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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벽에 들린 사람들 2부 - 맛난 만남 3부 - 일상 속의 깨달음 |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사랑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이러한 열정과 광기를 탐색한 글이다. 허균, 권필,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김득신, 노긍, 김영 등 내가 이 책에서 관심을 둔 인물들은 우연찮게도 대부분 그 시대의 메이저리거들이 아니라 주변 또는 경계를 아슬하게 비껴 갔던 안티 혹은 마이너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시대는 자못 격정적이다. 이 격정 앞에 온몸을 내던져 맞부딪쳐 나가는 사람이 있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이 있다. 뼈아픈 시련을 자기 발전의 밑바대로 삼아 용수철처럼 튀어오른 사람과, 한때의 득의가 주는 포만감에 젖어 역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버린 사람도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전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지난 10년 가까이 나는 이들과 만나 울고 또 웃었다. 현실의 중압이 버거워 달아나고 싶다가도 이들 앞에 서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태와 안일에 젖었을 때 뒤통수를 후려치는 죽비소리를 들었다. 현실 앞에 부서지면서도 결코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던 슬프고 칼날 같고 고마운 기록들이 여기에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다만 기록의 행간에 숨어 잘 보이지 않던 이들의 이야기를 먼지 털어 전달하는 사람의 소임만을 다하고자 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잊혀진 작은 영웅들을 복원해내고 싶다. 그들은 죄인으로, 역적으로, 서얼로, 혹은 천대받고 멸시받는 기생과 화가로 한 세상을 고달프게 건너갔다. 이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잊혀진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심지어 굶어 죽기까지 했다. 그들의 삶은 대부분 잊혀졌지만, 어느 순간 나를 후끈 달아오르게 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했던 그들의 뜨겁고 따뜻한 마음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절망 속에서 성실과 노력으로 자신의 세계를 우뚝 세워올린 노력가들, 삶의 곧 예술이 되고, 예술이 그 자체로 삶이었던 예술가들,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세워 한 시대의 앙가슴과 만나려 했던 마니아들의 삶 속에 나를 비춰보는 일은, 본받을 만한 사표(師表)도, 뚜렷한 지향도 없어 스산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를 건너가는 데 작은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의 그때와 우리의 지금은 똑같은 되풀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있다.
미쳐야 미친다! 이것은 지난 수년 간 내가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어온 화두이기도 하다. 날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주체를 세우는 일이다. 주체를 세우는 일은 식견을 갖추고 통찰력을 지녀야만 가능하다. 남들 하는 대로 하고 가자는 대로 이리저리 몰려다니기만 한 대서야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푸른역사의 해묵은 글빚을 갚게 되어 기쁘다. 침묵으로 기다려준 박혜숙 선생께 미안하고 고맙다. 저자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편집자 김주영 씨와 함께 작업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고암 정병례 선생께서 그의 칼로 돌에 새겨 이 책의 얼굴을 빛내주셨다. 세상 살아가며 갚고 새겨야 할 것이 자꾸 많아진다.
2004년 3월
봄이 오는 행당동산에서
정민
1부_ 벽癖에 들린 사람들
처참한 가난과 신분의 질곡 속에서도 신념을 잃지 않았던 맹목적인 자기 확신, 추호의 의심 없이 제 생의 전 질량을 바쳐 주인 되는 삶을 살았던 옛사람들의 내면 풍경이 나는 그립다
미쳐야 미친다
벽(癖)에 들린 사람들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그저 하고 대충 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하다 혹 운이 좋아 작은 성취를 이룬다 해도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노력이 따르지 않은 한때의 행운은 복권 당첨처럼 오히려 그의 인생을 망치기도 한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도달하려면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미쳐야 미친다. 미치려면[及] 미쳐라[狂].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狂氣)로 비칠 만큼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우고,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남들보다 우뚝한 보람을 나타낼 수가 없다.
광기 넘치는 마니아의 시대
조선의 18세기는 이런 광기로 가득 찬 시대였다. 이전까지 지식인들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가 떳떳해야 남 앞에 설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무자기(毋自欺) 공부, 마음이 달아나는 것을 막는 구방심(求放心)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이런 것이야 시대를 떠나 누구나 닦아야 할 공부니까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탐구는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사물에 몰두하면 뜻을 잃게 된다고 하여 오히려 금기시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를 강조하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사물이 아니라 앎이, 바깥이 아니라 내면이 최종 목적지였다.
