀방울 닦아내는
수건 한 장에도 시가 묻어납니다
어머니 곁으로
지나는 바람 한 줄기가
시 한 줄을 남겨놓고 떠나도
어머니는
정작 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천상 시인입니다
시어머님
김명림
명절, 밥상머리에서 시댁형님 바짓부리를 잡아당겼는데요 대꾸가 없어 자꾸자꾸 잡아 당겼는데요 느낌이 이상해 위를 쳐다보니 시아주버니, 고무줄 바지를 위로 잡아당기고 당겨 반바지를 만들고 계시는 게 아니겠어요?
언제 양복을 갈아입으셨나? 헉, 숨소리까지 멈추는데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조카, 까르르 아리랑 고개 넘어가는데요 쉿! 조용히 하라고 엉덩이를 드는 그 찰나! 바로 그 찰나였는데요 뽀오옹 단풍 물든 얼굴 쥐구멍 찾고 있는 중인데요 녀석, 방귀 소리 한 번 실하네
시어머님께 드리는 두둑한 흰 봉투가 아깝지 않더라니까요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
김명림
어머니는 속곳마다 한숨으로 박음질한 주머니를 달아 옷핀으로 봉했다 일곱 살 나는, 어머니의 속곳주머니 속이 궁금하여 어머니가 곤히 잠든 틈에 옷핀을 빼다봤다
눈깔사탕이 눈앞에 아른거려 꼬깃꼬깃 지전을 손에 들고 나오다 낮달한테 들켜버렸다 커다란 눈깔사탕 두 개를 사서 낮달의 입을 막았는데 녀석은 단맛도 채 가시지 않아 어머니께 고자질해버렸다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고 낮달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댕이치려고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낮달을 숨겨주고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엔 어머니의 삶처럼 너덜너덜한 만 원 권 몇 장이 마지막 온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삼베옷 곱게 입혀 드리고 속주머니에 노잣돈 넉넉히 넣어 옷핀으로 꽂아 드리며 먼 길 가시는 어머니 배웅하였다
부재
김명림
헐벗은 감나무 꼭대기
늙은 감 하나
눈보라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기다리는 사람 있어서라네
기린처럼 목 길게 빼고
갈대 사걱이는 언덕배기 바라보며
십 년째 소식 없는 아들 기다리네
붉은 피 토하며 죽어 간
짓뭉게진 가슴에
그리움의 씨앗 돌처럼 박혔네
무자식 상팔자라며
시벌, 시벌
장례 치르는 까치떼
탑골공원에는 늙은 비둘기가 많다
김명림
지팡이 짚은 비둘기 비틀거리는 공원
삐걱거리는 나무벤치에 앉아
깡마른 무릎 위에 신문 펼쳐 놓고
먼 산 바라기 하는 늙은 비둘기
검정양복을 입으셨다
어디를 다녀오시는 길일까
슬픔에 절은 향 내음
바람결에 묻어온다
매지구름* 검버섯 핀 얼굴
한가운데 떠 있다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아
파고다담배 한 게 피 건네 드렸더니
씁쓸한 담배 연기 속
넋두리 하얗게 피어오른다
깃털 빠진 비둘기들 양지 끝에 모여 앉아
꾸뻑 꾸뻑 졸고 있는
파고다공원에는 늙은 비둘기가 많다
휘청거리며
그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내가 보인다.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황금산 매화나무
김명림
어쩌다가 그녀는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황금黃金을 찾으러 왔다가
바닷물이 길을 막아
오도 가도 못하고
홀아비 뱃놈과 살 섞고 살았던 건 아닐까
