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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선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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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게시판 스크랩 유진벨(배유지), 오웬, 서서평 선교사 묘지(광주 호남신학교 선교사묘지)
작은 목자 추천 0 조회 49 15.04.16 12: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광주광역시 양림산 일대는, 1900년대 초까지, 광주시내 어린아이들이 죽으면 내다 버리던, 공동묘지 풍장터였다. 그러다가 1904년, 선교사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양림산은, 호남 지역 선교의 중심지로 변한 곳이다. 지금 이 자리에는, 호남신학교가 있다. 그러던 이곳에, 선교사 묘원이 만들어진 것은, 1909년 오웬 선교사가 병으로 순교하자, 이곳에 매장하면서부터이다. 원래는 오웬, 유진벨, 서서평 등 선교사와 그 가족 22기의 묘만 있었지만, 2010년 23기의 묘비가 추가로 세워졌다. 호남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숨져, 양화진과 전주에 안장된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묘비를 동일한 모양과 크기로 재현해, 추가로 세워서, 지금은 총 45기의 묘비가 있다. 돌비마다 이역만리 선교지에서, 고귀한 자기 생명을 바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사연이 새겨져 있다. 그중 1913년 4월 26일과 27일 하루 차이로, 숨져 나란히 누워있는 어린 남매의 묘비는 보는 이의 애틋함을 더해 준다.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선교사 묘지 (호남신학교)

 

오웬 선교사 (1867- 1909)

 

유진벨 선교사 (1868- 1925)

 

오웬 선교사(앞), 유진벨 선교사(뒤) 

 

오웬과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광주 지역에서 함께 사역하였다. 광주 최초의 교회인 현 광주제일교회의 연혁에 보면 1904년 12월 25일 광주 양림동 벨 선교사 주택에서 오웬 선교사 가족과 한국인들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현 광주제일교회)가 설립됐다. 전남 내륙지방 선교의 거점이었던 이 교회는 그 후 교인이 증가하자 북문안으로 이동하여 예배를 드렸다. 1909년 4월 오웬선교사는 장흥의 한 시골에서 선교활동 중 갑자기 고혈로 쓰러져 급거 광주에 도착하였으나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또한 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선교사가 1919년 3월 26일 경기도 병점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양림동산에 안장했으며, 벨 선교사도 노환으로 1925년 9월 삶을 마감하고 양림동산에 안장됐다. 양림동산에는 22명의 선교사들이 영면하고 있다.

 

오웬 선교사(앞), 유진벨 선교사(뒤)

 

광주 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된 오웬 선교사


광주 외국인선교사 묘지는 남구 양림동 108번지 호남신학대학 교내 언덕에 위치하여 있다. 여기에는 1909년 광주에서 최초로 순직한 오웬 선교사를 비롯하여 모두 26기의 외국인 선교사 또는 그 가족들의 묘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동료 선교사 니스벳(Nisbet, Anabel M.)은 오웬 선교사의 역동적인 선교 활동의 시작에 대하여 “그의 목포선교는 오웬이 미국 북장로희 의료선교사로 제일 경험이 많고 유능한 화이팅과 1900년 결혼함으로 인하여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의사이면서 목사로 지칠 줄 모르는 순회설교자였다. 그는 삶의 마지막 해에도 13개 군의 선교지역을 담당하여 순회 전도하면서 한 달 이상을 집을 떠나 전도여행을 계속했다.”라고 하였다. 그는 2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학습교인을 세웠다. 그가 별세하기 몇 일전 그의 어린 딸은 아빠는 왜? 우리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오웬은 1909년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일날 아침부터 뜻하지 않게 격렬한 오한으로 떨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장흥의 교우들은 가마를 준비하여 급히 광주로 향했다. 오한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신음했다. 가마꾼들은 빠른 걸음을 재촉하였으나 광주까지 이송하는 기간이 3일이나 걸려 수요일 새벽 2시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윌슨(Wilson, R. M., 禹越淳) 의사의 치료와, 목포 포사이드(Forsythe, W. H., 保衛廉) 의사에게 전보(電報)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그가 도착하기 전 4월 3일 밤 10시 45분 급성 폐렴으로 별세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장례예배는 1909년 4월 6일 광주선교부 묘지에서 프레스톤(Preston, 邊約翰)목사 집례로 거행되었으며 광주선교사 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부인(Georgiana W.)은 네 딸을 데리고 귀국하였으며 1952년 1월 24일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Denver)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다. 양림동 67-1번지에는 현재 광주 유형 문화재 26호로 지정되어있는 오웬 기념관이 있다. 이 기념관은 그 가족과 친지들이 낸 성금으로 예배당 및 집회실 형태로 1914년 지은 건물이다. 정방형의 르네상스식 2층 건물로 당시에는 광주 숭일학교 예배당 겸 강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기독간호대학 강당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자료출처- http://www.yanghwajin.co.kr,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목포에 전라남도 최초의 진료소를 개설한 C. C. 오웬