이런 흐름이 18세기에 오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다. 세상은 바뀌었다. 지식의 패러다임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왔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내면 풍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무언가에 온전히 미친 마니아들의 존재는 이 시기 변모한 지적 토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학자 오다 스스무가 쓴 《동양의 광기》를 읽다가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벽전소사(癖顚小史)》! 명말청초 본명을 감춘 문도인(聞道人)이란 이가 엮고, 원굉도(袁宏道)가 평을 쓴 책 이름이었다. 무언가에 미친 벽(癖)이 마침내 광기[顚]와 결합하여 정신병리학적으로 볼 때 이상 성격이나 왜곡된 욕망, 강박 증상 따위를 빚어내는, 속된 말로 이른바 '또라이'들의 열전을 모은 책 이름이었다.
흥분한 나는 그 길로 중국과 일본을 수소문해서 여러 사람을 괴롭힌 끝에 힘들게 이 책을 손에 넣었다. 막상 구하고 보니 49명의 벽(癖)에 대해 소개한 몇 쪽에 지나지 않는 작은 책자였다. 이 중에는 자못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벽도 적지 않다.
유옹(劉邕)은 부스럼 딱지를 잘 먹었다. 맛이 복어와 비슷했다. 한 번은 맹영휴(孟靈休)를 찾아갔다. 그는 이에 앞서 자창(炙瘡:불에 데어 헐은 것)을 앓고 있었다. 부스럼 딱지가 침상 위에 떨어지자 유옹이 가져다 이를 먹었다. 맹영휴는 크게 놀랐다. 부스럼이 미처 떨어지지 않은 것까지 모두 떼어 유옹에게 먹게 했다. 유옹이 가자 맹영휴는 하역(何 )에게 편지를 썼다. "유옹이 저를 먹어치우는 바람에, 마침내 온몸에 피가 흐르는군요."
'창가벽(瘡痂癖)' 즉 부스럼 딱지를 즐겨 먹는 벽이 있었던 유옹에 관한 항목의 전문이다. 이 밖에 화훼에 미쳐 귀족 집에 꽃이 대야만한 산다화(山茶花)가 한 그루 있단 말을 듣고 애첩과 맞바꾼 장적(張籍)을 비롯하여 온갖 종류의 벽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이 벽이야말로 18세기 지식인을 읽는 코드라고 확신하고 있던 차였다. 자료를 처음 받던 날, 책을 들고 온 연구실을 미친 사람처럼 환호하며 왔다갔다했다. 부스럼 딱지를 먹는 벽이야 변태적인 식욕일 뿐이지만, 18세기 지식인들은 이처럼 벽에 들린 사람들, 즉 마니아적 성향에 자못 열광했다. 너도나도 무언가에 미쳐보려는 것이 시대의 한 추세였다. 이전 시기에는 결코 만나볼 수 없던 현상이다.
꽃에 미친 김군
박제가(朴齊家)의 <백화보서(百花譜序)>를 보면 꽃에 미친 김군(金君)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癖)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온 것이니, 병 중에서도 편벽된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바야흐로 김군은 꽃밭으로 서둘러 달려가서 눈은 꽃을 주목하며 하루 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오도카니 그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눕는다. 손님이 와도 한 마디 말을 나누지 않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미친 사람 아니면 멍청이라고 생각하여, 손가락질하며 비웃고 욕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비웃는 자들의 웃음소리가 채 끊어지기도 전에 생동하는 뜻은 이미 다해버리고 만다.
김군은 마음으로 만물을 스승삼고, 기술은 천고에 으뜸이다. 그가 그린 《백화보》는 병사(甁史), 즉 꽃병의 역사에 그 공훈이 기록될 만하고, 향국(香國) 곧 향기의 나라에서 제사 올릴 만하다. 벽(癖)의 공이 진실로 거짓되지 않음을 알겠다. 아아! 저 벌벌 떨고 빌빌대며 천하의 큰일을 그르치면서도 스스로는 지나친 병통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이 첩을 본다면 경계로 삼을 만하다.