고기잡이 떠난 서방 돌아오지 않자
평생 바다를 바라보며
해풍海風에 뼈 깎이고
기다림에 병이든 것은 아닐까
가던 길 멈추고
사연이나 들어보자며
그녀의 깡마른 어깨를
살며시 잡았더니
하얀 눈물꽃 주르르 흐르네
* 충남 서산에 있는 바다를 끼고 있는 산 이름
간격
김명림
앞서 가는 엉덩이 바싹 쫓아
산을 오르는데요
뿡뿡 뿌뿡 뿌뿌뿌
갑작스런 따발총 소리
향기로운 꽃향기
콧속 깊숙이 스며드는데요
앞 사람과의 거리
산행법규 위반한 죄로
애매한 코만 꼭 쥐고
헉헉, 산을 오르는데요
초록 색 옷 단체로 입고
산행 나온 나무들
남의속도 모르고
낄낄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정상에 올라
가스 요금 달라며
짓궂게 손 내밀고 서 있는
가까울수록 좋은 내 남자
포장마차에서
김명림
심사가 뒤틀려 골목길 포장마차
활활 타는 번개탄 위,
꼼장어 벌겋게 익어 가는 밤
옆자리 사내들 정치, 경제 안주 삼아 조각난 인생을 마시네
인생은 말이지, 결국엔 꼼장어 연기처럼 사라져 갈 뿐이야
포장마차 주인 눈치보며 깜빡깜빡 졸고있던 호롱불
거나하게 취한 사내 말에 고개 끄덕이고
대첵 없이 詩에 매달린
내 머리도 덩달아 끄덕이네
그래,
한낮 연기 같은 生
스스로 옥죄이며 살진 않았는지
함박눈 펑펑 쏟아지는 길
눈 위에 별것도 아닌 인생
꾹꾹 찍으며 돌아오는데
그가 자꾸 따라오며 매달리네
죽자 가자 매달리네
상팔자, 그녀와 놀다
김명림
여고생인 친구 딸이 가출하여
답답한 마음에 찾아간 점집
한복을 곱게 입은 처녀 점쟁이가
요령으로 딸랑딸랑 조각보를 꿰맨다
한 땀 한 땀 꿰매가던 조각보
한 귀퉁이에서 뚝, 멈춘다
며칠 기다리면
조각보가 완성되니
밥 잘 먹고 기다리란다
친구의 얼굴이 환해진다
나도 슬그머니
만 원짜리 빳빳한 지폐 몇 장
불상 앞에 놓는다
대뜸, 연필 집어 던지라 한다
자격증시험공부 중이라고 얼굴에 씌였나?
상팔자를 타고 났으니
돈 벌 생각 말고 봉사나 하며 살라한다
실컷 낮잠 자고 일어나
상팔자, 그녀와 함께
커다란 양푼에 열무김치 넣고
세상을 썩썩 비벼먹는다
유모차
김명림
제비꽃 짹짹 피어나는 산책 길
숲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네
그냥 지나치려다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일으키려니
온몸이 불덩이였네
급히 119를 불러 병원에 모시고 갔네
외롬병이 짙어져
가슴 속 깊이 대못이 박혔다는
굵은 안경테 너머
의사가 전하는 말
비수 되어 가슴 찌르네
혼자 사는 갓난할머니 관절염으로
세 끼를 한숨으로 밤 말아 드신다기에
등 기대어 말벗이나 하라며 소개해주었네
갓난할머니 튼튼한 다리가 되아
여섯 개의 다리 푸르게, 푸르게
초원을 걸어가네 걸어간다
동반자
김명림
이른 아침, 비 오는 거리를 노부부가 걸어갑니다 뒤뚱거리는 걸음 때문에 몸이 우산 밖으로 자주 빠져 나옵니다 우리도 살아오면서 세상 밖으로 나간 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종갓집 종부로 살아온 아내, 치매 걸려 고생하던 시어머니가 십 년 만에 영감님 곁으로 떠나자 모질게 잡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아 버린 탓일까 그만,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우산 밖으로만 떠돌던 남편, 속죄인 양 사랑으로 아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진즉 잘하지 늙고 병든 담에 잘하면 무슨 소용 있느냐고 동네 아낙들 수군대지만 야지랑스럽게* 남편 등에 업힌 아내는 마냥 신이 났습니다 지나가던 바람 한 줄기, 남편 땀방울 닦아주며 등 토닥여줍니다.