C. C.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吳基元)은 1867년 7월 19일 미국 버지니아 주 블랙 월넛트(Black Walnut)에서 출생하였다. 1886년 햄덴시드니(Hampden Sydney)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유니언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고 스코틀랜드(Edinburgh)에 유학하였다. 해외 선교지에서 의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897년 5월 버지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선교부에 부임하였다. 1899년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1900년 12월 12일 미국 북장로회 화이팅(Georgiana Whitting) 의료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하고 목포에 합류하여 호남지역 선교사업에 힘썼다. 목포선교부는 당초(1896) 선교사 연례회에서 전라남도의 선교 거점으로 나주에 설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나주는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 영산강 하구에 연하여 수운(水運)을 통한 각종 산물의 집하장으로 서남 해안 교통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나주는 풍요로운 농촌으로 인근에 영산창(榮山倉)이 있어 이곳에서 세곡을 서울까지 운송하였다. 그러나 1897년 10월 1일 목포항(港)이 개설되면서 나주의 교통 입지가 달라졌다.  목포는 해상과 육지를 연결하는 중요 관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부의 중심 위치를 목포로 변경하여 부지를 매입하고 1898년 가을, 벨(Bell, Eugene, 裵裕祉) 선교사가 서울에서 목포로 이주하고 뒤이어 오웬 선교사가 부임하므로 목포선교부가 조직되었다. 오웬은 선교 초기 의사와 목사로서 의료사업과 전도 사업을 병행하였다.  그 후 병원에서 자유로운 복음전파가 가능하게 되자 의료 활동을 중단하고 전도 사업에 치중하였다. 그는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였다. 그의 한국 선교 업적은 의사로서 보다는 목사로서 더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두움을 밝혀야 한다.”는 그의 열망을 표현한 1899년 가을에 쓴 편지 하나가 있다. 이 무렵 호남지방에는 미국산 석유가 처음으로 보급되어 “등불‘을 키게 되었는데 오웬은 이 등불과 비유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우리 빛의 나라(미국)가 이 어둠의 나라(한국)를 비추고 있다. 밤이 밀려 들 때 밤 그림자를 통해 아래 마을을 내려다보면 불빛들이 별들처럼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 불빛의 출처는 우리의 모국이다. 왜냐하면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은 미국산 석유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가 한국의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생명의 빛으로 영적인 어둠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1904년 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서 열린 연례회의는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오웬 선교사는 벨 선교사와 함께 1904년 12월 19일 광주로 이사하여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양림동 언덕에 선교 기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호남지방 전도 사업에 헌신하면서 190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9회 선교사공의회 회장으로 선임(언더우드 후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합동공의회시대(1901~1906)에는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지방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예를 들면 1901년 광주 송정리(松汀里)교회를 벨과 협력하여 설립하고, 1902년 해남 선두(先頭)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12월 19일 목포에서 광주로 이주하였으며 12월 25일 광주 양림(楊林)교회 설립에 벨과 협력하였다. 그리고 완도 관산(冠山)교회도 설립했다. 1905년 나주 방산(芳山)교회, 보성 무만(武萬), 신천(新泉)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06년 고흥 옥하(玉下)교회를 설립했다. 이밖에 전남 각 지역을 순회하며 프레스톤(Preston, J. F., 邊約翰), 맥컬리(McCallie, H. D., 孟顯理), 코잇(Coit, R. T., 高羅福) 등과 나주 광암(廣岩), 장흥 진목(眞木), 순천 평촌(平村)교회에서 상계(相繼)하여 시무하였다. 독노회(獨老會) 기간에 해당하는 1907년부터 그가 순직한 1909년까지에는 화순, 보성, 광양, 나주 지방 등을 순회하며 복음전도를 통하여 여러 교회를 설립하였다. 1907년 화순읍(和順邑)교회 설립을 비롯하여 보성 운림(雲林)교회도 설립하였다. 1908년 광양읍(光陽邑)교회, 보성 양동(陽洞)교회와, 나주 내산(內山)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전남지역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며 광주 중흥(中興)교회에서 벨 선교사와, 장흥 삭금(朔金)교회에서 니스벳(Nisbet, 柳西伯)과, 나주 서문(西門)교회에서 탈마지(Talmage, J. V., 打馬子)와, 나주 상재(上材)교회에서 뉴랜드(Newland, L. T., 南大理)선교사 등과 각각 상계하여 시무한바 있다.  (자료출처- http://www.yanghwajin.co.kr, 호남신학대학교 차종순 총장) 