《백화보》는 꽃에 미친 김군이 1년 내내 꽃밭 아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술의 모양, 잎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책이다. 김군은 아침에 눈만 뜨면 꽃밭으로 달려간다. 꽃 아래 아예 자리를 깔고 드러누워 하루 종일 꽃만 본다. 아침에 이슬을 머금은 꽃망울이 정오에 해를 받아 어떻게 제 몸을 열고, 저물 녘 다시 오무렸다가 마침내는 시들어 떨어지는지, 그 과정을 쉴 새 없이 관찰하고 그림으로 그린다. 그리는 것만으로 부족해서 글로 옮겨 쓴다. 손님이 찾아와도 혹 꽃 피는 모습을 놓치게 될까봐 말도 시키지 말라는 표정으로 꽃만 바라본다. 그의 이런 행동을 보고 사람들은 '저 사람 완전히 돌았군! 미친 게 틀림없어' 하며 혀를 차거나, '젊은 사람이 어쩌다가 실성을 했누' 하며 안됐다는 표정을 짓기 일쑤다.
하지만 그런가?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박제가는 힘주어 말한다. 미치지 않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홀로 걸어가는 정신이란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이다.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이것저것 따지기만 해서는 전문의 기예, 즉 어느 한 분야의 특출한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벽이다.
《백화보》라는 책! 남들 하는 대로 하고, 주판알을 튕기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냈다. 미쳤다는 손가락질, 멍청이라는 놀림에도 아랑곳없이, 손님이 와도 시간이 아까워 말 한 마디 나누지 못하는 열정 끝에 그는 이 그림책을 완성했다. 박제가는 김군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은 훗날 자취조차 없겠지만, 꽃을 사랑해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그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을 확신했다. 그를 미쳤다고 비웃던 자들, 전전긍긍하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며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만족하는 자들의 비웃음은 한줌 값어치도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김군은 시간만 나면 꽃을 그렸던 모양이다. 박제가의 친구 유득공(柳得恭)의 문집 중 <제삼십이화첩(題三十二花帖)>이란 글에도 김군의 꽃 그림책에 관한 이야기가 한 편 더 실려 있다. 유득공의 글을 보면, 김군의 꽃 그림책이 단순한 소묘에 그치지 않고 꽃잎과 잎새의 빛깔까지 묘사한 채색화였음을 알 수 있다. 복사기가 있던 시절도 아니니, 그의 꽃 그림책은 오로지 한 부밖에는 만들어질 수 없는 책이었다.
세상은 부질없고 모든 것은 변해가는데, 그의 그림책 속의 꽃들은 늘 변치 않고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세상은 부질없지 않다고, 변치 않는 것도 있다고 일러주는 것만 같다. 그가 한 일을 어찌 미친놈 멍청이의 짓이라 하랴. 나는 그가 친구도 마다하고, 출세도 마다하고, 오로지 꽃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 너무도 고맙다. 그가 꽃 그림에 채색을 얹고, 꽃술의 모양과 잎새의 빛깔을 관찰하면서 느꼈을 그 무한한 감사와 경이와 희열을 함께 누리고 싶다.
박제가가 써준 〈백화보서〉의 친필
일제시대 백두용(白斗鏞)이 엮은 《명가필보》에 유득공의 글과 나란히 실려 있다. 이 글씨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김덕형이 그린 《백화보》도 그때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마니아 예찬론이다(전문의 번역은 16쪽에 있음).
하지만 정작 그는 박제가의 글에서나 유득공의 글에서나 김군으로만 남아 있을 뿐 제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의 책도 지금에 와서는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늘 그가 궁금하던 터에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읽다가 그의 이름이 김덕형(金德亨)임을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그가 특별히 화훼 그림에 솜씨가 뛰어나 한 폭이 완성될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소장했다는 이야기와 그의 《백화첩(百花帖)》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박제가의 친구인 유득공이 그의 꽃 그림에 얹어 써준 시 두 수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신분은 규장각(奎章閣)의 서리(胥吏)였다.
일제시대에 간행된 《명가필보(名家筆譜)》 속에 박제가와 유득공이 친필로 쓴 <백화보서>가 실려 있다. 그의 그림도 어느 소장가의 서재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을 것을 기대한다.
심하도다! 방군의 장황벽이여
다음 글은 표구에 미친 방효량(方孝良)에 관한 이야기다. 정조의 사위로 그림에 벽이 있던 홍현주(洪顯周)가 장황벽(裝潢癖)이 있던 방효량을 위해 써준 글이다. 원래 제목은 <벽설증방군효량(癖說贈方君孝良)>이다. 긴 제목을 풀면, '벽에 대하여. 방효량 군에게 주다'란 뜻이다. 장황은 서화의 표구를 가리키는 옛말이다('표구'는 일본에서 들어온 말이다). 홍현주는 글의 서두에서 먼저 벽에 대해 길게 설명한 뒤, 자신의 그림 수집벽과 그에 못지않은 방효량의 장황벽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앞은 생략하고 중간부터 읽어본다.