* 얄밉도록 능청맞으면서도 천연스럽다
어느 노파의 독백
김명림
마늘 껍질을 벗기며
속껍질을 슬쩍 눈감아 준다
벌거벗은 마늘 몸에도 차마 손톱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아
상처 입는 것이 어디 마늘뿐이겠냐고
자신의 시퍼런 상처를 눈물로 쓱 문지른다
꽉 쥐고 펴지 않으려는 주먹 같은 마늘을 쪼개며
치마끈 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열여섯 꽃봉오리
눈보라 속에 파르르 떨고 있는 숫처녀를 본다
첫날 밤, 새 신랑이 풀어주는 부드러운 손길이 아니라면
아, 짐승들의 진흙투성이 군홧발로 짓밟히지는 말았어야 했다
군홧발이 바뀔 때마다 대못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하나, 둘, 셋, 아흔아홉……
휘어진다, 못인들 제대로 박히겠는가
깐 마늘을 절구통에 찧는다
으깨어지면서 튀어나온 마늘이 손등에 닿는다
아리다
그래, 깨어진 마늘도 제 독한 상처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는데
내 몸에서
한恨서린 사리舍利가 나오거든
대한해협 건너 그들에게 보여서
떠도는 영혼 달래준다면
열여섯 꽃봉오리
다시 한 번 활짝 꽃피워보련만
스승
김명림
피 몇 방울 보시하고
상추 몇 닢 얻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모기한테 배웠습니다
글꽃 피어나는 집
김명림
글로 만난 인연도 있지
우리가 만나는 그곳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
글꽃이 날마다 피고 있지
꽃을 통해 안부를 묻고
일상을 향기로 전하곤 하지
어느 날, 그대가
대문에 못을 쾅, 쾅 박고 사라져 버리면
매일 보리란 글꽃도 시들어 버리고 말지
주인 없는 집에
바람과 함께 담장을 넘고
또 어느 날은 달님 벗 삼아
수북이 쌓인 먼지도 털어내기도 하지
그대의 흔적에 입 맞추고
그대가 남기고 간 쓰디 쓴 커피를 마시며
가끔은 그대를 원망도 하지
안녕이라는 글꽃이라도
한 송이 남겨줄 일이지
그대의 글꽃
언젠간 다시 꽃 피울 날 있겠지
꽃멀미
김명림
의료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남쪽에 사는 친구,
핸드폰으로 전해 오는 봄소식
이름도 망측한 큰개불알꽃이
철없이 피어나
보랏빛 얼굴로 히죽히죽 웃고
광대나물도 진분홍 웃음 요염하게 날리니
매화도 덩달아 하얀 웃음 풋, 풋 터져 나오고
계절도 늙었는지 망령이 났다고 넉살을 떤다
버스 올 때가 되었는데
시간을 보려고 휴대폰을 찾는다
가방 이곳저곳 뒤지는 통에
울산과 서산의 거리가 길었다, 짧았다 한다
전화 감이 좋지 않다는 친구에게
휴대폰 찾고 있는 중이라 하니
어머머! 너 치매 중증 아니니?
철모르고 피어난 꽃 소식에
나도 잠시 꽃멀미를 앓았던 건 아닐까?
갯벌
김명림
그녀의 남편은 두 집 살림을 한다
하루 두 번씩 집에 들려 몸을 섞고 가지만
점점 허기만 지는 사랑
그녀의 소문은 꼬리를 감출 줄 몰랐는데
백중 지난 어느 날
그녀의 뜨거운 알몸
배불뚝이 달, 온몸 샅샅이 훑어보고
말라깽이 별빛도 눈 반짝이며 쳐다보고
지나가는 바람은 슬쩍 만져보고
만삭의 갯벌,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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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詩 싹이 고개를 쏙 내미는 태몽을 꾸고
노산으로 산고의 고통을 모질게 겪으며
첫 시집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고슴도치의 자식 사랑이 이런 걸까요?