  

오웬 선교사  

 

유진벨 선교사 (1868- 1925)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선교사는 남장로교회의 제2진 선교사로 오웬(A. D. Owen)선교사와 함께 1895년 4월 9일 내한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전라남도지역에서 개척하도록 위임받은 그는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일하기로 하고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지역을 답사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거주지도 얻지 못하고 나주지부 설치에 실패하게 된다. 그는 목포로 옮겨가 목포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의 노력으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선교활동 속에서 서울에서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한국에서 당하는 첫 시련이었다. 목포지부를 개척한 그는 1904년 광주로 옮겨오게 된다. 먼저 김윤수 집사를 보내 광주에 거처를 확보하게 하고 주택이 거의 완성되자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은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유진 벨과 오웬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하여 40여명이 함께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인 현 광주제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유진 벨은 이곳 광주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활동, 그리고 교회개척에 힘썼다. 그는 한국에서 30년간 일하고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양림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유진벨 선교사 (1868- 1925)

 

유진벨 선교사 부인 마가렛트 벨 (1873-1919)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84)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선교사님의 일침,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말입니다. 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1. 이 메세지을 던진 주인공은 조선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고 가신 한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바로 서서평 선교사님입니다. 그녀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습니다. 그때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습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습니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전부 다 주고 떠나신 것이지요. 2.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조선인’으로 살았던 그녀를 다시금 기억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어쩌면 성공주의 신화에 도취되어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분을 잊고 살아왔습니다. 3.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선교강국과 교회성장의 그늘 속에 감춰지고 말았던 이 민족을 암흑에서 벗어나도록 일깨워 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다 가신 분들의 발자취를 되찾아야 합니다. 특별히 서서평 선교사님을 통해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정신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 서서평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셰핑은 광주기독병원 간호사였습니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 1912년 3월 32세 나이로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었습니다. 5. 그녀는 조선에 선교사로 왔지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섬김에 사용합니다. 그녀는 조선인들의 일상의 눈높이에서 먹고 마시며 생활 하였습니다. 식민치하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라도 일대의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돌보았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환우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14명의 아이들을 양아들·양딸로 삼았습니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6. 서서평선교사님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를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녀의 일상속엔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7. 서서평선교사님의 당시 일기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그녀가 활동했던 시기 이 민족의 어둠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8. 그녀는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부엌떼기"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 삶을 일깨우는 일에 헌신 하였습니다. 9.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기를 즐겨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으로 인해 닳아서 없어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지나친 헌신으로 그 육체는 쇠약해져서 만성풍토병과 과로와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54세였습니다. 광주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에는 수많은 나환자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 어머니!"를 외치며 애도했습니다. 10. 그녀의 부음을 듣고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있던 좌우명을 보았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NOT SUCCESS, BUT SERVICE)” 11. 이 말이 귓가에 멤돕니다. 가슴에서 계속해서 울립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 맞습니다. 그래야 삽니다. 12. 서서평 선교사님에 대한 책이 두 권 나왔는데 제목은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조선을 섬긴 행복”입니다. 제목 자체가 오늘 저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메세지" 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13. 오늘 우리 시대에는 성공을 위하여 위로는 아부하고 아첨하고 아래로는 비인격적인 태도로 살아가는 허다한 이들이 있습니다. 말은 잘하지만 삶은 결코 잘 산다고 말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입니다. 14. 교회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변질되는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사고가 아닌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를 할 때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유기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교회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5. 다시 섬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가룟유다의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발람의 길에서 돌아서야만 합니다. 게하시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섬김이 은혜요 섬김이 특권이요 섬김이 행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마디를 꼭 기억 하십시오.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

이상갑목사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84)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

[조선닷컴]간호사 교육을 받고 나이팅게일 선서를 마친 당시의 젊은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84)

 

엘리자베스 셰핑(서서평,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84)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

 

[조선닷컴]1914년 광주 제중원 여성 성경공부반의 조선 부인과 함께 선 서서평(엘리자베스 셰핑) 선교사. 독신 여성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에 와서,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평생 병들고 가난한 조선인과 나환자들을 섬기며 살았다. /Serving the People 제공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엘리자베스 셰핑                     (출처- http://cafe.daum.net/vision12/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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