내가 평소에 달리 좋아하는 바가 없지만, 오직 그림에 대해서는 벽이 있다. 옛 그림으로 마음에 차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면, 비록 화폭이 온전치 않고 장정이 망가졌더라도 반드시 비싼 값에 이를 구입하여, 목숨처럼 애호하였다. 아무개가 좋은 그림을 지녔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심력을 다해서 반드시 찾아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녹여들어 아침 내내 보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밤을 새우고도 지칠 줄을 모르며, 밥 먹는 것도 잊고 배고픈 줄도 알지 못하니, 심하도다 나의 벽이여! 앞서 말한 부스럼 딱지를 즐기거나 냄새를 쫓아다니는 자와 아주 흡사한 부류라 하겠다.
오래된 그림은 흔히 썩어 문드러진 것이 많아 이따금 손을 대기만 하면 바스라지곤 한다. 내가 매번 장차 오래되어 없어질 것을 염려하곤 했다. 방효량은 평소 그림에 대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벽에 있어서도 또 보통 사람과는 다른 데가 있다. 옛 그림의 종이가 손상되고 비단이 문드러진 것을 보기만 하면 반드시 손수 풀을 쑤어 묵은 장황을 새로 고치느라 애를 써 마지않는다. 바야흐로 눈대중으로 가늠해서 손으로 응하면 규격이 절로 들어맞아 조금의 어긋남도 없다. 평소 생활함에 있어서도 풀 그릇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장황을 할 때는 비록 큰 재물을 준다고 해도 그 즐거움과 바꾸려 들지 않았다. 신기하고 교묘한 솜씨는 거의 포정( 丁:《장자》에 나오는 인물.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아 마침내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 포정해우 丁解牛는 신묘한 기술을 일컫는 말로 쓴다)이 소를 잡는 것이나, 윤편(輪扁:춘추시대 제나라의 수레바퀴 만드는 기술자. 수레바퀴 만드는 일을 가지고 제 환공과 토론을 벌였다)이 바퀴를 깎는 것과 서로 아래 위를 겨룰 만하였다.
그래서 내가 소장한 옛 그림 중에 썩거나 손상된 것은 모두 그의 손을 빌어 낡은 것을 새롭게 하고 수명을 오래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심하도다, 방군의 벽이여! 또 나에게 비할 바가 아니로다. 나의 그림에 대한 벽이 방군의 장황에 대한 벽을 얻어, 옛 그림의 문드러진 것이 모두 온전하게 되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는 그와 더불어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감상하곤 하였다. 어리취한 듯 심취하여 하늘이 덮개가 되고 땅이 수레가 되는 줄도 알지 못하였으니 온통 여기에만 세월을 쏟더라도 싫증 나지 않을 듯하였다. 심하구나! 나와 방군의 벽이여. 인하여 벽에 대한 글을 써서 그에게 준다.
방효량은 왕실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6품 장원서(掌苑署) 별제(別提)를 지낸 인물로 미천한 신분이 아니었다. 섬세한 안목과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장황 기술을 그는 생활 속에서 아주 즐겼던 모양이다. 아무리 낡아 헐어진 옛 그림도 그의 손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아연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그는 장황에 몰두하여 어떤 큰 재물과도 바꾸려 들지 않을 만큼 그 자체를 즐겼다. 그리고 장황을 마친 후 새롭게 태어난 작품 앞에서 하루 종일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마음 쏟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이런 행동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거나 대가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오직 옛 그림을 수선하여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그 자체가 기뻐 그는 이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림을 목숨처럼 아껴 소장하는 벽이 있던 홍현주가 함께 있었다.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던 석치石癡 정철조
벽(癖)과 비슷한 뜻으로 바보라는 뜻의 치(痴), 또는 치(癡)자도 많이 보인다. 모두 병들어 기댄다는 뜻의 녁( )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들이다. 모두 무엇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치(癡)는 상식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벽에 대한 일반의 반응을 반영한다. 이 시기 문인들의 호에는 아예 바보 또는 쪼다라는 뜻으로 치(痴), 즉 멍청이란 말이 들어간 예가 적지 않다.