들꽃을 닮은 그런 詩를 쓰고 싶습니다
2013년 11월
김명림
▲ 시집 [어머니의 실타래] 겉표지(좌)와 속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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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림 詩集 [※어머니의 실타래※]
[ 해설 ] -
시와 같이 노니는 생의 뜨락,
재미성과 감동의 시학
이 지 엽(경기대학교 교수, 시인)
김명림 시인의 시편들은 생활 속에 잘 스며들어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마치 생활의 일부가 되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읽혀진다. 자연과 조응하여 하나가 되는 동일성이 있으며, 진솔한 이야기가 구슬구슬 풀리는 재미성이 있다. 시와 함께 더불어 웃고 노닌다. 그러면서 늘 풍경 밖을 생각하는 신선함을 갖고자 한다. 빙어와 같은 솔직함을 지니면서도 “언어의 방전”을 꿈꾼다. 풀어도 풀리지 않는 어머니의 실타래와 같은 길을 걸으며 “찔레꽃 푸른 향기”를 그리워한다. 어머니 “솟곳 주머니”의 노잣돈 같이 꾸깃꾸깃 접혀진 사랑이 있다. 시적 감동의 힘과 그리움이 있다.
1. 서정과 서사, 그 재미성과 서민성
구슬구슬 풀리는 김 시인의 시적 시원함은 서로 다르면서도 상보적인 두 가지 시적 자질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하나는 시가 가지고 있는 서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이와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이야기를 담지하고 있는 서사적 측면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시적 인자는 각기 다른 미학적 특질을 보여주는데 우선 서정성 측면을 보기로 하자.
콩잎 비단 금침 깔고
오뉴월 땡볕 아래
정사 벌이고 있는 무당벌레
보랏빛 야릇한 눈으로
몸 비비 꼬며 훔쳐보던 콩꽃
허연 엉덩이 내리까고
참았던 오줌보 쏴 쏟아내고
마른 침 꿀꺽 삼키며
넋 놓고 바라보던 고구마
단단해지는 몸, 주체 못 해
땅속 깊이 파고드는
-「풍경」전문
그림자에게라도 들킬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음식물 찌꺼기 통, 꽉 다문 입
활짝 열어젖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요
그날따라 만삭인 달이
제 뒤를 쫓아오며
야릇한 웃음을 흘리는 게 아니겠어요
설마 저도 머지 않아 어미가 될 테니
동네방네
고자질이야 하겠어요?
-「공범」후반부
이 작품들은 둘 다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인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조화와 균형의 세계가 유지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시적대상과의 조응을 이루는 과정에 대자연의 개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풍경」에서 주가 되는 것은 1연의 무당벌레 정사에 있지만 이를 은밀하게 엿보는 “콩꽃”과 “고구마”의 행동들이 익살스러우면서도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는 점 등이 이에 해당된다. 「공범」역시 어미고양이의 간절한 마음을 읽은 시적자아가 음식물 찌꺼기 통을 열어두는 것을 “만삭인 달”이 따라오며 참견하는 것을 정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시의 마지막에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을 읽다보면 격의 없이 자연과 대화를 주고받고 이를 신뢰하는 시인의 순수한 자세가 읽혀진다.
재미성은 더러「낚시」에서 보듯 “잡힐 듯 잡힐 듯한 詩語들/안갯속 허공을 헤매며/……낚詩대에는/피라미 詩語 한 마리/비실비실 매달려 있고”에서 보듯 언어유희적인 묘미까지 시도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간월암 보름달」에서 보듯 한참 자태를 뽐내던 “보름달/발을 헛디뎌/간월도 바닷물에/풍덩! 빠졌”다고 보는 등의 익살과 재치, 만공스님의 선문답과 상좌스님의 천연덕스러운 행동 등에서 연유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이 재미성에 더하여 다른 일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다음의 작품들은 우화적인 이야기나 생활 가운데의 이야기를 조근조근하게 풀어나가는 친숙함으로 다가온다.
절름발이 팽 영감 코딱지만 한 점방에
조그만 방 여닫이문 바로 앞에
눈꼽재기창이 정사각형으로 빌붙어 있었는데
사팔 팽 영감, 사팔뜨기 눈은
꼽재기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네
팽 영감 돋보기안경을 끼고
꼬질꼬질한 속옷을 벗어
쌀 같은 이, 보리 같은 이를 잡아
화롯불에 휙 던지는 모습을
눈깔사탕 사러 갔던 일곱 살 계집아이
눈꼽재기창을 통해 들여다보고 말았네
밖을 내다보기 위해 달아 논 눈꼽재기창이
방 안 풍경을 훔쳐볼 수 있으리라는 것을
팽 영감은 전혀 몰랐던 것일까
-「눈꼽재기창」전반부
동생 부부가 사정이 생겨
조카를 데리고 어린이 집에 갔어요
젊은 새댁들이 자꾸만 쳐다보는데
뭐가 묻었나?