정철조(鄭喆祚, 1730∼1781)는 벼루를 잘 깎기로 이름났다. 그래서 그의 호는 석치(石癡)다. 그는 당당히 문과에 급제하고 정언(正言: 사간원에 속한 정6품의 관직)의 벼슬까지 지낸 인물인데, 당대에 그가 깎은 벼루를 최고로 쳤다. 예술에 안목이 있다는 사람치고 그의 벼루 한 점 소장하지 못하면 아주 부끄럽게 여겼을 정도라고 했다.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이 동시대 각 분야의 재주꾼들을 모아 기록한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죽석(竹石) 산수를 잘 그렸고, 벼루를 새기는 데 벽이 있었다. 벼루를 새기는 사람은 으레 칼과 송곳을 갖추고, 새김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는 단지 차고 다니는 칼만 가지고 벼루를 새기는데, 마치 밀랍을 깎아내는 듯하였다. 돌의 품질을 따지지 않고, 돌만 보면 문득 팠는데, 잠깐 만에 완성하였다. 책상 가득히 벼루를 쌓아두었다가 달라고 하면 두말 없이 주었다.
정철조가 깎은 벼루를 그린 그림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이 그렸다. 일제시대 유명한 서화 수장가인 박영철(朴榮喆)이, 자신이 아끼던 명연(名硯) 3개를 이한복을 시켜 그리게 하고 관련 내용을 적은 《삼연재연보(三硯齋硯譜)》에 실린 그림이다. 전형적인 조선 벼루의 모양으로, 위쪽에는 이용휴(李用休, 1708~1782)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손은 글씨를 잊고, 눈은 그림을 잊는다. 돌에서 무얼 취할까? 치(痴)와 벽(癖)이 으뜸이다[手忘書, 眼忘畵. 奚取石, 痴癖最]." 이용휴와 정철조는 정철조의 여동생이 이용휴의 아들 이가환에게 시집가서 사돈의 인연이 있었다. 수경실(修쪹室) 소장.
정철조에게서도 마니아적인 특성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돌을 깎아 벼루를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그것으로 생계의 수단을 삼지 않는다. 또 돌의 재질을 가리지 않고, 보이면 보이는 대로 파서 그것으로 작품을 만든다.
정철조는 그림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녔고, 기중기와 도르래, 멧돌과 수차 같은 기계들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기까지 했다. 그의 집 방안에는 천문기구가 가득 차 있었고, 서양 천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당대 그에 대한 평가는 냉랭하였던가 보다. 정인보(鄭寅普)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술주정뱅이로만 여겼으니, 어찌 시대와의 만남이 불행하여 구차히 재앙을 면하기만을 바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슬퍼했다.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이렇듯 꽃에 미친 김덕형이나 장황에 고질이 든 방효량, 벼루에 빠진 정철조말고도 18, 19세기로 접어들면 어느 한 분야에 미쳐 독보의 경지에 올라선 마니아들이 자주 등장한다.
칼 수집 벽이 있어 칼마다 구슬과 자개를 박아 꾸며서 방과 기둥에 주욱 걸어놓고, 날마다 번갈아 찼지만 1년이 지나도록 다 찰 수 없었다는 영조 때 악사 김억(金檍), 매화에 벽이 있어 뜰에 매화 수십 그루를 심어놓고, 시에 능한 사람이라면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매화시를 받아와 비단으로 꾸미고 옥으로 축을 달아 간직하여 매화시광(梅花詩狂)으로 불렸던 김석손(金暄孫)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유신(李惟新)은 수석에 벽이 있어 아예 호를 석당(石堂)이라고 했다. 신위(申緯, 1769~1847)도 돌에 미쳐 돌을 주우러 다녔고, 심지어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가는 곳마다 돌을 주워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오면서, 그 모습을 동행한 화가에게 그리게 해서 장편의 시를 지어 얹은 일도 있다. 이 밖에 국화에 미쳐서 혼자 무려 48종의 국화를 재배했다는 미원(薇原)의 심씨(沈氏), 매화를 아낀 나머지 그림값으로 받은 3천 냥을 쾌척해 매화를 샀던 화가 김홍도(金弘道) 등도 모두 어느 한 가지 벽에 들렸던 마니아들이다.
담배를 유난히 좋아했던 이옥(李鈺, 1760~1815)은 아예 담배에 관한 기록들을 주제별로 모아 《연경(煙經)》을 엮었고, 비둘기 사육에 관심이 있었던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발합경(眞景經)》을 남겨,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관상용 비둘기 사육에 관한 기록을 집대성했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5)는 자신이 기르던 초록 앵무새를 관찰하면서 역대 문헌 속에 나오는 앵무새 이야기를 집대성해서 《녹앵무경(綠鸚鵡經)》을 지었다.
심지어 죄를 입고 귀양가서도 이들의 이러한 정리벽은 고쳐지지 않았다.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현산어보(玆山魚譜)》나, 김려(金儼, 1766~1822)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그 엄청난 저작들도 모두 벽의 추구가 낳은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의 산물이다.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이런 마니아들의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비록 작은 기예라 해도 잊는 바가 있은 뒤라야 능히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큰 도이겠는가?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 알려진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일찍이 과거를 보러 가서 답안지를 쓰는데, 한 글자가 왕희지와 비슷하게 되었다. 앉아서 하루 종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차마 능히 버리지 못하고 품에 안고 돌아왔다. 이는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이징(李澄)이 어려서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혔는데, 집에서는 있는 곳을 모르다가 사흘 만에야 찾았다. 아버지가 노하여 매를 때리자 울면서 눈물을 찍어 새를 그렸다. 이는 그림에 영욕을 잊은 자라고 말할 만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 유명한 노래 잘하는 자이다. 산에 들어가 연습할 때 한 곡조를 부를 때마다 모래를 주워 신발에 던져 신발이 모래로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그를 죽이려 드니, 바람결을 따라 노래하자 뭇 도적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는 이른바 삶과 죽음을 마음에 들이지 않은 것이다.
내가 처음 이를 듣고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대저 큰 도가 흩어진 지 오래되었다. 나는 어진 이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저들이 기예를 가지고도 족히 그 목숨과 바꾸었으니, 아아!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다.
<형언도필첩서(炯言挑筆帖序)>의 앞부분이다. 우연히 왕희지와 같게 써진 글씨에 제가 취해서 과거 답안지를 차마 제출할 수 없었던 최흥효.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와중에 저도 몰래 눈물을 찍어 새를 그리던 이징. 모래 한 알로 노래 한 곡을 맞바꿔, 그 모래가 신에 가득 찬 뒤에야 산을 내려온 학산수. 이들은 모두 예술에 득실을 잊고, 영욕을 잊고, 사생을 잊었던 사람들이다.
이징(李澄, 1581~?)이 그린 노안도(蘆雁圖)
이징은 왕족 출신 화가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17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화가였다. 갈대밭에 내려앉아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 기러기는 부부를 상징한다. 노안도는 음을 따서 노안도(老安圖), 즉 부부가 해로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라는 축원을 담고 있다.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을 해서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붓글씨나 그림, 노래 같은 하찮은 기예도 이렇듯 미쳐야만 어느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미쳐야 할 것인가?
순 가짜들이 그럴듯한 간판으로 진짜 행세를 하고, 근성도 없는 자칭 전문가들이 기득권의 우산 아래서 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풍경이다. 그러나 진짜는 진짜고 가짜는 가짜다. 진짜 앞에서 가짜는 몸 둘 곳이 없다. 설 땅이 없다. 그것이 싫어 가짜들은 패거리로 진짜를 몰아내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한 시대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한 분야에 이유 없이 미치는 마니아 집단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에 뚜렷한 이름 석 자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질 때가 더 많다. 하지만 한 시대의 열정이 이런 진짜들에 의해 안받침되고, 우연히 남은 한 도막 글에서 그들의 체취와 만나게 되는 것은 한편 슬프고 또 한편으로 다행한 일이다.
굶어 죽은 천재를 아시오?
독보적인 천문학자 김영
능력 있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 공정한 룰이 지켜지는 시스템을 사람들은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 자꾸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세상이 그처럼 공정하지도 않고, 능력 있는 사람이 제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기 때문이다. 바른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림당하고, 부족한 것들이 작당해서 능력 갖춘 사람을 왕따시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상 있는 일이다.