애매한 얼굴만 쓱쓱 비벼 대는데
은수 할머니세요?
에구머니나!
주책없는 주름이 봄맞이 나왔나 봐요
미안해서, 나이 든 것이 정말 미안해서
슬그머니 뒷걸음쳐 나왔어요
풋내가 나지도 싱싱하지도
곰삭은 맛도 낼 줄 모르는
무덤덤한 나이
-「무덤덤한 나이」2연과 3연
전자의 작품에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모티프가 서민적이라는 점에 있다. 여닫이 옆에 만든 작은 창문인 “눈꼽재기창”이라는 것을 소재로 한 것부터가 그렇다. 이 창은 안과 밖이 통하는 통로인 셈이다. 그래서 비밀을 간직하려해도 간직할 수 없는 공간이다. “절름발이 팽 영감”의 설정도 친근감을 자아내고 “코딱지만 한 점방”의 설정도 서민적이다.
후자의 작품에서는 노인정에 가서는 시적자아에게 “젊어서 좋겠다” 얘기해주는 것이 미안해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데 인용된 2연에서는 이와 반대로 나이든 것을 머쓱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똑같은 나이인데도 서로 다르게 해석되는 이중성을 극적이면서도 적절한 상황설정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우화적인 이야기나 생활 가운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손때 묻은 서민들 희로애락을 포착하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2. 진솔함과 신선함 사이, 방전을 꿈꾸는 빙어
시집 제목에서도 드러나지만 시인은 시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와 함께 더불어 웃고 노닌다. 그러면서 간간이 툭 치고 지나가는 가벼움에 말의 흰 뼈가 선명하게 빛난다.
우아한 모습으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저 연꽃 좀 보아
시궁창 판잣집에 사는지 누가 알았겠어?
창자 쓸개 다 보여주고 후회하는 꼬락서니라니!
-「빙어」전문
「빙어」가 이를테면 시적자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이 배면에 놓인 의미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중성을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현실 가운데 웃고 노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대체 저 노파를 어디서 봤던가/
대낮부터 늙어가는/
세월에 취해/
기름기 빠져나간/
푸석, 푸석한 몸으로/
햇볕 벌러덩 깔고 누워/
내 청춘 돌려달라고/
하늘 향해/
바락바락 악쓰는/
저, 노파/
-「늙은 빗자루」전문
사내들, 허름한 창고 한구석에 일렬로 서 있다 백여명은 족히 될 것이다. 눈동자까지 정지된 채 미동도 없다 사람 목숨까지 우습게 여겼던, 겨울철이면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그들이 서로의 몸을 의지한 채 폐허가 된 빈집에 이십여 년 동안 방치돼 있다 사내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노파는 골다공증으로 거동을 못해 아들 집에 가더니 소식이 없다 죽었다는 소문도 있다 차라리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온몸에 활활 불타는 정열 없이는 더는 사내가 아니라 한다
- 「연탄」전문
사라져가는 청계천 헌책방에서
용케 견디며 나를 기다려 온
그녀가
눈물 나게 고마워
살쾡이 같은 마누라 몰래
책꽂이에 원룸 하나 얻어놓고
밤마다 은밀히 만나는
숨겨 놓은 내 여자
-「헌책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다」후반부
시인은 늙거나(「늙은 빗자루」) 변하지 않거나(「연탄」), 아주 오래된 풍경(「헌책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다」)들을 새롭게 구성하여 꺼내놓는다.「늙은 빗자루」의 “하늘 향해/바락바락 악쓰는/저, 노파”는 단절된 인간관계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얼마 전 죽은 지 6년 만에 발견된 독거노인의 죽음이 보도된 적이 있다. 같은 공동주택 안에서도 단절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건조한 일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헌책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다」에서도 잊어지면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있다. “헌책방”이라는 낡은 공간을 “종이컵”이나 “원룸”의 새로운 공간으로 가져온다. 이것은 “쉰일곱”이라는 나이를 “가수알바람 등 떠미는 거리/어정쩡 서성이는/줄기에 매달린 시월/애 늙은 오이 하나”(「쉰일곱」)로 비유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나고,「어느 노파의 독백」에서 마늘 껍질을 벗기며 “벌거벗은 마늘 몸에도 차마 손톱자국을 남기고 싶지 않아……꽉 쥐고 펴지 않으려는 주먹 같은 마늘을 쪼개며/치마끈 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열여섯 꽃봉오리/눈보라 속에 파르르 떨고 있는 숫처녀”등의 표현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나는 동쪽을 이야기하고/
너는 서쪽을 이야기 할 때가 있지/
말(言)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
언어의 방전!/
마음과 마음을/
코드에 꽂고 스위치를 올려 봐
-「소통」전반부
“언어의 방전”을 꿈꾸는 시인의 노력은 세계를 보다 치밀하게 인식하려는 의도라고 풀이된다.