상처 입은 개와 사자자리 유성우流星雨
1998년 대만의 정치대학교에 교환교수로 1년 간 머문 적이 있다. 학교에는 주인 없는 개들이 유난히 많았다. 두세 마리 혹은 서너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는 이 놈들은, 따뜻한 볕을 찾아 배를 깔고 누워 자다가 밥 때가 되면 식당 근처나 쓰레기통 주변을 기웃거리며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일이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이 개들에게도 이른바 구역이 있어서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은 좀체로 없었다. 각 구역에는 으레 두목 격의 개가 한 마리씩 있었다. 상경대학 주변에 있는 개들이 덩치가 제일 크고 무리도 많은 편인데, 이곳은 구내식당과 인접해 있고 학생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종종 가져다 주어 굶을 걱정이 없는 명당자리였다. 이곳의 대장은 덩치가 큰 검은 점박이였다. 녀석은 언제나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는데, 먹을 것이 생겨도 부하들은 결코 먼저 입을 대지 않았다. 간혹 영문을 모르는 신참내기 개가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대번에 부하들에게 물어뜯겨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곤 했다. 어쩌다 한 번씩 학교에 때아닌 개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내 연구실이 있던 외국어문학부 건물 주변은 다리가 짧은 엷은 밤색 개의 관할구역이었다. 검은 점박이와는 달리 녀석은 부하를 거느리는 법 없이 혼자 다녔다. 아침마다 제 구역을 한 바퀴씩 시찰하는 모양인데, 녀석이 짧은 다리로 한참 폼을 잡고 걸어갈 때 차가 옆을 지나갈라치면 물어뜯을 듯 짖어대며 자동차를 향해 덤벼드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 녀석의 호전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보는 사람이 적을 때는 절대 그러지 않는 것도 특기할 만했다. 먹을 것이 신통찮은 후문 어귀나 후미진 신문관 쪽은 으레 힘이 없어 쫓겨난 흉터투성이 개들의 차지였다. 간혹 거기서도 위계질서 같은 것이 보여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있었다.
저는 손 하나 까딱 않고 부하들만 시키는 검은 점박이나, 일일이 제가 다 챙기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밤색 짧은 다리, 그 밑에서 넘버 투나 넘버 쓰리 자리를 놓고 충성을 경쟁하는 부하들, 또는 공연히 멋모르고 주위를 서성대다가 아닌 이빨에 제 살을 뜯기고 마는 신참내기, 아니면 아예 눈에 띄지 않는 후미진 곳에서 굶주림을 감내하고 있는 상처 입은 개들. 참 이곳 개들의 사회도 사람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란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여기에 싸움 잘하는 한국의 진돗개나 풍산개 한 마리를 풀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강의실을 오가곤 했다.
그 해 11월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자자리 유성우(流星雨)의 장관을 TV 화면으로 보다가, 나는 전혀 엉뚱하게도 학교의 개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유성처럼 사라져버린 조선 후기 한 천문학자의 서글픈 초상이 그 위에 포개져 떠올랐다.
독학으로 신수神授의 경지에 오르다
김영(金泳, 1749∼1817), 내가 그와 처음 만난 것은 연세대학교 도서관이 유일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문집에 대한 해제를 쓰면서였다. 벌써 10년 저쪽의 일이다. 홍길주의 문집은 3종 36권 17책으로, 당시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고양된 문화 역량을 한눈에 보여주는 방대하고도 호한한 저작이다. 그 가운데 나를 특히 애먹였던 것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없는 <기하신설(幾何新說)>과 <기하잡쇄보(幾何雜碎補)> <호각연례(弧角演例)> 같은 기하학 관련 저술이었다. 자술(自述)에 따르면 홍길주는 7∼8세 때 기하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 때 이미 연립방정식의 해법 및 제곱근과 세제곱근의 풀이,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을 완전히 해득했을 만큼 수학과 기하학에 조예가 깊었다.
특히 그의 <호각연례>는 황도와 백도 상 해와 달의 운행을 예측한 것으로, 유클리드의 평면기하학을 넘어선 구면삼각법(球面三角法)의 난해한 이론을 소화하여 천문학에 활용한 것이다. 중국의 《역상고성(曆象考成)》을 보고, 그 내용이 너무 소략하여 이해하기 어려움을 안타깝게 여겨 이를 부연하고 도면으로 풀이한 것이다. 스물아홉(1814)에 착수하여 23년 뒤인 쉰둘(1837)에야 완성을 본, 한국 과학기술사에서 간과치 못할 특이한 저술이다. 비록 아직까지 학계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홍길주가 김영에게 보여 감수를 받으려 했던 <호각연례>의 일부분
황도와 백도상의 해와 달의 운행을 예측한 천문학 관련 저술이다. 홍길주의 집안은 그의 어머니 영수각 서씨도 수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었던 수학 집안이었다. 그리고 김영은 홍길주로 하여금 수학에 눈뜨게 해준 과외선생이었다. 연세대도서관 소장.