3. 시적 감동의 힘과 그리움, 솟곳 주머니의 사랑
김 시인의 시편들 특색은 쉽게 잘 읽히면서도 재미성과 서민성을 자나가 때문에 감동적이다. 이 시적 감동은 억지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생래적이라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외할머니 가슴앓이는 여름으로 가는 길목을 꼭 잡고 놔주지 않았다 보릿고개 힘겹게 넘으며 낳은 맏아들 전쟁터에 나가 생사조차 알 길 없으니 쩍쩍 갈라 터진 논바닥만큼이나 외할머니 가슴도 시커멓게 타들어 갔을 것이다…(중략)…앞마당 찔레꽃 가시에 찔려 아픈 줄도 모르고 종일토록 어루만지던 어느 날엔가 앞머리 긁고 있는 다섯 살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다 미역국 한 솥 끓여 놓으시고 아들 환갑상 차려 주러 떠난 외할머니 찔레꽃 푸른 향기 하늘까지 닿았겠다
-「찔레꽃 필 무렵」에서
어머니의 실타래는/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실타래 속에 팔순 등 굽은 소설책이/
절뚝거리며 걸어온 우여곡절이란 길이 펼쳐져 있다/
골다공증으로 걸을 수 없는 깡마른 두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그 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하시며/
내 귀에 발자국을 찍으신다
-「어머니의 실타래」전반부
그것은 두 편의 인용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가족사적인 내력으로부터 형성되고 있다. 시적화자는 어릴 적 기억을 통해 외할머니의 가슴앓이를 읽어낸다. 외삼촌을 기다리다 결국에는 그 곁으로 떠나신 외할머니의 모습이 애잔하게 잡혀온다. 외할머니의 따사함을 어머니는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데 후자의 작품「어머니의 실타래」에서 우리는 어머니 발자국 소리를 통해 일상을 경계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들의 시적인 감동은 전자의 경우는 “찔레꽃 푸른 향기”가 “하늘까지 닿”아 독자들의 무딘 후각을 흔들어 주는데 있다. 후자의 작품은 “실타래 끝은 보이질 않고 먼지만 폴폴 날”리는 현실의 옹색한 걸음걸이를 “콕콕 지팡이까지 찍으”시는 소리로 청각을 아주 맑게 맑혀 주는데 있다. 말하자면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시적 감동에까지 나아가고 있는 특색을 보여준다.
어머니의 어머니와 어머니를 거쳐 시적화자에게로 전승된 사랑은 「방울토마토」에서는 “딸아이 먹다 남기고 간/방울토마토 몇 알/코끝이 찡하다/엄마! 사랑해/휴대폰에 찍힌/맑은 눈물을 읽는다”에서 보듯 딸에 대한 내리사랑으로 연결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자두」,「어머니의 詩」같은 작품에서 잘 형상화되고 있다.