홍길주는 <호각연례>를 완성한 후 바로 자신의 수학 선생인 김영에게 보여줄 생각이었으나, 불행히도 그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못내 애석해했다. 그의 문집에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던 김영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한 <김영전(金泳傳)>이 실려 있다.
이 전기에 따르면, 김영은 인천 사람으로 신분이 미천했으며, 용모가 꾀죄죄하고 말도 어눌하여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역상산수(曆象算數)의 학(學)에 있어서는 신수(神授)라 할 만큼 독보의 조예가 있었다. 그는 스승 없이 《기하원본(幾何原本)》 1책을 독학해서 익힌 것이 고작이었으나, 이에 흥미를 느껴 향후 15∼16년 간 역상(曆象)에 더욱 침잠 몰두하여 마침내 남들이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김영의 재능을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각신(閣臣) 서호수(徐浩修, 1736∼1799)였다. 산학으로 당대에 가장 이름이 높았던 서호수는 관상감(觀象監 : 오늘날 기상대와 천문대의 기능을 아우르고 있던 서운관書雲館)의 제거(提擧)로 있을 때,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마디 말을 나누어본 후, 대번에 당대 으뜸으로 자부하던 자신의 실력이 그에게는 결코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관상감의 책임자로 있던 홍길주의 조부 홍락성(洪樂性, 1718∼1798)에게 김영을 추천하였고, 마침내 김영은 관상감에 기용될 수 있었다. 김영이 당대 쟁쟁한 벌열이었던 홍씨 집안과 서씨 집안에 드나들게 된 것은 이런 저런 얽히고 설킨 인연이 있었다. 홍길주의 어머니 영수각(令壽閣) 서씨(徐氏)만 해도 서호수와 한집안인 데다, 《주학계몽(籌學啓蒙)》에서 평분(平分)ㆍ약분(約分)ㆍ정부(正負:양수와 음수)ㆍ구고(句股: 직각삼각형)에 대한 설명이 번잡하여 어려운 것을 보고 스스로 계산법을 창안할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
사람됨이 고집불통인 데다 기질이 있었다
홍길주의 문집에 대한 해제를 쓴 뒤, 김영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희미해져갈 무렵, 나는 다시 한 번 김영과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 어느 날 서호수의 아들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을 보다가, 그에 대한 또 한 편의 전기인 <김인의영가전(金引儀泳家傳)>과, 서유본이 김영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찾아낸 것이다.
서유본의 문집은 국내에는 없고 일본에만 있는 것을 이우성 선생께서 복사해 와 소개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진 책이었다. 특히 서유본이 쓴 전기는 홍길주의 것보다 훨씬 상세해, 이 글을 읽고는 김영이란 인물이 보다 실감 있게 다가왔다. 서유본의 글을 보고 나서 나는 자꾸 그가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어한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후에도 《이항견문록(里巷見聞錄)》과 《조선왕조실록》에 그와 관련된 기록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서유본의 전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영(泳)이요 자는 계함(季涵)이니 김해 사람이다. 아비는 아무이고 조부는 아무이다. 대대로 농사를 지었는데,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이리저리 떠돌다 서울로 왔다. 사람됨이 성글고 고집불통인데다 기질(氣疾)이 있었다. 키는 후리하게 크고 얼굴은 야위었으나 두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서유본은 김영을 김해 사람, 홍길주는 인천 사람이라고 했고, 《이항견문록》에는 또 영남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출신조차 분명찮은 미천한 신분이었던 듯하다. 여기에 홍길주의 기록까지 더하면 비쩍 마른 꾀죄죄한 용모에 후리후리한 키, 성깔 있고 고집 있게 생겼으되, 말은 어눌하여 우물대기만 하는 괴팍한 성격의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자에 계(季)자를 쓴 것으로 보아 여러 형제 중 막내였던 듯하나 이것도 확인할 수 없다.
기질(氣疾)이 있다고도 했다. 《이항견문록》에는 그가 젊은 시절 산술에 통달하고도 본원(本源)의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여러 해 고심진력하느라, 마침내 유울지질(幽鬱之疾)을 앓아 여러 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이로 보아 상당히 심각한 우울증 증세도 보였던 것 같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주변 사람과 별 교통이 없는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공부하였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물어볼 스승조차 없는 답답함이 더하여, 마침내 히스테리 발작 증세로까지 나타났던 모양이다.