붉은 자두 한 알
조물조물 만지다
말간 어머니 숨소리 듣습니다
쉰둥이인 내게
젖가슴 살살 문질러
입에 물려주던 부드러운 사랑
넋 나간 창가에 앉아
낡은 세월 보듬고
먼 산 바라기 하는
산수傘壽의 어머니
햇볕 속, 자두 씨 한 알
뼛속까지 말라갑니다
-「자두」전문
이 작품에는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다정한 생각들이 자두의 일생을 통해 포개져 있다. 여기서 자두는 마치 어머니의 유방과 같은 존재다. “조물조물 만지다” “젖가슴 살살 문질러/입에 물려주던 부드러운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어느덧 흘러 “뼛속까지 말라”가는 앙상함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여자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는 데 아무리 볼품없이 말라가더라도 시적자아는 여기에서 “말간 어머니의 숨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니 그 사랑의 여일함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詩」에서는 어머니가 일하는 일상 즉, “구수한 된장찌개 끓이는 뚝배기 속”이나 “호밋자루에 묻어나는 풀 한 포기 흙 한 줌”이거나 혹은 “이른 아침 학교에 가는 손에 도시락을 건네주며 이마의 땀방울 닦아내는 수건 한 장에도 시가 묻어” 남을 얘기하면서 어머니는 정작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천상 시인”이라고 얘기한다. 어머니를 왜 “천상 시인”이라고 명명했을까. 그것은 가식적이지 않고 한국적인, 그리고 가난하지만 건강한 노동의 일상과 땀방울 흘린 따사함을 어머니는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고, 이것들이 시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라는 것을 시인은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속곳마다 한숨으로 박음질한 주머니를 달아 옷핀으로 봉했다 일곱 살 나는,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 속이 궁금하여 어머니가 곤히 잠든 틈에 옷핀을 빼봤다
눈깔사탕이 눈앞에 아른거려 지전을 들고 나오다 낮달한테 들켜버렸다 커다란 눈깔사탕 두 개를 사서 낮달의 입을 막았는데 녀석은 단맛도 채 가시지 않아 어머니께 고자질해버렸다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맞고 낮달의 머리채를 잡아 내동이치려고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낮달을 숨겨주고 있었다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엔 어머니의 삶처럼 너덜너덜한 만 원권 몇 장이 마지막 온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삼베옷 곱게 입혀 드리고 속주머니에 노잣돈 넉넉히 넣어 옷핀으로 꽂아 드리며 먼 길 가시는 어머니 배웅하였다
-「어머니의 속곳 주머니」전문
뇌출혈로 쓰러져 “낡은 세월 보듬고/먼산 바라기하는/산수傘壽의 어머니”가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시인은 속곳 주머니에서 돈을 훔쳐내어 눈깔사탕을 사먹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는 마지막 가시는 길 그 속곳 주머니에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실타래의 노잣돈을 넣어드린다. 풀리지 않던 실타래의 마지막이 풀리지만, 시적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은 독자들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다가온다.
우리는 지금까지 김명림의 시편들을 살펴보았다. 서정과 동시에 서사성을 지니면서도 재미성과 서민성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편들은 세계를 부드럽게 껴안고 있다. 동시에 그녀의 시편들은 진솔하면서도 신선함을 추구하는 노력을 보여준다. 방전을 꿈꾸는 언어들 속에는 현대인의 이중성과 고뇌를 예리하게 짚어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시편들읁 시적 감동의 힘과 사랑이 있다. 생래적으로 태동된 시적 대상에 대한 응집력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감동의 자장을 형성해준다.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이어온 이 힘과 사랑으로 더욱 더 넓고 크게 이 땅의 상처와 아픔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빛과 그늘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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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김명림 시인의 시편들은 생활 속에 잘 스며들어 일체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마치 생활의 일부가 되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읽혀진다. 자연과 조응하여 하나가 되는 동일성이 있으며, 진솔한 이야기가 구슬구슬 풀리는 재미성이 있다. 시와 함께 더불어 웃고 노닌다. 그러면서 늘 풍경 밖을 생각하는 신선함을 갖고자 한다. 빙어와 같은 솔직함을 지니면서도 “언어의 방전”을 꿈꾼다. 풀어도 풀리지 않는 어머니의 실타래와 같은 길을 걸으며 “찔레꽃 푸른 향기”를 그리워한다. 어머니 “솟곳 주머니”의 노잣돈 같이 꾸깃꾸깃 접혀진 사랑이 있다. 시적 감동의 힘과 그리움이 있다.
― 이지엽(경기대학교 교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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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림 시인∥
∙ 강원 양구 출생
∙ 2011년《열린시학》신인작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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